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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들나루 동작진

정조와 정약용 그리고 노량진 배다리

작성자조영희|작성시간19.01.30|조회수1,941 목록 댓글 0

<조선왕조실록>에는 1795년 음력 2월9일 첫날 새벽 6시45분, 1779명의 일행을 거느리고 창덕궁을 떠난 정조가 노량진에

가설된 배다리를 건너 노량행궁에서 점심을 먹고 11시30분 출발, 장승배기를 거쳐 시흥행궁에서 하룻밤을 묵었다고 적혀 있다.

둘째 날 화성행궁 도착, 넷째 날 현륭원 참배…. 마지막 여덟째 날인 음력 2월16일 용양봉저정에서 점심을 먹고 배다리를 건너

환궁했다는 7박8일 행차 일정이 세세하게 적혀 있다.
배다리를 만드느라 징발된 배들은 한강을 오르내리면서 조세곡을 실어 나르거나 장사를 하는 배들이었으므로 행차가 있을 때마다

폐단이 컸다. 정조는 배다리를 짧은 기간에 최소한의 비용으로 건설하는 방법을 연구해 친히 <주교지남>(舟橋指南)을 지었다.

주교사에서는 ‘주교사절목’(舟橋司節目)을 제정했다. 배다리는 왕의 강남 행사 때 비용을 줄이면서 안정성을 높인 것이 특징이다.

다산 정약용이 작성한 ‘자찬묘지명’ 등에 다산이 배다리를 설계했다는 대목이 나온다.

"그 전에 배다리를 만드는 방식은 500~600척의 배를 다 모아서 촘촘하게 까는 방식이었다.그 배는 다 어디서 올까요?

백성들의 배였습니다. 그러니까 백성들의 일을 못하게 만들어 놓고 배다리를 건설한 건데정조 때 배다리는 정약용이

설계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36척의 큰 배, 세곡을 나르는 조운선을 통일해서 나열하고 배와 배 사이에 목재 보를 얹는

오늘날 거더교하고 동일한 방식입니다.현대적 공학적 관점에서도 아주 탁월한 설계라고 볼 수 있습니다."-김평원 인천대 교수

거더교(girder bridge)는 종류가 많다. 거더(girder)는 우리말로 들보 대들보 형(㭢)이라고 표현한다.
거더교는 중심 들보를 주체로 하여 들보들을 수평으로 걸쳐 배열한 구조의 다리다.

많은 나루 중에 하필이면 왜 노들나루였을까. 한강은 강폭이 넓어서 배를 타고 건너기도 쉽지 않았다.

돌다리를 만들 엄두도 내지 못했다. 다행히 노량진은 강 양쪽에 높은 언덕이 있어서 영구적 선창을 만들기에 적당했다.

강의 유속이 평온하고 수심이 깊어 배다리를 설치하기 적당한 곳이었다. 80척 중 36척은 배다리 몸체를 만들었고,

나머지는 좌우에서 다리를 고정하거나 호위 군사가 탔다. 배다리의 정중앙에 오는 배의 높이가 가장 높고 양쪽으로 갈수록

낮아져서 멀리서 보면 홍예(무지개 모양)가 되도록 했다. 정조는 배가 몇 척이나 필요한지 알기 위해 노들나루 양쪽의 거리를

정확하게 쟀는데, 요즘 길이로 약 336m 정도였다. 따라서 한강을 직선으로 잇는 데 필요한 배는 모두 36척을 사용했다.

나머지 작은 배들을 배다리의 왼쪽과 오른쪽에 나누어 세워서 배다리를 끈으로 잡아매거나 호위토록 했다.

연산군 때 배다리 건설에 800척의 배가 들어간 것에 비하면 매우 경제적이었다.

배다리 건설에 사용되는 재료는 보관했다가 재활용했다.

1789년 10월에 정조는 한강 뚝섬에 배다리를 건설했다.

경기도 양주 배봉산에 있던 사도세자의 묘소를 수원으로 옮기면서 상여가 강을 건널 때 이용하기 위해서였다.

한강에 배다리가 놓인 것은 이때가 처음은 아니었다. 15세기 초에 지금의 서울 송파인 마전포에 배다리를 설치한 기록이 나오고,

1740년에 영조가 개성을 방문하면서 임진강에 배다리를 놓은 적이 있었다. 영조가 배다리를 택한 것은 배를 이용하는 것보다

 비용은 많이 들지만 안정성이 높았기 때문이었다. 정조가 만든 배다리는 비용을 더욱 줄이면서 안정성을 높인 것이 특징이다.

정조가 한강에 배다리를 만든 것은 두 가지 이유에서였다.

뗏목에 상여를 싣고 폭이 넓은 한강을 건너는 것이 불안했고, 음력 시월의 찬바람에 강 중앙이 얼어붙어 배가 움직이기

어려울 것이라는 점도 고려했다. 이때 만든 배다리는 큰 배 77척을 나란히 배열하여 대나무와 칡 끈으로 연결시키고,

배 위에 모래와 흙을 깔고 잔디를 덮는 방식이었다.

사도세자의 상여가 한강을 건너간 뒤에는 정조 자신이 배다리를 건너 수원을 왕래했다.

작가 한승원은 그의  장편소설 <시대를 일깨운 역사의 웅대한 산 '다산'>에서 정조가 정약용이 설계하고

지은 배다리를 이용해 수원 화성으로 가는 장면을 그리면서 그 배다리를 만들게 된 과정을 이렇게 전한다. 

화성으로 행궁할 때 정조임금은 대장군 복장을 하고 마차에 올랐다.

정약용에게 병조참의를 제수하고 군복을 입혀 자기의 옆에 붙어서 따르게 했다.

정약용은 활과 화살 통을 짊어지고 한 손에 장도를 들었다.

정약용은 화성으로 가는 내내 가슴이 뻐근하고 뜨거웠다.

임금의 행열이 장대한 배다리(舟橋) 위를 나아갈 때 그는 우둔거리는 가슴을 주체할 수 없었다.

그 배다리는 남인 계열의 정약용과 소론계열의 서영보 두 사람이 주축이 되어 만든 것이다.

정조임금은 1777년 노론의 집요한 반대를 뚫고 왕위에 올랐다. 이후 아버지 사도세자의 추승작업에 전력하였다.

먼저 양주 배봉산에 있던 무덤을 수원으로 옮겨 현륭원이라고 하였고 수원에 화성을 조성하여 탄탄한 방어력을 지닌

새 상업도시를 만들었다.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소를 옮긴 이후 자주 화성까지 행차하곤 한 데에는 아버지 사도세자를

명예롭게 복원함으로써효를 행하고 왕권을 만천하에 과시하려는 뜻이 들어 있었다.

그것은 그가 자주 사대에 올라 과녁을 향해 시위를 당기곤 하는 것과 같은 것이었다.

화성으로서의 행궁에서 최대 난제가 한강 건너기였다.

정조임금은 먼저 주교사를 설치하였고 주교사에서는 오래 전 중종 임금이 아버지 성종의 선릉 참배하기 위해

만든 바 있는 배다리를 참고하여 '주교절목'을 만들어 정조 임금에게 보고하였다.

그것을 읽고난 정조 임금은 그 계획이 치밀하지 못함을 조목조목 짚어가며 비판하고

직접 '주교지남(舟橋指南)'을 써서 배다리를 놓는 기본 원칙을 제시하였다.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을 맞이하여 대대적인 화성행차를 원할하게 하기 위한 새로운 배다리 건설을 지시하였다.

정조 임금의 명을 받은 사람은 노론 계열의 중신인 서용보와 화성축조위 설계도를 만든 바 있는 남인 계열의

정약용이었다. 정조 임금은 의도적으로 주교사 안에, 노론 계열 한 사람과 소론 계열 한 사람을 기용한 것이다,

한데 이들 두 사람은 배다리를 설치할 장소를 놓고 부딪쳤다.

서용보는 압구정 인근의 동호  물어울 위에 설치하자고 주장하였다.

"동호에 설치하게 되면 과천까지 가는 길이 그만큼 가까우므로 길 닦는 일이 수월하고 경관도 빼여납니다."

정약용은 노량진에 설치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노량진 양쪽 언덕이 높고 수심이 깊으며 물 흐름이 빠르지 않을 뿐만아니라 강폭이 가장 좁습니다.

동호는 노량진에 비하여 강폭이 훨씬 넓으므로 동호에 설치할 경우  노량진에 설치하는 것보다

큰 배가 열 척 이상은 더 필요하게 됩니다."

양쪽의 주장이 팽팽하였으므로 마침내 그들은 정조 임금에게 결정해달라고 청했고 정조 임금은 정약용의 손을 둘어주었다.

그 결정이 내려진 뒤부터 서용보는 자존심이 상한 듯 입을 굳게 다물고 정약용과 눈도 마주치려 하지 않았다.

정약용은 서용보에게 정중히 머리를 숙여 화해를 청했다.

"송구하옵니다. 소인이 대감의 체면을 생각지 못한 채 일만 생각하고 고집을 부렸습니다."

서용보는 선선히 웃으며 "뭐 그깐 일로...."하고 말했지만 이후 그 일에 손을 대려 하지 않았다.

정약용은 혼자서 휘하의 관리들과 더불어 '주교지남'을 바탕으로 공사를 추진하여 배다리를 완공하였다.

배다리에 쓸 배는 새롭게 만들지 아니하고 한강에 드나드는 경강선과 강에서 고기잡이를 하는 큰 어선들을 빌려다가 활용했다.

세곡 어물 옹기 소금 따위의 운송을 담당하던 배들과 어선들에게 적당한 이권을 주고 행차 때에만 활용하기로 한 것이다.

먼저 남쪽 노량진에서 북편의 한강나루를 향해 일직선으로 배를 가로로 잇대어 놓되 배의 머리와 꼬리를

장구 치듯이 엇갈린 형태로 배치하여 닻을 단단히 놓아 고정시켰다.

강심에 해당되는 가운데 부분의 배다리는 도도록한 무지개 모양으로 설계되었으므로 가운데 부분에는 유다르게 큰 배를

배치하고 남쪽과 북쪽으로는 점차 조금씩 작은 배들을 배치하였다.

배들의 배치가 끝난 뒤에는 실팍한 소나무 널판지들을 이용하여 배와 배를 이었고 널판자 위에는 잔디를 깔아 푹신푹신하게 하였다.

배다리의 폭은 24척이었으므로 아홉 사람이 일렬로 나란히 걸어갈 수 있었다.

또 맨 가장자리 걸어가는 사람이나 말이 강물에 빠지지 않게 하기 위해 배다리의 양편에 난간을 설치하였다.

그리고 배다리 양끝과 중간부분에 세 개의 홀살문을 세웠다.홍살문은 배다리가 신성하고 위엄있는 공간임을 강조하는 것이었다.

화성으로 가는 행렬을 보기 위해 배다리를 중심으로 한강의 양쪽 연안에 백성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배다리는 임금의 뜻과 서용보 정약용 등의 주교사 관리들 경강상인들 배다리가 존치하는 동안

불편을 감수하여 준 어민들....실로 온 나라 백성의 힘이 뭉쳐진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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