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몬한 전투 이후 체결된 정전협정으로 일-소간의 분쟁은 일단락되었습니다. 41년 4월 13일에는 모스크바에서 일본 외상 마스오카 요스케와 소련 외상 몰로토프간에 "일소중립조약"을 체결합니다. 유효기간 5년으로 쌍방은 서로의 영토를 침범하지 않고 제3국의 침략을 받을 경우 중립을 지킨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러나 일소 중립조약이 체결되자말자 41년 6월 22일 독일이 소련을 침공합니다. 이것은 같은 추축국으로서 일본과는 아무런 사전 통보나 협의 한마디 없이 일방적으로 시작된 것이었고 7월 1일에야 일본에게 소련 극동지역을 침공해 줄 것을 제안합니다. 일본 군부내 일부 강경파들은 독일에 호응해 연해주와 시베리아를 침공할 것을 주장하였으나 관동군의 준비 부족과 병참 문제, 소련 극동군이 여전히 강력하다는 것, 무엇보다 이 지역에는 석유가 없다는 이유로 자원이 풍부한 동남아를 침략하기로 결정합니다. 덕분에 소련은 모든 역량을 독일에게 집중할 수 있었고 일본 역시 북방의 위협을 받지 않고 마음껏 남방을 침략할 수 있었습니다. 2차대전내내 일소 양국은 경제적으로 협력하며 중립관계를 유지합니다.
한편 미국은 대일전쟁에 소련의 참전을 지속적으로 요구하고 있었습니다. 일본의 역량을 과대평가하고 있었던 루즈벨트와 참모들은 일본 본토 상륙시 적어도 백만명이상의 사상자가 날 것이라고 보았고 미군의 희생을 줄이기 위해서는 소련의 참전이 절실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스탈린은 우선 독일과 전쟁에 모든 역량을 집중해야 하며 독일이 항복한 연후에 참전하겠다고 말합니다. 독일의 패색이 명확해지는 45년 2월 얄타회담에서 스탈린은 대일전 독일 항복후 2, 3개월안에 일본을 공격하되, 그 댓가로 극동에서 막대한 권익을 요구하자 루즈벨트는 신중한 검토 없이 무조건적으로 수락하였습니다. 따라서 독일 항복 직후 6월부터 소련은 본격적으로 유럽에 집중된 병력을 극동으로 대거 이동시키기 시작하죠.
그러나 일본은 이런 상황을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44년 말 장개석 정권에 대해 중국에서 완전 철병을 전제로 강화를 제안했으나 거부당했고 소련 역시 45년 4월 6일 일소중립조약의 파기를 일방적으로 통보하였습니다. 그럼에도 일본은 소련의 의중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채 연합국과의 중재를 요청합니다. 6월 3일 히로타 고키 전 수상은 주일 소련 대사인 야콥 말리크에게 소련의 중립 유지와 화평중재를 요청하고 그 댓가로 러일전쟁당시 빼앗은 사할린 남부에 대한 반환, 여순과 대련에 대한 조차권 양보, 북만주의 철도권 양도 등을 제시하였습니다. 또한 일본은 조선을 그대로 확보하며 만주국의 독립은 유지한다는 내용이었죠.
그러나 이미 내부적으로 대일 참전을 결정한 상태였던 소련은 의도적으로 확답을 회피하였습니다. 게다가 7월 26일 포츠담 회담에서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요구하자 더욱 초조해진 일본은 전 수상인 고노에 후미마모를 천황특사로 모스크바에 파견했겠다고 소련에 요청하였으나 소련은 이를 거부합니다.
이미 소련의 대일참전이 점점 명확해 지고 있음에도 외무성은 주소련대사인 사토 나오타케에게 교섭을 계속할 것을 지시합니다. 이에 대해 사토는 도고 시게노리 외상에게 직접 전문을 보내어 "우리 쪽의 확고한 결심도 없이 오로지 빙빙 돌려 설득하는 방식으로 소련을 움직이려는 것은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것"이라며 정부의 안이하고 우유부단한 자세를 격렬하게 비판하였습니다.
그러나 일본 정부는 여전히 안이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도고 시게노리는 소련의 선전포고는 시간문제라 더이상 교섭 시도가 무의미하다고 주장했지만 군부는 미-소간의 대립은 필연적이며 완충국으로 일본이 필요하기 때문에 타협의 여지가 있다고 말합니다. 이런 막연한 기대감은 바로 히틀러가 몰락을 눈앞에 두고 품었던 환상이었지만 결국 실현되지 않았음에도 일본은 여전히 현실을 외면한채 실날같은 희망을 품고 있었죠.
군부의 허수아비에 불과한 스즈키는 어차피 자신이 반대해 봐야 소용없다며 도고에게 되건 안되건 소련과의 접촉을 계속 시도할 것을 지시합니다. 그러나 이런 우유부단하고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는 일본과 달리, 몰로토프는 말리크에게 "일본이 구체적인 안을 제시하지 않는한 상대할 필요도 없다"라고 냉정하게 지시하고 있었습니다.
44년 9월 18일 대본영은 관동군에게 "대륙명 제1130호"를 하달하여 소련의 침공에 대비한 장기방어전의 준비를 명령합니다. 41년만해도 관동군은 이른바 "특종연습"이라는 명목으로 대소침공을 위해 대대적으로 병력을 증강하여 일본 육군 최강의 전력을 자랑하였고 44년까지도 여전히 상당한 전력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남방의 상황이 급격히 악화되면서 44년 중순부터 남방으로 차례로 차출되었고 44년초 지나파견군이 전략적으로 무의미한 이치고 작전을 강행하면서 전차부대를 비롯해 대량의 병력과 물자를 전용합니다. 또한 45년초에는 본토결전의 명목으로 남은 3개사단까지 일본으로 보내졌습니다. 따라서 16개에 달했던 상비 사단이 모두 빠져나가자 막상 소련군의 침공을 눈앞에 두고 있는 시점에서 관동군은 단지 껍데기에 불과했습니다.
만주국 수도인 신경(지금의 장춘)의 관동군 사령부. 원래 여순에 있었으나 만주국 건국후 34년에 신경으로 이전합니다. ※ 사진출처 : 위키백과
관동군은 이를 메꾸기 위해 45년 7월 30일까지 현지 일본인들중에 성인남자들을 "싹쓸이"하듯 소집하여 신설사단들을 급조했지만 머릿수만 그럭저럭 채웠을뿐 실제 전력은 매우 형편없었습니다. 사단 예하 연대가 모두 보병이고 사단 포병이 없는 부대도 태반이었으며 차량과 장비도 턱없이 부족했고 심지어 소총조차 지급받지 못한 자도 태반이었습니다. 특히 대전차무기가 매우 빈약했습니다. 간부들은 대부분 40대이상의 고령의 예비역들이거나 단기교육을 받고 배치된 무경험자들이었습니다. 병사들도 마찬가지로 원래 군면제를 받았거나 부적합자들을 끌어 모은 것에 불과했고 훈련도 제대로 받지 못한데다 군기도 엉망인 오합지졸이었습니다.
게다가 야마다 오토조 대장을 비롯해 관동군 수뇌부는 말그대로 무능하고 무책임했으며 탁상공론만 하며 시간만 허비할 뿐이었습니다. 일소중립조약이 체결된 이래 4년간 관동군은 비현실적인 선제공격만 고수했을뿐 소련의 만주 침공을 가정해 어떠한 방어 준비도 하지 않았으며 극동에서 소련군이 급격히 증강되고 있다는 정보를 파악하고서도 여전히 소극적이었습니다. 군사작전이 용이한 7~8월중에 소련군이 침공할 가능성이 가장 높다는 것은 상식임에도 관동군은 막연하게 빨라도 가을이후나 되어야 할 것이라고 판단하였으며 어쩌면 병력의 수송과 병참의 한계로 46년 봄까지도 불가능할 것이라고 예상하였습니다.
마지막 관동군 사령관 야마다 오토조(1881~1965). 최종계급 대장. 기병장교출신으로 제12사단장, 중지나파견군 사령관을 거쳐 40년 8월 일시 퇴역했다가 44년 7월 다시 복귀하여 관동군 사령관에 임명됩니다. 일본 패망후 전범으로 체포되어 시베리아로 유형되었고 10년의 유형생활을 하다 56년 6월 일본으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주로 참모와 교육업무를 맡았고 일선 사단장이나 야전군을 지휘할때에도 특별히 주요 전투를 겪어보지 못한 전형적인 책상물림 장교였습니다.
45년 5월 30일 "대륙명 제1338"호, "대륙명 제1393호"에 따라 관동군과 조선군은 전시상태에 돌입합니다. 38도선을 경계로 한반도 북부는 관동군이, 남부는 조선군의 작전구역으로 나누어졌고 소련이 침공하자 조선군 산하 제17방면군과 제58군, 사할린의 제5방면군은 관동군의 지휘권에 편입되었습니다.
45년 8월초 관동군의 전력은 제1방면군(제3군, 제5군)과 제3방면군(제30군, 제44군), 제4군, 제34군으로 편성되어 24개 보병사단과 2개 전차여단을 포함한 11개 독립여단, 1개 항공대에 총병력 73만명, 각종 야포 1천문, 구식 경전차 200대, 항공기 230여대였습니다. 그러나 전투력을 제대로 갖춘 것은 그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30만명정도였습니다. 이외에 만주국군이 17만, 몽강군 4만4천명이 있었으나 그동안 일본으로부터 2선급 부대로 취급받아온데다 보급과 처우도 형편없어 사기와 훈련도 매우 낮았고 소련군의 침공이 임박하자 탈영병이 속출하고 있었습니다.
※ 종종 서적들중에 관동군의 전력을 31개 보병사단과 12개 독립여단 약 100만명으로 기술하여 혼란을 주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한반도에 있는 제17방면군과 제58군의 전력까지 포함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은 미군의 상륙에 대비하여 주로 남부지방에 배치되어 있었고 따라서 소련군과 교전하지 않았으므로 제외하였습니다.
한반도의 조선군 역시 연초부터 부대를 대거 확충하면서 사령부 직속의 4개사단 및 1개 독립혼성연대와 제17방면군(4개 사단), 제58군(3개 사단, 1개 독립혼성여단), 조선헌병대, 철도사령부 등으로 편성되어 11개 보병사단, 1개 혼성여단 및 1개 혼성연대 등 총병력 34만7천명에 달하였습니다. 특히 일본은 대륙과 일본 본토를 차단시키기 위해 미군이 한반도 남부나 제주도에 상륙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45년초만 해도 겨우 1천명밖에 되지 않았던 제주도의 수비대를 대거 증강하여 45년 8월에는 6만명에 달하였고 제주도민들을 강제 동원해 섬 곳곳에 땅굴을 팠습니다. 만약 미군이 실제로 제주도에 상륙을 시도했다면 제주도는 "제2의 오키나와"가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관동군의 방어계획은 한반도 북부와 만주 동남부의 산악지대에 주력을 집중시키고 만주의 광대한 공간을 활용해 국경지대의 요새에 배치된 수비대가 지연전을 펼치는 동안 주력부대는 남만주로 후퇴하여 소련군을 내륙으로 깊숙히 끌여들인후 소련군의 병참이 한계에 직면하면 반격한다는 일종의 종심방어전략이었습니다. 주방어선은 대련-신경-도문(두만강 하류에 접한 도시)을 연결하는 삼각지대였습니다. 이 말은 주요 산업시설이 밀집한 만주 북부와 중부지역의 방어는 사실상 포기한다는 의미였죠.
관동군이 설정한 주 방어선. 소련군의 침공시 험준한 산악지대를 활용해 지연전을 펼치되 결정적인 전투는 회피하여 붉은선까지 퇴각한다는 것이었습니다. 150만㎢에 달하는 광대한 만주를 횡단한다면 아무리 우세한 소련군도 병참에 심각한 애로를 겪게 될 것이고 공세 종말점에 직면하면 그때 반격한다는 계획이었으나 막강한 기계화부대를 갖춘 소련군의 역량을 노몬한 시절과 동일시한데다 자신들의 능력은 턱없이 과대평가한 것이었죠.
그러나 국경지대의 요새선의 구축도 수송수단과 자재부족으로 제대로 진척되지 않은데다 관동군 수뇌부의 안이함으로 인해 병력의 배치도 완료되지 못했습니다. 게다가 제공권은 물론이고 소련군의 전차부대를 상대할 대전차 무기도, 병력 기동에 필요한 차량도 없었으며 병력은 넓은 지역에 분산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관동군의 계획은 한낱 탁상공론에 불과한 것이었습니다.
다만 만주 동부지역의 우수리강 국경지대에 30년대 말에 구축된 하일라얼요새, 동녕요새, 호두요새, 아이훈 요새 등 대규모 국경요새는 두꺼운 콘크리트로 제작되어 영구적인 축성 진지였으며 16인치 열차포를 비롯해 다수의 대형 장거리포가 배치되어 있어 상당히 강력한 방어선을 구축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국경지대에 거주하는 민간인에 대한 피난이나 보호계획도 없었습니다. 당시 만주에는 155만명의 일본인이 살고 있었는데 관동군 일부 참모들을 중심으로 2월 24일 "관동군 재만거류민 처리계획"을 수립하여 5월부터 성인남자의 총동원과 함께 노약자와 부녀자들을 후방으로 철수시킬 것을 검토했으나 대본영은 현지민의 동요와 소련군의 침공을 유발할 수 있다는 이유로 반대합니다. 더욱이 관동군은 정보 통제를 내세워 민간인들에게 어떤 정보도 제공하지 않아 아무런 대비책도 세울 수 없었습니다. 시기적으로 너무 늦은데다 구체적인 수단도 결여되어 있어 막상 소련군이 침공하자 이들은 어떤 보호도 받지 못한채 완전히 무방비상태로 버려지게 되었죠.
한편, 극동에서의 스탈린의 야심과는 상관없이 만주 침공은 스타브카(소련군 최고사령부)로서는 결코 만만한 사업이 아니었습니다. 비록 베를린에 승자로서 입성했지만 소련군은 4년에 걸친 독일군과의 소모전으로 이미 만신창이나 다름없었고 병력의 대부분이 유럽에 집중된 상태에서 이들을 수송하는데 필요한 시베리아 횡단철도는 모스크바부터 블라디보스톡까지 무려 총길이 9,400km에 달하는 대장정이었습니다. 거의 지구의 1/4에 달하는 시베리아 횡단철도의 엄청난 길이와 제한된 수송능력으로는 수십만의 병력과 차량, 물자를 유라시아 대륙을 가로질러 극동까지 수송하는데 많은 시간이 소요될 수 밖에 없었죠. 그러나 스탈린은 스타브카에게 7월말까지는 모든 준비를 완료하여 8월 중순에 공격을 시작할 것을 명령하였습니다.
따라서 많은 부대들이 자신의 차량으로 개별적으로 이동해야 했고 막상 공격을 시작했을때도 모든 병력이 제 자리에 배치되지 못했으며 병참과 연료부족으로 많은 애로를 겪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또한 많은 병사들이 중장년이거나 어린 소년들이었습니다.
지형적으로도 만주는 공격자에게 결코 유리하지 않았습니다. 만소국경지대에는 험준한 산악지대가 가로막고 있었고 공간은 광대하지만 철도와 도로망은 형편없었습니다. 따라서 대규모 기계화부대를 투입하여 전개하기에는 매우 불리할 수 밖에 없었죠.
스탈린은 만주 침공의 지휘를 위해 45년 7월 자바이칼에 극동방면군 사령부를 창설하고 알렉산드르 바실레프스키원수를 사령관으로 임명합니다. 39년 노몬한전투에서 일본군을 격파했고 전쟁기간 붉은 군대의 최고 영웅이자 당시 독일 소련 점령 지구 군정 장관이었던 게오고르 쥬코프원수가 이 역할의 적임자라는 주장도 많이 있었으나 지나치게 위상이 올라간 쥬코프를 경계하고 있던 스탈린은 바실레프스키를 선택하였습니다.
알렉산드르 바실레프스키(1895~1977). 최종계급 원수. 전쟁기간 쥬코프와 함께 소련군을 대표한 가장 유능한 지휘관. 제정러시아의 장교였으나 적백내전에서 붉은 군대에 가담하여 소련-폴란드 전쟁에서도 큰 활약을 하였습니다. 30년대 후반 대숙청의 피바람이 불때 그는 오히려 승승장구 할 수 있었고 독소전쟁이 발발하자 스타브카의 참모차장 및 작전국장이 되었습니다. 모스크바 공방전에서 쥬코프와 협력하여 독일군의 공격을 막아내었고 스탈린그라드전투에서는 일대 반격작전인 "천왕성작전"을 추진하여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쿠르스크 전역과 바그라티온 작전 등 굵직굵직한 주요 작전을 수립하여 전세를 역전시켰고 45년 3월에는 제3벨로루시 전선군 사령관으로 임명되어 4월 동프로이센의 수도인 쾨니히스베르크(현재의 칼라닌그라드)를 점령합니다. 8월 폭풍작전으로 만주를 점령하고 관동군의 항복을 받았으며 종전후 국방장관이 되었으나 스탈린 사후 흐루시초프가 집권하면서 강제 예편되었습니다.
44년 12월 당시 소련의 극동군은 19개 소총사단, 2개 기병사단, 24개 항공사단 등 총병력 70만명에 전차 1천대, 항공기 1500대가 배치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6월부터 철도와 도로를 통해 본격적으로 병력이 증강되기 시작합니다. 극동군은 로디온 말리노프스키원수의 자바이칼 전선군, 키릴 메레츠코프원수의 제1극동 전선군, 막심 푸르카에프원수의 제2극동 전선군으로 구성되었습니다. 또한 극동함대사령관에는 유마세프 해군원수가 임명되어 쿠릴열도와 사할린에 대한 상륙작전을 맡았습니다. 관동군의 책상물림 지휘관들과 달리 모두 독소전쟁을 거치며 풍부한 경험을 쌓은 역전의 명장들이었죠.
45년 8월 일소 쌍방의 대치상황. 이미 양측의 전력은 압도적으로 소련측에 기울어 있었습니다.
비록 많은 부대들이 지쳐있었고 병력도 정원에 훨씬 못미친데다 노인과 소년들이 상당수 포함되어 있었지만 풍부한 실전경험을 가지고 있었고 장비와 화력, 기동력에서 비약적으로 강화되어 있었습니다. 또한 전쟁을 거치며 교리에서도 많은 발전을 이룩하여 강력한 포병과 공군의 지원아래 기계화부대가 신속하게 적진을 돌파한후 전과를 확대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6년전 노몬한 당시의 소련군과는 엄청난 차이가 있는 것이었죠.
소련군의 공격 계획은 블라디보스톡의 제1극동전선군이 동쪽에서, 하바롭스크의 제2극동전선군이 북동쪽에서, 자바이칼전선군이 외몽골 국경에서 서쪽으로 공격하여 삼면에서 협공하여 포위 섬멸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와 함께 남사할린과 쿠릴열도에 대해서도 상륙작전이 전개될 계획이었습니다.
이미 일본의 패망이 목전에 다달은 상황에서 소련의 목적은 군사적인 것보다 오히려 정치적인 것에 있었습니다. 스탈린은 미국이 원자폭탄을 개발했다는 정보를 입수했고 일본이 항복하기 전에 빨리 공격을 시작하여 속전속결로 만주 전역을 장악할 것을 닥달하였습니다. 따라서 당초 8월 중순에 공격할 계획이었으나 8월 7일까지 서둘러 모든 부대의 전개와 공격 준비를 마칩니다. 다음날 히로시마에 최초의 원폭이 떨어지자 스탈린의 마음은 더욱 초조해지죠.
8월 8일 저녁 8시.
몰로토프의 초청을 받은 사토 대사가 크렘린에 도착합니다. 모든 격식을 무시한채 몰로토프는 소련정부의 명의로 된 문서를 무뚝뚝한 목소리로 읽어나갑니다. 그것은 바로 선전포고문이었습니다.
"소련정부는 8월 9일을 기해 일본과 전쟁 상태에 들어감을 선언하는 바이다."
사토가 크렘린을 나간지 2시간후, 9일 새벽 0시 만소국경 전역에 걸쳐 소련군의 일제 공격이 시작되었습니다.
소련군의 병력은 3개 전선군 산하 11개군 80개 소총사단과 1개 전차군(4개 전차군단), 3개 항공군 등 총 157만명, 야포 2만6천문, 전차 및 돌격포 5,300대, 항공기 4,500대(해군 항공대 1,500대 포함)에 달하여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완전히 압도하였습니다. 여기에 1만 6천여명의 몽골기병도 있었습니다.
가장 먼저 만주서쪽에서 자바이칼전선군의 선봉인 제6근위전차군이 만몽국경을 돌파하여 해발 1,800미터의 다싱안링산맥을 넘어 거대한 전차군은 일본군의 저항을 전혀 받지 않은채 그 앞에 펼쳐져 있는 대평원을 향해 무인지경으로 내몽골로 쇄도합니다.
내몽골의 초원을 무인지경으로 달리는 소련군 제6근위전차군의 T-34 전차들.
※ 사진출처 : http://pkka1918.egloos.com/1028172
자바이칼전선군이 공격을 시작한지 1시간후 메레츠코프의 제1극동 전선군도 연해주에서 만주 동부를 침공합니다. 이 지역은 지형이 매우 험하고 울창한 삼림이 펼쳐져 있었는데다 일본군이 수십km에 걸친 대규모 요새지대와 포대를 배치하고 있었습니다. 메레츠코프는 이 요새지대를 돌파하기 위해 선봉부대인 제5군을 대폭 강화하여 전차 692대, 2,945문의 야포, 432대의 카츄사 다연장로켓포를 배치하고 제9항공군의 지원을 받도록 하였습니다.
장대비가 내리는 가운데, 소련군은 준비포격없이 공격을 시작함으로서 완전히 방심하고 경계를 허술하게 하고 있었던 일본군은 완전히 기습을 당했습니다. 대부분의 요새가 제대로 저항조차 하지 못한채 당일날 제압되었고 이 지역의 수비를 맡고 있는 일본군 제3군은 단순한 국경충돌인지 소련군의 전면 공격인지조차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일본군 진지를 향해 포격중인 카츄사 다연장 로켓포. 독소전쟁기간 "스탈린의 오르간"이라 불리며 명성을 떨쳤습니다. ※ 사진출처 : http://pkka1918.egloos.com/1030219
같은 시간 동북쪽에서는 제2극동전선군의 제15군이 만소 국경에 흐르는 아무르강 주변의 일본군 초소들을 순식간에 제압하고 아무르강 사이의 여러 섬들을 장악하였습니다. 이어서 모든 종류의 선박을 동원해 병력과 전차, 장비를 아무르강 10일까지 남안으로 도하시킵니다. 이 과정에서 일본군은 변변한 저항은 커녕 강에 기뢰나 장애물을 설치할 틈도 없이 후퇴합니다.
또한 9일 새벽 0시 30분부터 신경을 비롯해 만주의 주요도시와 군사기지, 비행장, 철도, 나진의 해군기지가 소련군 항공기들의 대규모 공습을 받아 큰 피해를 입었으며 초전에 관동군과 만주군의 지휘, 통신은 완전히 마비상태가 되어버립니다.
만주 전역에 걸쳐 소련군의 침공이 시작되었을때 정작 관동군 사령관 야마다 오토조 대장은 사령부를 비운채 관동주 의용봉공대본부 결성식에 참석하기 위해 대련에 출장중이었고 보고를 받고 부랴부랴 사령부로 복귀한 것은 오후 1시경이었습니다. 소련군의 침공이 임박한 상황에서도 군사령관이 별로 중요하지도 않은 행사에 참석하기 위해 자리를 비웠다는 것만 봐도 그동안 큰 소리만 쳐 왔던 관동군 수뇌부가 얼마나 무사안일주의에 빠져 위기감이 없었는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죠. 이제 그 댓가를 치룰 참이었습니다.
만주국 역시 혼란에 빠진 것은 마찬가지였습니다. 한낱 꼭두각시에 불과한 황제 푸이를 대신해 총무청 장관으로서 실제로 국정을 좌지우지하고 있었던 다케베 로쿠조는 소련군 침공소식을 듣자 9일 새벽 6시 간부들을 모아 향후 대책을 논의합니다. 그러나 관동군으로부터 아무런 연락도 받지 못한데다 전방의 만주군과도 통신이 두절되어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조차 알 수가 없었습니다. 사실상 만주국 정부는 마비상태나 다름없었죠.
갑자기 8월 10일 오전 9시 40분. 관동군으로부터 사령부를 신경에서 통화로 다음날까지 이전할 계획이니 푸이 황제와 만주국 정부도 당일밤까지 통화로 옮기라고 통보합니다. 유사시 관동군은 신경을 포기하고 서쪽으로 280km 떨어진 통화로 이전키로 내부적으로 정하고 있었으나 정작 만주국 정부에게는 한마디도 전달하지 않은데다 이전을 위한 구체적인 계획도 준비해 두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갑작스레 통보를 받은 만주국 정부로서는 통화로 이전할 아무런 준비도 없을 뿐더러 통신시설이나 정부 청사로 쓸 수 있는 건물도, 심지어 푸이가 지낼 숙소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미 신경 방위가 불가능하다는 보고를 받자 한 밤중에 고위관료들과 직원들, 황제의 친족들, 호위병 등 300여명을 태운 궁정열차를 타고 13일 새벽 1시 통화에서 가까운 압록강변의 임강으로 이동합니다. 다시 대요자라는 작은 산촌마을에 가서 둥볜다오 개발주식회사 현지 소장의 사택을 임시황궁으로 삼습니다. 그러나 관동군에게는 끝까지 어떤 연락도, 보호도 없었습니다. 철저하게 버림받은 것이었죠.
소련군은 대규모 전차군을 앞세워 만주를 삼면에서 파죽지세로 밀고 들어왔습니다. 다신안링산맥의 험준한 지형이 소련군 기계화부대의 기도을 막아줄 것이라고 제대로 된 방어선조차 구축하지 않은채 태평하게 있었던 제3방면군은 제6근위전차군이 산맥을 간단하게 돌파했다는 보고를 받자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소련군 기계화부대는 일본군의 주 방어선을 우회하여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고 도로의 빈약함에도 불구하고 3일동안 무려 450km를 주파하였습니다. 북만주의 요충지이자 요새도시인 하이리얼은 일본군 제80 독립 혼성 여단이 수비하고 있었으나 소련군 제35군 산하 제86소총병 군단은 시가전을 펼쳐 하루만에 점령하였습니다. 일본군 제119사단만이 4일간의 완강한 방어전을 펼치며 소련군 제205 전차여단과 제2소총병 군단의 공격을 저지했을뿐 결국 동쪽으로 후퇴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대대급, 중대급으로 분산배치되어 있었던 일본군 수비대들은 압도적인 소련군 전차부대와 포병 화력에 맞설 능력이 없었고 순식간에 괴멸되어 패주하였습니다. 소련군은 일본군 주방어선을 손쉽게 우회하여 이들을 고립시킨후 섬멸시켰습니다. 일부 부대가 패잔병들을 모아 소규모 반격을 시도했으나 여지없이 박살납니다. 소련군의 전진을 막는 것은 일본군의 저항이 아니라 강과 늪지들이었습니다. 이로 인해 많은 공격 제대가 흩어졌고 병참선이 끊어져 연료부족에 허덕여야 했습니다.
이렇다할 전투 없이 파죽지세로 진격하는 자바아칼 전선군과 달리 메레츠코프의 제1극동군의 앞에는 거대한 난관이 하나 있었습니다. 바로 우수리강 서안에 자리잡고 있는 호두(후터우)요새였죠. 동만주 방어의 요충지인 호두요새는 33년에 구축된 두께 3미터의 철근 콘크리트로 된 요새로 왠만한 포격에는 끄떡도 하지 않았습니다. 더욱이 사면을 관측할 수 있는 높은 고지에 위치한데다 사면이 고립되어 있어 방어는 용이하지만 공격하기에는 매우 어려웠습니다. 요새병력은 제15국경수비대 산하 약 7천명이었으며 16인치 대구경 열차포를 비롯해 59문의 야포와 80문의 대공포, 10문의 대공기관총이 촘촘히 배치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숙련된 요원이 부족했고 더욱이 소련군의 공격이 시작되었을때 요새 사령관인 나시와키 다케시 대좌는 제5군 사령부에서 열린 회의에 참석하여 부재중이었습니다.
메레츠코프는 우선 일본군의 일선 방어선을 돌파한후 요새지대는 우회하여 주력부대는 만주 동부지역으로 진격하되 후속부대들이 요새를 처리하기로 결정합니다. 요새의 공략은 제35군이 맡아 8월 9일 새벽 1시부터 맹렬한 포격을 시작하였습니다. 소련군 포병의 포격과 항공지원 속에서 소련군은 주요새 주변의 거점들을 하나씩 제압하여 호두요새를 고립시킵니다. 그러나 그 와중에서도 일본군의 저항은 맹렬했고 8월 15일 천황의 항복 선언에도 불구하고 저항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치열한 전투끝에 대부분의 병사들이 죽거나 스스로 자결하였고 호두 요새가 완전히 함락된 것은 13일이 지난 8월 22일이었습니다.
소련군 제5군은 첫날에만 35km를 돌파하였고 파죽지세로 돌파구를 계속 확대해 나갑니다. 목표는 일본군 제1방면군 사령부가 있는 무단장이었죠. 그러나 무단장 동쪽에서 일본군 제124사단의 완강한 저항을 만나 전진이 저지되자 메레츠코프는 제5군 사령관 크릴로프를 격렬하게 질책합니다. 크릴로프는 30분간의 준비포격을 실시한후 전차와 돌격포를 투입하여 일본군 수비대를 격파하였고 제272연대는 최후의 일인까지 "옥쇄"하였습니다. 그럼에도 제124사단은 8월 15일까지 방어선을 유지하여 8월 22일에야 항복하였습니다.
도처에서 방어선이 붕괴되며 소련군이 포위망을 좁혀 오자 관동군 사령관 야마다 대장은 11일 사령부를 신경에서 통화로 옮기는 한편 병력을 집중시켜 결전을 시도할 계획이었으나 8월 15일 오전 11시 천황의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는 뉴스가 라디오에서 나왔고 8월 16일 오후 4시 대본영에서 모든 전투를 중지하라는 명령이 정식으로 내려옵니다. 그때까지 저항하고 있던 많은 부대가 전의를 상실하고 무기를 버린채 소련군에게 투항합니다.
8월 8일부터 9월 초까지 소련군의 진격상황
대본영으로부터 정전 명령이 떨어지자 관동군은 소련과 항복 교섭을 시작합니다. 8월 19일 관동군 총참모장 하타 히코사부로중장이 소련군 제1극동방면군 사령부를 방문하여 바실레프스키를 면담합니다. 회담은 소련군에 의해 일방적으로 진행되었음에도 사령부로 복귀한 하타는 태평하게 "소련군은 관대하니 아무 걱정할 것 없으며 그들을 환영할 준비를 하라"고 말할 정도로 낙관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환상도 잠시였습니다. 소련군은 도처에서 일본인이든 중국인이든 국적과 상관없이 온갖 약탈과 강간, 폭행을 일삼았으며 9월 3일 야마다가 바실레프스키에게 거류민의 보호를 요청했으나 거절당하자 비로소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았습니다. 9월 5일 바실레프스키의 명령에 따라 야마다 사령관과 하타 총참모장을 비롯해 관동군 참모들을 모두 체포하여 하바롭스크로 연행합니다.
항복문서에 서명하기 위해 소련군 사령부에 출두하는 야마다 관동군 사령관
※ 사진출처 : 2차대전사, 알라스테어 핀란, 폴 콜리어, 마크 J.그로브 저, p. 689
만주국 황제 푸이는 봉천비행장을 통해 일본으로 도주하려고 했으나 비행장에 그들이 도착함과 함께 소련군에게 점령당하여 현장에서 체포되었고 곧바로 하바롭스크로 끌려갑니다. 만주사변 당시 가장 먼저 일본편에 붙은 "한간 1호"이자 만주국 총리대신였던 장경혜는 관동군 사령부와 함께 통화로 갔다가 일본이 항복하자 신경으로 돌아옵니다. 그리고 나름대로 향후 국민정부에서 한자리 얻을 생각으로 치안유지위원회를 구성하지만 소련군에 의해 해산되었고 8월 31일 그를 비롯해 만주국 관료들은 모두 체포되어 푸이와 함게 하바롭스크에 수감되었습니다. 이후 모택동이 신중국을 건국하자 50년 8월 푸이 등은 모두 중국으로 인도되어 무순 전범관리소에서 약 10년간 복역하게 됩니다. 그러나 87세의 고령이었던 장경혜는 석방직전에 옥사하였습니다.
비행기에 타려다 소련군에 의해 체포된 푸이. 어차피 일본으로 도주하는데 성공했다고 해도 같은 운명을 겪어야 했을 것입니다. ※ 사진출처 : 대일본제국, 가토 키요후미, p.189
관동군 사령부의 항복에도 불구하고 예하부대간의 통신이 두절되어 곳곳에서 고립된 부대들이 절망적인 전투를 계속하였습니다. 사할린에는 소련 해군 육전대가 상륙하여 8월 18일 점령되었고 같은날 하얼빈도 함락됩니다. 만주국 수도인 신경에 대해서는 만주국 총리대신인 장경혜가 무익한 저항이라며 야마다 사령관에게 비무장도시로 선언해 줄 것을 요청했으나 야마다는 이를 거부하고 제30군을 배치하는 한편 시내 곳곳에 바리케이트를 치고 시가전을 펼칠 것을 지시합니다. 그러나 소련군이 신경에 도착하기전에 일본이 항복함으로서 8월 21일 소련군은 무혈로 진입할 수 있었습니다.
하얼빈에 입성하여 행진하는 소련군 기병대
※ 사진출처 : 2차대전사, 알라스테어 핀란, 폴 콜리어, 마크 J.그로브 저, p. 690
관동군의 항복에도 불구하고 소련군은 진격을 멈추지 않고 계속 남하하여 8월말까지 만주 전역을 점령하였고 이어서 북평 북쪽의 장가구와 산해관까지 진출하여 중국을 긴장시켰으나 중소우호조약의 체결에 따라 만리장성 선에서 멈춘채 더이상 남하하지 않고 정지합니다. 전투가 완전히 종결된 것은 8월말이었습니다.
소련군이 침공을 개시한 8월 9일부터 관동군과의 정전협정이 체결되는 8월 20일까지 11일간의 짧은 전투에서 소련군은 전사 12,031명, 부상자 24,425명 등 약 3만6천여명의 적지 않은 피해를 입었습니다. 일본군의 피해는 정확하지 않으며 소련측 주장으로는 8만 3천명이 전사하고 64만명이 포로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만주사변을 비롯해 하극상과 독선, 무모한 모험주의로 일본을 전쟁의 구렁텅이로 빠뜨린 관동군의 최후였습니다. 그러나 그 마지막은 추태 그 자체였습니다.
비록 관동군이 매우 약체화되어 있었다고 해도 방어계획부터 매우 졸렬하기 짝이 없었으며 특히 사령관인 야마다 대장을 비롯해 관동군 참모진은 총체적인 무능을 그대로 보여주었습니다. 종심방어를 하겠다면서 광범위한 공간에 병력을 여기저기 분산배치했고 소련군이 방어선을 우회하여 돌진하자 속수무책이었습니다. 더욱이 제공권에서 압도적으로 열세했고 소련군의 중전차를 저지할 대전차무기도 없었을 뿐더러 기동성도 결여되어 있었습니다. 더욱이 소련군이 공격이 임박했음에도 태평스럽게 경계를 게을리하여 완전한 기습을 허용했습니다. 그들이 믿은 것은 단지 만주를 둘러싼 험한 산악지대뿐이었으나 이조차도 방어선의 구축을 게을리한데다 소련군의 험지 기동능력과 돌파능력, 화력을 과소평가한 것이었죠.
심지어 군의 기강조차 무너져 적이 쳐들어오자 대부분 제대로 싸우지도 않은채 파렴치하게도 자신들의 가족만 군용열차에 태워 피난시켰을뿐 피난민들을 보호하려는 최소한의 노력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이는 마찬가지로 내몽골에서 소련군의 공격을 받은 주몽군이 재류 일본인 4만명을 남쪽으로 탈출시킨 것과는 대조되는 것입니다.
소련군은 짧은 준비기간에도 불구하고 독일과의 전쟁에서 쌓은 경험을 토대로 훌륭한 제병협동전술을 보여주었으며 장고봉, 노몬한 당시의 단순한 정면공격만을 예상했던 관동군의 허를 찔렀습니다. 따라서 국지적으로 일본군이 강력하게 저항한 예도 없지 않았지만 소련군은 대체적으로 무인지경이나 다름없이 진격했으며 전투는 일방적으로 진행되었습니다.
소련군의 포로가 된 일본군 병사들.
※ 사진출처 : 2차대전사, 알라스테어 핀란, 폴 콜리어, 마크 J.그로브 저, p. 690
스탈린은 내무성 인민위원회(NKVD)에 지시하여 이들을 모두 시베리아로 이송시켜 전쟁으로 황폐화된 소련의 복구에 활용하도록 합니다. 일본군 포로들은 약 2천개소에 달하는 수용소에 분산되어 도로건설과 벌목 등 중노동에 종사했고 46년말부터 단계적으로 송환되어 전후 10년이 지난 56년말에야 전원이 귀국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할린에 남은 3만명의 조선인들은 끝까지 조국으로 돌아오지도 못한채 구소련이 붕괴될때까지 온갖 차별을 견뎌야 했습니다.
한편 제1극동전선군 예하 제25군은 두만강을 건너 8월 12일 한반도로 진격하여 나진과 웅기를 점령하고 13일 청진을 공격하지만 일본군 수비대의 완강한 저항으로 청진을 완전히 점령한 것은 일본이 항복한후인 8월 18일이었습니다. 21일에는 원산과 함흥을, 23일에는 개성까지 진출합니다. 24일 제25군의 선견대가 평양에 도착하였고 26일에 제25군의 주력이 입성합니다. 아직 소련이 개입하기전인 7월 24일 미영소 참모총장 회담에서 소련측 안토노프 장군이 마셜에게 "소련군이 만주와 한반도를 공격할 계획에 대해 미국도 한반도에 상륙할 계획이 있는가"라고 묻자 마셜은 "계획이 없다"라고 대답합니다. 마셜의 이런 대답에 스탈린은 미국이 한반도에 관심이 없으며 소련이 한반도 전체를 점령하더라도 미국은 묵인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소련의 예상이상의 맹렬한 진격에 놀란 마셜은 즉시 한반도에서 미소간의 작전분계선을 정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참모들에게 의견을 묻자 가드너는 평양-원산선인 39도선을 제안했고 링컨은 대련-여순이 39도선 아래이기 때문에 소련이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라며 38도선을 고집합니다. 물론 이것은 어떤 명확한 근거나 판단에 의한 것이라기 보다 단지 한 군인의 즉흥적인 생각일뿐이었습니다.
이때만 해도 소련의 목적은 단지 한반도에서의 완충지역의 확보일뿐 굳이 미국과의 충돌을 야기하면서까지 극동의 작은 영토를 조금이라도 더 먹으려고 고집을 부릴 이유가 없었습니다. 더욱이 청일전쟁 직후 일러간의 밀약인 로마노프-야마가타 협약에서도 39도선을 정했기 때문에 미국이 39선이나 또는 더 윗쪽을 제안했다고 해도 받아들였을 것입니다. 실제로 소련은 어떤 방해도 받지 않고 한반도 전역을 손쉽게 장악할 수 있음에도 미국이 38도선을 타협안으로 제시하자 아무런 반대없이 즉석에서 승락하였고 개성까지 진출한 병력을 북쪽으로 철수시켰습니다.
사실 그들은 아무런 준비도 신중한 고민할 시간적 여유도 없이 그 자리에 불려왔을 뿐이었고 더욱이 미 국무부가 아니라 합참의 몇몇 군인들에 의해 즉흥적으로 결정했다는 점을 보더라도 당시 미국이 한반도의 가치에 대해 얼마나 무관심했는가를 알 수 있게 하는 것이죠. 얄타회담이나 포츠담회담에서도 연합국간의 논의사항에 한반도는 제외되어 있었습니다. 합참으로부터 보고를 받은 트루먼은 38도선 안을 다시 검토하라고 지시하자 8월 13일 합참은 다시 40도선을 내놓았으나 태평양전구 사령관인 맥아더는 일본점령이 가장 중요하며 한반도나 중국에 대한 상륙은 부차적인 것일뿐이라고 반대하였습니다.
결국 3성 정책조정위원회(SWNCC, 국무부와 육군, 해군이 참여)에서 미군의 진주 능력을 고려해 38도선을 미소간의 분할선으로 정하는 "일반명령 제1호"를 단 30분만에 수립합니다. 그리고 8월 15일 트루먼은 이 안을 최종 승인합니다. 명분은 단순히 일본군의 무장해제를 위한 군사상 임시경계선일뿐 정치적 의도는 없다고 하지만 사실상 미소간의 세력권을 정한 것이었습니다. 쌍방의 대결은 이미 시작되었고 세계는 새롭게 분할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미소가 38도선을 정했을때 이 결정이 5년후 2차대전이래 최악의 전쟁을 불러오리라고까지 생각하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그들에게 한반도는 단지 자국의 안보를 위한 완충지역일 뿐이었습니다. 9월 8일 하지중장이 지휘하는 미 제7사단이 인천을 통해 상륙하여 다음날 서울에 입성합니다.
8월 하순 스탈린은 바실레프스키에게 북한의 지도자로 세울만한 사람을 추천하라고 지시합니다. 바실레프스키가 추천한 사람은 소련 극동군 산하의 제88특별보병여단의 지휘관이었던 김일성이었습니다. 그는 모스크바에서 직접 스탈린의 면접을 받았고 "합격"판정을 받았습니다. 9월 19일 그는 소련이 제공한 군함을 타고 원산에 상륙하였고 10월 14일 "소련해방군 환영 평양시민대회"에서 처음으로 대중에게 그 모습을 드러내었습니다. 이것이 김일성의 첫등장이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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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댓글 작성자푸른 장미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13.09.13 전투 기간도 짧고 실질적으로는 전투보다 천황의 항복에 의해서 갑작스럽게 종결이 되다보니 사람들의 관심을 덜 산게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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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댓글 작성자푸른 장미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13.09.13 그리고 어떤 전투가 유명세를 얻으려면 전투 기간도 좀 있어야 되고 약간 드라마틱한 극적 요소가 있어야 되는데 8월 폭풍 작전은 그런 게 부족하죠. 시작하자 마자 어린애 팔비틀기처럼 관동군이 녹아내렸으니까요. 비슷한 예로 북태평양의 아쓰 섬이나 키스카 섬 전투가 역시 그렇습니다. 작전의 중요성이나 규모에 비해 별로 알려진 바가 없죠. 반대의 경우엔 안지오 전투가 대표적입니다. 연합군이 안지오에 상륙해서 교두보 구축하는 동안 독일군은 방어선 다 완성하고 서로 대치만 하고 있었죠. 그런데도 안지오 전투는 전투 기간이 좀 길다보니 기자들이 모여들어서 화제가 되고 결국 로마의 함락으로 이어져서 더욱 유명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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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댓글 작성자푸른 장미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13.09.13 이 전투로 당시 미군 지휘관 마크 클라크 중장이 유명세를 타게되고 훗날 그가 한국전쟁에서 유엔군 사령관까지 출세하는데 영향을 주게 되죠. 근데 알고 보면 클라크 중장은 별로 한 일도 없습니다. 실제로 안지오에서 독일군이 물러나게 된것은 남쪽의 몬테카시노 전선이 뚫려서 포위를 피하기 위해 독일군이 후퇴한 거죠. 당시 전선 사령관인 영국의 알렉산더 대장이 클라크에게 독일군을 추격하라고 명령했지만 클라크는 가볍게 이 명령을 씹어버리고 로마로 입성합니다. 그래서 수많은 기자들 앞에서 포즈를 취할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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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무장공비 작성시간 13.09.13 불지옥을 뚫고 최종복스 목을 따고 온 러시아의 보너스 미션(...)
영혼까지 털리는 불쌍한 관동군. -
작성자배달민족 작성시간 13.09.13 소련군이 한반도 전체를 장악하지 않은것이 다행인가 불행인가................. 어쨌든 운명의 38도선은 그어지고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