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 때 수원 화성으로 가는 길에 쉬어가던 행궁 용양봉저정 앞에 설치된 주교사 폿돌
정조는 해마다 수원에 있는 아버지의 묘소를 참배하고자 했다. 그런데 골치거리가 하나 있었다.
바로 한강을 건너는 것이었다. 강을 건너지 못하면 아주 먼 길을 돌아가야 했기 때문에 한강은 왕의 행차를
막는 커다란 장애물이었다. 왕이 타는 배인 용선을 만들어 건널 수도 있지만 자칫 배가 뒤집히기라도 하면
큰 일이라 왕이 배를 타는 일은 매우 드물었다. 그러다 보니 왕이 한강을 건널 때는 배다리를 만들어 건넜다.
배다리는 백성들의 배를 모아 겹겹이 이어 붙이는 방식으로 만들었다. 그러다 보니 안전이 문제가 되었다.
크고 작은 배들어 불러 모으니 높낮이 들쭉날쭉 제멋대로라 무게를 분산기키는 힘이 일정하지 않았다.
바람이라도 불어 물결이 출렁거리면 더욱 위험했다. 무엇보다 배다리로 인해 백성들의 원망이 큰 것도 곤란한 문제였다.
배다리에 쓰인 배들은 크고 작은 상처를 입은 채 온전하지 못한 상태가 되기 일쑤였고 고기를 잡거나 물건을
나르는 백성들의 배를 동원하다 보니 먹고살 생계 수단을 빼앗는 꼴이 되어 버렸다. 이러니 배다리 이야기만 나오면
백성들은 다들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정조는 배다리 문제점을 알고 배다리 설치를 체계적으로 관리하기로 했다.
배다리를 만드는 관청인 주교사를 만들어 세 정승을 주교사의 우두머리로 삼고는 이렇게 명령했다.
"내년부터 수원 행차는 백성들의 생업에 지장을 주지 않도록 한겨울에 할 것이다. 그러니 백성들에게 피해가 가지 않으면서도
안전하고 튼튼한 배다리를 만드는 방법을 연구하여 제출하도록 하라."
정조가 배다리의 설치부터 해체까지 체계적으로 운영할 수 있는 방법을 제대로 연구하라고 지시한 것이다.
"네, 전하. 최선을 다 하겠나이다."
신하들은 별 문제가 아니라는 듯 자신 있게 대답하고는 얼마 뒤 배다리 설계 보고서를 당당하게 올렸다.
정조는 초계문신인 정약용에게 배다리 설계보고서인 <주교절목>을 검토하라는 과제를 내렸다.
정약용은 배다리 보고서를 읽기 시작했다. 그런데 첫 번째 항목부터 고민에 빠졌다. 배다리를 놓을 곳으로 정한
노량진 나루터가 잔잔한 곳이라고 적혀 있었다.
'과연 그러한가?"
정약용은 유토리와 두화를 불러 물었다.
"노량진 나루터는 평소 물결의 방향과 세기가 어떠하더냐?"
유토리가 나서며 자신 있게 대답했다.
"물살이 동쪽에서 서쪽으로 잔잔히 흘렀습니다요?"
이에 두화가 손을 내저으며 반박했다.
"아닙니다. 얼마 전에 사람들이 한강을 건너는데 서쪽에서 동쪽 방향으로
물살이 세게 흘러 배가 심하게 출렁거렸다고 합니다."
유토리와 두화는 서로 자기 말이 옳다고 우겼다.
"노량진 나루터로 가야 되겠다. 유토리는 나를 따라 나서거라."
정약용은 노량진 나루터에 도착해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한참을 둘러보았다.
노량진 나루터가 배다리를 놓을 수 있는 가장 짧은 거리임에는 분명했다.
하지만 결코 잔잔한 곳은 아니였다. 서해의 물결과 썰물에 영향을 받아 강물의 높낮이가
계속 변했고 그때마다 물살의 방향이 바뀌어 배가 출렁거렸다.
'조류 분석이 틀렸다!"
'이렇게 조류가 불안정한 곳에 배와 배를 끈으로 연결하다가는 큰일 나겠다.'
주교사의 보고서대로 배와 배를 끈으로 연결하면 배가 출렁거릴 게 뻔 했다. 매우 위험했다.
"주교사의 관리들은 이곳에 직접 와 보지도 않았단 말인가?"
정약용의 혼잣말에 유토리가 이때구나 하고 맞장구를 쳤다.
"글쎄말입니다요. 뱃사람들 말로는 지체 높으신 나리님들은 코빼기도 안비쳤답니다요."
주교사의 보고서는 배다리를 놓을 현장을 조사하고 백성들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고민하여
만든 설계도가 아니라 이미 알고 있는 방법을 책상머리에서 정리한 보고서에 불과했다.
정약용은 보고서의 문제점을 조목조목 비판해 정조에게 제출했다.
정약용이 올린 검토 보고서는 한마디로 <주교절목>이 엉터리 보고서라는 말이었다.
정조는 당장 주교사 관리들을 불러들이고는 항목 하나하나 따져 물었다.
"노량진 나루터는 북쪽 언덕이 높고 남쪽 언덕이 낮다.
그런데 보고서에는 양쪽 언덕이 모두 높다고 되어 있다.어찌 된 일인가?"
"전하, 송구하옵니다."
"필요한 배의 수량이 42척이라고 되어 있다. 한강의 너비가 얼마이고 배 한 척의 너비가 얼마이냐?"
"전하,황공하옵니다."
"한강의 너비도 모르는데 배의 수량은 어찌 계산한 것이냐?"
"전하, 몸 둘 바를 모르겠나이다."
정조가 묻는 말에 주교사 관리들은 서로 눈치만 볼 뿐 한 명도 제대로 된 대답을 하지 못했다.
배를 모아 이어 놓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전혀 예상하지 못한 질문 공세에 무척이나 당황했다.
무엇보다 한강의 지형과 조류의 특성을 상세하게 파악하고 있는 정조의 전문성에 더욱 놀랐다.
"주상께서 마치 직접 노량진 나루터에 가셔서 분석하신 것 같지 않은가? 놀랍네, 놀라워!"
"흔들리는 배 위에 다리를 놓는데 어떻게 출렁거리지 않게 할 수 있단 말인가?"
주교사의 관리들은 우왕좌왕했다. 나루터에 가 보지도 않고 책상머리에서 상상으로만
연구해 만들어 낸 관리들이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그런데도 또 책상만 붙들고 앉아 입씨름만 해댔다.
정조는 다시 정약용을 불러들였다.
"그대가 직접 배다리를 설계하라."
정약용은 뜻밖의 지시에 당황했다.
"경험도 없는 신이 어찌 그런 큰일을 할 수 있겠나이까?"
"<주교절목>을 조목조목 비판한 걸 보니 그대가 적임자이다."
"황공하옵니다. 안전한 배다리를 설계해 올리겠사옵니다."
이렇게 정약용은 배다리 설계라는 첫 번째 과제를 부여 받았다.
"200발(약 360미터)이 넘는 한강을 사람 수천명과 말 수백필이 동시에 건너야 한다."
"무엇보다 안전이 최우선. 어떻게 하면 튼튼한 배다리를 만들 수 있을까?"
정약용이 혼잣말을 하며 생각에 빠져 있자 유토리가 너무 뻔한 거 아니냐는 듯 참견했다.
"뭘 그리 고민하십니까요? 나리, 배들을 쭈욱 이어 놓은 다음 배들을 가로질러 나무 기둥 척 올려놓고
그 위에 판자를 깔면 간단한 것을요,고민도 아닌 걸 고민하시고 참....."
"이 녀석, 잘 난 척 하기는. 누가 그걸 모르느냐."
정약용이 면박을 주자 유토리는 입을 댓 발이나 내밀었다. 정약용은 어릴 적부터 배에 관심이 많았다.
배의 구조와 부력에 관해 생각을 정리해 둔 책이 있을 정도였다.
1791년 1월, 정조의 수원 행차에 맞춰 주교사는 <주교지남>을 지침으로 삼아 배다리를 만들었다.
주교사는 배와 배를 연결하는 공법은 정약용의 설계를 그대로 따랐으나 선창다리는 일단 널빤지를 올려놓는 방식으로'
제작했다. 정조가 배다리를 건너며 그 까닭을 묻자 주교사 책임자는 부판을 설치하는 방법은 문제가 많다고 보고했다.
수원 행차를 마치고 돌아온 정조는 다시 정약용을 불렀다.
"부판을 의심하는 이들도 많고 무엇보다 비용이 많이 든다며 반대하는 의견이 많다.
비용을 줄이되 부판과 같이 안전하고 튼튼한 선창다리를 다시 고민해 보아라."
정조는 상황을 설명하며 새로운 방법을 찾도록 지시했다.
"네, 전하.내년 수원 행차에 차질이 없도록 새로운 방법을 찾아내겠사옵니다."
정약용은 부판의 부력 문제를 해결하고 비용을 줄일 수 있는 방안을 올리려 했으나 이미 위에서 결정된 사항이니
부판 대신 새로운 방법을 찾기로 했다. 부판을 대신 할 수 있는 방식을 빠른 시간 내 찾아야 했다.
'한강이 물높이 변화가 심하니 튼튼하게 결합시키는 짜 맞춤도 안되고 부판은 비용이 많이 들어 안되고......'
고민에 빠져 있던 정약용은 허공을 멍하니 바라보다 무심코 문고리를 처다보게 되었다.
문고리를 배목에 걸고 배목 구멍에 비녀못을 꽂으면 문을 잠글 수 있다. 배목은 문에 박혀 고정되어 있으나
비녀못은 자유롭게 움직였다.
"배목 구멍에 꽂는 비녀못이라...."
뭔가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도 있을 것같았다.
정약용이 배목에 비녀못을 꽂아 둔 상태로 이리저리 궁리하고 있을 때, 때마침 두화가 문을 두드렸다.
"어르신,두화이옵니다. 문 좀 열어 주십시오."
문고리에 꽂힌 비녀못을 빼자 문이 열리면서 두화가 찻상을 들고 들어왔다.
"오호, 그렇지, 배목을 가로지르는 비녀못처럼 기둥의 끝을 맞물리게 깍아서 비녀못과 같은 철심을 박아 넣으면 되겠다."
정약용은 두화를 붙들어 앉히고는 방금 생각해 낸 새로운 선창다리 방식을 설명하기 시작하였다.
"배다리의 나무 기둥과 부두에 걸친 나무 기둥을 요철(凹凸)처럼 끝이 맞물리도록 그려 보아라."
"요철이요?"
"그래, 요철처럼 맞물린 나무 기둥 사이에 비녀못처럼 생긴 철심을 박을 것이다."
"철심이 박힌 두 나무 기둥이 자유롭게 움직이는 것인가요?"
"그렇지.그래."
두화가 서둘러 그림을 그리자 이번에는 유토리에게 어서어서 모형을 만들라고 재촉했다.
"나리, 한마디로 짜맞춤입니다요. 비용도 안들고 방법도 간단하고 부판보다 훨씬 더 좋고 편리한 것같습니다요."
모형을 다 만들고서 유토리가 헤헤거리며 말하자 정약용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부판이 가장 안전한 방식이다. 이 요철 결합 방식은 한두 번 사용할 수 있는 미봉책에 불과하다."
요철 방식은 무게가 요철 부위에 집중되기 때문에 부판에 비해 안전하다고 볼 수는 없었다. 하지만 배다리는 왕이
행차할 때만 사용하는 소모품이니 큰 문제는 없었다. 정약용은 수정한 방법을 즉각 정조에게 올렸고
정조는 주교사에 명령을 내려 수정된 방식을 적용하라고 지시했다.
요철 결합 방식을 적용한 선창다리는 1792년 1월 배다리를 만들면서 적용되었다. 왕의 행렬이 배다리에 진입하는 순간
선창다리가 부드럽게 진동을 흡수하면서 움직였고 행렬이 배다리를 벗어나올 때도 수위 변화에 맞게 선창다리는 부드럽게
출렁거렸다. 최종 걸림돌이었던 선창다리도 마침내 성공을 거두었다.
정조는 수원 행차를 마치고 돌아와 내년 수원 행차를 앞두고 배다리와 관련된 모든 사항을 정리하여 최종 보고서를
완성하라고 지시했다. 책상머리에 만든 엉터리 보고서인 <주교절목>이 정약용의 설계도가 반영된 <지교지남>으로
바뀐 뒤 실제 배다리를 만들어 보면서 개선된 사항까지 담아 <주교사개정절목>에 따라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드디어 배다리가 완성 되었고 왕이 수원으로 행차하는 날이 되었다. 정약용이 설계한 배다리는 실제로 웅장한 모습을
드러냈고 튼튼한 배다리 덕에 왕의 행렬은 무사히 한강을 건넜다.
"나리, 나리, 저기 좀 보십시요. 배다리가 마치 우리가 그린 그림 속에서 튀어나온 듯 합니다요."
언덕 위에서 왕의 행차를 지켜보던 유토리가 환호성을 질렀다. 정약용 또한 가슴이 벅차 이 광경에서 한순간도
눈을 떼지 못했다. 4년만에 배다리가 최종 결실을 맺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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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글은 김평원 저 <정약용과 발명 특공대, 정조대왕의 특명에 도전하라!>에서 일부 옮겨온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