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0년대 한창 중국 군벌들간에 대규모 내전을 벌이고 있던 시기, 군벌들은 필사적으로 상대보다 더 강력한 군사력을 키우는 것에만 매진합니다. 1차대전이 끝나고 엄청난 양의 무기가 유럽에서 밖으로 흘러나와 각국에 판매가 되는데 그 중에 당시로선 최첨단이었던 항공기도 중국에 흘러들어 옵니다.
군벌들의 강력한 지원속에 국내 곳곳에 비행학교와 공장이 수립되었고 그들 스스로도 비행술을 습득하기도 하여 동북군벌인 장학량은 자기 손으로 자신의 전용기를 조종할 수 있을 정도였습니다. 동북군의 경우 약 60여기의 항공기를 보유했는데 만주사변에서 일본에게 패함으로서 대부분이 관동군 손에 들어가고 맙니다.
장개석이 중국 전토를 통일함으로서 이런 잡동사니 군벌 산하 항공부대들이 중앙군에 흡수 통합됩니다. 장개석은 공군 육성에 대해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 배후에는 그의 와이프인 송미령의 오빠이자 중앙은행 총재였던 송자문이 스폰서로서 지원하였습니다.
1930년에 남창에 항공 지휘부를 수립하였고 32년에 군정부(국방부)산하에 항공부대를 관리하는 부서인 항공서를 수립합니다. 그리고 33년에 처음으로 공군을 육군에서 독립시켜 별도의 병종으로 만드는데 당시 미국, 일본을 비롯한 대다수 국가들이 공군을 육군이나 해군에 속한 예하부대로 운영했다는 점에서 의외로 앞서가고 있었다고 할 수 있겠죠. 36년에 양광전쟁후 중국 군벌들중에 최대 규모였던 광서공군이 중앙군에 편입되면서 중국공군이 모습을 갖추게 됩니다.
당시 군사비 총액 2억원중 육군이 1억 2천만원, 해군이 229만원, 공군이 7천만원을 차지했다는 것만 봐도 장개석이 공군 육성에 얼마나 지원을 아끼지 않았는가 알 수 있습니다. 여기에는 중국에 파견되었던 독일 군사 고문단의 강력한 건의와 지원의 역할도 컸습니다. 중국공군은 독일과 미국, 이탈리아의 지원속에 육성되어 항공기 500대, 조종사 1천명을 목표로 추진됩니다.
항공학교는 총 3개가 있었는데 항주, 광주, 낙양에 있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항주 중앙항공학교가 가장 큰 규모로 그 예산만도 100만원에 달했습니다.(이 금액은 당시 국내 총 21개의 전 국립대학 예산과 맞먹었음) 항주 학교는 미국인에 의해 운영, 훈련되었는데 그 훈련이 매우 엄격하여 정원 400명에서 실제 입학을 허락받은 사람은 150명, 최종 졸업자는 그 중에서 겨우 30~50%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중일전쟁 개전시까지 훈련을 마친 조종사는 겨우 700명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주요 기체 생산공장은 항주, 남창등에 있었으며 수리 공장은 국내 여러곳에 분산 운영되고 있었습니다.
역시 가장 큰 규모는 미국인이 투자한 항주비행공장으로 노드롭식, 슈라이크식, 더글라스식 정찰기, 폭격기를 라이센스 생산했으며 총 135기가 생산됩니다. 그외에 남창, 하문등의 비행공장에서도 소규모지만 다양한 기체를 생산합니다.
즉, 흔히 알려진 것처럼 단순히 외국기체를 원조받아 운영했다는 것이 아니라 라이센스지만 중국 자체적으로 기체를 생산할 능력이 이미 있었다는 것이죠.
비행장은 국내 곳곳에 총 262개를 건설하여 각 비행장에 17개의 탄약소, 6개의 자재소, 3개의 기상관측소, 6개의 대공무선전신시설을 설치하였습니다.
노드롭2E 경폭격기
커티스 호크-2 전투기
중국공군의 주력이었던 I-16전투기
중국공군의 규모는 서류상으로 항공기 500여대, 조종사 1000여명이었다고 하나, 개전 직전 중국 공군의 고문으로 가 나중에 제 14 항공대대, 이른바 "플라잉 타이거즈"를 창설하는 센놀트대위의 회고록에 따르면 실제로는 144기에 불과했고 실제 가동가능한 작전기는 겨우 90여기에 불과했다고 합니다. 이는 다소 과소평가되었다는 설도 있으며 아무튼 보유기수는 300기 미만에, 작전가능기는 그 반수라는 설이 통설입니다. 장개석이 많은 지원을 아끼지 않았지만 규모면에서 네덜란드나 유고같은 3류 공군국가의 수준에 지나지 않았던 거죠.
구성은 전투기가 70여기, 폭격기와 정찰기가 74기였으며 총 9개 대대, 26개 중대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남창 - 공군 사령부, 제 1대대(폭격), 제 4대대(전투기), 제 5대대(전투기), 제 6대대(정찰), 제 8대대(중폭격)
광덕 - 제 2대대(폭격)
구용 - 제 3대대(전투기)
남경 - 제 6대대(정찰)
서안 - 제 7대대(정찰)
방부(蚌埠) - 제 9대대(지상공격)
공군의 포진은 주로 남경과 양자강 하류 일대 제공권 획득에 중점을 두고 있었으며 개전했을때에 이 방면에서 일본기들과 치열한 제공권 쟁탈전이 벌어집니다.
1937년 7월 7일 노구교 사건으로 중일전쟁이 발발합니다. 7월 17일 일여산 회의를 거쳐 북경이 함락되고 상해가 위협받으면서 장개석은 대일 전면 개전을 결의하고 상해방면으로 주력 부대를 투입합니다. 총통 직속의 독일식 사단 제 87, 88사단을 비롯한 중앙군을 중심으로 총 60만명 이상이 투입되는 제 2차 상해공방전이 그 막을 열고 중앙공군도 그 힘을 모아 전기를 총동원하여 최전선으로 이동하기 시작합니다.
8월 4일 남창의 요정에서 파일럿들을 모아 출정 축하의 연회가 성대히 열리고 다음날 여러 비행장의 각 중대들이 상해일대로 이동하는 동시에 북부 전선의 신양 비행장으로 이동합니다. 그들은 센놀트에 의해 훈련되었고 아직 숙련도는 낮았으나 사기만은 충천하였습니다.
당시 일본은 육군이 800여기(일선기 500기), 해군기가 730기(육상부대 360기, 항모기 370기)를 보유했으며 개전당시 중국 전선에 가용한 숫자는 육군기 196기, 해군기 247기로 압도적으로 우세했습니다. 육군기들은 만주방면에, 해군기는 상해방면에 배치되었습니다. 여기서 양자간의 운영상 차이가 있는데, 육군 항공대는 지상작전의 지원을 목적으로 자신들의 세력권내로 제한한 반면 해군기는 남경을 비롯한 양자강 일대 제공권 확보를 목적으로 적극적인 공세와 폭격으로 나섭니다.
여기에 대항하여 중국측은 숫적 열세에다 장기적으로 기체 상실시 보충능력의 열세를 고려하여 단기 결전에 집중하기로 결정합니다. 공군의 주력을 화북방면으로 투입하여 천진을 기습하여 일본군의 진격을 저지하고 덕주-석가장을 방위라인으로 결정, 총 140기를 투입합니다. 그리고 일부는 상해방면에 투입합니다. 숫적으로 열세하기 때문에 병력을 집중적으로 운영함으로서 단기결전과 적극공세 전략을 취합니다.
숫적으로는 일본기가 우세했으나 기체성능은 소련제 I-16 단엽기를 보유한 중국공군도 만만치 않았으며 따라서 공중전은 매우 치열하게 벌어집니다.
8월 13일 상해에 주둔하는 일본 해군 육전대 5천에 대하여 중국군 약 5만명이 총공격을 가함으로서 제 2차 상해 공방전이 시작되고 중국 공군도 상해 부근의 비행장에 공습을 위해 대기에 들어갑니다. 병력의 이동 및 집결, 작전의 입안은 센놀트에 의해 치밀하게 수립되었습니다.
8월 14일 오전 7시, 가흥 비행장의 제 35중대가 상해의 일본 해군 육상 기지 및 물자 집적장을 폭격하면서 중앙 공군의 대공습작전이 개시하였습니다.
9시 20분, 제 24중대 커티스 호크3 복엽 전투기 8기가 일본 구축함에 대한 해상공습을 가했으나 구름이 많고 폭격 기술 미비로 폭탄 1발만 명중시켰습니다.
제 25중대 커티스 호크3 3기가 홍구의 일본 해군 육전대 사령부을 목표로 폭격했으나 폭격은 실패, 부근의 케세이 호텔 노상에 떨어져 수십명의 사상자를 내었습니다.
8시 40분, 제 2대대 11중대 6기, 제 9중대 9기, 제 14중대 6기로 구성된 편대가 이륙, 10시 10분에 일본 함대에 기습 공격에 나섭니다. 전함 이즈모 지근에 폭탄이 떨어지는등 공격은 맹렬했으나 명중탄은 한발도 없어 폭격은 실패로 돌어갔습니다.
오후 4시, 제 2 대대 노스롭2 단엽 경폭격기 22기가 광덕 비행장을 출격해 일본 조계를 폭격하였습니다. 그 와중에 최소 3기 이상이 일본기와 대공포에 맞아 격추됩니다.
장개석은 항모부대를 폭격하기 위한 결사대 20명을 모집하여(중국판 가미가제?) 공격에 나서기도 했으나 압도적인 일본기들의 방어로 전과는 미미하였습니다.
중국공군은 숫적으로 열세하고 질적으로도 뒤떨어졌으나 대단히 용감했고 37년말까지 양측의 피해는 일본기 129기에 중국기 144기로 거의 호각을 나타냈습니다. 그러나 보충능력의 차이에서 9월말이 되면 중국의 제공권은 사실상 일본측에 넘어갑니다.
그럼에도 38년까지 중국공군은 소련을 비롯한 각국의 원조를 받아 그 규모를 늘려가며(약 500여기) 일본에게 대항하나 파일럿의 질적차와 일본기들의 증강으로 인해 중국기들의 피해가 늘어나고 1939년이 되면 100여기 이하로 떨어집니다. 그리고 일본의 백-1호작전(오지항공공격작전)으로 인해 중국기들은 거의 괴멸상태에 빠지고 40년말 잔존기수는 65기에 지나지 않게 됩니다. 여기에는 특히 신예기체인 제로기의 역할이 컸습니다. 이렇게 중국공군의 손실이 커지고 보충할 능력을 상실하자 공군 고문이었던 센놀트는 1941년 8월 115명의 파일럿 용병들과 P-40 워호크 전투기로 그 유명한 "플라잉 타이거스"를 창설하게 됩니다. 그리고 미국이 본격적으로 참전하면서 중국 상공은 미 공군의 무대가 되었고 중국공군은 그들의 보조역할로 전락합니다.
그럼에도 중국기들은 국지적으로 일본기에게 맞서 많은 피해를 지속적으로 주었고, 그중에서 폭격기들의 활약도 대단하여, 소련제 SB-2 폭격기는 일본에게 가장 큰 위협이었습니다. 1938년 1월 일본의 대규모 폭격에 맞어 큐슈일대에 폭격기를 보내 100만부의 전단을 뿌리기도 했으며, 1939년에는 양자강 하류의 일본 비행장을 습격하여 한번에 100여기 이상의 일본기를 지상에서 격파하기도 했습니다. 일본군은 대공방어에 매우 취약했기 때문에 중국 공군의 기습시 호되게 당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라이프 2차대전사에서는 당시 중국공군을 미국인들의 편견 그대로 "귀족 도련님의 취미거리"처럼 묘사하고 있으나 실제로는 열세한 전력으로 일본군과 잘 싸웠으며 오히려 개전초 미국이나 영국, 네덜란드같은 열강의 공군들이 일본기들에게 일방적으로 박살났던 것보다 훨씬 더 잘 싸워 훌륭한 전과를 냈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출처] [중일전쟁] 중국공군의 성립|작성자 욱이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