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두발의 원자폭탄이 떨어지고 남쪽에서는 미군이, 북쪽에서는 소련군이 북만주를 휩쓸고 있었던 45년 8월 14일 오후 8시 30분. 아침부터 시작된 만 하루동안의 회의끝에 총리대신 스즈키 간타로는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요구하는 포츠담 회담을 수락한다는 조서안을 천황 히로히토에게 상신합니다. 천황의 재가와 내각의 모든 각료들이 연서한 종전조서는 중립국인 스위스를 통해 4대 연합국(미, 중, 영, 소)에 정식으로 통보되었습니다.
종전조서에 수락하는 히로히토.
※ 사진출처 : http://cafe.daum.net/3133815/5cNr/255?docid=19ti05cNr25520110830233007
다음날 정오. "제국신민"들을 향해 전날밤 미리 녹음했던 히로히토의 목소리가 라디오를 타고 전파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내용에는 "항복"이나 "패전"이라는 말도, 무모한 전쟁과 침략에 대한 반성도 없었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전쟁은 전적으로 자신의 의지가 아니었으며 연합군의 잔혹한 공격으로 무고한 백성들이 죽어가는 것을 더이상 지켜볼 수 없어 부득이하게 전쟁을 중단한다는 자기 변명과 궤변의 연속이었습니다. 더욱이 천황과 내각은 여전히 무모한 본토결전을 고집하는 군부를 어떻게 하면 억누를수 있을까에만 집중한 나머지 정작 패전이후의 대책이나 식민지와 점령지의 광대한 지역에 흩어져 있는 250만명의 군인과 3천만명이 넘는 민간인들의 귀환에 대해서 어떤 고민도 하지 않았습니다. 말그대로 그들은 버려졌고 일본정부는 무책임하게도 연합군에게 떠넘겨 버렸습니다.
패전을 알리는 천황의 "옥음방송"이 일본 본토와 식민지 전역에서 흘러나오자 일본인들은 비통의 눈물을 흘렸고 그들로부터 온갖 고통을 겪었던 식민지인들은 감격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 사진출처 : http://blog.naver.com/choi1040/30001068583
같은날 오전 10시. 워싱턴을 비롯해 전세계 주요 도시에서도 일본의 포츠담 선언 수락과 전쟁의 승리를 알리는 뉴스가 발표되었고 전 세계는 2차대전의 종전에 기뻐하는 수많은 군중들의 물결로 가득 찼습니다. 군인과 민간인을 합해 5천만명이상의 사상자를 낸 인류 최악의 전쟁은 드디어 그 종지부를 찍은 것이죠.
승리의 소식에 흥분한 것은 중국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중경과 남경, 상해의 거리마다 청천백일기가 휘날리고 하늘에는 폭죽소리가 펑펑 울려 퍼졌습니다. 그러나 연합국들중에서 가장 긴 시간동안 일본과 싸웠고 가장 많은 희생을 치루어야 했던 중국에게 일본의 항복은 결코 극적인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절반의 승리에 불과했습니다.
독일군을 격파하고 파괴된 베를린의 국회의사당에 붉은 깃발을 꽂으며 승리를 환호했던 소련군과 달리 중국은 여전히 중국 대륙의 서남쪽으로 밀려난채 7월에 와서야 비로소 반격을 시작하여 그 전해에 빼앗겼던 영토를 조금씩 탈환해 나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관동군이나 남방전선은 완전히 붕괴되어 버렸지만 100만이 넘는 지나파견군은 건재했습니다.
중국에게 있어서 그 기나긴 전쟁은 어느날 갑자기 일방적으로 "끝났다"라고 통고를 받은 것이나 다름없었습니다. 베를린이 함락되고 히틀러가 자살하는 순간까지 싸웠던 독일과 마찬가지로 일본 역시 전 국토가 연합군에 의해 장악되기 전까지 항복하리라고는 상상할 수 없었습니다. 전쟁은 적어도 1년이나 1년반은 더 지속되리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에게는 그야말로 "자고 일어나니 끝났다더라"라는 말과 다를바 없었고 따라서 어리둥절했고 반신반의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일본이 실제로 항복을 선언하기 직전에야 장개석은 전쟁이 곧 끝날 것이라는 사실을 인식하였습니다. 그러나 승리를 자축하기에는 그의 앞에는 당장 해결해야 할 난제들이 산적해 있었습니다. 일본군의 무장해제부터 피점령지의 회복과 행정시스템의 복구, 치안의 확보, 친일 부역자(한간)들에 대한 처리, 피난민의 귀환, 파괴된 중국의 재건을 위한 원조 획득, 만주를 휩쓸고 만리장성까지 밀고 내려오고 있는 소련군을 멈추게 하기 위한 교섭까지. 중국은 그 어떤 것에 대해서도 준비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특히 홍콩 반환문제로 영국과 충돌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여전히 "대영제국"의 자존심을 내세우고 있었던 영국은 장개석의 거듭된 요청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양보하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처칠에게 홍콩을 중국에게 돌려주어야 한다고 말했던 루즈벨트와 달리 트루먼은 영국의 손을 들어줌으로서 아편전쟁이래 수모의 역사를 청산하려는 중국의 열망을 짓밟아 버렸습니다. 결국 8월 30일 영국군은 홍콩에 상륙하였고 9월 16일 홍콩총독인 다나카 히사카즈와 항복조인을 체결함으로서 홍콩은 다시 영국령으로 복귀합니다. 그로부터 40년후 1984년 12월 19일 영-중간에 "홍콩반환협정"이 체결되면서 1997년 7월 1일을 기해 155년만에 중국으로 반환될 수 있었습니다.
가장 심각한 위협은 연안이었습니다. 제2차 국공합작을 체결했을때만 해도 섬북의 작은 지방정권에 불과했던 중공은 중일전쟁에서 국민정부군과 일본군이 치열하게 싸우는 동안 한쪽에서 급격하게 세력을 확대하였습니다. 당초 겨우 4만 5천명에 불과했던 그들의 군대는 45년 8월 정규군 130만명에 민병 268만에 달하여 장개석으로서는 도저히 통제할 수 없을만큼 거대한 세력으로 성장하였습니다. 전쟁기간 내내 모택동이 외쳤던 "지구전략", "유격전술"이 과연 일본이 아닌 누구를 향한 것인지 이제 본격적으로 보여줄 참이었습니다.
일본의 패망이 가까워지자 그들은 발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소련군이 전격적으로 만주를 침공한 8월 9일. 모택동은 "대일구적최후일전"이라는 제목의 무장봉기격문을 전 예하부대에 하달합니다. 그 주된 내용은 "적극적인 해방구의 확대"와 "일본군의 무장해제", "주요 도시와 교통 요지의 장악"이었습니다. 또한 그는 "항일은 끝났다. 새로운 임무는 국내투쟁이다"라고 지시합니다. 그들은 드디어 그동안 숨겨왔던 야심을 드러낸 것이었습니다.
10일 밤 소련군의 만주진공을 돕고 일본군을 무장해제시킨다는 명분으로 "연안총부명령 제2호"를 내리고 화북, 열하, 만주 일대로 4개 집단군을 급파합니다. 특히 여정조, 장학시, 만의 등 팔로군내에 구 동북군출신 지휘관들을 찰합이성, 열하성, 요녕성으로 이동시킵니다. 15일에는 임표가 이끄는 1천명의 선견대가 열하성을 강행군하여 만주로 진입하였고 화남, 화중에 있던 공산군 부대들 역시 산동과 화북으로 북상합니다. 45년말까지 만주로 이동한 병력은 당간부들과 행정요원들까지 포함해 약 40만명이상이었습니다. 이들에게 부여된 임무는 주요 도시와 교통 요지를 신속하게 점령할 것과 일본군을 무장해제시킬 것, 만약 거부한다면 공격하여 괴멸시키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직접 일본군과 전투를 벌여 요충지를 점령하기보다는 소련군이 만주를 점령하고 국민정부군의 만주진입이 지연되는 공백을 이용해 오지지역을 중심으로 그들의 능력이 닿는데까지 장악해 나갑니다. 그 과정에서 만주와 화북 곳곳에서 국공과의 무력 충돌이 벌어집니다. 현지의 일본군 역시 여기에 휘말려 적어도 3천여명 이상의 전사자를 내었으며 그들 스스로도 국공 양측에 직간접적으로 가담하여 싸우기도 합니다. 특히 공산군은 투항한 일본군과 만주군 장병들(주로 파일럿, 위생, 차량, 통신 등의 기술을 가진 자들)을 적극적으로 포섭하여 내전에 활용하였습니다. 국민정부 역시 마찬가지로, 염석산의 제2전구만 해도 항복한 약 1만여명의 일본군을 공산군과의 전투에 투입하였습니다. 과연 얼마나 많은 이들이 양 진영에 참전하고 또 그 과정에서 죽었는지는 아마 앞으로도 정확하게 알 길은 없을 것입니다.
만주으로 진격중인 공산군. 그들은 일본군 38식 소총과 체코제 ZB-26 경기관총, 영국제 브랜 기관총 등 일본군과 국민정부군으로부터 노획한 잡다한 무기로 무장하고 있었습니다. 장비와 훈련도 매우 빈약하여 한낱 유격대에 불과했던 그들은 국공내전 초반 미국식 기계화병기로 무장한 국민정부군의 공격을 받아 여지없이 박살났으나 정치적인 문제와 병참의 부담으로 국민정부군의 추격이 지연되자 주력을 보존한채 북만주의 산악지대로 후퇴할 수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소련군은 일본군으로부터 노획한 막대한 무기와 군수품, 식량을 제공함과 함께 현대적으로 다시 훈련시켰고 그들은 막강한 군대로 다시 태어날 수 있었습니다. ※ 사진출처 : 맨앳암즈, 중국내전 1911-1949
이런 상황에서 8월 15일 항전승리를 알리는 연설에서 장개석이 "이덕보원(以德報怨)", 즉 "덕으로 원수를 갚아야 한다"라고 말한 것은 과연 어떤 의미로 봐야 할 것인가. "원한이 있는 자에게는 도리어 덕으로 갚는 것이다"라는 논어의 이 한 구절은 덕을 강조하는 중국인 특유의 표현법이기도 하지만, 관대함을 보여줌으로서 본격적으로 시작된 공산군과의 경쟁에서 일본군의 원만한 협조를 얻기 위한 제스쳐라는 것 또한 부정할 수 없을 것입니다. 또한 그는 중국의 통일과 부흥을 위해 일치단결할 것을 호소하였습니다. 이는 점점 갈등이 격화되어 가는 공산군을 겨냥한 것이었습니다.
8월 15일 항일전쟁의 승리에 환호하는 군중과 장개석
※ 사진출처: http://china.joins.com/portal/article.do?method=print&total_id=4385358
공산군이 적극적으로 세불리기에 나서자 이를 지켜 볼 수만 없었던 장개석도 8월 11일 3가지 명령을 하달합니다.
1. 주덕의 공산군 : 모든 소속 부대들은 현 위치에 주둔하면서 차후 명령을 기다릴 것이며 일본군이나 괴뢰군에 대한 무단 공격이나 무장해제를 금함
2. 일본군 및 괴뢰군 : 주둔 지역에 대한 치안을 책임질 것이며 공산군에게 투항하지 말 것
3. 국민당군 : 적극적으로 이동하여 일본군을 무장해제 시키며 절대 긴장을 늦추지 말 것
그러나 공산측은 주덕과 팽덕회의 이름으로 장개석의 명령을 정면에서 거부하고 지나파견사령관인 오카무라대장에게 공산군에게 항복할 것을 요구합니다. 물론 오카무라는 이를 거부했고 17일 장개석의 명령에 전적으로 복종하겠음을 중경으로 회신합니다. 그리고 예하부대에 "중경정부가 접수할때까지 주둔지에서 이탈하지 말고 기다릴 것이며 절대 공산군에게는 항복하지 말 것, 필요하면 무력을 써도 좋다"라고 지시합니다.
당시만 해도 국공내전에서 장개석이 패할 것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던 오카무라는 전후 일본의 부흥을 위해서는 중국과의 관계 개선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국민정부의 요구에 적극적으로 협력하여 만주를 제외한 중국 본토에서 지나파견군의 무장해제와 행정권의 이양은 큰 혼란없이 비교적 순조롭게 진행되었습니다. 덕분에 그는 전범으로 기소되어 국민정부의 군사법정에 섰음에도 어떠한 처벌도 받지 않고 일본으로 송환될 수 있었죠.
8월 27일 오후 5시. 남경성 밖의 대교 항공기지에 7개의 수송기가 착륙하였고 100여명의 국민정부군 병사들이 속속 내립니다. 상해에도 제3방면군 사령관 탕은백의 선견대가 도착합니다. 그리고 이어서 국민정부군 부대들이 속속 도착하였고 9월 8일에는 장개석을 대신하여 일본의 항복을 받기 위해 하응흠이 남경에 도착합니다.
9월 2일 도쿄만 앞에 정박한 전함 미주리호의 선상에서 미국과 일본간의 항복조인식이 거행된지 일주일후인 9월 9일 중일 양국 역시 남경의 중앙군관학교 강당에서 지나파견군 총사령관 오카무라 야스지 대장과 중국 육군총사령관 하응흠 일급상장 사이에서 항복조인식이 열립니다.
남경에서의 항복조인식. 왼쪽이 중국 육군총사령관 하응흠 일급상장, 오른쪽이 지나파견군 총사령관 오카무라 야스지 대장 ※ 출처 : http://gall.dcinside.com/list.php?id=worldwar2&no=45651
항복조인에 따라 만주를 제외한 중국 본토와 대만, 북위16도 이북의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에 주둔한 일본군은 모두 국민정부군에 항복하였습니다. 그 숫자는 105만명의 지나파견군을 포함해 군인, 민간인 모두 합해 311만 6천명에 달했습니다. 이들의 송환은 미국으로부터 수송선과 상륙용 LST를 대여받아 진행되었고 46년말까지 진행되었습니다.
37년 7월 7일 노구교 사변으로 시작된 8년하고도 1개월에 걸친 전쟁은 이것으로 막을 내렸습니다.
국민정부의 공식 통계에 따르면, 중국군은 전사자 103만명을 포함해 총 321만명의 사상자를 냈고, 민간인 피해는 913만명에 달한 것으로 되어 있으나 실제로는 2천만명이 넘는다고 추산하고 있으며 근래 일부 학자들은 3,500만명에 달한다는 주장을 합니다. 또한 전쟁으로 입은 손실과 전쟁비용은 약 559억$에 달한다고 추산되었습니다.
일본군은 중국전선에서 40만5천명이 전사했으며(해군 7,600명 포함) 총 241만8천명의 사상자를 냈습니다. 이 숫자는 태평양전쟁동안 총 전사자 194만명중 약 1/5에 달하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태평양전쟁기간 미군의 전사자가 약 10만명, 영국군이 3만, 네덜란드군이 2만7600명 정도였습니다. 그런 점에서 2차대전기간 중국이 겪은 고통은 거의 소련과 맞먹는 것이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의 기여나 역할에 대해서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있는 것은 무엇때문인가.
사실 그동안 영, 미권의 학자들은 미국이 수행한 태평양전쟁을 중심으로 기술하면서 중일전쟁에 대해서는 단지 태평양전쟁의 한 부분으로만 아주 지엽적으로 취급하였습니다. 더욱이 전쟁기간 중국에 체류하면서 중경정부와 중국군을 지켜보았던 서방의 관찰자들은 자신들의 관점에서 그들을 매우 부정적으로 바라보았고 이후에도 중일전쟁을 연구하는 역사가들에게 절대적인 영향을 주었습니다. 바로 대표적인 인물이 스틸웰이나 데오도어 H.화이트와 같은 사람들이었죠. 그러나 그것은 당시의 중국 사회에 대한 이해부족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중국은 그들이 살고 있는 세상과는 달랐고 같을 이유도 없었습니다. 여기다 국공내전에서 장개석이 모택동에게 패배하자 미국의 대중정책의 실패는 전적으로 장개석정권의 모순탓으로 돌려졌고 중일전쟁에서의 그의 역할마저 철저하게 평가절하되었습니다.
또 한가지는 국공내전에서 승리한 모택동은 적이었던 장개석정권에 대해 "봉건적 파쇼적 독재정권"으로서 "타도의 대상"으로 규정하였습니다. 항전기간 국민정부와 국민정부군의 그 어떤 역할도 완전히 부정되었고 공산군의 투쟁만이 강조되었습니다. 대만을 제외하고는, 전후 서방과 일본학계 역시 모택동 중심의 "공산혁명사"에 편중되어 공산주의 특유의 정치적 선전과 다를바 없는 소위 "마오식 결론"을 무비판적으로 답습하였습니다. 양안의 정치적인 특수성으로 인해, 중일전쟁에 대한 연구는 편향되고 왜곡되었고 대부분 정치사, 사상사에만 편중된채 막상 전쟁 그 자체에 대해 군사적인 측면에서의 연구는 여전히 미진한 실정입니다.
그러나 중일전쟁은 태평양전쟁의 한낱 일부가 아니라 오히려 일본이 패망할 것을 알고서도 대미개전을 선택하지 않으면 안되도록 만들었던 가장 중요한 원인이었습니다. 중국과의 전쟁에서 완전히 수령에 빠져 국내 경제가 붕괴의 위기에 직면하자 "천운"에 걸고 벌인 도박이 바로 태평양전쟁이었습니다. 거꾸로 말해서 중국이 손쉽게 굴복했다면 태평양전쟁 자체가 발발하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남방전선의 악화에도 불구하고 육군의 2/3이상이 중국군의 반격을 우려해 중국과 만주에 항시 묶어 있어야 했습니다. 중국이 굴복했다면 일본은 중국전선에 배치되었을 전력을 소련에게 돌렸거나 반대로 인도, 호주까지 진격했을지도 모릅니다. 연합군은 훨씬 더 어려운 싸움을 강요받았을 것입니다.
스틸웰은 중국이 공산군과의 내전에만 광분할뿐 연합국의 승리에 무임승차하려고 한다고 주장했지만 이는 명백히 부당한 비난입니다. 중국은 소련이나 영, 미와는 달리 근대전을 수행할 수 있는 충분한 준비없이 일본의 침략을 받았습니다. 아시아에서 가장 근대화된 국가였던 일본은 전쟁수행능력에서 거의 프랑스와 맞먹는 수준이었습니다. 외부의 지원은 턱없이 미미한데다 전형적인 농업국가로서 단지 소총과 경화기를 소량 생산할 수 있을 뿐인 중국이 과연 무엇을 할 수 있는가.
그럼에도 그들은 단지 수동적으로 싸운 것이 아니라 축차적으로 준비한 요새선에서 적의 진격을 지연시키고 후방에서는 유격전을 전개해 병참을 교란했으며 이후 적극적으로 반격하였습니다. 중국군은 통상 매전투마다 적보다 훨씬 많은 희생을 치루었지만 이것은 그들의 허약함이 아니라 오히려 끈기와 인내심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중일전쟁 초반 소련의 군사고문관이었던 알렉산드르 칼라야긴이 "공격 명령을 받은 지휘관들이 멋대로 후퇴하여도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았다"라고 한 것은 단지 부분적으로만(주로 전쟁 초기) 맞는 말일뿐입니다. 장개석은 스탈린처럼 소위 형벌대대를 운용하면서 무단후퇴한 자들을(심지어 어렵게 포위망을 돌파한 자들까지) 처벌할 수 있을만큼 강력한 권위를 가지지는 못했지만 산동주석 한복구를 비롯해 적전도주한 많은 지휘관들을 본보기로 삼았습니다.
그가 자신의 군대는 의도적으로 보존한채 지방군벌군만을 소모품으로 활용했다는 것 역시 왜곡입니다. 장개석은 황포군관학교 졸업생들이 모범이 되기를 요구했으며 그들은 장개석의 명령에 절대적으로 복종하여 대부분의 전투에서 최일선에서 싸우거나 전의가 낮은 지방군벌군에 대한 독전의 역할을 맡았습니다. 따라서 많은 부대들은 장개석의 "절대 사수"에 따라 월등히 우세한 화력과 기동력을 갖춘 적을 상대로 그 자리에서 문자그대로 전멸할때까지 싸웠으며 2명의 집단군 사령관을 비롯해 206명의 고위급 장성들이 전투중 전사하였습니다.
서구의 관찰자들의 시각에서 중국군의 작전술이나 전술역량은 분명 높이 평가할 만한 수준은 아니었습니다. 장개석을 비롯해 고위 지휘관들의 대부분은 군벌시대에 초급수준의 군사교육을 6개월에서 1년정도 받았을뿐이었고 이조차도 서구 기준에서는 매우 형편없었습니다. 병사들도 단지 생계를 목적으로 입대한 사회 최하층민들이었습니다.
더욱이 지휘체계조차 통일되지 않은 상태에서 부대간의 협조나 지휘 통신 시스템조차 제대로 갖추지 못했고 심지어 합동훈련조차 해본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전쟁을 통해 초기의 문제점들을 지속적으로 개선해 나갔으며 중국 나름의 방식대로 전쟁을 수행함으로서 일본군은 개전 1년만에 공세 종말점에 도달하였고 더이상 전진하지 못한채 아무 의미없는 소모전에 끝없이 허덕여야 했습니다.
8년의 전쟁기간 39년말 야심찬 동계공세를 비롯해 장개석은 제한적인 공세를 시도하기도 했습니다. 그런 공세가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했던 것에 대해서 로이드 E. 이스트만은 단지 지방군 사령관들의 의지부족으로 돌렸지만 근본적으로는 도로망과 차량의 부족, 제공권의 열세에 있었습니다. 1차대전이래 근대전에서 대규모 공세를 시작하기 위해서는 공격지점에 병력은 물론 대량의 식량과 탄약을 신속하게 집약시킬 수 있어야 하고 야전군이 진격함에 따라 차량으로 지속적으로 군수품을 실어날라야 그들의 공격력을 지탱할 수 있는 것입니다. 광대한 중국 대륙에서 이런 병참능력은 중국군은 물론 일본군에게도 없었습니다.
중일전쟁은 독소전쟁이나 유럽전쟁과는 다른 것입니다. 양측 모두 결정타를 먹일 수 없었으며 먼저 인내심이 바닥나 쓰러지는 쪽이 지는 것이고 끝까지 버티는 쪽이 이기는 전쟁이었습니다. 이런 점에서 베트남전이나 아프간전쟁과도 유사하지만 다윗이 골리앗을 꺾은 대표적인 두 사례조차 사실은 외부의 막대한 물적 지원이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것도 간과해서는 안됩니다.
장개석이 결코 뛰어난 군사전략가라고 할 수는 없지만 대신 지도자로서 명확하고 일관성있는 국가전략과 항전방침을 국민들에게 제시함으로서 국론을 통일시켰습니다. 그의 방법은 시간이 오래 걸리고 국민들의 고통을 수반할 수 밖에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굴복하지 않겠다고 결정한 이상 어떤 더 나은 방법이 있었을 것인가. 초반의 심각한 패배와 왕정위의 배반에도 불구하고 중국은 분열되지 않았으며, 오랜 인내심의 싸움에서 결국 중국이 이기고 일본이 패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이런 방식의 전쟁은 "전쟁의 승리는 오로지 적 주력의 격멸에 있다"라고 주장한 클라우제비츠식 사고에 빠져 있던 서구인들의 관점에서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이지만 그는 손자병법으로 대표되는 동양의 전쟁 방식으로 싸웠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전란의 끝은 그러나 새로운 혼란의 시작이었습니다. 일본의 항복은 당초 중국이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빨리, 그리고 갑작스럽게 다가왔습니다. 원래부터 장개석정권은 일종의 과도기에 가까웠고 중국의 거대한 국토의 대부분은 여전히 청조시절의 반봉건적인 색채가 그대로 남아있었습니다. 근대적인 행정, 사법체계는 아직도 걸음마 수준이었죠. 게다가 일본의 오랜 침략으로 국가 체제와 행정기구의 많은 부분이 파괴되었습니다. 이는 전쟁이 끝났다고 해도 하루아침에 재건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었습니다.
일본의 항복에 따라 국민정부군과 행정기구들은 미군의 지원을 받아 동쪽으로 진격하였고 1만 2천명의 미해병대가 산동반도의 끝자락에 있는 청도를 통해 상륙한 것을 비롯해 11만 3천명의 미군이 북평, 천진, 남경 등 연안가의 주요도시에 진입하여 일본군을 무장해제시킵니다.
그 과정에서 보여준 것은 말그대로 혼란과 무능, 부정부패함이었습니다. 일본에 협력했던 "한간"들은 국민정부의 묵인하에 여전히(비록 일시적이었지만) 요직에 앉아 있었습니다. 대표적인 예가 주불해였습니다. 왕정위의 남경정권에서 행정원 부원장이자 재정부장, 상해시장이기도 했던 그는 "상해지구 특별행동총대사령"으로 임명되어 상해, 항주지구의 치안을 맡았습니다. 그러나 곧 국민정부군이 피점령지를 회복하면서 장개석의 관용을 기대하고 있었던 한간들은 모조리 체포되어 법정에 섰습니다.
괴뢰정권의 요직에 있었던 거물들은 공개재판을 거쳐 신속하게 총살당했지만 혼란과정에서 많은 이들이 뇌물을 이용해 형을 감형받거나 무죄로 석방된 것도 부정할 수 없습니다. 또한 친일부역자라고 해도 그 내용은 간단하게 구분할 수 없었습니다. 오로지 개인의 사리사욕을 목적으로 한 자, 위장협력한 자, 화평만이 중국이 살 길이라고 생각한 자... 상당수는 전쟁기간 중경에서 침투시킨 특무요원들이거나 또는 그들과 직간접적으로 연결된 사람들이었고 또한 그 중에는 중국과 일본 양쪽에서 양다리를 걸치고 이중첩자 노릇을 한 자도 있었습니다. 그러니 도대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를 "한간"으로 볼 수 있을 것인가.
45년 11월부터 본격적으로 전국에서 일제히 한간이 고발, 체포되기 시작하였고 47년 말까지 한간죄로 기소된 자는 30,828명, 불기소 처분이 20,718명, 무죄로 선고된 자는 6,152명, 형을 선고받은 자는 15,391명이었습니다.(여기에는 군인으로 기소되어 군사재판을 받은 숫자는 포함되지 않음) 그러나 국공내전이 격화되고 국민정부군이 남쪽으로 패퇴하기 시작하면서 한간재판은 흐지부지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일본인이 남긴 막대한 물자와 공업시설에 대한 접수와 한간들의 재산몰수에서도 부패한 관료들의 농간으로 상당한 자산들이 국가로 귀속되는 대신 개인의 뱃속으로 들어갔고 피점령지에서의 물자부족과 불공평한 화폐교환으로 인한 통화팽창은 심각한 인플레이션으로 이어졌고 국민정부의 신뢰성이 실추되었습니다.
특히 이런 현상은 만주와 대만에서 가장 심각했는데, 국민정부는 이 지역의 통치권을 현지민들의 자치에 맡기는 것을 거부하였고 국민정부가 파견된 관료들은 동포가 아닌 지배자로서 군림하였습니다. 게다가 일확천금을 노리고 본토에서 넘어온 상인들은 부패한 관료들과 결탁하여 온갖 횡포를 부립니다. 이때문에 만주와 대만의 경제는 급격하게 악화됩니다. 국민정부의 권력 남용에다 무능함, 여기에 언어와 문화적인 차이까지 겹쳐 쌍방의 갈등은 점점 고조되었고 원성은 점점 높아졌습니다. 이로 인해 국공내전이 발발하자 동북인들은 공산군을 전폭적으로 지지하여 공산군이 내전에서 승리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제공하였고 대만에서는 이른바 "2.28"사건이라 불리는 대규모 시민 봉기가 일어나고 말았습니다.
47년 2월 28일 이른바 "2.28"사건 당시 대만 시내에서 시위중인 데모대. 장개석은 대만 주석 진의의 요청을 받아 병력을 증원한후 무차별로 학살극을 벌여 적어도 3만명이상의 사망하였으며 대만 전체가 초토화되었습니다. 3월 17일 국방부장 백숭희가 직접 대만으로 와서 수습하면서 비로소 살육은 멈추었습니다. 이 사건은 장개석 최악의 오점이었습니다. 한편 학살에 앞장섰던 진의는 이후 절강성 주석으로 부임했으나 공산당과 내통한 혐의로 체포되어 50년 6월 타이베이시 교외에서 처형당했습니다. ※ 사진출처 : 위키백과
45년 가을이 되자 평화와 안정 대신 내전의 가능성은 점점 높아지고 있었습니다. 모택동은 이미 장강을 경계로 중국을 양분할 것을 노골적으로 드러내었고 공산군은 도처에서 교통의 요지를 장악한채 국민정부군의 이동을 저지하면서 충돌은 점점 확대되었습니다. 웨드마이어는 장개석에게 병참 확보와 수송의 어려움을 이유로 만주 진격을 일단 미루고 우선 장성 이남, 장강 이북의 육상 교통, 통신망부터 신속하게 확보하고 행정과 치안을 안정시킬 것을 충고하였습니다. 또한 그는 만주를 한시적으로 미, 영, 소 3국의 신탁통치에 둘 것도 제안합니다.
냉철하게 본다면 그의 주장은 분명 현실적인 것이었으나 장개석의 입장에서는 그것은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외세에게 빼앗긴 영토를 다시 외세의 통치에 맡긴다는 것은 중국으로서는 자존심의 문제였고 정부의 역량부족을 스스로 인정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었죠. 따라서 웨드마이어의 건의가 아무리 타당하다고 해도 가장 중요한 정치를 고려하지 않은 이상 실현될 수 없었습니다.
무엇보다도 만주는 전략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양쪽 모두에게 대단히 중요한 곳이었습니다.
만주에는 풍부한 천연자원과 일본이 그동안 건설한 대규모 산업시설이 있었습니다. 만주는 면적에서 11.5%, 인구는 8%를 차지했지만 콩생산량은 전국의 70%, 산림면적은 37%, 중공업에서는 90%를 차지했고 석탄생산량은 36%, 철도는 41%, 석유생산량은 93%, 금광은 50%나 차지했습니다. 해외 수출에서도 37%에 달했고 노동자는 전국의 1/3에 달했습니다. 또한 선철은 8.5배, 전력생산은 2.5배 등 만주의 근대 공업은 본토를 훨씬 능가하였습니다. 오랜 전쟁과 극심한 인플레이션, 원료 부족으로 완전히 망가진 본토를 복구하기 위해서는 만주는 반드시 필요한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양측이 만주에 눈독을 들이려는 것은 당연하였죠.
일본이 항복하기 2개월전인, 45년 6월 11일 제7차 전국대표회의에서 모택동은 다음과 같이 말하며 만주를 자신들의 기반으로 삼을 것을 정하고 있었습니다.
"동북은 우리당과 중국혁명의 최근 변화상으로 보았을 때 특별히 중요한 곳이다. 만약에 우리가 모든 근거지를 다 잃었다 해도 동북만 있으면 중국혁명의 기초는 견고한 것이다. 물론 다른 근거지도 잃지 않고 동북도 있다면 중국혁명의 기초는 더욱더 공고한 것이다"
9월 19일 개최된 중공 중앙 정치국회의에서 당 주석대리였던 류소기 역시 이른바 "북진남방(北進南防)"을 결정하여 화남과 화중에 흩어져 있는 부대들을 장강이북으로 철수시키고 화북의 부대는 만주를 장악할 것을 지시합니다.
장개석 역시 "우리가 동북을 탈취하지 않으면 중국이 근대 산업화된 국가로 발전하기 힘들다"라고 말합니다.
양자는 서로 경쟁적으로 만주로 질주했지만 이 레이스에서 절대적으로 불리한 것은 장개석이었습니다. 44년 이치고 작전에서 참패한 국민정부군은 사천, 귀주, 운남 등 서남부지역에 밀려나 있었던 반면 공산군은 근거지부터가 화북에서 가까운 서북지역인데다 이미 45년 초반부터 화북과 만주에 적극적으로 요원들을 침투시키고 있었습니다.
당초 45년 12월 3일까지 철수를 완료하기로 중국과 합의했던 소련은 철수가 지연되면서 46년 4월 6일부터 본격적으로 철수하기 시작합니다. 그들을 뒤따라 만주로 진입한 국민정부군은 약 13만 7천명정도였으나 광대한 만주 전역을 확보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했고 게다가 소련군은 국민정부군의 대련항의 사용을 거부함으로서 국민정부군의 만주 진입은 지연될 수 밖에 없었고 호로도 상륙도 차단되어 부득이하게 진황도까지 내려와 산해관을 통해 만주로 진입하는 우회작전을 쓸 수 밖에 없었습니다. 또한 소련군은 국민정부군의 철도 사용도 불허합니다.
이로 인해 국민정부군의 병참에 막대한 부담을 주게 되었고 나중에 만주에서 공산군에게 패하는 가장 큰 원인중의 하나가 됩니다. 또 소련군은 대량의 산업시설과 발전시설, 물자를 무단으로 약탈하는 한편 관동군에게 압수한 대량의 무기와 물자, 의약품을 공산측에게 넘겨 이들이 병력을 정비하고 보강할 수 있도록 지원합니다.
국공 쌍방의 갈등과 불신은 극에 달하고 있었습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45년 8월 28일 모택동은 중경에서 장개석을 만났고 양측의 협상은 10월 11일까지 진행되었습니다. 44일동안 두사람은 9번이나 만나서 토론했으나 입장차이는 명확하였습니다. 장개석은 국민정부만이 중국의 유일한 합법정부이며 중공은 국민정부의 체제안에 들어와야 한다고 전제하였고 모택동은 쌍방이 대등한 입장에서 연합정권을 수립하자는 것이었습니다.
쌍십협정(10월 10일) 체결당시 장개석과 모택동, 헐리 대사.
※ 사진출처 : http://web.donga.ac.kr/kimjh/50years/4549/chongqing/chongqing.htm
여기서 모택동이 구상하는 통치제도는 서구적인 민주제도와는 차이가 있었는데 여당과 야당이 경합하여 자유로운 민주 선거를 통해 다수당에 의해 정부를 구성하는 것이 아니라 의회에 의석을 가진 여러 정당이 합작하여 연합정부를 구성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즉, 장개석은 국민당 일당독재는 일시적인 것이며 향후 의회정치의 실현을 어느정도 인정한 반면 모택동은 그 자체를 부정하였습니다. 실제로 그는 국공내전에서 승리한후 형식상 각 당파를 망라하는 연합정부를 구성했으나 실제로는 모든 실권은 공산당이 쥐고 있었고(그것도 소수의 모택동 측근들이 독식한) 그조차도 소위 "정치운동"을 통해 민주당파를 점차 숙청해 나가게 됩니다.
10월 10일 쌍십협정의 체결, 이후 마셜의 개입으로 협상을 지속적으로 벌였음에도 결국 46년 4월 18일 국민정부군의 기계화부대가 만주 사평가에서 공산군을 공격함으로서 대일항전이 끝난지 1년도 되지 않아 내전은 본격적으로 확대되고 말았습니다.
내전은 피할 수 없었던 것인가. 노예제를 둘러싼 복잡한 갈등이 남북전쟁으로 이어졌지만 국공내전의 원인은 훨씬 명확했습니다. 바로 중국의 패권을 누가 차지하는가였죠. 어느 한쪽이 그것을 포기하지 않는한 내전은 피할 수 없었습니다. 국공내전은 프랑스혁명처럼 기존 체제에 대한 불만을 품고 있던 민중들의 봉기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두개의 권력집단간의 싸움이었습니다. 국민정부군이 우세한 군사력을 가지고도 패배한 가장 큰 원인은 전적으로 그 자신의 모순에 있었지만 그렇다고 중공이 그와 같은 모순이 없는 것도 아니었고 그 모순을 해결하려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애초에 내전의 목적은 그것에 있지 않았기 때문이죠.
신해혁명이후 국공내전까지 너무 많은 사건들이 고작 30년이라는 짧은 시간동안 집중적으로 일어났습니다. 루즈벨트는 "중국은 우리가 2~3백년동안 이룩한 것을 아주 짧은 시간안에 창조해야 한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장개석의 어려움은 바로 여기에 있었던 것입니다. 중국 근현대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장개석정권을 평가하기 위해서는 우선 이 기본적인 사실부터 인정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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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댓글 작성자푸른 장미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13.09.16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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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Vv아마게돈vV 작성시간 13.09.17 '즉, 장개석은 국민당 일당독재는 일시적인 것이며 향후 의회정치의 실현을 어느정도 인정한 반면 모택동은 그 자체를 부정하였습니다.'
??? 다른 부분은 공감하는데 이 부분은 아무리 생각해도 미화 같아요. 장개석 만약 진짜 저렇게 생각했으면 대만에서 끝까지 독재는 하지 않았겠죠. 근데........
하튼 너무 잘 봤습니다. 감사합니다. -
답댓글 작성자푸른 장미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13.09.17 저도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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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지옥괭이 작성시간 13.09.17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장개석의 역량이 알려진 것보다 휠씬 대단한 거 같습니다. 만일 국공내전의 최후승자가 장개석이 었다면, 중국이 G2의 지위에 올라가는 것이 10년은 빨랐을 거 같습니다 -
답댓글 작성자푸른 장미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13.09.17 대약진운동이나 문화대혁명 같은 뻘짓은 없었을 테니 아마 그리 되었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