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정 앞에 넙죽 엎드려 두 번 절하더니
상주와 맞절도 하고
소주 한 병만 주쇼
소주 한 병이면 됩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사내는 부랑자다
막걸리 심부름을 해본 적 없다
처음 입에 댄 술이 소주 한 병
그때 성의중학교 3학년
감천甘川 시냇가 둑에 앉아 흘러가는 물을 보며
병나발을 끝까지 불었다
서서히 도는 세상
빙글빙글 하늘이 돌고 강이 돌고
물을 마셨는데 몸이 타올라
껑충껑충 뛰며 노래 부르며
김천 시내를 휘젓고 다녔지
해는 중천에 떠있건만
병원 뜰 벤치에 좀 전의 그 사내
드러누워 코 골고 있다
머리맡께 땅바닥에 빈 소주병과
새우깡 빈 봉지 하나
저보다 더 깊은 잠이 어디 있으랴
땅이 집이니 이사 갈 일 없고
죽은 자가 낸 술을 마시고
산 자가 잡에 빠져있다
술로 온몸 불태운 기쁨에 푹 젖어
[생애를 낭송하다], 천년의시작,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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