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한 점령을 끝으로 일본은 사실상 공세 종말점에 직면합니다. 왜 그들은 그 여세를 몰아서 중경과 성도까지 단숨에 진격하지 못했는가. 꼭 10년후 모택동의 인민해방군은 파죽지세로 국민정부군을 밀어붙여 대륙 전체를 석권하였고 장개석은 어느 곳에서도 그들의 진격을 막지 못했습니다. 인민해방군은 적들로부터 노획한 약간의 차량만을 가지고 있었을뿐 전차도, 전투기도, 기계화부대도 없었습니다. 단지 도보만으로 만주에서 해남도까지, 그리고 신강과 티벳으로 북에서 남으로 동에서 서로 진격하여 단지 4년만에 중국 전역을 점령하였습니다. 반면, 일본군은 모택동의 군대보다 훨씬 많은 자원을 가지고 있었고 대량의 전차, 전투기, 기계화부대와 포병, 막강한 해군까지 보유하고 있었음에도 왜 지지부진한 소모전만을 반복했던가.
모택동은 결정적인 전역에서마다 국민정부군의 주력을 고립시키고 포위 섬멸하였으나, 일본군은 단지 산간오지로 밀어냈을 뿐이었습니다. 중국군은 많은 사상자를 내고 다수의 장비를 상실했어도 괴멸되지는 않았고 여전히 강력한 전투력을 그대로 유지한채 후퇴하여 새로운 방어선을 구축하였습니다. 더욱이 일본군의 점령지 곳곳에는 미처 후퇴하지 못한 중국군의 잔존부대나 새로 침투한 유격대들이 적극적으로 활동하여 일본군을 교란하고 소모전을 강요하였습니다. 일본군은 후방의 안정을 위해 병력을 계속 투입하여 이들을 소탕해야 했고 따라서 일선의 공격능력은 감소할 수 밖에 없었죠. 그러나 그들의 만행과 가혹한 통치에 반발한 대다수 중국인들은 유격대들을 적극적으로 후원하고 있어 일본의 통제력이 가장 강력한 상해, 남경 등 양자강 하류 지역에서조차 치안은 갈수록 악화되었습니다.
※ 독일점령지구에서 적극적인 무장 유격전을 펼친 것은 소련과 유고, 그리스에서도 그 예가 있지만 이들은 해당지역 주민들의 자발성보다는 공포와 완력에 의존한 경향이 매우 컸습니다. 파르티잔들은 독일군을 직접 공격하는 대신 보다 만만한 상대들, 즉 자발적이든 비자발적이든 관계없이 적에게 부역한 자들이나 식량과 물자를 제공한 자, 파르티잔에 가담하기를 거부한 자들에 대해 무자비하게 보복하는데 더 열중하였습니다. 유고의 양대 반독세력, 티토의 빨치산과 미하일로비치의 체트닉은 전후 주도권 확보에만 광분하여 독일군보다 오히려 자기들끼리 싸우고 보복하는데 더 열중하였고 심지어 체트닉은 이를 위해 때때로 독일군과 협조하는 추태를 부리기도 했죠.
반면, 중국에서 유격대들은 공포과 학살로 주민들을 통제하려고 하지 않았으며 주민들은 자발적으로 항일투쟁에 협조하였습니다. 특히 공산군은 어느정도 "미화"되었다는 점을 감안한다해도 매우 효과적으로 민중속으로 침투해 들어갔으며 이들이 배신자들에 대한 집단학살이나 보복, 약탈 등 강압적으로 행동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일본이 적극적인 봉쇄와 토벌에도 불구하고 41년 당시 왕정위괴뢰정권 통치구역을 시찰한 한 일본인은 "민중들은 매우 가혹하게 착취당하면서도 어려움을 이겨내고 있으며 신4군이 민심을 강력하게 장악하고 있는 것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라고 보고하였습니다.
왕정위의 배반과 지방 군벌들에 대한 모략에도 불구하고 장개석의 통제력은 여전히 강력했으며 지방군벌들이 일본과 결탁하여 독립을 선포하거나 반란을 일으키는 예도 없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일본의 당초 계산에서 완전히 빗나간 것이었습니다.
이렇듯 중국군의 유격전쟁은 일본군의 역량을 분산시켰고 더이상 깊숙히 진격할 수 없도록 교착상태로 만들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중일전쟁이 장기화된 가장 큰 이유였습니다. 따라서 대본영은 1938년 12월부터 향후 군사행동의 일차적 목표를 이들에 대한 토벌과 치안 안정에 두었으나, 현지부대들은 대본영의 방침을 의도적으로 무시한채 "중국군의 반격 차단", "점령지의 치안 안정", "장개석 원조 군수품 수송로 차단" 등 이런저런 명분을 갖다붙이며 작전지역을 야금야금 넓혀 나갑니다. 단지 국지적 승패에만 급급하여 이런 식의 명확한 전략적 목표도, 원칙도 없는 소규모 공격의 반복은 중국군에게 결정적인 타격은 주지 못한채 자신들의 인적, 물적 소모만 늘릴뿐이었습니다.
또한 매 전투는 고전의 연속이었으며 성급한 공격은 격퇴되기 일쑤였고 설령 이기더라도 지킬 능력이 없어서 점령지를 포기하고 후퇴해야 했습니다. 일본군은 산악지대에 강력한 방어선을 구축한 중국군을 돌파할 능력이 없었고 중국군 역시 일본군의 공격을 막을 수는 있었지만 전면적인 반격으로 전환하기에는 힘이 부족했습니다. 즉, 쌍방의 힘이 사실상 균형을 이룬 셈이죠. 이런 대치 상황은 45년 8월 전쟁 끝나는 그 순간까지 큰 변화없이 지속됩니다.
이렇듯 더이상 대규모 공격작전을 지속할 능력이 없는 일본은 단기간에 중국 전토를 장악하겠다는 목표를 버린 대신, 중국군의 해상 보급선을 차단하고 공중폭격으로 적의 저항을 꺾겠다는 지구전략으로 바꿉니다.
중국의 해상보급로의 80%를 차지하는 광주를 공략하여 광주, 홍콩루트를 차단하는데 성공하였으나 장개석은 재빨리 새로운 보급로를 개척합니다. 바로 하노이와 버마루트였죠. 중국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와 가까운 광동 서쪽의 연안지역과 광서성의 성도인 남녕 등을 통해 군수 물자를 확보해 나갑니다.
일본해군은 이 하노이 루트를 차단시키기 위해 해남도 공략을 강력하게 건의했으나 육해군간의 알력과 해남도 공략이 영국, 프랑스를 자극할 것을 우려한 대본영에 의해 일시 중단되었다가 육해군 수뇌부들끼리 타협함으로서 39년 1월 13일 어전회의에서 해남도공략작전이 결정되어 19일 대륙명 제265호를 발령함으로서 정식으로 해남도 공략명령이 하달됩니다.
중국 최남단에 있는 해남도는 대만 다음으로 큰 섬으로, 면적은 33,920㎢ 이며 당시 인구는 2백2십만명정도였습니다. 북부는 평야지만 중부와 남부는 대부분 산악지대이며 그 중심에는 해발 1,867m의 오지산이 있습니다. 당시 수비군은 제62군(군장 장달)휘하 제152사단이 주둔하고 있었고 그 외에 비정규군 2개 여단, 보안대, 현지 자경단 등이 있었습니다.(정확한 병력수는 미상이나 1만~2만정도로 추정) 사령부는 경산에 있었고 제62군 부군장인 왕의가 지휘를 맡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전략적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방어태세는 매우 허술했고 병사들도 훈련과 장비가 부족한 지방잡군과 신병이 태반이었습니다. 또한 인프라가 매우 낙후되어 철도나 도로도 제대로 없었고 근대적인 항만시설 역시 전무한 전형적인 어촌이었죠.
동원된 병력은 제21군 산하 대만혼성여단(보병 1연대, 2연대, 산포병연대)과 해군육전대 3개 대대, 그리고 새로 편성한 해군 제5함대(남중국해 관할)였으며 제5함대 사령관 곤도 노부타케중장이 지휘를 맡았습니다.
공격은 남북에서 협공하는 형태로 진행되어, 2월 9일 22시 대만혼성여단이 해남도 북쪽 징매만 해안가에 상륙을 시작하여 5시간의 교전끝에 중국군의 방어선을 돌파하고 내륙으로 파죽지세로 진격합니다. 또한 해군항공대는 해남도의 주요 진지와 병영을 폭격하여 큰 피해를 입혔습니다. 10일 정오에 해구를, 오후 2시에는 이미 경산에 돌입하여 점령에 성공합니다. 또한 14일 새벽 5시부터 해군 육전대 2,550명이 해남도 남쪽 삼아항에 상륙하였고 당일날 유림과 애주를 점령합니다.
트럭을 타고 해남도 내륙으로 진격중인 일본군. ※ 사진출처 : 위키백과
중국군의 초기 저항은 매우 미미했으나 이들 대부분은 투항하지 않고 내지의 산악지대로 철수한후 지속적으로 유격전을 펼쳐 일본군을 괴롭힙니다. 특히 동부산악지대에는 1천명이 넘는 신4군 계열의 공산세력들이 대거 포진하고 있었고 따라서 이들에 대한 소탕작전은 계속되어 병력을 추가 증원한후 40년 3월에 대대적인 토벌을 한후에야 완전히 제압할 수 있었습니다.(그러나 실제로는 산악지대에서 투쟁이 계속되었고 일본은 단지 해안가의 요충지만 장악했을뿐 전쟁 끝나는 순간까지도 전투가 벌어집니다.) 이 과정에서 섬에 거주하는 남성 1/3이 살해되는 남경대학살에 비견되는 학살극이 벌어집니다.
버려진 민가를 수색중인 일본 육전대 병사들.
※ 사진출처 : 동아일보 1939. 3. 5일자 기사
해남도 공략당시 일본군의 진격상황. 상륙이후 해안가의 도시들을 제압하는 것은 간단했지만 중국군은 과거처럼 쉽게 투항하거나 와해되지 않고 지형적으로 유리한 산악지대로 물러나 계속 저항을 하였습니다. 일본군은 39년~40년초까지 국민정부군과 공산군 유격대에 대해 여러차례 대규모 토벌전을 벌였고 "소탕완료"를 선언했지만 실제로는 여전히 지속적으로 저항활동을 벌였으며 전쟁 후반으로 갈수록 일본군의 세력이 점점 약화됨에 따라 공산군은 농촌 지역에서 해방구를 건설하고 세력을 확대하여 거의 대부분의 지역을 장악합니다.
해남도 점령과 함께 해군은 경산에 비행장을 건설하여 뇌주반도와 남녕을 비롯한 광서성, 광동성 등의 대도시와 중국-인도차이나 국경의 철로를 대대적으로 폭격하여 중국의 보급로 차단에 나섭니다. 이것은 큰 위협이었으나 중국은 새로운 보급로로서 곧 버마-운남루트를 개통합니다.
또한, 일본의 해남도 점령은 미, 영, 프의 관계악화로 이어집니다. 여지껏 중일전쟁은 단지 극동에서 중국과 일본 두나라만의 분쟁으로 자신들과는 무관하게 생각했으나 일본이 해남도를 점령하고 비행장과 군항을 건설하여 함대를 배치했다는 것은 당장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에게 위협이 되었고 본격적으로 남방으로 세력을 확대하려는 의도가 아닌가 의심을 품지 않을 수 없었죠.
장개석 역시 일본의 해남도 침공직후인 2월 12일 외신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이것은 태평양의 만주사변이며 일본은 태평양 전체에 대해 전쟁을 확대하려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또한 미, 영, 프 삼국도 "그동안 일본이 중국에 대해 영토적 야심이 없다고 매번 천명했음에도 해남도를 점령한 것은 그 진의가 의심스럽다"라고 강력하게 항의합니다. 여기에 대해 아리타 하치로 외상은 "이번 출병은 영토적 합병을 목적으로 한 것이 아니라 단지 군사적 목적에 의해 한시적으로 점령한 것일뿐"이라며 일축합니다. 그러나 일본의 전선의 확대는 이 지역에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는 열강들의 경계를 불러오지 않을 수 없었고 프랑스는 인도차이나 방위를 강화하기 위해 3억프랑을 증강하는 한편 순양함을 급파합니다. 또한 일본에 대한 항의의 표시로 2월 17일부터 중국-인도차이나 국경의 대중원조루트에 대한 모든 제한을 철폐하고 중국을 원조하는 등 양국의 관계가 급격히 악화됩니다.
한편, 해남도 공략과 함께 해주 공략작전이 개시됩니다. 해주는 서주 동쪽에 있는 도시로 농해선의 종착점이기도 했습니다. 서주회전당시 일본군은 산동성과 강소성 대부분을 점령했음에도 이곳에 대해서는 중국군의 강력한 저항에 봉착하여 소위 "점령지구내의 미점령지구"로 아직까지 남아 있었죠. 방어군은 제51군, 제57군, 제89군 등 약 5만에 달했으나 완전히 고립된 상태였고 대부분 패잔병들이었습니다. 일본군은 제12군 산하 3개 사단과 해군육전대를 동원해 이들을 포위한후 공중폭격과 함께 포위망을 점점 축소하여 1주일간의 치열한 전투끝에 3월 6일 해주성을 점령하는데 성공합니다.
3월 6일 해주성에 입성한 일본군 ※ 사진출처 : 도해 일중전쟁, 태평양전쟁연구회, p.133
한편, 중지방면군은 무한을 점령했지만 전선의 형태가 적진 깊숙히 돌출된 형태라 삼방향에서 중국군에게 포위된 형세였습니다. 게다가 남창비행장에서 출격한 중국공군기들이 장강을 운행하는 일본군 수송선단을 폭격해 큰 타격을 입히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대본영의 "전선 불확대 방침"에도 불구하고 무한 주변의 중국군에 대해 타격을 가해 위협을 제거하기로 결정합니다. 가장 먼저 남창에 대한 공략을 결정하고 39년 2월 6일 제11군에 "남창작전요강"을 하달합니다. 남창은 무한 남동쪽으로 200km 거리에 있으며 제3전구와 제9전구의 경계에 있는 전략적 요충지이기도 했죠.
공산당에게 남창은 가장 중요한 성지중의 하나인데, 1927년 8월 1일 하룡, 주은래, 주덕 등이 주도한 최초의 공산 혁명인 "남창봉기"가 일어난 곳입니다. 물론 성급한 공격으로 일시적으로 남창을 점령했지만 곧 압도적인 정부군의 공격에 5일만에 격퇴되어 극소수만이 탈출하였고 이들은 모택동이 자리잡고 있던 정강산으로 향합니다.
※ 사진출처 : http://news.donga.com/Inter/3/02/20110609/37887159/1
원래 무한회전 당시 제106사단이 구강에서 노산을 거쳐 남창까지 단숨에 남하하여 점령할 계획이었으나 오히려 덕안 서북쪽 만가령에서 중국군에게 포위되어 전멸직전까지 몰렸다가 증원군의 도움으로 간신히 후퇴하는데 성공합니다. 이 과정에서 나리토미 마사이치중좌를 비롯해 사단 참모들도 다수 전사하고 전 병력의 70%의 손실을 입어 무한회전 전체를 통틀어 최악의 피해를 입었었죠. 따라서 이에 대한 설욕전을 벼르고 있었습니다.
동원된 병력은 제11군 산하 3개사단(제6사단, 제101사단, 제106사단)을 주축으로 전차 130대, 1개 포병여단 및 2개 포병연대, 해군육전대 1개 대대 등 총 12만명에 달하였습니다. 특히 제106사단은 적진 돌파의 핵심으로 250문에 달하는 야포를 배속받았습니다. 단일전구에서 이정도 숫자의 포병을 집중시킨 것은 일본으로서도 처음이었습니다.
중국은 정보망을 통해 일본군의 남창공격계획을 사전에 이미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일본군의 공격에 대항할 제9전구의 병력은 4개 집단군(제1, 제19, 제30, 제32집단군) 39개 사단 20만명 정도였습니다.
당초 중국측 방어전략은 피아간의 전력차이를 고려할때 남창을 끝까지 방어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보고 중국군의 피해가 한계에 직면할때까지 버팀으로서 일본군의 공격능력을 소모시킨후 주력부대가 포위되기전에 후방으로 철수시켜 제3전구와 협력해 일본군의 호남성 침공을 저지하면서 일부병력으로 적 측면과 병참선에 대한 유격전을 펼쳐 교란시키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장개석은 일본군의 허를 찔러 선제공격에 나섬으로서 적의 기선을 제압하자는 제안을 했고 3월 8일 제9전구 대리사령인 설악에게 3월 15일부터 전면 공세로 전환할 것을 하달합니다. 만약 설악이 그 명령대로 바로 공격에 나섰다면 일본군으로서는 한창 공격을 위해 전개중이었다는 점에서 전혀 예측하지 못한 상태에서 허를 찔렸을 것이고 큰 피해를 입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설악은 준비가 아직 완료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3월 24일로 연기했으나 3월 17일 일본군의 대대적인 포격과 함께 선제공격이 시작됩니다.
덕안에서 남하한 일본군은 200문이 넘는 야포를 전개하여 메이지이래 일본육군사상 최대규모의 포병화력으로 수수(修水) 남안의 중국군 진지를 맹타한후 2일만에 방어선을 돌파합니다. 23일에 안의를 점령하고 25일에는 남창 서쪽까지 진출하여 중국군의 증원군을 격파한후 동진하여 남창교외까지 진출합니다. 중국군은 포위되기직전에 철수했고 27일 남창이 함락됩니다.
남창을 향해 진격중인 일본군.
끼익끼익하며 시골길을 통과중인 89식 전차들.
일본으로서는 순조롭게 남창을 점령했다고 생각했으나 그 직후 중국군의 대규모 반격, 이른바 "4월 공세"가 시작됩니다. 장개석은 4월 16일을 기하여 전 전구에 대해 공세로 전환할 것을 명령했고 특히 광주와 남창이 주요 탈환 목표로 설정되었죠. 중국군의 대반격은 일본으로서는 완전히 예상밖의 일이었는데, 4월 21일 중국군 일부 부대가 남창성의 일부를 점령하는데 성공하기도 했으나 결국 탈환에는 실패하였고 5월 9일 장개석은 작전 중지와 철수명령을 내립니다. 공격이 실패한 것은 중국군의 준비부족과 화력의 열세도 있었지만, 특히 숫적 열세에 몰린 일본군은 독가스탄을 무차별로 사용하였고 이덕분에 간신히 중국군을 격퇴할 수 있었죠. 2달간의 전투에서 쌍방의 피해는 중국군 사상자 5만1천명에 대해 일본군은 2만4천명으로 약 2:1정도였습니다.
※ 일본군은 국제연맹에 의해 1925년부터 독가스탄의 사용이 금지되었음에도 상황이 불리하거나 중국군의 강력한 방어선을 돌파할때 수시로 사용하여 세계적인 지탄을 받았습니다. 당시 육군 참모총장이었던 간인노미야 고토히토 친왕은 무한작전에서 처음 북지방면군과 중지방면군에 독가스탄의 사용을 지시하였고 이후 주요 전투마다 독가스전을 실시하였습니다.
간인노미야 고토히토 친왕(1877~1945) : 일본 황족으로 최연소 원수이자 1931년부터 1940년까지 육군 참모총장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도 참전하여 야전지휘관으로서는 나름대로 용맹함을 보였으나, 군 총수로서의 리더쉽은 없었고 30년대 군부의 폭주와 하극상의 만연은 실상 이 양반의 무능함때문에 빚어진 면도 있었습니다. 36년 황도파 장교들의 쿠테타였던 2.26사건을 제대로 대응하지 못해 천황 히로히토로부터 질책을 받기도 했고 삼국동맹 체결에도 적극 관여하였습니다. 전형적인 무능한 정치군인이었고 군국주의의 대표적인 인물이었습니다. 40년에 참모총장직에 물러나 패망직전인 45년 5월 사망하였고 6월에 국장으로 치루어졌는데 그것이 일본제국 마지막 국장이었습니다.
남창에서의 중일 양측의 공격과 반격은 39년부터 40년까지 수없이 반복될 치열한 전투의 시작일 뿐이었습니다. 무한함락전까지 중국군의 전략이 일본군의 공세를 최대한 지연시키며 더 깊숙히 침공하는 것을 저지하는데 만족하는 것이었다면 39년부터는 적극적으로 반격하여 빼앗긴 지역의 탈환을 노렸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전투는 이전보다 훨씬 더 치열했고 교전의 횟수도 늘어났으며 쌍방의 피해와 물자 소모 또한 훨씬 늘어납니다. 북지방면군만도 1939년 한해동안 대소전투 17,457회에 달했으며 점령지역의 주변에는 반격의 기회를 노리는 중국군이 포진해 있었고 공격할때마다 항상 중국군의 거센 반격을 받았다고 보고하였습니다.
5월에는 무한 서쪽의 이종인의 제5전구에 대해 공격을 개시합니다. 당시 제5전구는 "4월 공세"에 따라 무한을 위협하고 평한철도를 습격하고 있어 이에 대한 위협을 제거하기 위함이었죠. 공격군은 제3사단과 제13사단, 제16사단, 제4기병여단 등 11만3천명이었습니다. 여기에 대항하는 중국군은 20만명정도였습니다.
5월 1일부터 시작된 일본군의 공격은 당초에는 순조롭게 진행되어 장자충의 제33집단군의 방어선을 돌파하여 7일에는 조양을 점령하였고 제5전구 주력인 제11집단군과 제31집단군을 포위섬멸하려고 했으나 중국군은 재빨리 철수하였습니다. 일본군의 진격이 한계에 직면하자 5월 12일부터 총반격에 나서 일본군을 사면에서 포위하였고 일본군은 큰 피해를 입은채 도로 출발지까지 후퇴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중국군은 5월 20일까지 조양을 비롯해 빼앗겼던 모든 지역을 탈환하였습니다. 쌍방의 피해는 일본군이 2만1천명, 중국군이 2만8천명으로 거의 대등했으며 태아장전투 이래 일본군의 대규모 공격에 대해 가장 성공적으로 막아낸 작전중 하나였습니다.
조양방어전에서 중국군은 종심방어로 적의 공격력을 최대한 소모시킨후 후퇴하자 즉시 반격으로 전환하였고 추격하여 큰 피해를 입혔습니다. 이어서 9월부터 10월까지 전개된 제1차 장사회전(일본은 공상(贛湘)작전이라고 부름)에서도 중국군은 똑같은 방식으로 일본군의 공격을 격퇴하였습니다.
남창을 빼앗긴 제9전구는 모든 병력을 호남성으로 이동시켜 성도인 장사 수비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었습니다. 38년 12월 장치중의 성급한 장사방화로 시가지 대부분은 완전히 폐허가 된 상태였고 장치중 역시 주석에서 해임되어(목숨은 건졌지만) 설악이 겸임하고 있었습니다. 이어서 일본군 대본영은 제11군에 제9전구를 완전히 격멸시킬 것을 지시합니다. 동원된 병력은 제6사단, 제13사단, 제33사단, 제106사단 등 4개 사단 10만명정도였습니다.
일본군의 장사 공격에 대해서도 중국측은 사전에 정보를 입수하고 있었고 장개석은 일본군의 선제공격을 유도하되 축차적인 종심방어를 실시하여 적의 진격을 최대한 둔화시킨후 결정적인 순간에 반격할 것을 지시합니다. 이에 따라 설악은 제9전구 병력을 4개로 나누어 야전병단, 결전병단, 경비병단, 예비병단으로 편성하였고 예비병단이 견고한 방어선을 구축하여 적을 저지하면 야전병단과 경비병단이 적의 측면을 지속적으로 습격토록 하였습니다. 그리고 주력부대가 결전병단으로서 반격의 핵심으로 삼았으며 매복전과 유격전, 그리고 적 후방 침투조를 편성하여 운용합니다. 병력은 30개사단 20~25만명정도였습니다.
일본군의 침공은 9월 14일부터 시작되어 일진일퇴의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고 제6사단은 신장하 도하에 2번이나 실패하자 독가스로 공격하여 간신히 돌파에 성공합니다. 일본군은 몇겹에 달하는 중국군의 방어선을 돌파하면서 장사를 향해 진격하였으나 중국군의 매복과 기습으로 많은 사상자를 내었습니다. 게다가 일본군 통과가 예상되는 일대에 대해서는 소위 "청야작전"을 실시하여 가축, 식량은 운송하고 모든 도로를 파괴하여 일본군의 전차와 차량의 기동을 어렵게 만듭니다. 그럼에도 29일 제6사단이 장사 북쪽 30km지점까지 진출하여 장사 점령도 시간문제라고 생각했으나 그기까지가 공격의 한계였고 10월 1일 철수를 시작합니다. 일본군이 철수를 시작하자 중국군은 즉시 추격하여 점령당했던 지역을 모두 수복합니다.
일본군은 중국군에게 큰 피해를 입혀 사살 4만4천명, 포로 4천명을 획득하고 자신들은 전사 850명, 부상 2700명정도였다고 발표하며 "승리"라고 주장했으나 실제로는 철저한 실패로 끝났습니다.(양측의 정확한 피해는 미상)
이렇듯, 무한 주변에서의 위협을 제거하기 위한 일본군의 작전은 남창 공략에만 성공했을뿐 조양과 장사에 대한 공격은 완전히 실패로 돌아갔고 많은 인적, 물적 손실만 입었을 뿐이었습니다. 충분한 준비와 적정 조사 없이 무턱대고 깊숙히 진격하면 중국군의 측면공격을 받아 병참선이 끊겼고 사면에서 포위되어 큰 피해를 입은채 후퇴해야 했죠. 이런 모습은 과거 초공전당시 국민정부군이 공산군에게 당했던 것을 그대로 재현하는 것이었습니다. 더욱이 이들은 중국군을 경시하여 기밀유지에 신경쓰지 않았고 따라서 일본군의 이동이나 작전계획은 사전에 중국군에게 쉽게 누설되어 방어를 강화할 수 있었습니다.
일본군은 병력과 물자를 이전보다 몇배나 증강했으면서도 이렇게 전투는 지지부진한 상태였습니다. 중국군은 이전처럼 수동적인 방어가 아니라 과감하게 반격하였고 유격대의 활동도 점점 활발해지고 있었습니다. 또한 무리한 봉쇄작전과 남방으로의 확대는 열강들의 반발을 불러왔습니다. 여기다 북쪽에서는 소련군과의 최대의 무력충돌이 발발합니다. 바로 노몬한(할힌골)전투였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