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근(善根)이란
불교가 처음 중국으로 전해 졌을 때 빨리어 ‘꾸살라 캄마’라는 말을 중국인들은 선업(善業)이라고 번역하고 ‘아꾸살라 캄마’를 불선업(不善業) 내지 악업이라고 번역했다.
구마라집과 현장의 번역에서도 똑같이 선근(善根)으로 되어 있다 보니 한글로 해석할 때도 악의 반대 개념인 선으로 해석하는 경향이 많이 있습니다. 즉 과거 수많은 부처님께 착한 인연의 뿌리를 심어 놓았다는 정도로 이해하는 것이지요.
과연 어떤 것이 착한 것이고 어떤 것이 악한 것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진리에 있어서는 선악이 서로 나뉘지 않는다고 했는데 어찌 선근만을 문제 삼고 있는가.
물론 선에 대한 해석을 선악의 차별되는 개념으로 이해하지 않고 선악을 초월하는 절대선, 초월선의 개념으로 이해할 수도 있겠지만 각묵스님이 번역하신 산스크리트 원전 주해에 보면 선근은 단순한 악의 반대로서의 선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 ‘지혜로운 주의’로써 이해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선(善)이란 빨리어로 ‘꾸살라(kusala)’인데 이는 ‘꾸사라’라는 풀을 자른다는 의미이다. 이 풀은 억새풀처럼 억세고 날카로워 자를 때 마음을 주의집중하지 않으면 손을 베일 수도 있기 때문에 ‘꾸살라’는 의미가 ‘지혜로운 주의’ 혹은 ‘지혜로운 마음 주의 집중’ ‘마음 집중’으로 이해된다는 내용입니다. 초기 불교에서는 선근(善根, kusala mula)을 탐진치(貪瞋痴)가 없음을 의미했다.
즉 선근이란 마음을 기울여 주의 집중하는 수행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번역된다면 한량없는 부처님께 선근을 심었다는 말은 한량없는 부처님께 마음을 기울여 주의 집중하는 정념의 수행, 관의 수행 인연을 심었다는 말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선근을 심었다는 것은 수많은 부처님에게 악한 인연이 아닌 선한 인연을 심었다는 의미가 아니라, 수많은 부처님에게 지혜로운 마음을 주의 집중하여 분별없이 관하는 수행의 인연을 심었다고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이해되었을 때 비로소 이 분의 가르침이 좀 더 선명하게 다가올 것입니다. 과거 수많은 부처님과 마음집중의 수행인연을 지었으니 그 수행의 인연으로 인해 여래가 멸한 뒤 후 오백세에도 능히 계를 지키고 복을 닦는 이가 있어서 이같은 글귀, 즉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을 타파하라는 가르침에 능히 신심을 내어 진실하게 여길 것이라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참된 기도며 수행은 번뇌를 비우고, 분별을 비우며, 바램도 놓아버리고 욕심도 놓아버리는 데서 옵니다. 부처님은 이미 다 알고 다 보고 계시는데, 애써 그것들을 다시금 되새길 필요가 뭐가 있겠습니까.
다만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바로 그것을 그냥 놓아버리는 것입니다. 그저 부처님께 다 바치고, 부처님께 다 맡기는 것입니다. 그렇게 다 맡겨버렸을 때, 내 마음은 맑게 비워지고 텅 비어 참된 울림이 있게 됩니다. 그 때 비로소 부처님과 진짜 선근을 맺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잔뜩 짊어지고 복잡한 때에는 부처님을 만날 수 없으며, 부처님 또한 우리의 바램을 들어줄 수 없습니다.
그 복잡하고 정신없는 바람과 소망들을 그저 부처님께 다 바치고 공양올린 뒤 내 마음을 평화롭게, 고요하게 텅 비울 수 있다면 그 때 비로소 참된 성취가 있을 것이고, 참된 공덕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이 글귀를 듣고 한 생각에 청정한 믿음을 낼 것’ 이라고 하였는데, 그 글귀는 구체적으로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앞의 분에서 말했던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凡所有相 皆是虛妄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 라는 게송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게송 한 구절을 보고 문득 청정한 믿음을 낸다는 것은 그야말로 한없는 복덕을 짓는 것에 다름이 아닙니다.
복덕 중에 가장 큰 복덕이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진리를 깨닫는 것입니다. 물질적인 것을 얻는다거나, 바램을 성취한다거나, 지식을 얻는다거나, 지위나 명예를 얻는다는 것들은 유루복(有漏福: 끝이 있는 복으로 언젠가 소멸되는 복)으로 유한한 것들이지만, 청정한 믿음을 일으켜 진리를 깨닫는 일은 무루복(無漏福 : 끝이 없는 복으로 무한정한 복)으로 한도 끝도 없는 무량한 복인 것입니다.
유루복들은 짓는 내가 있고 받는 내가 있다 보니 내가 지은 복 만큼만 받을 수 밖에 없고, 지은 복을 다 받고 나면 복의 텅 비고 말지만, 무루복은 ‘나’라는 아상이 없기 때문에 짓고 받는 주체가 공하게 되고, 그랬을 때 비로소 온 우주법계를 다 먹이고도 남을 만큼의 무량한 복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한 생각에 온 우주를 다 먹이고 남을 만큼의 복 그 정도는 되어야 수행자의 복이라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산스크리트 원문에서는 이 부분을 이렇게 옮기고 있습니다. ‘수보리여, 그들 모두는 측량할 수 없고 셀 수 없는 공덕의 무더기를 쌓고 얻게 되리라’ 다시 말해 ‘측량할 수 없고 셀 수 없는 공덕의 무더기’ 라고 하여 무량한 복을 언급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무릇 형상 있는 것은 모두 허망한 것이니, 만약 모든 형상이 형상이 아님을 보면 곧 여래를 보리라’ 는 한 글귀를 보고 한 생각에 이것이야말로 진리의 말씀이구나 하는 청정한 믿음을 일으킨다면, 한량없는 무량한 복덕을 얻을 것이라고 한 것입니다.
‘나’라는 형상도 형상이 아니며, 무릇 일체 모든 형상이 형상이 아님을 바로 보았기 때문에, 복을 짓고 받는 주체도 사라지고, 그 때 비로소 일체 모든 존재가 바로 내가 되고, 이 세상 삼라만상 그대로가 나와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온전한 하나’가 되었을 때, 무량한 복은 오는 것입니다. 아상이 있으면 무루복은 없습니다. 아상(我相)이 없는 텅 빈 깨달음 속에서 무루의 복, 무량대복은 오는 것입니다.
출처 : 이 글은 선업에 관한 여러 스님들의 글을 참고한 것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