37년 7월 7일 노구교사변 발발 다음날인 8일, 모택동, 주덕, 팽덕회, 서향전 등 공산당 지도부가 연명으로 "홍군은 장개석 위원장의 영도 아래 국가를 위해 목숨을 바쳐 적과 싸워 국토를 지킬 것을 원한다"라는 전문을 장개석에게 보내고 9일에도 홍군 야전지휘관들이 "모든 홍군은 국민혁명군으로 개명하고 명을 받들어 왜구와 목숨을 다해 싸울 것을 바란다"라는 전문을 보냅니다. 그리고 8월 22일, 국민정부는 4만 5천명의 홍군을 제18집단군(제8로군) 3개사단으로 개편하였고 9월 23일에는 공산당을 합법적인 정당으로 승인함으로서 이른바 "2차국공합작"이 결성됩니다.
팔로군 주요 지휘관들. 왼쪽 첫번째가 팔로군 총참모장 팽덕회, 두번째가 팔로군 총사령관 주덕, 오른쪽 맨끝사람이 등소평. ※ 사진출처 : http://kr.chinajilin.com.cn/qihua/content/2012-12/03/content_99367.htm
이른바 "섬감녕변구"라 부르는, 중공정권의 통치구역은 연안을 중심으로 섬서성 이북과 감숙성 동쪽 변경을 차지하여 23개 현에 10만㎢, 인구는 200만명정도였습니다. 대부분 험준한 산악지대로 매우 낙후되고 척박했습니다. 그들은 서안사변 와중에도 영역을 적극적으로 확장하여 기존에 양호성의 서북군과 장학량의 동북군이 차지하고 있던 광대한 지역을 장악하여 자신들의 영토에 추가하였습니다.
2차국공합작은 손문시절의 1차국공합작과는 엄청난 차이가 있었습니다. 1924년 1월 소련의 중재로 결성된 1차국공합작은 사실 손문으로서는 어디까지나 소련의 원조를 받기 위해 마지못해 선택한 수단에 불과했습니다. 진독수가 주도하던 공산당 역시 국민당과의 합작을 처음에는 강력하게 반대했으나 소련이 "자금지원을 중단하겠다"라고 압력을 가하자 부득이 굴복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때만 해도 국민당은 손문의 私黨에 불과할만큼 세력이 미미했고 공산당 역시 마찬가지였죠. 손문은 공산당을 대등한 제휴세력으로 받아들인 것이 아니라 단지 "개인자격으로 국민당에 가입해도 좋다"라는 일종의 묵인의 형식을 취했습니다.
손문 정권은 야당을 허용하지 않는 일당독재였으며 국민당은 이중당적을 허용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원칙적으로는 공산당을 탈퇴해야만 국민당에 가입할 수 있었으나 쌍방이 타협하여 이중당적을 허용한 것이죠. 그러나 공산당은 어디까지나 손문을 중심으로 뭉친 국민당 정권내에서 여러 정치 계파중 하나일뿐 민주적인 정당정치가 허용되지 않았기에 손문에 대해 직접적인 비판이나 견제를 할 수도 없었고 직접적인 무력을 보유하는 것도 불가능했습니다. 따라서 구심점이었던 손문이 죽자 당장 국민당내에서는 치열한 권력다툼이 일어났고 결국 우파인 장개석이 승리함으로서 1차 국공합작이 깨지고 공산당은 국민당에서 완전히 밀려납니다.
반면, 2차국공합작에서 공산당은 엄청난 정치적 수혜를 받았습니다. 중공정권은 "소비에트"를 취소하고 토지몰수와 계급투쟁을 포기하는 댓가로 "삼민주의의 틀속"에서의 공산주의 활동이 용인되었으며 연안과 그 주변을 "특별구"로서 독자적인 통치권과 무력을 보유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또한 그동안의 경제봉쇄도 해제되었으며 공산주의에 대한 비난도 중지되었습니다. 더욱이 다른 지방정부들과 달리 그들은 통치권에 대한 중앙의 간섭도 배제하면서 세금을 중앙에 납부할 의무도 없었습니다. 반면 중앙으로부터 무기와 탄약, 병사들의 급여, 피복 등 군자금으로 매월 50만원을 지급받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말그대로 반독립국으로서 "국가속의 국가"나 다름없는 것이죠. 설령 "마지못한 것"이라고 해도, 그동안 철저하게 이들을 말살시키려고 했던 장개석으로서는 그야말로 파격적인 양보인 것은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합작"을 선언했다고 해서 그동안 쌓일대로 쌓인 불신과 갈등이 하루아침에 없어질 수 있는가. 근 10년에 걸친 내전으로 인한 해묵은 감정은 둘째치고라도 애초에 왜 양자가 전쟁을 시작했는가를 생각한다면 그 근본적인 원인이 없어지지 않는한 어차피 쌍방의 "밀월"이 오래갈 수 없다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장개석으로서는 공산당을 신뢰할 수 없는 가장 큰 이유가 기존 정권를 전복시키고 소위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실현하는 것이 그들이 추구하는 목표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과연 어떤 정권이 그것을 용납할 수 있겠습니까. 당장은 자신에게 복종할 것을 서약했다고 해서 진정으로 "모택동 일당"이 "천하를 지배하겠다"는 야심을 완전히 버렸을 것이라고 누가 장담할 수 있으며 일본과의 전쟁을 기회로 세를 불린후 다시 국민정부에 대적하지 않는 보장이 있는가.
실제로 국공합작이 정식으로 체결된지 얼마되지 않은 37년 10월 25일 장개석은 자신의 일기에 "공산주의자들의 기회주의와 속임수에 주의해야 한다. 나는 그들의 사악에 대해 정상적인 방법으로 상대하고 그들의 교활함을 솔직함으로 대응해야 한다"라고 적으며 그들에 대한 불신과 경계를 감추지 않고 있었습니다.
장개석이 모택동을 믿을 수 없다면 반대로 모택동은 장개석을 믿을 수 있는가. "항일"을 내세워 홍군을 최전선의 총알받이로 소모시키지 않는다는 보장이 어디에 있으며 언제 다시 총부리를 돌려 토벌에 나서지 않는다는 보장이 어디에 있는가. 바로 이것이 국공 양측이 숙명적으로 가질 수 밖에 없는 모순이며 이것부터 이해하지 못한다면 이후 그들이 왜 그토록 격렬하게 대립하고 충돌했으며 일본과의 항쟁이 끝나자말자 바로 내전을 시작했는지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37년 8월 22일부터 25일까지 섬서성 낙천에서 중앙정치국 확대회의가 개최됩니다. 낙천회의에서 소위 "항일구국 10대 강령"을 제정하여 최종적인 승리를 위해 항전에 모든 역량을 동원할 것을 선언합니다. 그런데 그 방침에서 "국민당은 일본과 타협 투항할 가능성이 높으므로 공산당이 전쟁을 주도하여 유격전과 항일근거지를 수립하고 국민당통치구에서 광범위한 항일대중운동을 전개해야 한다"라는 등, 국민정부와 충돌할 수 밖에 없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이는 당초 국민정부에게 복종하고 계급투쟁을 포기하겠다는 약속과는 명백히 상반되는 것이었습니다.
더욱이 모택동은 팔로군의 활동범위를 화북3성(산서성, 찰합이성, 하북성)으로 설정했는데 이것은 당초 제2전구의 산서성 북부지역으로 한정한 군사위원회의 결정을 정면으로 무시하고 독자적으로 활동하겠다고 선언한 것이었습니다. 그는 "우리 당은 반드시 독자적인 원칙을 견지하며 국민당에 대해서 고도의 경계심을 지녀야 한다. 우리 군의 행동은 우리 자신에 의해서만 결정될 수 있을뿐 장개석의 명령에 따를 수 없다. 우리 홍군이 언제 어느 전선으로 떠나는가는 오로지 우리 사정에 의해 선택한다."라고 지시하였고, 9월 17일에도 주요 지휘관들에게 "홍군은 본질적으로 분견대이며 홍군은 어떤 결정적인 역할도 수행하지 않는다"라고 전문을 보냅니다.
12월에 모스크바로부터 돌아온 왕명이 "국민정부에 절대 복종할 것"을 주장하자 모택동은 "우경 투항주의"라고 격렬하게 비난하였고 류소기 역시 "멘세비키파"라고 매도합니다. 물론 이것은 단순히 항일을 떠나 과거의 지도자와 현재의 지도자간의 주도권 다툼이 핵심이기 때문에 이것만 가지고 "왕명은 항일을 주장했는데 모택동은 반대했다"라는 식으로 주장하는 것은 성급한 것일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모택동이 비밀리에 고위간부들과 지휘관들에게 "일본과의 항쟁은 우리 당이 발전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다. 우리는 국공합작을 통해 70%를 역량 확대에, 20%를 국민당과의 투쟁에, 10%를 일본과의 투쟁에 사용해야 한다. 이를 위해 제1단계는 타협단계로서 표면상으로는 국민당에게 복종한 실질적으로는 당의 생존과 발전을 엄호한다. 제2단계는 경쟁단계로서 공산당의 정치와 군사력의 기초를 2~3년내에 완성하여 국민당에게 대항할 수 있도록 발전시킨다. 제3단계는 공격단계로서 공산당의 근거지를 확대시키고, 국민당을 고립시켜 주도권을 장악한다"라고 지시했다는 점에서 그들은 처음부터 국민정부와 맺었던 그 어떤 약속도 지킬 의도가 없었으며, 솔직히 그가 항일의 의지조차 있었던 것인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죠.
왕명과의 싸움에서 승리한 모택동은 중일전쟁동안 류소기, 주은래 등 추종세력들의 도움을 받아 소위 "정풍운동"을 벌였고 공산당 내부에서 자신의 독재를 강화해 나갑니다.
정풍운동당시 간부들과 토론중인 모택동. 41년 5월부터 모택동, 류소기 등의 주도로 이론과 실천의 일치, 형식주의 배제를 외치며 "정풍운동"을 추진합니다. 그러나 그 내용은 실상 당내 비판세력을 배제하고 모택동 일인 독재를 강화하는 것이 목적이었습니다. 장개석정권 역시 일인 독재를 추구했음에도 국민당내 다양한 계파와 반장세력으로 인해 여전히 취약했던 것에 비해 모택동의 독재권력은 훨씬 강력하였습니다.
※ 사진출처 : http://hihistory.net/post/8057/
공산당의 권력투쟁 과정에서 무고하게 희생된 사람중에는 조선출신 독립운동가이자 소설 "아리랑"의 실존인물인 김삼(본명 장지학)도 있었습니다. 그는 36년 7월 상해에서 조선민족해방동맹을 창설했고 38년 8월 조선혁명가 대표로 선출되어 연안의 항일군정대학에서 강의를 맡았습니다. 그러나 공산당 비밀경찰 수장이었던 강생의 명령에 따라 갑자기 체포되어 즉결총살당했습니다. 모스크바에서 스탈린식 철권통치를 배운 강생은 귀국후 모택동의 최측근이 되어 30년대말부터 소위 "적색테러"를 주도하여 모택동의 정치적 라이벌인 왕명, 장국도의 세력을 완전히 뿌리뽑아 모택동체제를 구축하는데 지대한 역할을 하였으며 이후 70년대 모택동, 강청 등과 함께 "문화혁명"을 주도합니다.
43년부터는 본격적인 우상숭배작업에 들어가 그는 사실상 "살아있는 신"이나 다름없게 됩니다. 그 과정에서 많은 반대세력들에 대해 자아비판과 제명, 체포, 처형하는 등의 방법으로 제거하고 류소기의 주도로 소위 "중국식 마르크스주의"를 제창하여 모든 권력을 모택동 한 개인에게 집중시킵니다. 모택동의 방식은 장개석 이상으로 교활하고 철저한 것이었습니다.
류소기(1898~1969) : 모택동의 야심적인 대약진운동이 철저하게 실패한후 제2대 국가 주석에 올라 개혁을 추진하다가 모택동에 의해 몰락하여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 사람으로 잘 알려져 있죠. 그는 모택동과 같은 호남성 출신으로 중국 공산당 초기 멤버이기도 했습니다. 한낱 "촌무지렁이"라며 천대받았던 모택동과 달리 소련 유학파로서 엘리트였던 그는 당 중앙위원회 위원과 호북성, 상해의 공산당 조직을 이끌었습니다. 준이 회의에서 모택동이 주도권을 회복하는데 그의 역할은 매우 지대했으며 이후에도 적극적으로 모택동 우상화에 앞장섭니다. 사실 모택동이 공산당의 중심에 서는데 류소기의 강력한 지원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우상화는 모택동을 "신성불가침의 존재"로 만들어 버렸고, 대약진운동이후 물러난 모택동은 류소기, 등소평 등이 자신의 지위를 위협한다고 판단하자 어린 학생들을 "홍위병"으로 동원하여 반격합니다. 류소기는 변변히 저항조차 못해본채 하루아침에 몰락하여 홍위병들에게 구타와 고문을 당하다 실각한지 1년만에 사망합니다.
그러나 항전 초기에는 국공 쌍방은 그럭저럭 협조해 나갑니다. 제2전구 사령관 염석산의 명령에 따라 팔로군 주력부대는 주덕의 지휘하에 8월 하순 연안을 출발하여 산서성의 최전선에 투입됩니다. 그리고 찰합이성과 수원성을 점령한 일본군 제5사단이 태원을 공격하기 위해 9월 중순 산서북부를 침공합니다. 쌍방은 태원의 관문인 평형관을 놓고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는데 임표의 제115사단은 평형관 동북쪽 산악지대의 산간 도로 주변에 매복해 있다가 9월 25일 제5사단 제21여단의 보급부대 1천여명을 습격하여 팔로군의 첫 승리를 거둡니다. 이것이 소위 "평형관 대첩"인데, 공산당 중앙에서는 이 소규모 승리에 대해 일본군 3천명을 살상하고 소총 1천정, 기관총 수십정과 화포 2문을 노획하고 차량 100대를 파괴했다며 마치 제21여단 주력을 괴멸한 것처럼 선전합니다. 그러나 평형관 전투는 태원회전의 일부일뿐이며 평형관 전투의 대부분을 맡은 것도 산서군과 중앙군이었습니다. 그들의 승리가 고전하던 중국군의 사기를 올린 것은 틀림없지만, 단지 한 부분만을 맡았을 뿐인 팔로군이 마치 평형관 전투의 핵심인양 묘사하는 것은 명백한 왜곡입니다. 10월 19일 유백승의 제129사단이 양명보 비행장에 대해 야습을 실시했고 하룡의 제120사단은 태원 동쪽 낭자관 부근에서 유격전을 벌입니다.
이후 일본군은 병력을 증원하여 9월 30일 평형관을 돌파하고 한달간의 치열한 전투끝에 11월 8일에는 태원이 함락됩니다. 38년 2월에는 염석산의 사령부가 있는 임분을 점령하고 산서 남부로 남하합니다. 팔로군 제129사단은 산서 남부의 경계에 있는 태행산 부근의 간선도로에서 재차 매복전을 실시하였고 이른바 "신두령전투"에서 일본군 수비대 1,500여명을 유인한후 괴멸시킵니다. 39년 11월 7일에는 태행산에서 일본군 독립혼성 제2여단을 포위했고 전투중 여단장 아베 노리히데중장이 전사합니다.
아베 노리히데중장(1886~1939) : 독립혼성제2여단장으로 팔로군과 싸우다 전사한 일본군 최고위 지휘관. 39년 10월말부터 1,200명의 병력으로 하북성과 산서성에서의 공산군 토벌에 나서 팔로군 제120사단을 격파하고 추격하는 중 11월 7일 태행산에서 10배이상 우세한 팔로군에게 포위당했고 박격포탄을 맞아 전사합니다. 이후 일본군은 병력을 증원하여 팔로군을 공격하자 팔로군은 포위를 풀고 후퇴합니다.
여기까지가 노구교사변이래 39년까지 팔로군이 벌인 정규전의 사실상 전부였습니다. 이들이 일본군과의 전투를 전적으로 회피했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같은 기간 중국군이 벌인 전투의 주축을 맡지 않은 것은 틀림없는 것입니다.
태원 함락후 팔로군은 사실상 염석산의 지휘를 더이상 받지 않은채 임의로 병력을 철수시킨후 산서성과 하북성, 하남성 등 화북일대로 들어가 "유격구"를 구축해 나가며 세력을 급격히 확장합니다. 제115사단은 오대산을 중심으로 산서성과 찰합이성, 하북성의 경계지역에서 "진찰기변구"를, 제120사단은 산서성과 수원성의 경계지역에서 "진수변구"를, 제129사단은 태행산을 중심으로 산서성, 하북성, 하남성의 경계지역에서 "진기예로변구"를 구축하고 점차 근거지를 확대해 나갑니다. 40년까지만 해도 일본군은 병력 부족으로 도시와 철도를 중심으로 장악했을뿐 점령지역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농촌지역에 대해서는 사실상 방기함으로서 무정부상태나 다름없었기에 공산군은 일본군의 세력이 미미한 성의 경계지역과 산악지대, 농촌을 중심으로 쉽게 침투해 나갈 수 있었습니다.
문제는 이런 팔로군의 활동이 국민정부와의 사전 협의하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에 국민정부측의 유격부대와 정면으로 충돌할 수 밖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국민정부 역시 점령지역에 대해 "유격전구"를 설정하고 유격대를 침투시켜 적극적인 활동을 하고 있었는데, 팔로군은 전구사령관인 염석산의 명령을 노골적으로 무시한데다 산서성, 하북성 등 화북에서의 국민당 유격구를 점차 잠식해 들어가면서 39년말부터 무력 충돌도 점점 빈번해지고 국공 양측의 관계가 급격히 악화됩니다. 대표적인 예로, 40년 2월 산서군 신편 제12여단이 이동중 태원 서쪽 부근에서 팔로군의 기습을 받아 괴멸되었고 여단장 설문교가 전사합니다. 이 시기는 국민정부군이 한창 일본군에 대한 "동계 공세"를 진행하고 있는 중이었죠.
게다가 2월에서 3월까지 기찰전구 총사령 겸 하북성 주석인 녹종린 휘하의 유격부대 전체가 팔로군의 공격으로 괴멸되었고 산동성에서는 석우삼의 부대가 괴멸되었으며 8월에는 국민정부의 산동성정부가 있는 노촌이 팔로군에게 장악됩니다. 40년말이 되면 화북 전역에서 국민정부의 유격구는 팔로군에 완전히 잠식되었고 국민정부계열의 유격부대는 소멸합니다. 진찰기변구만 해도 산서성, 찰합이성, 하북성, 열하성, 요녕성 등 화북과 만주 5개성에 걸쳐 80만㎢에 달했고 인구 2,500만의 거대한 지역으로 발전합니다. 즉, 이것은 일본군 점령지역에 대한 항일 근거지 구축 경쟁에서 국민정부측이 공산측에게 완전히 패하고 있다는 얘기였죠.
공산계열의 유격대. 이들의 전의는 높았으나 무장은 매우 빈약하여 심지어 조잡하게 만든 창이나 화승총으로 무장하기도 했습니다. ※ 사진출처 : 오스프리 맨앳암즈, 중국편(1911~1949)
국민정부는 39년 8월부터 40년 2월까지 화북지역에서 팔로군이 국민정부군을 공격한 사례는 모두 9건에 달했다고 주장했고 중공측도 39년 1월 국민당 제5기 5중대회에서 국민정부가 "항일"에서 "반공"으로 방침을 변경한후 팔로군을 중상모략하고 도처에서 팔로군에 대해 도발을 감행했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과연 어느 쪽이 가장 먼저 최초의 일발을 쏘았는가를 알아낼 방법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중공측이 국민정부가 39년 1월부터 "반공"노선을 강화했다고 비난했지만 그들 역시 38년 9월 연안에서 개최된 6기 5중전회에서 "공산당의 독립성"을 강조하고 "변구의 확대와 강화", 팔로군의 활동영역을 화북에서 화중으로 확대하기로 결의합니다. 공산군이 국민정부군의 기반을 파괴하려고 든다면 국민정부측이 이를 묵과할 수 없다는 것은 당연하다는 점에서 국공의 충돌이 전적으로 국민정부의 반공파들때문이라는 비난은 어떻게 보더라도 편파적이고 부당한 것이죠.
게다가 일본군은 국민정부군을 주요 공격대상으로 삼고 있었기에 병력의 대부분이 무한을 중심으로 화중, 화남에 집중되어 있었으며 40년말을 기준으로 일본군의 병력밀도는 화북을 1로 본다면 무한지구가 9, 상해-남경-항주를 3.5, 화남은 3.9였습니다. 즉, 화북은 무주공산이나 다름없는 것이었고 일본과 국민정부가 최일선에서 치열하게 싸우는 동안 팔로군은 그 후방에서 마음껏 세력을 확대해 나갈 수 있었던 것이죠. 따라서 37년 7월 팔로군은 4만5천에서 40년말에는 40만으로, 민병은 100만으로 확대됩니다. 변구의 인구는 유격구를 포함해 1억에 달하고 있었으며, 41년 중순 화북에서 팔로군의 활동지역은 90%에 육박할 정도였습니다.
40년 연안에서 사열중인 팔로군 기병대. 40년 당시 팔로군은 총 14개 기병사단과 10만명의 병력을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 사진출처 : 오스프리 맨앳암즈, 중국편(1911~1949)
더욱이 공산군은 항일전선과는 상관없는 청해성, 영하성, 감숙성과 신강성에까지 세력을 확대해 나가고 있었습니다. 당시 신강성은 실권자인 성세재의 묵인아래 30년대 이래 소련의 강력한 영향력 아래에 있었는데, 따라서 36년 10월에 이미 공산군 제4방면군 산하 2만 1천여명이 신강성에 진입하여 활동하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성세재는 적극적으로 소련과 중공에 접근하여 소련공산당과 중국공산당에 정식으로 가입할 것을 제안하기도 합니다. 신강성에 대한 소련과 중공의 영향력은 중일전쟁이후 더욱 강화되어, 38년 2월에는 모택동의 동생 모택민이 신강성 성도인 우루무치로 파견되어 신강성 재정부장과 중앙은행장을 맡아 화폐개혁 등의 각종 사업을 추진합니다.
성세재(1892~1970) : 일명 "신강왕". 신강독판 김수인의 부하였다가 33년 4월 쿠테타를 일으켜 정권을 차지한후 44년 9월까지 신강성을 통치합니다. 정권 유지를 위해 적극적으로 소련에 접근하여 막대한 원조를 받아내고 공산주의자처럼 행세했으나 이는 어디까지나 자기 개인의 야심을 위해 소련과 중공을 이용하는 것일뿐이었고 독소전쟁 발발로 소련의 영향력이 축소되자 하루아침에 반공주의자로 둔갑한후 42년 9월 "백색 쿠테타"를 일으켜 모택민을 비롯한 중공측 인사 300명을 체포한후 처형합니다. 그리고 장개석에게 접근하여 충성맹세를 했으나 만만치 않았던 장개석은 이를 이용해 제42군 3개 사단을 우루무치에 주둔시킨후 성세재를 무장해제시키고 그를 중경으로 소환합니다. 국공내전말기 장개석과 함께 대만으로 넘어갔고 "신강 10년 회고록"을 쓰며 노년을 보냅니다. 평생을 권력만을 쫓으며 배신과 변신을 거듭했던 진정한 "악당"이었습니다.
이렇게 합작 2년만에 세력이 급격히 확대되면서 국민정부로서도 이미 팔로군을 통제할 수 없는 상황에 직면합니다. 40년 5월 팔로군 총참모장인 팽덕회는 "공산군의 팽창을 저지하는 어떤 세력도 배제할 힘을 가지고 있다"라고 호언할 정도였습니다. 팔로군과는 별도로 화남에서 활동하고 있던 신4군 역시 1만에서 10만으로 10배나 늘어나 상해 인근까지 진출하는 등 양자강 중류와 하류에 걸친 광범위한 지역에서 유격구를 구축하고 세력을 확대해 나갑니다. 40년 5월 4일 공산당 중앙은 신4군에게 "항일을 중지하고 국민당의 반공 완고파의 공격에 저항할 것"을 지시하면서 고축동의 제3전구에 대항해 "모든 법률, 명령에 반대하고 그들과 단호한 투쟁을 벌일 것"을 하달합니다. 이는 명백히 국민정부에 대해 정면 도전하겠다는 의미였습니다.
장개석은 공산당이 합작의 서약을 깨고 독주하는 것에 분개하면서도 그렇다고 그것을 빌미로 다시 내전을 시작할 수도 없는 입장이었습니다. 이는 여론의 문제와 최대 원조국인 소련과의 관계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죠. 41년 1월 이른바 "환남사변"은 국공 쌍방의 최악의 충돌이었음에도 본격적인 내전으로 확대되지 않은 것도 이때문이었습니다.
장개석은 섬감녕변구에 대한 경제봉쇄를 점차 강화하고 병력을 배치하여 통제하는 한편(물론 거의 효과는 없었지만), 진성의 건의를 받아들여 국공의 관계가 더 악화되지 않도록 39년 11월부터 중공정권에 대해 타협을 추진합니다. 200만원의 군자금을 연안에 송금하는 한편, 팔로군의 군비와 피복, 급여, 무기 등의 지급을 정규군과 동등하게 대우하고 하북성, 산서성, 산동성 등 화북지구의 유격구에 대해 양측이 충돌하지 않도록 쌍방의 경계를 명확히 구분할 것, 삼민주의 범위내에서 공산당의 활동을 최대한 보장하고 국민정부에 대한 비판도 어느정도 허용하겠다는 등 국민정부로서는 2차 국공합작 당시에 비해 상당히 완화된 조건을 제시하죠. 그러나 팔로군의 활동지역을 당초 산서북부에 국한했던 것을 화북일대로 확대하되, 신4군을 화중에서 화북으로 이동시키도록 하였습니다. 국민정부로서는 공산군의 무한확장을 지켜볼 수만은 없기에 용납할 수 있는 선에서 타협하되 이들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나 2년만에 세를 엄청나게 불린 공산당 중앙은 이 정도의 타협안으로 만족할리가 없었습니다. 공산당은 다음과 같이 요구하는데, "제18집단군을 당초 3개사단에서 3개군 9개 사단으로 증편하고 그 편제에서도 중앙군에 준하는 갑종군, 개편사로 하며 신사군은 3개사단으로 인가할 것", "제18집단군의 활동범위를 화북5성 전체로 할 것", "화중과 화남에서의 신4군 유격구 인정", "지방정부내 반공성향의 관료를 처벌할 것", "섬서성과 신강성 양정부의 주석을 공산당이 추천하는 사람으로 임명할 것" 등이었습니다. 이는 국민정부에게 아예 백기들고 공산당과 중국 대륙을 양분하라는 것이나 다름없는 것이었죠.
중공정권을 국민정부의 지방정권으로서 통제하려는 중앙과 그 통제에서 벗어나려는 공산당, 서로 생각하는 것이 하늘과 땅만큼 차이가 있었기에 당연히 협상은 40년 내내 난항을 겪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왜 국민정부는 "유격구" 건설의 경쟁에서 공산군에게 완패했는가. 공산군이 점령지구에 제대로 침투하지 못했다면 솔직히 국민정부로서는 이들이 아무리 설친다해도 별로 신경쓸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장개석은 직접 수차례나 유격전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각 전구에 유격부대를 편성하는 한편 군사위원회 직속으로 유격간부훈련과정을 설치하고 장개석이 직접 주임을 맡습니다. 38년 말 기준으로 전국의 유격부대가 80만명에 달하였고 이 숫자는 같은 시기 공산군 전체를 합한 것의 3배가 넘는 것이었습니다. 성정부부터 말단현까지 행정기관을 설립했으며 국민정부계열의 유격부대들은 일본군 후방에서 적극적인 활동을 수행했고 39년말 동계공세에서도 수만이 넘는 유격부대들이 정규군의 공격에 연계해 곳곳에서 철도와 도로를 파괴하고 일본군 수비대를 습격합니다.
※ 그 동안 많은 서적들의 연구가 주로 팔로군과 신4군의 유격활동과 항일근거지 건설에만 촛점을 맞추고 국민정부의 유격 활동에 대해서는 언급 자체가 되지 않은 경향이 있으나 이는 명백히 잘못된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39년부터 국민정부의 유격구는 점점 공산군에게 잠식되었고 심지어 유격부대들이 공산측으로 전향하는 예도 많이 있었습니다. 이렇게 공산측에게 밀리게 된 이유는 첫째로, 40년까지 일본군은 병력의 주력을 국민정부를 상대하는데 집중했기에 국민정부로서는 역량이 분산될 수 밖에 없었던 것에 반해 공산군은 일본군과의 큰 충돌없이 모든 역량을 "해방구"건설에 집중할 수 있었으며, 둘째로, 국민정부군의 패배로 인해 국민정부이 구축한 농촌 행정기관들이 붕괴되자 팔로군이 파고들어 이들을 회유하거나 와해시킬 수 있었다는 것, 그러나 근본적으로 민중 사이로 파고들어가는 전략에서 공산측이 국민정부보다 명백히 한수위였다는 것입니다.
주로 군사적 측면에서 유격활동을 했던 국민정부측과 달리, 팔로군은 민족전쟁과 계급투쟁을 적절히 줄타기를 하면서 민중속으로 침투해 들어갑니다. 사실 화북 농촌지역의 80%이상은 매우 가난한 빈농이었으나 그렇다고 "계급투쟁"만을 강조하고 부농들에 대해 강제로 토지몰수를 실시했다면 빈농 이외의 계층들의 심한 반발을 샀을 것은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공산측은 변구에서 민주적인 선거를 하면서 소위 "3.3"제를 실시하여(공산당 30%, 진보파 30%, 중립파 30%로 구성) 공산당원 이외의 부농, 지식인세력에 대해서도 적극적으로 포섭해 나갑니다. 반면, 국민정부는 국민참정회를 구성하여 주민들의 정치 참여를 형식상 허용하였으나 실제로는 아무런 권한이 없어 주민들의 강한 불만을 샀고 이에 대해 공산측은 이런 국민정부의 비민주성을 적극 선전합니다.
또한, 과거의 "몰수"중심의 급진적인 토지개혁정책을 보다 온건적인 소작료 인하 운동으로 전환함으로서 빈농의 부담을 경감시키는 한편 소작료를 2년간 내지 않은 토지에 대해서는 소작지를 회수토록 하여 중소 지주의 재산권을 보호하는 형식을 취했으며 고리대를 폐지합니다. 이런 공산당의 정책은 섬감녕변구를 시작으로 점차 전체 변구로 확대되었는데 지주들에 대해서도 공산당의 정책을 어느정도 순응할 수 있는 여지를 둠으로서 그들의 저항을 줄입니다. 이때문에 국민당의 향촌 통치기반은 뿌리부터 완전히 붕괴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41년~42년 공산측이 건설한 "해방구"의 현황. 그러나 이것은 고정적인 것이 아니라 상황에 따라 매우 유동적이었으며 대부분의 변구들이 팔로군과 일본군이 함께 통제하는 상황이었다는 것을 인식해야 합니다. 즉, 위의 지도에서 "항일근거지"라고 표시된 영역이 반드시 팔로군이 통치하는 "영토"라는 의미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 사진출처 : 중일전쟁과 중국혁명, 윤휘탁
그러나 한편으로 간과해서는 안되는 것은, 이런 "민주성"은 공산당 지도부에 의해 손쉽게 훼손될 수 있다는 한계 또한 있었다는 것입니다. 대표적인 예로 모택동, 류소기 주도로 시작된 "정풍운동"은 공산당내의 반혁명분자를 숙청해야 한다는 식으로 전개되어 변구에서 주민들간의 "집단적인 린치"로 나타났고 이 과정에서 많은 지식인들과 당원, 지주들이 살해되기도 하였습니다. 즉, 70년대 중국을 광적으로 휩쓸었던 "문혁"의 모습은 단순히 일시적인 일탈이 아니라 공산당이 가진 태생적인 모습이자 항시 내포된 결함인 것입니다.
이른바 "백단대전"은 중일전쟁기간 팔로군이 수행한 유일한 대규모 공세 작전이었습니다. 원래 백단대전은 원래 공산당 중앙의 주도로 처음부터 조직적으로 계획했던 작전이 아니라 유백승-등소평의 "진기예로변구"에서 시작된 제한된 공격이 그 과정에서 타 변구와 부대들도 자발적으로 참여하면서 확대되는 형태로 전개된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장개석이 주도했던 "동계공세"와는 명백한 차이가 있었습니다.
일본군이 진기예로변구에 대해 봉쇄작전을 실시하자 40년 3월 유백승은 화북 철도 연변의 일본군 거점을 공격하기로 결정합니다. 이에 대해 팽덕회는 진기예로변구의 역량만으로는 일본군의 봉쇄를 돌파하기 어렵다고 판단하고 7월 22일 "진기예로변구" 및 "진찰기변구"의 22개 여단 4만명을 동원해 정태철도를 공격하는 이른바 "정태작전"을 실시하기로 결정합니다. 이런 결정은 한편으로 당시 중국내에 팔로군에 대해 "세력 확대에만 광분하고 일본군과의 전투에는 소극적이다"라는 비난여론이 팽배해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8월 8일 팔로군 총사령부에서 "전역행동명령"이 하달되어 8월 20일부터 본격적으로 공격이 시작됩니다. 주된 공격목표는 산서성 평정에서 하북성 석가장에 이르는 정태철도와 동포철도, 주요 도로를 파괴하는 것이었습니다. 곳곳에서 철도와 도로가 파괴되고 분대단위로 분산되어 있던 일본군 진지가 공격을 받았습니다. 9월에는 다른 변구에서도 공격을 시작하여 작전 종료를 선언하는 12월 5일까지 최대 115개 연대 40여만명 가량이 참가합니다.
백단대전에 참가한 팔로군 병사들. ※ 사진출처 : 위키백과
쌍방의 피해에 대해서는 명확하지 않으나 팔로군은 대소 전투 1,824회에 474km의 철도를 파괴하고 2만명의 일본군과 5천여명의 친일괴뢰군을 살상한 대신 2만 2천여명의 피해를 입었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일본측 기록으로는 교량 파괴 73회, 터널 파괴 3회, 20개의 역 소실, 철도 파괴 117건(44km) 등이었습니다.
현재 중국에서는 "백단대전"에 대해 항일전동안 공산군의 가장 대표적인 작전이자 "항전 역량을 대내외에 널리 보여주었다"라며 극찬하고 있으나, 당시 백단대전을 지휘했던 팽덕회는 후에 자신의 회고록에서 "연안의 동의없이 전투명령을 내렸다는 이유로 모택동은 대단히 화를 냈다. 20만의 병력을 투입한 것은 너무 무모했다라고 모택동은 생각했다"라며 모택동은 백단대전에 매우 회의적이었음을 회고했으며 59년 7월 루산회의에서도 팽덕회는 백단대전을 놓고 모택동에게 혹독한 비판을 받았습니다.
팔로군의 "백단대전"은 어떤 명확한 공격 목표를 정하여 전투력을 한곳에 집중시켜 공격하는 일반적인 정규전이 아니라, 소규모로 분산된 일본군을 공격하고 주로 철도와 도로, 시설을 파괴하는 비정규전의 형태로 진행되었습니다. 이 공격 자체는 공산측이 선전하듯 일본군에게 직접적으로 큰 타격을 가한 것은 아니었으나 대신 화북 전역의 치안이 급격히 악화되어 일본군의 화북 지배를 심각하게 위협하였습니다. 따라서 일본군은 화북에서의 병력을 증강하는 한편 41년부터 42년까지 화북 전역에 걸쳐 소위 "치안유지운동"과 "숙정운동"을 전개합니다.
41년 11월 화북에 전개된 일본군은 9개 사단, 14개 독립 여단 등 총 32만 5천명과 북지치안군(친일괴뢰군) 11만7천명에 달하고 있었습니다. 또한 수많은 특무조직을 향촌으로 침투시키고 치밀한 정보망을 구축하여 공산측의 요원들을 색출하고 소탕합니다. 42년 1월부터 4월까지만도 6,500명이 검거됩니다. 공산군이 활동하는 항일 근거지 주변으로 도로와 토치카, 차단벽을 건설하여 철저하게 봉쇄하고 지속적으로 토벌전을 벌였으며 소위 "삼광정책"을 실시하여 현지 주민들을 학살하고 집단부락으로 몰아넣습니다. 이로 인해 팔로군의 활동 영역은 급격히 감소하여 43년이 되면 화북전역에서 사실상 와해됩니다.
그러나 이런 상황은 44년부터 다시 변화하는데, 남방전선에서 상황이 급격히 악화되자 일본군은 화북과 만주에서 병력을 지속적으로 남방으로 파견하였고 또한 "이치고작전(대륙타통작전)"을 위해서 병력을 화중과 화남으로 전용합니다. 대신 그 빈자리는 현지에서 징집한 신병들로 채워져 치안이 다시 악화됩니다. 이에 따라 팔로군은 다시 화북으로 침투하여 해방구를 신속하게 재건했으며 병력도 급격히 늘어나 45년 8월에는 무려 130만명에 달하게 됩니다.
전쟁기간 화북일대의 점령지 주민들은 소위 "양면촌"이라 하여, 팔로군과 일본군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면서 생존하였고(노골적으로 어느 한편을 들경우 보복을 당할 우려가 있기에) 전쟁말기 일본의 패망이 명확해지자 그때서야 팔로군측에 적극 가담하여 해방구와 공산군에 입대하는 사람이 급격하게 늘어납니다.
※ 자료출처 : 중국현대혁명사, 이케다 마코토, p.375
한편, 백단대전 직후인 41년 1월 6일 신4군 사령부 소속의 병사 1만명이 강북으로 이동중 국민정부군 7개사단 8만명에 포위되어 괴멸하는 이른바 "환남사변"이 일어납니다. 3천명이 죽었고 군장인 엽정을 비롯해 3천명이 포로가 되었으며 부군장 항영과 2천여명만이 포위망을 뚫고 도주하는데 성공합니다.
국민정부군의 공격을 피해 도주중인 신4군의 잔존부대
※ 사진출처 : http://terms.naver.com/entry.nhn?cid=796&docId=955813&mobile&categoryId=1546
40년 9월 19일 군사위원회에서는 주덕에게 황하이남의 화중과 화남에서 활동중인 공산군에 대해 11월말까지 황화이북으로 이동할 것을 명령했으나 중공측은 "비정규부대의 강북 이동은 곤란하다"라며 거부합니다. 이에 대해 군사위원회에서는 재차 "12월 31일까지 먼저 강남에 있는 신4군은 강북으로 이동하고 다시 1월 30일까지 황하 이북으로 이동하라"고 명령합니다.
국민정부로서는 화중과 화남에서 급격히 세력을 확대해 나가는 공산측의 세력을 통제하기 위함이었으나 그런 명령을 공산측이 이를 받아들일리가 만무했습니다. 따라서 쌍방의 긴장관계는 급격히 악화됩니다.
환남사변의 전개과정에 대해서는 중공측과 국민정부측의 주장이 명확히 대립하고 있습니다. 중공측은 국민정부의 명령에 따라 신4군이 안휘성 남쪽(환남)에서 북상하는 과정에서 국민정부군의 함정에 빠졌고 포위되어 전멸했다는 식으로 주장하는 반면, 국민정부측은 군사위원회의 명령을 거부하고 1월 5일 국민정부군 제40사단을 기습 공격하였고 제3전구 사령관 고축동이 신속하게 반격명령을 내려 이들을 괴멸시켰다라고 주장합니다.
과연 어느 쪽의 주장이 옳은가. 환남사변은 국공합작이래 최악의 충돌이었지만 이미 39년 말부터 국공 쌍방은 여러차례 무력 충돌을 벌이고 있었다는 점에서 그것은 결코 돌발적인 사건이 아니었습니다.
과연 국민정부측의 주장대로 신4군이 선제공격했다가 되려 반격을 받아 괴멸되었던 것일까. 실제로 공산군이 국민정부군과 보안대를 여러차례 선제공격한 선례가 있지만, 국민정부에 의해 사면에서 포위공격을 받아 군장이 포로가 되었을만큼 괴멸되었다는 점에서 객관적으로 보았을때 그것은 아무래도 믿기 어렵습니다.
그럼 중공측의 주장대로 치밀하게 사전 계획된 음모였을까. 당시 라이프지 극동지부 프리랜서 기자였던 데오도어 H. 화이트는 "장개석이 덫을 놓고 학살을 명령했다"라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러나 공산군 전체를 전면적으로 공격하는 것도 아니고, 단지 신4군의 한개 부대를 괴멸시켰다고 해서 장개석과 국민정부가 도대체 무엇을 얻는단 말인가. 그런다고 공산군의 활동이 위축되는 것도 아니고 전력에 큰 타격을 주는 것도 아닙니다. 그건 승리라고 부를 수도 없는 것이었으며 오히려 중공측에게 좋은 선전거리만을 제공했을 뿐입니다. 실제로 중공측은 "국민당내 친일, 완고파에 의해 사전 계획된 것이라며 전국의 인민과 세계가 주목해야 한다"라며 펄펄 뛰며 외국기자와 각국 외교관들을 상대로 환남사변과 국민정부의 반공탄압을 적극적으로 선전합니다.
레이황은 "장제스 일기를 읽다"에서 "주은래는 장개석이 직접 명령했다는 것을 부인하고 부하들이 무단으로 저지른 짓이라고 말하였다"라고 기술하고 있습니다. 환남사변은 중앙차원에서 본보기로 삼기 위해 처음부터 치밀하게 계획된 사건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제3전구의 국민정부군과 신4군간의 극심한 갈등과 불화, 그리고 신4군이 당초 정해진 이동경로를 벗어나 행군하자(공산측은 미리 승인을 받았다고 주장했지만) 현지에서는 이를 명령불복이라고 판단하고 공격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즉, 환남사변은 그 하나만 떼어놓고 볼 것이 아니라 그 전후사정을 전반적으로 살펴봐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41년 1월 23일 국민정부 선전부는 환남사변에 대해 "이는 반공탄압이 아니며 단지 명령에 불복한 신4군의 군기위반에 대한 처벌을 했을뿐"이라고 발표하였고 중공정권과 제18집단군에 대한 비난은 삼가합니다. 국민정부로서는 국공간의 분열과 갈등이 대내외적으로 이슈화되는 것은 매우 곤란한 것이었고 특히 소련과의 관계에 악영향을 줄 것을 심각하게 우려하였습니다.
그런데 장개석의 우려와 달리 사실 소련은 환남사변을 이유로 국민정부에 대해 적극적으로 압박을 가할 의사는 전혀 없었는데, 소련이 중국을 원조하는 이유는 이데올로기 때문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극동에서 일본을 견제하기 위함이었기 때문입니다. 소련은 중공정권에 대해서도 결코 우호적인 입장이 아니었고 심지어 소련 외무장관인 몰로토프는 미국 헐리 대사에게 "중국 공산주의자는 전혀 공산주의자가 아니며 공산주의와는 아무런 인연도 없는 사람들이다. 우리가 그들의 배후로 지목될 아무런 이유도 없으며 결코 중국 내부의 분열과 내전을 바라지 않는다."라고 말하기도 하였습니다.
공산종주국인 소련이 중공을 푸대접하고 "우리와 상관없다"는 식으로 일관한 것에 비해 국공의 화해에 관심을 가지고 장개석을 압박한 쪽은 아이러니하게도 자본주의국가인 미국이었습니다. 1941년 2월 8일 루즈벨트의 특사로 파견된 커리는 장개석에게 "항일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국공간의 이견을 배제할 필요가 있다"며 강한 압력을 가합니다. 이에 대해 장개석은 "루즈벨트가 중공측의 유인비어에 속은 것이 아닌가"라고 대단히 불쾌하게 생각합니다. 이후 귀국한 커리는 루즈벨트에게 "중공은 민중의 지지를 끌어낼 수 있는 유일한 정당"이라고 보고하는 등58 미국은 중공측에 대해 매우 동정적인 입장이었으며 이런 시각은 태평양전쟁이후 미국의 대중정책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전쟁 말기로 갈수록 미국내 여론은 국민정부를 비판하고 반면 중공측을 찬양하는 쪽으로 흘러갑니다. 브룩스 애키슨, 네셔널 페퍼, 에드가 스노우 등 미국내 친중공적인 인사들이 게재하는 칼럼들은 국공의 분열의 책임은 전적으로 국민정부측에게 있으며 연안은 활기가 넘치고 항일전쟁에서 상당한 활약을 하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데오도어 H. 화이트 역시 자신의 회고록에서 국민정부군의 군대는 매우 무능하고 부패했으며 싸울 의지는 없는 주제에 미국에게 끝없이 돈과 무기만 요구하는 "썩어빠진 집단"으로 묘사한 반면 공산군은 인민을 자발적으로 동원하고 유격전술로 일본군을 괴롭히고 있다고 서술하고 있습니다.
이들의 주장이 옳고 그름을 떠나, 44년부터 미국은 적극적으로 국공간의 관계에 개입하였고 11월에는 루즈벨트의 개인특사인 헐리장군이 직접 연안을 방문하기도 하였습니다. 장개석의 참모장이자 중국-버마-인도지구의 연합군 사령관이었던 스틸웰대장은 장개석이 전쟁에 소극적이라며 "최정예부대 50만을 중공을 봉쇄하는데 사용하고 있다"라고 격렬하게 비난하였습니다. 스틸웰의 주장은 명백히 사실과 거리가 먼 것이었는데, 당시 중국군의 주력은 중공과 접한 제2전구가 아니라 화중일대에 포진한 제1전구, 제5전구, 제9전구에 집중되어 일본군과 대치하고 있었으며 그가 말하는 "최정예부대"는 바로 스틸웰 본인에게 배속된 중국 유일의 전략예비대인 제5군이었기 때문입니다. 공산군 봉쇄에 투입된 부대들은 정예부대는 커녕 장비와 훈련이 매우 빈약했으며 심지어 호종남 휘하의 중앙군조차 각 사단에서 매달 600명의 탈영병이 나오고 전염병과 영양실조에 허덕이고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국공이 화해할 것을 요구하는 미국의 태도는 장개석으로는 부당한 내정 간섭에 해당하는 것이었습니다. 만약 남북전쟁 당시 링컨 행정부에게 유럽이 남부의 요구를 일방적으로 받아들이라고 압력을 가했다면 미국으로서는 명백한 "간섭"이지 "중재"라고 말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미국은 중국내 정치상황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원조를 무기로 자신들의 영향력을 확대하기 위해 장개석을 압박한 것일뿐이었습니다.
그동안 중국은 물론 좌파측에서 나온 서적들은 중일전쟁기간 국민정부군이 소극적인 자세를 유지한 반면, 공산군은 항전의 주축이었으며 팔로군이 건설한 해방구가 항전의 주전장이었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결코 정당한 평가라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태평양전쟁 발발 이후에도 국민정부군은 여전히 화중에서 일본군 주력을 상대로 수차례 대규모 전투를 벌였으며 많은 피해를 입었습니다. 최정예부대인 제5군과 제6군은 스틸웰의 요청에 따라 버마로 파견되었고 그들은 큰 희생을 치루면서 일본군을 격퇴하고 결국 버마를 탈환하였습니다. 45년 1월부터 중앙군을 우선으로 미식 사단으로 재편되었고 일본군 최후의 공세였던 지강, 노하구 공격을 격퇴한후 7월부터 화중과 화남에서 제한적인 반격을 개시하여 영토를 탈환해 나가고 있었습니다. 장개석은 전쟁기간 내내 전력을 보존하면서 연합군의 승리만을 수동적으로 기다렸던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주동적으로 전쟁을 수행해 나가고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오히려 전력을 최대한 보존하며 근거지 확대에만 집중하고 있었던 것은 공산측이었습니다. 전쟁기간동안 그들은 희생이 큰 군사작전은 피하면서 지하운동을 통해 점령지는 물론 국민정부 통치구역으로 침투하여 세력을 확대해 나가는 전략을 구사하였습니다. 전쟁 말기에 와서 팔로군이 적극적인 공세를 취하여 45년 4월~5월동안에도 109차례의 전투를 벌였다고 하지만 모두 소규모 유격전이었으며 이를 가지고 일본군 주력을 격퇴하기 위한 본격적인 반격이라고 말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약자가 강자를 상대하기 위해 유격전을 벌이며 전력을 축적하는 것 자체는 매우 현명한 전략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이는 최후의 국면에 도달했을때 총반격으로 전환한다는 전제에서만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2차대전 당시 바르사바 봉기를 주도했던 폴란드 국내군이나 월남전에서의 베트남민족해방전선(베트콩)은 지하운동과 병행하여 적극적인 군사작전 또한 전개하였습니다.
그러나 공산군은 마지막 순간까지도 정규군을 동원한 대규모 공세를 지양했고 소련군이 만주를 침공하자 그제서야 8월 11일 주덕의 명령으로 요녕성, 길림성으로 병력을 진입시켜 주요 도시를 장악함과 함께 일본군과 만주국 군경 4만 5천명을 무장 해제시켰습니다.
팔로군 병사들 개개인을 본다면 항일을 위해 온 몸을 바쳤고 많은 희생을 치룬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희생과 모택동을 비롯한 공산당 지도부의 항일의지는 전혀 별개의 것입니다. 8년의 전쟁기간 국민정부군의 사상자는 321만명에 달했고 하응흠 회고록에 따르면 소장급 이상 고위장성만도 상장 8명을 포함해 206명이 전사하였습니다. 일본군은 중국전선에서 40만5천명의 전사자를 비롯해(해군 7,600명 포함) 총 241만8천명의 사상자를 냈고 소장급 이상 고위장성도 129명이 중국전선에서 전사했습니다.
최근에 공개된 "모택동외교문선"에서 1950년 모택동은 중국을 방문한 일본인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던 것으로 나옵니다.
"사실 일본 제국주의는 우리에게 좋은 본보기가 되었다. 첫째, 장제스의 힘을 약하게 해 주었다. 둘째, 우리의 공산당 지도부의 근거지와 군대 확충을 도왔다. 항일전쟁 전, 우리 군대는 30만명에 달했지만, 우리 스스로 저지른 실수로 불과 2만명밖에 남지 않았다. 그러나 일본과 8년 전쟁을 치르면서 우리 군대는 120만명으로 늘었다. 이것이 큰 도움을 받은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