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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마피아]미국 마피아 - 1. 뉴욕 마피아의 역사(1), 뉴욕을 지배하는 것은 패밀리

작성자푸른 장미|작성시간13.10.24|조회수6,245 목록 댓글 2

1990122, FBI 뉴욕 지부의 조직범죄 단속반은 50세의 이탈리아계 뉴욕 시민 존 고티(John Gotti, 닉네임은 Dapper Don, Teflon Don)와 그 외 2인에 대하여 구속영장을 발부받아, 같은 날, 그들 일당이 활동본부로 삼고 있는 리틀 이탈리아의 클럽 래버나이트(Ravernite Club)’에서 고티와 그의 부하 새미 그라바노(Salvatore Gravano, 닉네임은 Sammy the Bull), 프랭크 로카시오(Frank Locascio) 3명을 체포하였다. 존 고티에 대한 혐의는 그가 5건의 살인에 관련되었다는 것과 그밖에 뇌물수수, 불법도박, 불법 고리대금업, 갈취, 탈세, 사법정의 실현의 방해 등이었다.

감비노 패밀리의 부두목 이었던 살바토레 ‘새미 불’ 그라바노

 

프랭크 로카시오

이날 클럽 래버나이트에는 그들 3인 이외에도 무려 24명이나 되는 갬비노 패밀리의 거친 조직원들이 함께 어울려 있었다. 도청 등의 감시를 통하여 이을 미리 알고 있었던 FBI는 클럽 밖에다가 경찰 부대를 대기시켜놓고 15명의 특수요원들을 중무장시켜 클럽을 습격하였는데 다행히 갱들로부터 약간의 험한 말만 들었을 뿐, 자신들의 법 집행에 별다른 폭력적인 반항을 겪지는 않았다.

체포되는 존 고티

 

존 고티는 1985년에 피살된 폴 카스텔라노(Paul Castellano, 닉네임은 Big Paul, Pope)의 뒤를 이어 뉴욕의 유력한 마피아 갱단의 하나인 갬비노 패밀리의 보스가 된 사람이다. 고티가 체포되기 5년 전인 19851216, 당시 70세이던 갬비노 패밀리의 보스, 폴 카스텔라노가 그의 운전사인 토마스 빌로티(Thomas Bilotti)와 함께 스테이크 요리로 유명한 뉴욕의 스팍스 레스토랑(Sparks Restaurant)' 앞에서 총에 맞아 피살된 사건이 발생하였고, 그 후에 카스텔라노가 차지하고 있던 자리를 존 고티가 이어받은 것이다.

폴 카스텔라노

 

토마스 빌로티

뉴욕 맨해튼 46가의 스테이크 하우스 스팍스

 

1985년의 암살은 크리스마스 쇼핑 인파로 몹시도 붐비던 뉴욕의 복잡한 저녁 길거리에서 눈깜짝할 사이에 일어났다. 차편으로 레스토랑에 도착한 카스텔라노가 차에서 내리자마자 피격되어 숨을 거두고 암살자들이 사라지기까지 한 1,2분쯤이나 걸렸을까? 폴 카스텔라노는 사업 동료들과 저녁 식사 약속이 되어 있던 스팍스 레스토랑을 찾아왔다가 미리 그 정보를 알고 그곳에서 잠복하고 있던 히트 맨들에게 당한 것이었다. 이때 카스텔라노는 7, 운전사인 토마스 빌로티는 4발을 맞았는데, 카스텔라노의 총상 중 하나는 매우 가까운 거리에서 뒤통수에다 권총을 대고 쏜 것으로 죽음을 확인하는 마지막 총격인 것으로 보였다. 그것은 의심할 여지없는, 100% 계획된 히트였다.

살해당한 폴 카스텔라노

 

살해당한 토마스 빌로티

 

뒤이어 피를 부르는 갱들간의 복수전이 예상되었고, 뉴욕 경찰국을 비롯한 여러 관련 사법당국에는 곧 비상령이 떨어졌다. 그들은 이어서 벌어질 피비린내 나는 갱 전쟁에 대비한 준비를 하였으나 이상하게도 거리는 평온하였다고 한다. 며칠 후 뉴욕 경찰의 정보망에 포착된 소문은 정말로 경악할 만한 것으로, 45세의 갬비노 카포레짐, 존 고티가 패밀리의 새 보스로 추대되었다는 소식이었다.

 

마피아 가문의 위계질서는 보스(Boss, 또는 Capo라고도 한다. 그러나 최근에는 이보다는 Boss는 그냥 Boss로 부르고 CaporegimeCapo라고 부르는 경향이 있다.) 아래에 언더보스(Underboss 또는 Sotto Capo라고도 한다.)가 한 명이 있고 그 아래에 카포레짐(Caporegime, 최근에는 Captain이라고도 한다)들이 있으며, 카포레짐이 솔다티(Soldati)라 부르는 일반 행동대원들을 거느리는 구조로 되어 있다. 그리고 이와는 별도로 콘실리에리(Consigliere)라고 하는 고문이 있어 조직원들의 고충을 보스에게 전달하고, 보스의 독재적 전횡을 견제하는 역할을 맡고 있다. 이러한 가문, 즉 범죄 조직이 각 도시마다 대략 1개씩 활동하고 있으며 뉴욕의 경우에는 갬비노 패밀리를 비롯하여 5개의 이와 같은 마피아 가문이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카포레짐을 초기에는 카포데치나(Capodecina)라고도 불렀는데, 카포데치나는 원래 라틴어로 10명의 병사를 거느린 대장이란 뜻이다. 솔다티는 영어의 솔져와 같은 뜻으로 사병을 말한다. 이러한 조직 구성은 일찍이 1931년에 뉴욕의 암흑가를 통일하여 보스 중의 보스로 등극하였던 살바토레 마란자노(Salvatore Maranzano, 닉네임은 Little Caesar)가 최초에 만든 것을 그 후에도 그대로 계속 사용하고 있던 것이다.

살바토레 마란자노

 

갬비노 패밀리에는 23명의 카포레짐이 있었고, 보스의 지휘를 받아 이들 모두를 통솔하는 언더보스는 아니엘로 델라크로체(Aniello Dellacroce, 닉네임은 Neil, 또는 The Lamb)라는 사람이었다. 그는 과거 브루클린 부두를 주름잡았으며 지금까지도 그 행적이 전설로 전해져 내려오는 뉴욕 암흑가의 보스의 한 사람, 알버트 아나스타샤(Albert Anastasia, 원래 이름은 Umberto Anastasio. 닉네임은 Mad Hatter)의 심복이었던 사람이다. 또한 델라크로체는 그간 존 고티를 키우고 그의 뒤를 봐준 고티의 후견인이기도 하였으며, 1970년 이래로 가문의 언더보스를 맡고 있었다.

아니엘로 델라크로체

 

앨버트 아나스타샤

 

1985122, 아니엘로 델라크로체는 지병인 폐암으로 사망하였는데 그가 죽자 빅 폴(보스인 폴 카스텔라노의 별명이다)이 누구를 후임 언더보스로 임명할 것인지가 모든 조직원들의 관심사가 되었다. 가장 유력한 후보는 전임 보스였던 카를로 갬비노(Carlo Gambino)의 맏아들인 토마스 갬비노(Thomas Gambino)와 카스텔라노의 운전사인 토마스 빌로터 두 사람이었다.

카를로 갬비노

 

토마스 갬비노

 

원래 이들의 세계에서 운전사라 함은 매우 중요한 직책이다. 그 이유는 첫째, 운전사는 보스가 움직이는 스케줄을 미리 파악하고 있어, 운전사가 배반한다면 너무나 쉽게 보스가 저격당할 수 있으므로 가장 신임하는 부하에게 운전을 맡기고 있기 때문이고 둘째, 운전사는 자동차 안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대화를 들을 수 있어 많은 정보를 접할 수 있으므로 가장 입이 무거운 부하여야 하기 때문이다. 또한 운전사는 보스의 경호원이기도 하고, 골치 아픈 문제가 발생했을 때는 상담역할을 할 때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같은 한 사람이 운전사와 언더보스를 겸임하는 경우도 많았다.

당시 갬비노 패밀리의 사업 규모는 돈으로 따져서 1년에 대략 5억 달러 정도였다. 1985년의 우리나라 1년 총 예산이 12조원으로, 당시의 환율을 따라 800원을 1달러로 환산하면 약 150억 달러가 된다. 그런데 뉴욕의 5대 마피아 가문 중 한 군데의 1년 매출이 5억 달러였다. 특히 이들의 사업은 그 성격상 세금을 거의 내지 않으며, 원가도 별로 먹히지 않는다는 것을 생각해 볼 때 이것은 정말로 엄청난 액수이다. 당시 뉴욕 5대 가문의 순위는 갬비노 패밀리가 가장 큰 규모였고, 그 다음이 제노베제 패밀리, 루케제 패밀리 그리고 콜롬보와 보나노 패밀리의 순서였으며 모든 가문의 수입이 이 정도였다는 것은 아니다.

이만한 사업을 거의 총괄하게 될 가문의 언더보스가 공석이 되었고, 그 후임자가 논의되고 있는 시점에서 갑자기 보스가 피살된 상황이 벌어졌는데, 바로 그 보스의 자리에 언더보스의 후보자도 아니었으며 여러 카포레짐 중 서열도 그리 높지 않았던 존 고티가 올라섰던 것이다. 뉴욕 경찰국과 FBI의 조직범죄 대책반은 문자 그대로 혼란의 도가니가 되지 않을 수 없었다.

 

존 고티는 이탈리아 이민의 제2세대이다. 그의 아버지 존 조셉 고티는 신대륙 아메리카의 열풍이 전 유럽을 휩쓸고 지나간지 얼마 뒤인 1920년에 남부 이탈리아의 나폴리 인근 지방에서 미국으로 건너왔다. 신대륙을 향한 대이민의 열풍이 불었던 시기는 우리에게 남북전쟁으로 잘 알려진 미국의 내전이 끝난 뒤부터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전까지, 대략 1870년경부터 1914년까지의 기간을 일컫는 것으로 이때 유럽에서 미국으로 건너간 이민 인구는 대략 2,600만 명을 상회한다고 한다.

특히 남부 이탈리아에서는 1882년과 1906년의 두 차례에 걸쳐 베수비오 화산이 다시 분화를 시작하여 화산재가 비옥한 캄파니아 평야를 뒤덮었고, 그로 인한 흉년과 기아에서 벗어나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다른 지역으로 이주하기 시작하였다. 이것은 유럽 역사상 몇 번째 안으로 손꼽히는 민족의 대이동이었으며, 그들은 북부 이탈리아와 스위스로, 북아프리카로, 그리고 신대륙인 남미와 북미 대륙으로 이주하였다.

존 조셉 고티 부부는 미국으로 건너온 후, 뉴욕의 사우스 브롱크스에 자리를 잡고 하루 일당 1달러 25센트짜리 건설 노동자 일을 하며 8명의 아이를 낳아 키웠다. 1952년에는 브루클린의 브라운스빌로 이사를 갔고, 그 뒤로 5명의 아이를 더 낳았다. 존 고티는 이들 부부의 다섯 번째 아이로 19401027일 태어났다. 이들 부부가 이사를 갈 무렵의 브루클린은 알버트 아나스타샤가 지배하고 있었으며, 갱들의 갈취가 경찰의 묵인과 시민들의 외면 속에 백주대로에서 공공연하게 행해지던 무법 천지였다. 존 고티는 이 같은 환경에서 청소년기를 보냈고 따라서 그가 숭배하는 우상은 당연히 브루클린 부두의 왕, 알버트 아나스타샤일 수밖에 없었다.

고티 가족이 이사를 가던 때는 브루클린의 공식적인 지배권이 빈센트 망가노(Vincent Mangano, 닉네임은 Vince)로부터 알버트 아나스타샤로 막 넘어간 시기였다. 비토 제노베제(Vito Genovese, 닉네임은 Don Vitone)는 시실리로부터 돌아왔지만 아직 전열을 완전히 정비할 여유를 갖지 못해, 뉴욕 암흑가의 주도권은 루치아노 패밀리의 프랭크 코스텔로(Frank Costello, 원래 이름은 Francisco Castiglia. 닉네임은 The Prime Minister)와 망가노 패밀리의 알버트 아나스타샤가 나누어 갖고 있을 때였다.

빈센트 망가노

 

비토 제노베제

 

미국 마세리아-루치아노 패밀리의 보스 프랭크 코스텔로(왼쪽)

 

프랑크 코스텔로가 1936년부터 약 16년간, 알버트 아나스타샤가 1951년부터 1957년까지 6년간 각각 한 가문의 보스를 지냈지만 사람들이 코스텔로 패밀리, 아나스타샤 패밀리라는 용어를 잘 쓰지 않고 있는 것은 매우 이상하게 생각되는 일 중의 하나이다. 여하간 코스텔로 패밀리, 아나스타샤 패밀리는 오늘날까지도 그 명맥과 전통이 이어져 내려오고 있으며, 그들 둘을 포함하여 오늘날 뉴욕을 지배하고 있는 5대 마피아 가문은 당시에도 그대로 활동하고 있었는데 그들이 그렇게 존재하게 된 연유를 한번 자세히 알아보려면, 우리는 대략 1930년경으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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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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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리블루 | 작성시간 13.10.25 갓파더님의 시대군요(후다닥)
  • 답댓글 작성자푸른 장미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3.10.28 영화 <대부>의 주배경은 1940년대 후반부터 1960년대까지죠. 이 시대의 대표적 보스라면 프랭크 코스텔로와 카를로 갬비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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