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적이 항복했다는 소식은 내게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일이었다. 수년 동안 애를 써서 참전을 준비한 것도 모두 허사로 돌아가고 말았다. (중략) 그러한 계획을 한번 실시해 보지도 못했고 왜적이 항복하였으니, 지금까지 들인 정성이 아깝고 다가올 일이 걱정되었다." - 백범일지에서
30년대 내내 극도의 혼란과 갈등으로 해체직전까지 몰렸던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40년 9월 중경으로 이동하면서 비로소 점차 안정을 찾으며 독립운동의 중심으로서 활동을 재개합니다.
임정에게 30년대는 고난의 연속이었습니다. 당파들간의 이해관계와 주도권 싸움, 리더쉽의 부재로 극도의 혼란을 겪었고 극심한 재정난으로 독립운동은 커녕 생계조차 허덕일 정도로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중일전쟁이 시작되자 중국 전토를 돌며 유랑을 해야 했죠. 그나마 김구에 우호적인 감정을 가지고 있던 장개석의 개인적인 도움으로 임정은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우선 조직을 정비하고 정부 조직을 확대하여 임정의 인원을 대폭 늘리는 한편 40년 10월 8일 "대한민국임시약헌"을 개정하여 집단지도체제에서 단일지도체제로 바꾸어 강력한 지도력을 갖추었습니다. 이전까지 주석이라는 직책은 국무위원들이 돌아가면서 맡아 회의를 주관하는 정도의 역할에 불과했으나 임시의정원을 통해 선출된 주석은 국가원수이자 임시정부의 대표로서 모든 행정, 통수권을 장악합니다. 또한 김구가 주석으로 추대되었고 그는 여당인 한국독립당의 중앙집행위원장, 행정부 주석, 광복군의 통수권자로서 당, 정, 군을 장악한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김구는 그동안 중국내에 난립한채 주도권 문제를 놓고 서로 대립하고 있던 좌우파의 독립단체들을 임정 산하로 결집시켜 40년 5월 8일 우파계열의 한국국민당, 한국독립당, 조선혁명당을 한국독립당으로 통합시켰고 미국에서 활동중인 하와이애국단과 하외이단합회와도 화해하여 한국독립당 하와이지부로 복속시킵니다. 임정과 결별하여 독자적인 활동을 하고 있던 이승만, 서재필 등 해외인사들도 입당하였고 이어서 김원봉의 조선민족혁명당과 김성숙의 조선민족해방동맹 등 좌파계열 단체들도 차례로 임정에 합류하죠. 특히 41년부터 중국정부가 김구의 임시정부를 한국의 유일한 합법적인 망명정부로서 승인하는 것을 논의하고 지원창구를 임정으로 단일화하면서 임정의 위상은 크게 올라가죠.
국내외의 모든 독립단체를 통합시키지는 못했지만, 중국을 이리저리 떠돌던 몇몇 독립운동가들만의 작은 유랑단체에서 좌우파를 망라하는 당시로서는 가장 큰 세력이 된 임정은 열강들을 상대로 국제승인을 요청함과 함께 항일투쟁을 본격적으로 추진해 나갑니다.
임정은 1919년 수립 당시부터 무장투쟁을 강조하고 국내와 러시아, 중국에 거주하는 한인들을 대상으로 10만명이상의 의용군을 모집하여 자체 군사력을 갖춘 다음 독립전쟁을 수행한다는 방침을 정하고 있었습니다. 이를 위해 만주에서 활동중인 다양한 무장단체들과 연계하는 한편 1919년 5월 3일 길림성 유화현에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하여 독립군 간부들을 양성합니다. 또한 11월에는 서간도의 한족회와 합의하여 서로군정서로 개편하여 임정산하에 편입시킵니다. 이후 일본군 장교였던 지청천, 오광선, 운남군관학교 출신의 이범석 등이 서로군정서에 귀순하여 신흥무관학교 교관으로 활동하면서 신흥무관학교는 보다 조직적이고 체계화되어 1920년 5월부터 8월까지만해도 3,500명의 간부를 배출하여 각종 무장투쟁과 파괴, 암살 등의 활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하였으며 봉오동, 청산리전투의 승리는 20년대 독립투쟁의 가장 큰 전과였죠.
신흥무관학교의 전경. 1911년 5월 14일 이동녕, 이시영, 이상룡 등의 주도로 만주에 거주하는 조선인들을 모집하여 독립군을 양성하기 위해 길림성 유화현 삼원보에 농작물 창고를 개조하여 신흥강습소를 설립하였고 이듬해 통화현으로 이전하여 신흥중학교로 개칭합니다. 지원자가 많아지고 임정과 연계하면서 1919년 류하현으로 다시 이전하여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하여 많은 간부들을 배출합니다. 그러나 일본의 탄압과 극심한 재정난, 흉년까지 겹쳐 20년 8월 폐교하였고 지청천은 생도 300명을 이끌고 홍범도 부대에 가담합니다. 해방후 초대 부통령이 된 이시영은 서울 종로에 신흥전문학교를 설립하였고 한국전쟁이후 현재의 경희대학교로 개칭합니다.
또한 임시정부가 있는 상해 프랑스 조계내에서도 1920년 3월 20일 임시육군무관학교를 설립합니다. 6개월 속성과정으로 운영되어 1기에는 19명, 2기 22명이 졸업하였고 비록 4기까지 배출한후 재정문제로 폐교되었으나 이후에도 중국 등지의 사관학교, 비행학교에 입교시켜 간부들을 지속적으로 양성하였습니다.
그러나 20년대 중반부터 독립단체들간의 극심한 분열과 갈등에다 청산리 전투 이후 만주의 독립군들 역시 임정과의 관계를 끊고 독자적으로 활동합니다. 망명지라는 한계와 심각한 재정난으로 임정은 자체적인 무력을 갖추는 것은 고사하고 존립마저 위협받는 지경에 이르고 김구는 자신의 일기를 통해 동지들과 그 가족들이 겪는 극심한 생계난과 비참함을 통탄합니다.
제1차 상해사변이 끝난 직후인 1932년 4월 29일. 홍구 공원에서 일어난 의거는 한순간에 임정과 김구에 대한 평가를 바꾸었습니다. 김구의 한인애국단 소속의 윤봉길 의사가 일본군의 승전기념식장에 폭탄을 투척하여 상해파견군 시라카와 요시노리 대장과 일본거류민단장 가와바타 사다쓰구가 죽고 중국 공사 시게미쓰 마모루(일본 패망당시 외상으로 전함 미주리의 항복조인식에서 일본 대표로 서명합니다.)와 함대 사령관 노무라 중장 등은 불구가 되었습니다.
장개석은 "5억 중국인이 하지 못한 것을 한명의 조선 청년이 해냈다"라며 극찬합니다. 김구는 임시정부의 대표로서 장개석을 직접 대면할 수 있었고 이후 지속적으로 국민정부를 상대로 각종 외교교섭과 원조를 획득할 수 있었습니다. 장개석은 개인적으로 김구를 매우 우호적으로 대하여 임시정부가 일본의 공격을 피해 중경으로 피난할때도 차량과 여비를 지원하였고 김구가 이른바 "5.7사건"으로 암살미수를 당하여 입원했을때에도 직접 전문을 보내고 치료비 3천원을 주었습니다.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임정은 본격적으로 광복군 창설을 추진합니다. 37년 10월 군무부 산하에 군사위원회를 설치하고 지청천, 안공근(안중근의사의 동생) 등 6명을 군사위원으로 임명하였고 임정 예산의 절반이상을 군사비로 편성합니다.
그런데 38년 10월 10일 당시 국민정부의 임시수도였던 한구에서 김원봉이 국민정부의 지원을 받아 "조선의용대"를 조직합니다. 이것은 만주를 제외하고 중국 관내에서 재중 한인들에 의해 결성된 최초의 무장조직이었습니다. 창설당시 초기 멤버는 김원봉 이하 2개 區隊 약 100명정도였으며 39년에는 155명으로 증가하고(그중에는 전향한 일본인도 있었음) 40년에는 314명에 달합니다. 사령부는 한구가 함락되자 계림에서 다시 중경으로 이전하였고 박효삼의 제1구대는 호남성과 강서성 일대에서, 이익봉의 제2구대는 안휘성, 하남성에서 활동하였습니다. 이들중 일부 중공 당적을 가진 사람도 있었으나 창설 초기에는 중공과는 거의 무관했으며 국민정부군의 지휘를 받아 각 전구에 파견되어 일본어 교육, 정보수집, 선전활동, 포로심문 등 각종 심리전과 특수작전을 수행하였습니다.
조선의용대의 창설 기념식. 일본인 반전운동가 아오야마 가즈오가 편성계획을 수립하였고 국민정부측의 진성과 중공측의 주은래 양쪽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조선인외에도 귀순한 일본인도 있어서 "국제여단" 또는 "국제의용군"이라고도 불리었습니다. ※ 사진출처 : https://search.i815.or.kr
좌파계열에서 먼저 무장조직을 결성했다는 것은 임정측에게는 큰 충격을 주었고 임정 역시 38년말 광주에서 유주로 이동하면서 "한국광복진선 청년공작대"를 조직합니다. 인원수는 약 70명정도였습니다. 이들은 장병들의 피복 보급을 위한 모금활동을 벌이고 서안에 공작대 본부를 수립한후 산서성 태항산일대에서 활동하였는데 조선의용대와 마찬가지로 정보수집과 병참, 포로심문, 귀순유도, 심리전 등을 수행하였습니다. 이들은 광복군이 창설되면서 41년 3월 1일 광복군 제5지대로 편성됩니다.
광복군 창설의 난간은 첫째로 병력의 모집, 둘째로 재정문제, 셋째로 중국정부의 승인이었습니다. 임정이 중국에 있기 때문에 중국 영토내에서 군대를 만든다는 것은 중국정부의 승인없이는 불가능했죠.
김구, 이시영, 지청천, 박찬익 등 임정 지도자들은 중국 국민당 간부인 서은증을 통해 광복군 창설을 원조해 줄 것을 요청하여 40년 5월 중국정부에 "한국광복군편성계획대강"을 제출합니다. 주요 내용은 광복군은 중국내 조선인과 중국인을 모집해 1개 사단으로 편성할 것, 중국군 최고사령관의 지휘를 받되 중국군과 대등한 위치에서 연합작전을 전개하며 중국정부는 재정적 원조를 해줄 것을 요청하는 것이었습니다. 국민당 조직부장인 주가화가 임정을 적극적으로 지지하자 장개석은 "중국의 항일전쟁에 참가한다"는 전제하에 승인합니다.
그러나 이 과정이 결코 순탄치는 않았는데, 중국의 원조를 놓고 김원봉과 주도권 다툼이 일어나 국민정부와 군부내에서는 황포군관학교 출신인 김원봉을 지원해야 한다는 주장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또한 광복군은 중국군과 대등한 위치가 될 수 없으며 조선의용대와 마찬가지로 중국군에게 복속되어 지휘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물론 임정은 이런 요구를 거부하였고 중국과의 교섭이 난항을 겪자 이범석은 중국의 승인없이 일단 자력으로 광복군을 창설하자고 주장하였고 중국군에 복무중인 조선인들로 총사령부를 구성한후 1년안에 3개 사단을 편성하기로 정합니다.
1940년 9월 17일 중경 가릉빈관 홀에서 임정 국무위원, 중경위수사령관 유치 이급상장, 기타 외국인 등 200여명이 모인 가운데 한국 광복군이 창설됩니다. 총사령관은 지청천, 참모장에는 이범석이 임명되었습니다. 그러나 장개석의 동의에도 불구하고 실제 추진에 있어서는 중국의 승인을 얻지 못한 상태에서 임정이 독자적으로 창설을 강행함으로서 창설멤버는 겨우 30여명에 불과했고 비용 역시 미국의 교포들이 보내준 4만원의 돈으로 행사를 치룰 수 있었습니다.
광복군의 지위와 원조를 놓고 한중 양측은 합의하지 못했고 따라서 중국의 공식적인 협조없이 임정 단독으로 창설식을 조촐하게 거행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개인 자격으로 군정부장 하응흠, 중공 중경대표부장 주은래, 백숭희, 풍옥상 등 중국내 고위 관료들과 정치가, 군인들, 언론인들이 대거 참석하여 자리를 빛내주었으며 이는 중국이 광복군의 존재를 사실상 승인한 것이나 다름없었죠. 식장 주변에는 "초나라가 비록 세집 남았어도 진나라를 멸망시킬 수 있다", "단군의 자손은 끝내 고국에 돌아갈 것이다."와 같은 표어가 붙어 임정과 광복군의 결의를 참석자들에게 강하게 인식시켜 주었습니다. 또한 장개석의 와이프인 송미령도 10만원의 축하 격려금을 보내주었습니다.
※ 사진출처 : http://muwee.tistory.com/79
4차 개헌을 통해 전시체제로서 전시광복쟁취 임시정부로 내각을 개편하고 주석인 김구에게 모든 권한을 부여합니다. 또한 통수부를 구성하여 참모총장에는 유동열, 군무부장에 조성환을 임명하였고 이청천, 이범석을 비롯해 30명으로 우선 광복군 참모진과 총사령부를 구성합니다. 편제와 직제는 중국군을 모방하였으며 이를 근간으로 야전부대를 확장해 나갈 계획이었습니다. 목표는 외국의 원조를 유치하여 간부의 양성과 자원자를 모집하여 1년안에 3개 사단을 편성할 것, 연합국들에게 정당한 교전단체로 승인받아 공동전선을 전개할 것, 국내에서 항일 총궐기를 일으킬 것 등이었습니다. 그러나 중경과 사천성에는 조선인이 적어 11월 27일 전선에서 가까운 서안에 광복군 임시 총사령부를 설치합니다. 이곳은 중국군 제2전구 산하 호종남이 지휘하는 제34집단군 사령부가 있었습니다.
광복군은 우선 3개 지대를 편성하였고 이어서 기존에 활동중이던 청년공작대 100여명이 광복군에 흡수되어 제5지대로 편성됩니다.
제1지대 : 지대장 이준식, 근거지 산서성 대동, 활동지역 산서성 및 하남성
제2지대 : 지대장 고우기, 근거지 수원성 포두, 활동지역 찰합이성 및 하북성
제3지대 : 지대장 김학규, 근거지 안휘성 부양, 활동지역 안휘성 및 강소성, 산동성
제5지대 : 지대장 나월환, 근거지 섬서성 서안, 활동지역 섬서성 및 하남성
또한 42년 7월에는 김원봉의 조선의용대가 광복군 제1지대에 편입되었고 김원봉은 광복군 부사령관에 임명됩니다.
조선의용대는 이념문제와 향후 투쟁 노선을 놓고 분열되는 양상을 보이면서 41년 초 대원의 대부분이 화북으로 올라가 팔로군 산하로 들어갔고 42년 7월 조선의용군 화북지대로 개편되었습니다. 조선의용대가 분열되고 주력부대가 중공측으로 넘어가자 42년 5월 중국 군사위원회는 김원봉을 비롯해 중경에 잔류한 100여명에 대해서 광복군과 통합할 것을 명령하였습니다.
사실 조선의용대는 원래부터 광복군과 경쟁의식이 있었기 때문에 중국의 명령에 마지못해 따랐을뿐 통합 과정에서 많은 마찰을 빚었고 정식으로 통합이 완료된 것은 두달이 지난 후인 42년 7월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이들은 중국내 군관학교에서 정규 군사교육을 이수했기 때문에 질적으로나 훈련수준에서 다른 무장단체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우수하여 광복군의 전력은 크게 향상됩니다.
김구와 함께 중국내 독립지도자의 양대축이었던 김원봉(1898~?) 중국으로 건너와 의열단을 조직하여 동양척식주식회사 폭탄투척사건을 비롯해 암살, 폭파 등 항일투쟁을 전개했고 황포군관학교를 졸업한후 조선민족혁명당과 조선의용대를 결성합니다. 사회주의자였으나 이념보다 민족을 우선시해야 한다고 주장하여 중공에게 "기회주의자"라는 비판을 받자 자신을 따르는 소수 대원들을 데리고 임정에 가담하였고 군무부장을 지냅니다. 해방후 월북하였고 김일성 정권에서 노동상,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등을 역임했으나 58년 11월 김일성이 연안파를 숙청하면서 함께 제거됩니다.
그 외에도 장준하처럼 학병으로 중국전선에 끌려갔다가 탈출하여 광복군에 입대하는 이들도 많이 있었습니다. 대표적인 예가 "비호대"였습니다. 박주대, 이운선 등 20대 청년들이 평안도, 함경도에서 강제 징집되어 일본군에 훈련을 받던 중 탈출하여 광복군에 입대하였고 중국군의 지원을 받아 45년 1월 "비호대"를 조직하였습니다. 인원수는 약 100여명정도였습니다. 이들은 설악의 제9전구에 배속되어 전투를 벌였고 일본어에 능한 20여명으로 특공대를 조직하여 일본군의 후방에 침투한후 대대본부와 중대본부에 수류탄을 던져 폭파시키고 대대장 1명을 비롯한 다수의 일본군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립니다.
또한 임정은 영, 미와도 지속적으로 접촉하고 영국의 요청을 받아 "주인면공작대"를 인도에 파견합니다. 비록 소규모였지만 인도, 버마전선에서 위험을 무릅쓰고 최일선에서 적극적으로 임무를 수행하여 광복군의 위상을 높였습니다.
그러나 광복군의 지위를 놓고 한중간의 이견은 좁혀지지 않았고 중국정부의 승인이 늦어지면서 광복군의 활동은 많은 제약을 받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또한 임정이 영, 미와의 직접 교섭을 추진하고 독자노선을 고수하자 중국 군사위원회에서는 광복군중에 "이적분자가 있다"며 그들의 활동을 제한할 것을 지시하기도 합니다. 따라서 창설후 1년이 지난 41년 12월에도 광복군의 인원은 겨우 300여명에 불과했으며 재정난으로 대원들은 식량, 무기, 피복도 제대로 지급받지 못한채 심한 고통을 겪어야 했습니다. 41년 김구가 주가화를 통해 장개석에게 어려움을 호소하자 장개석은 즉석에서 10만원을 지급합니다.
장개석 개인의 우호적인 자세에도 불구하고 중국은 광복군에 대해 결코 적극적이었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매우 보수적인 입장에서 이들의 활동을 최대한 억제하고 통제하려고 했습니다. 41년 11월 15일 하응흠은 광복군에 대한 재정지원의 조건으로 이른바 "한국광복군 9개 준승"을 임정에 제시합니다. 주요 내용은 중국은 광복군의 훈련과 무기, 장비, 급여 일체를 제공하는 대신 광복군은 중국의 항전동안 중국 군사위원회의 지휘를 받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임정안팎에서는 "광복군은 임정의 군대가 아니라 중국의 군대가 되는 것"이라며 격분하였으나 김구는 현실론을 내세워 일단 받아들인 다음 지속적으로 중국을 설득하여 이를 개정할 것을 제안하여 11월 19일 결국 통과됩니다. 이로 인해 광복군 총사령부내에서 참모장, 참모처장 등 주요 간부는 중국군이 차지하였습니다.
사실 아무런 정치적, 경제적 기반이 없이 중국에서 활동하는 임정으로서는 중국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해외의 교포들이 기부하는 금액은 너무 미미하였고 정부의 경상비부터 광복군의 운영, 직원들의 생계비까지 전적으로 중국의 원조에 의존하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40년 이후 중국의 지원이 증가하면서 임정은 중국과 종속관계가 되지 않을 수 없었죠.
광복군의 지위는 단지 중국군에 배속된 외국인 자원부대에 불과하였습니다. 임정의 계획은 창설 1년안에 3개 사단을 편성하고 열강들의 원조를 획득하여 자체적인 공군력과 최대 30만명까지 확대할 생각이었으나 실제로는 45년 4월 광복군의 규모는 541명(중국인 장교 65명을 제외하면 449명)에 불과했고 종전시점에서도 682명이었습니다. 광복군이 지속적으로 늘어나기는 했지만 임정이 꿈꾸었던 대규모 야전군을 편성하여 실질적인 무장투쟁을 추진하는데는 한계가 있었죠.
김구는 광복군의 목줄이나 다름없는 "9개 준승"의 폐기를 위해 중국과 지속적으로 교섭하여 44년 7월 10일 하응흠은 장개석에게 9개 준승의 폐기와 광복군을 임정에게 돌려줄 것을 건의하였고 장개석은 받아들입니다. 이후에도 지속적인 협의를 통해 45년 5월 1일에야 최종적으로 폐기되고 대신 "원조한국광복군판법"이 체결됩니다. 주요 내용은 광복군은 한국의 광복을 위해 투쟁하며 광복군에 소요되는 금액은 중국이 차관의 형식으로 임정에 제공하고 포로중에 조선인이 있다면 광복군에 인도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비로소 임정은 자주적으로 광복군의 지휘권을 행사하여 활동할 수 있었습니다.
45년 당시 광복군의 배치현황. 창설당시 4개지대(1,2,3,5)가 있었으나 조선의용대의 광복군 편입과 제5지대장 암살사건으로 광복군은 전면개편되어 조선의용대는 제1지대로, 1,2,5지대는 제2지대로, 안휘성에서 활동하고 있던 제6분처를 제3지대로 편성하였습니다. 이외에 인도, 버마에서도 주인면공작대가 활동하고 있었습니다.
※ 사진출처 : 한미군사관계사:1871~2002, 국방부군사편찬연구소, p.140
왜 중국은 광복군을 견제하려고 했는가. 중국의 입장에서 본다면 자국 영토내에서 활동중인 외국군대를 통제하려는 것은 일정부분 불가피한 것이기도 했습니다. 또한 중국 내부적으로 산적한 문제가 많아 광복군에 대한 지원은 부차적일 수 밖에 없었다는 점도 있었습니다.
특히 중국의 정치적 특수성 역시 간과할 수 없습니다. 중국군의 지휘를 받고 있던 조선의용대 주력부대가 북상하여 중공으로 넘어간 사건은 장개석에게는 큰 충격이었고 이때문에 장개석은 41년 10월 하응흠에게 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광복군과 조선의용대를 통합하고 이에 대한 통제를 강화할 것을 지시합니다. 이것은 이시기 임정이 중국으로부터 그다지 신뢰를 받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이죠. 이런 점에서 단순히 원조를 무기로 광복군을 예속시켜 괴뢰화시키는 것이 목적이었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또 한가지 중국의 원조는 단순히 약소민족에 대한 인도주의적 지원만이 아니라 국제 정세와 전략적 이해관계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중국은 카이로회담을 비롯해 열강들에게 임정의 승인을 여러차례 거론하고 임정 역시 국제 승인을 받기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합니다. 그럼에도 미, 영, 소는 물론이고 중국 역시 끝까지 임정을 승인하지 않은채 결국 흐지부지되고 말았습니다. 이는 열강들간의 복잡한 이해관계때문이었습니다.
당시 일본의 군사력을 지나치게 과대평가하고 있던 미국은 소련의 대일참전이 절실하였고 임정을 일방적으로 승인할 경우 소련을 자극하여 외교적 마찰을 빚을 것을 우려했습니다. 루즈벨트는 장개석에게 첫째로 한국의 독립과 임정의 승인은 별개의 문제이며, 둘째로 한국의 독립단체들이 분열되어 있어 임정의 대표성이 의심스러우며, 셋째로 이들은 한반도와의 아무런 연계도 없고, 넷째로 중국이 임정을 승인할 경우 소련 또한 친소단체를 승인하여 연합국간에 불필요한 마찰만 일으킬 수 있다고 말합니다.
독소전쟁 발발직후인 41년 12월 소련은 런던에 있는 폴란드 망명정부를 무시하고 자국내 폴란드공산주의자들을 모아 소위 "폴란드 애국자 연맹"을 발족시켜 정통정부라고 주장하여 영, 미와 갈등을 빚었으나 결국 소련의 손을 들어줌으로서 폴란드의 주권은 철저하게 짓밟혔습니다. 미국은 한국이 제2의 폴란드문제가 되는 것을 원치 않았고 중국에게 임정 승인을 재고할 것을 요구한 것이죠. 또한 영국은 영국대로 한국의 독립과 임정을 승인할 경우 인도를 비롯한 식민지들의 독립 열기에 영향을 줄 것을 우려해 승인을 반대하였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중국 단독으로 임정 승인을 강행할 경우 미, 영, 소로부터 중국이 임정을 내세워 한반도를 지배하려는 것이 아닌가라는 경계를 우려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실제로 41년 12월 미국무부에서 주중 미국대사 가우스에게 임정의 실상에 대해 조사하라고 지시하자 가우스는 "임정은 분열된데다 조직도 미비하고 본토와의 접촉도 없으며 중국의 원조는 전통적인 패권주의 노력"이라고 보고하였습니다. 결국 중국은 열강들로부터 불필요한 오해를 살 수 있다는 이유로 임정의 승인을 보류한다고 결정하여 임정은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열강들이 한국에 무관심하고 단지 자신들의 이해관계에서만 접근할 때, 중국은 임정의 유일한 원조국이었고 많은 도움을 준 것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더욱이 일본의 꼭두각시에 불과했던 찬드라 보스의 자유인도정부와는 달리 중국이 단지 자신들의 필요에 의해 일방적으로 지원한 것이 아니라 임정의 지속적인 노력과 호소에 의한 것이었죠.
광복군 역시 비록 자주성에서 한계는 있었지만 외세가 아니라 임정에 의해 만들어졌으며 그 예속관계는 어디까지나 한시적인 것이었습니다. 이런 점에서 일본에 의해 만들어진 인도국민군이나 만주국군, 나치독일의 괴뢰군대였던 크로아티아 우스타샤와는 명백히 다른 것이죠.
그러나 중국이 보다 전향적으로 광복군을 지원하고 임정을 승인했다면 그때까지 관망하고 있던 독립단체들도 임정에 가담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고 이후 한반도의 역사 또한 바뀌었을 것이며 친일파 청산도 가능했을 것이라는 점에서 아쉽지 않을 수 없습니다. 반면, 중공과 소련은 자신들에게 종속된 조선인부대들을 적극적으로 육성하였고 해방후 이들은 북한으로 입국하여 북한정권과 군부의 핵심이 됩니다. 또한 국공내전기간 북한은 중공의 후방기지역할을 하였죠. 국공내전이 끝나자 중공은 조선인으로 구성된 3개사단을 입북시켰고 이들은 남침의 선봉이 되어 광복군과는 대조적인 길을 걷게 됩니다.
중국에서의 투쟁과 함께 임정이 야심적으로 추진한 것은 바로 자력에 의한 국내진공작전이었습니다. 이것은 두가지가 있었는데 하나는 화북과 만주에 있는 조선인 무장세력과의 연계, 또 하나는 미국 OSS와의 연계였습니다.
김원봉과 결별한채 김두봉을 따라 북상한 조선의용대는 중공에 편입되어 화북에서 활동하고 있었습니다. 연안에 도착한 김두봉이 조선독립동맹을 조직하자 조선의용대는 조선의용군 화북지대로 개편되어 조선독립동맹의 당군(黨軍)이 됩니다. 또한 팔로군 포병사령관인 김무정이 조선의용군 사령관이 되어 화북과 만주의 한인들을 상대로 세력을 확대해 나갑니다. 그 규모는 약 500여명에 달했고 같은 시기 광복군보다도 많은 숫자였죠.
연안에서의 조선의용군 대원들. ※ 사진출처 : http://www.kimhakcheol.com/print.asp?articleid=327
44년 3월 김구는 김두봉에게 친서를 보내어 "지역과 파벌을 불문하고 양자가 연합하여 광복군과 조선의용군이 함께 압록강을 건너자"라며 자신이 직접 연안으로 갈 것을 제안합니다. 또한 45년 4월 국무위원인 장건상을 연안으로 파견하여 좌우통일전선을 제안하자 김두봉과 간부들 역시 이에 찬성하였고 김두봉은 자신이 중경으로 가겠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 사이에 일본은 항복하였고 결국 양자의 합작은 실현되지 못했습니다.
임정이 연계를 시도한 또 다른 세력은 김일성의 항일유격대였습니다. 30년대 만주에서 활동하다 40년 10월 소련으로 이동하였고 42년 7월 "제88특별보병여단"으로 편성되었습니다. 그러나 임정은 그동안 연해주나 소련지역의 조선인들이 처한 상황을 전혀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소련으로 망명하여 활동중이던 이충모가 44년 7월 중경의 임정을 찾아오면서 소련 교포들의 정보를 얻게 되었고 이들과의 연계를 생각하게 됩니다. 김구는 44년 9월 5일 장개석과의 면담에서 "소련 중앙아시아 일대의 백만 조선인과 연락할 수 있도록 협조해달라"고 요청하였고 장개석은 "구체적인 사실을 제출하면 노력해 보겠다"라고 대답합니다.
45년 3월 김구는 김일성부대와의 연계를 위해 이충모를 밀사로 연해주에 파견합니다. 그러나 그가 수원성에 도착하자 일본이 항복하여 김일성을 만나보지도 못한채 무산되고 말았습니다. 한편, 김일성 역시 중경의 임정과 연안의 조선의용군과의 연계를 시도했으나 마찬가지로 성사되지는 못했습니다.
한편, 곤명에 주둔하고 있던 미국 전략첩보국(Office of Strategic Services, OSS) 중국지부는 중국내 조선인 독립단체들과 연계하여 대일전에 활용하는 방안을 구상하고 있었습니다. 한반도의 전략적 가치를 무시하고 있었던 루즈벨트 행정부와 달리 OSS는 한반도가 일본과 중국을 연결하는 수송로이자 일본으로 침투하기 위한 기지로서의 역할을 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들이 구상한 작전은 세가지였는데, 넵코작전, 북중국첩보작전, 그리고 독수리작전이었습니다.
"넵코작전"은 OSS 부국장인 굿펠로우가 제안한 것으로, 자체적으로 선발한 조선인을 훈련시켜 항공기나 잠수함으로 한반도에 침투시켜 정보를 수집하고 첩보망과 저항세력을 조직하여 향후 연합군의 한반도 상륙을 대비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를 위해 미육군에 복무중인 조선인과 재미교포, 일본군에서 탈출한 학병들중에서 요원을 선발하여 넵코작전을 위한 훈련을 실시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독수리작전을 추진하고 있던 OSS 중국지부가 강력하게 반대하였고 이들이 한반도로 침투하기 위해서는 중국 전구나 태평양 전구 사령관의 승인이 필요하였는데 끝까지 승인을 받지 못하여 구상단계에서 끝나고 말았습니다.
"북중국첩보작전"은 중공과 손을 잡고 연안에 대규모 첩보조직을 구축하여 일본군의 정보를 수집하고 또한 조선의용군을 만주와 한반도로 침투시키겠다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조선의용군 사령관인 김무정 역시 미국의 원조를 얻으려고 시도하고 있었습니다. 이 계획은 OSS 워싱턴 본부의 도노반 국장의 주도로 구상되었으나 헐리 대사와 미 국무성의 반대로 역시 실현되지는 못했습니다.
구상단계에서 끝난 두가지 계획과 달리 "독수리작전"은 임정의 적극적인 협력으로 구체화되어 실행직전까지 가게 됩니다.
44년 10월 광복군 제2지대장이었던 이범석이 OSS 비밀첩보과의 사전트대위에게 광복군과 OSS의 합작을 제안한 것이 양측의 첫 접촉이었습니다. 사전트대위는 이범석의 초청으로 직접 제2지대를 방문하였고 이들의 전의와 단결심이 매우 훌륭하다며 OSS의 훈련에 적합하다고 판단합니다. 45년 2월 24일 비밀첩보과에서 "독수리작전"을 입안하여 3월 1일 OSS 국장 도노반의 승인을 받습니다.
독수리작전의 내용은 우선 60명의 요원을 선발하여 3개월동안 첩보, 통신 훈련을 실시한후 최종적으로 45명을 서울, 부산, 평양, 신의주, 청진에 침투시켜 일본군의 군사시설과 산업시설, 교통망 등에 대한 정보 수집과 조선인들의 대중봉기를 유도한다는 것이었습니다. 향후에는 일본으로의 침투와 특수게릴라 작전까지 확대할 생각이었습니다. 이들의 훈련은 OSS 중국지부 비밀첩보과에서 주관하고 사전트대위가 책임자로 임명됩니다. 이들의 훈련을 위해 장교 1명과 사병 9명이 파견되었고(대부분 한국계 미국인) 또한 이들의 훈련비용으로 매월 2만5천달러가 책정되었습니다.
이범석 등 제2지대 대원들과 OSS 요원들 ※ 사진출처 : 위키백과
4월부터 본격적으로 임정과 OSS간의 협의를 시작하여 4월 17일에는 김구가 중국전구 미군사령부를 방문하여 웨드마이어중장을 면담합니다. 김구는 웨드마이어에게 "미군당국에 요청하는 군사원조 안건에 대한 개요"를 제출하여 미국과의 합작과 원조를 요청하였습니다. 5월 1일에도 재차 방문하여 웨드마이어는 "미국은 앞으로 중국을 거치지 않고 임정과 직접 교섭하겠다"라고 대답합니다. 이는 임정의 자주성을 인정한다는 의미였죠. 또한 김구는 그 자리에서 제주도에 거점을 마련할 수 있도록 미군이 도와줄 것을 요청하였습니다.
한편, 3월 15일에는 제2지대장 이범석, 제3지대장 김학규가 주중국 제14공군 사령관 센놀트소장을 만나 한미군사합작을 체결하여 대일 공동작전과 미군의 원조를 약속받습니다. 이로서 독수리작전을 위한 훈련을 받을 수 있게 되었죠.
우선 제2지대에서 50명이 선발되어 서안훈련소에서 5월부터 훈련을 시작하여 8월 4일 완료됩니다. 훈련은 매우 엄격했고 12명이 탈락하여 38명만이 수료할 수 있었습니다. 제3지대에서는 20명이 선발되었고 강소성 입황에서 7월부터 훈련을 시작하였습니다.
OSS에 의해 훈련받은 제3지대 대원(왼쪽부터 노능서, 김준엽 전 고려대총장, 장준하)
제1기의 훈련이 완료되자 8월 7일 임정과 OSS 간에 한미연합군사작전을 최총 합의하였고 8월 20일까지 국내에 진입시킬 계획이었습니다. 그러나 8월 10일 일본이 포츠담 선언을 무조건 수락한다는 뉴스가 나왔고 15일 무조건 항복을 선언함으로서 국내진공작전은 결국 최종단계에서 실현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OSS는 이들을 국내에 침투시킨다는 원론적인 방침만 정했을뿐 실제로 어떤 수단으로 어떻게 침투시킨다는 구체적인 방법에 대해서는 검토중이었습니다. 또한 침투 장비의 수송도 문제였습니다. 잠수함은 구할 수 없었고 대원들은 낙하훈련을 받지 못한 상태였습니다. 게다가 일본은 정보를 사전에 입수하고 한반도 전역에 대해 특별 경계를 지시합니다. 따라서 일본의 항복이 좀 더 늦어졌다고 해도 김구가 원하는대로 8월 20일까지 이들을 국내로 침투시키기는 어려웠을 것입니다.
또한 미 합참은 일본 본토 상륙을 위한 보조전선으로서 한반도에 대한 대규모 상륙 작전을 2차례 검토했으나 모두 기각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한반도에는 대규모 상륙작전에 적합한 양호한 지형의 해안이 없으며 한반도의 70%가 산악지대로서 일본군이 산악지대에서 지구전을 수행한다면 미군으로서는 많은 병력이 소요됨은 물론이고 장기간의 소모전을 강요당하여 불필요한 희생만 치룰 우려가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나중에 작전상 필요하다면 재검토할 수 있다는 여지는 두고 있었으나, 우리의 열망과는 달리 사실상 한반도에 대한 상륙작전은 물건너 간 셈이었죠.
임정은 어려운 여건속에서도 자주적인 독립투쟁을 위해 많은 노력을 하고 다른 무장세력들과의 공동전선을 추진하였습니다. 이는 분명 높이 평가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재정의 어려움과 열악한 환경, 시기적으로 너무 늦어 결국 국내진공작전을 실현시키지 못한 것은 매우 아쉽다 하지 않을 수 없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