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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신라)

황남대총의 피장자를 추적

작성자정성일|작성시간10.11.25|조회수159 목록 댓글 0

 


황남대총의 방사선탄소연대측정 결과로는 420년~520년인데 오차가 60년~70년에 달한다고 합니다.

학계에서는 방사선탄소연대측정 결과에도 불구하고 무덤의 주인을 5세기 초반에 국한하여 내물이사금과 눌지마립간으로 비정하는데, 아마도 350년~460년(405년±55년)이 황남대총의 묻힌 피장자의 실제 사망시기에 해당한다고 보입니다.


이를 근거로 삼국사기와 비교하면 내물이사금(402卒), 실성이사금(417卒), 눌지마립간(458卒), 흘해이사금(356卒)이 여기에 가장 가깝습니다.


황남대총은 현재까지 발굴된 신라인의 무덤중에서 규모가 가장 크고, 유물에서 금관과 금동관이 출토된 점, 수량과 내용물이 일반귀족으로 볼 수 없다는 고고학계의 의견이 있었으며, 이러한 연유로 실성이사금은 왕임에도 눌지에게 죽임을 당한 이유로 제외당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가장 먼저 눌지마립간이 황남대총의 주인으로 우선적으로 거론된 이유는 무엇일까?

가장 먼저 내물이사금릉으로 전해지는 무덤이 따로 있다는 점입니다. 경주시 교동 14번지에 위치하여 있으며, 1969년에 사적 188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삼국사기에 전하는 내물이사금의 계보와 기년으로는 내물이사금의 나이와 피장자의 나이는 전혀 일치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삼국사기 초기기록 불신론, 정확히 말하면 내물이사금 이전의 기록 불신론으로 내물이사금도 피장자에 이름을 올리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황남대총 남분에 묻힌 남자의 나이는 인터넷자료에 의하면 좀 차이가 있습니다. 혹은 60세 전후로 혹은 60대라고 하는데, 60세 전후로 보게 되면 삼국사기와 황남대총의 피장자의 나이를 더욱 믿을 수 없기 때문에 오차범위 한계인 60대까지를 말하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


먼저 눌지마립간부터 나이를 추정해 보죠.

눌지마립간의 나이를 알 수 없으니 동생인 미해(미사흔갈문왕)의 나이를 살펴보면, 삼국유사에 의하면 내물이사금 즉위36년 경인(390)년에 미해의 나이가 10세에 볼모로 보냈다고 합니다. 그런데 삼국사기에는 실성왕 원년 임인(402)에 미해를 볼모로 보냈다고 합니다. 남당유고에는 미해의 출생이 393년으로 실성왕 원년에 나이가 10세에 해당합니다.


삼국사기 열전에는 실성이 내물이 고구려에 볼모로 보낸 것을 원망하여 미해를 왜(倭)로 볼모로 보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삼국유사의 기록보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이 옳다고 여겨지며 만약 미해가 형인 눌지마립간이 죽었을 때까지 살았다면 66세에 해당합니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78세에 해당합니다. 또한 미해에게는 보해(복호)라는 형이 있고 그 위에 형이 눌지마립간이죠. 그러므로 눌지마립간의 나이는 70세(남당유고 72세) 정도로 추산함이 타당하죠. 그러므로 눌지마립간은 황남대총 피장자에서 제외되어야 할 조건이 생긴 것이죠.


삼국사기에 여러 기록이 누락되거나 왜곡된 원인을 우리는 김부식 탓으로 돌리고 있으나 실제로는 신라가 삼국을 합한 시기에 삼국사관련 고기를 저술하면서 역사를 왜곡하기 시작하였으며, 비교적 이른 시기에 저술한 것으로 보이는 일본서기(편찬시기가 720년이라 알려져 있음)는 신라인이 저술한 삼국사관련 고기를 참조하면서, 왜곡됨이 더욱 심하게 되어 우리가 기대하는 상식을 완전히 무너뜨리고 있습니다.


일본서기 편찬자 역시 왜곡됨을 더했다고 하더라도, 우리와 중국의 사서와의 기록과는 맞추는 것이 사서의 기본 상식인데 이를 벗어나 있습니다. 여기에 해당하는 기사가 비미호와 아달라이사금, 신공태후와 우로의 이야기가 여기에 해당합니다. 후대의 사서일수록 편견에 편견을 더하여 사서가 왜곡됨이 더욱 심하여지므로 최초의 저본을 찾는 것이 중요한 일입니다. 현재 남당유고도 최초의 저본은 아니며, 혹은 후대에 왜곡된 사서가 보입니다. 그러나 보다 다양하고 많은 자료를 우리에게 전달해 주고 있으므로 연구하고 발전시켜 나가지 않으면 안 됩니다.


황남대총의 무덤의 주인이 내물이사금의 무덤이 아니라는 정황중의 하나가 바로 무덤이 따로 있다는 것을 본인이 제시하였는데, 비록 신라인들이 사서를 왜곡하였다고 할지라도 그들의 중시조에 해당하는 미추이사금과 내물이사금의 무덤만은 관리하고 제사지냄에 소홀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현재 학계에서는 내물이사금 이전의 기록을 모두 잘못이라고 인정하는 것은 남당유고를 인정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서입니다. 내물이사금 이전의 기록을 인정한다면 삼국사기 본기의 기록과 잡지(지리지)의 기록이 서로 맞지 않음을 인정해야 하기 때문이죠.


실성이사금이 탄소연대측정에서는 내물이사금과 더불어 가장 근접해 있으면서도 제외된 이유란 실성이사금이 눌지마립간에게 죽임을 당하였기 때문이다. 삼국사기의 기록에서 보듯이 실성은 눌지를 죽이기 위하여 고구려로 보냈는데, 고구려인이 눌지를 돌려보냈다고 하였다. 눌지가 이를 원망하여 실성을 죽였는데, 눌지가 실성을 위하여 그렇게 성대한 장례를 치루어 주었겠느냐는 의견이다. 물론 남당유고에도 그런 기록이 보인다. 눌지는 실성이 죽자, 방치하고 장례를 치루지 않았다고 하였다. 그런데 그것이 끝은 아니었다.


삼국사기에 보면 눌지마립간의 妃는 실성이사금의 딸이고, 눌지의 후계자가 된 자비마립간의 어머니이기도 하다. 눌지마립간의 어머니와 눌지마립간의 어머니는 모두 미추이사금의 딸이다. 곧 두 분이 자매사이인데, 이 기록조차도 부정하는 분들이 많은 줄은 안다.


눌지가 실성을 제압하고 즉위하면서 그동안에 실성을 따랐던 인물들은 저죄(抵罪)할 필요가 있었을 것이고 곧, 신라 왕실에는 피바람이 날리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신라왕실은 근친혼으로 인하여 실성의 신하가 곧 눌지의 신하이며, 실성의 친척이 눌지에게도 친척이 되는 묘한 상황이었을 것이다. 즉, 실성의 죄를 물으면 자신의 살이 베어지는 묘한 상황이었다. 즉, 실성의 죄를 물으면 자신의 처(妻), 장모이자 이모(姨母), 그리고 자신의 아들 자비에게도 죄를 물어야하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죽음을 내리지는 않더라도 폐하여 물러나게 하여야 하는 상황이었다. 눌지가 그렇게 하지 않았기 때문에 실성은 자비를 진골정통으로 세웠고, 실성의 명예회복을 위하여 그처럼 거대한 고분을 축조하였을 개연성은 충분한 것이었다.


탄소연대측정이외에도 근거로 삼을 만한 자료로는 남분의 피장자의 신장(身長, 키)에 관한 것인데, 금동관에서 허리띠드리개(허리띠 장식품)의 길이가 181cm인데, 당시의 척(尺)의 길이를 알 수 없으나, 남조(南朝)척을 썼다는 견해가 있다. 인터넷에서 남조(南朝)척에 관하여 찾아본 결과로는 25cm라고 하는데, 이에 의하면 실성이사금의 키 7척5촌은 187.5cm이며, 혹은 183.8cm라고 주장하는 분도 있는데 인터넷 자료가 항상 정확한 것은 아니어서 검증은 필요하다. 삼국사기에는 내물과 눌지의 키에 대한 기록이 없으므로, 이 분들이 아니라는 증거로는 비록 사용할 수 없더라도, 실성이사금을 황남대총의 피장자에서 제외하여야 할 사유는 아닌 것이다. 또는 고고학적 발굴결과로는 신라인들의 키는 지금에 비해서 상당히 작았으므로, 실성의 키는 남들보다 우월하였기 때문에 실성만이 기록에 남았을 가능성도 있다.


황남대총은 그 이외에도 피장자를 추정할 수 있는 단서를 제공하는데, 남분은 남성의 무덤으로 금동관이, 북분에는 여성의 무덤으로 금관이 출토되었으며, 북분이 남분을 훼손하고 20년쯤 후에 축조되었을 것이라는 고고학적 판단이다.


부부가 같은 곳에 묻혔다면 생전에 두 분이 금실이 좋았다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그런데 먼저 죽은 왕은 추가장이 불가한 적석목곽분으로 축조되었고, 나중에 죽은 왕비의 유언에 따라 남분을 헐어 쌍분으로 묻었을 것이다.


이런 점에 비추어보았을 때 눌지마립간은 아들 자비가 왕위를 이었던 점을 감안하여 제외됨이 타당하고, 내물이사금은 아들이 있었음에도 실성이사금에게 왕위를 물려주었으므로 초기에는 정권 계승의 정당화를 위해서라도 내물을 존중하는 척 하였을 것이다. 물론 실성이 원년에 미해를 왜(倭)로 볼모로 보낸 것은 자신이 오랫동안 고구려에 볼모로 있었던 것에 대한 분풀이로 볼 수 있지만, 여전히 자신의 처(妻)와 자매인 내물의 처(妻)의 눈치를 살피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물론 실성이 정치적인 이유라면 내물의 무덤은 추가장이 가능한 형식으로 만들었을 것이고, 만약에 개인적인 감정이라면 적석목곽분을 축조하였을 가능성은 있으므로 확실치는 않다.


그러나 실성이사금의 경우에는 내물이 비록 정치적인 이유로 실성을 성대히 장사를 치뤘다고 하더라도 자신의 장모이자 이모와 함께 묻히는 것을 원하지는 않았으므로 추가장이 불가능한 형식으로 무덤을 조성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후에 자신의 후계자인 자비의 정통성을 확보해 주는 차원에서 쌍분으로 축조를 허락하였을 것이다.


삼국사기의 기록으로는 내물이사금이 죽었을 때의 눌지의 어머니는 120세 이상이며, 실성이사금이 죽었을 때 눌지의 이모이자 장모는 135세에 해당하므로 믿을 수 없는 기록이 된다. 그러나 남당유고에 의하면 실성이 죽었을 때 나이가 59세이며 실성의 비(妃)는 15년 후에 죽었으니 황남대총의 발굴결과와 부합되는 바가 있다.


남당유고에 의하면 유례이사금의 아들 세기(世己)가 천신소문지설(天神召文之說, 의성군에서는 조문으로 읽는다)을 주창한 것이 대개 내물이사금의 재위기이며 4세기 후반에 해당한다. 당시에 옥모(玉帽)와 구도(仇道)를 진골의 두 가지 흐름으로 삼았는데, 서로가 보(輔)하였기 때문에 소문(召文)계통이 흥(興)하게 되었다.


이것은 이번의 조문국 학술대회에서의 발표결과와 일치하는 부분이다. 역사는 쉽고 빨리 이해하기 어렵다. 하나씩 자료를 찾아가며 검토하고 긴 시간을 고민하면서 밝혀가야 하는데 공부할 시간이 너무 적으며 또한 타인에게 전달할 시간도 없다. 때로는 인터넷으로 자료수집을 의존하다 보니 잘못된 자료가 있고, 몇 달이 걸리기도 한다. 그래서 대학 교수님과 사귀어야 좋은 자료를 빨리 받아보고 오류가 적어진다.


내년에 조문국 박물관이 완공하면 21대 369년의 기록을 자료로 제시할 것 같다. 그런데 문제는 이 자료가 누구의 출처냐고 하면 정성일씨 자료라고 대답할 것이고 대학교수님들 몇 분이 오셔서 위서라고 하면 아무 말도 못하고 창고 속에 두었다가 얼마 지나지 않으면 폐기처분 될 것 같습니다.


이번에 조문국 학술회의에 참석했던 분중에 어느 분이 국사교과서에 한줄만 올라가면 박물관이 대박 날 텐데 하는 말씀하는 것을 들었다. 조문국은 신라 진골계통을 푸는 열쇠이므로 한 줄이 아니라 한 페이지는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곧, 남당유고가 진서(眞書)로 인정받는다면 가장 큰 혜택을 받는 곳이 바로 의성군입니다. 물론 본인의 개인적인 영광도 뒤따르며 개인적인 욕심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남당유고의 저본(底本)이 일본 궁내성 서릉부에서 우리나라로 돌아오거나 없다는 것이 밝혀진다면 남당유고 진위논쟁은 허무하게 끝날 수도 있다. 그런데 남당유고 저본이 일본에서 우리에게 돌려줄 가능성이 지극히 낮다. 왜냐하면 그것은 일본황실의 비밀도 함께 담겨져 있기에 자신들이 충분히 검토한 연후에 자신들의 필요에 따라 돌려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그런데 반드시 남당유고가 돌아오지 않더라도 확인할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다. 바로 미추왕릉과 내물왕릉의 전하는 무덤을 발굴하여 남당유고의 기록과 일치하는 방사선탄소연대측정, 피장자 나이, 미추왕대에 불교전래 등을 종합 검토하여 남당유고 진위여부를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본인은 역사학과 대학생들이 운영하는 카페에 가입했다가 추방된 적이 있습니다. 미추왕릉지구 발굴 자료를 얻기 위해서였는데, 부산대학(원)생들끼리만 가입하는 카페라는 이유였습니다. 본인이 남당유고의 진위여부를 밝히는 자료는 인터넷에서 구하는 것은 한계가 있고, 대학이나 연구기관에서 얻어야 하는데, 저의 위치에서 구하기란 쉽지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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