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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신라)

[스크랩] 천전리 서석과 남당유고의 비교

작성자정성일|작성시간11.01.14|조회수224 댓글 0

천전리 서석과 남당유고의 몇가지 비

1.원명과 추명

原名 : 1.乙巳沙啄部葛文王覓遊來始得見谷之

을사년 사탁부 갈문왕께서 놀러 오셨다가 처음 (이)골짜기를 보시게 되었다.

2.古谷无名善石得造□□以下爲書石谷字作之

오래된 골짜기이나 이름이 없는 골짜기라서 좋은 돌을 얻어 □□을 만들고 이후로

서석곡이라 부르게 하시고 글자를 쓰게 하셨다.

3.幷遊友妹聖(麗)□光妙於史鄒女郞王(三)之

함께 놀러온 벗인 누이는 성(려)□광묘하신 어사추 여랑왕이시다.(놀러온 이는 등 삼인이다?)

4.食多煞作工人尒利夫智□悉得斯智大舍帝智作食人榮知智壹干支妻居知尸奚夫人愼육智

沙干支妻阿兮牟弘夫人作書人慕慕尒智大舍帝智

식다살작공인(짐승을 잡은 도살인?)은 이리부지와 실득지대사제지이며 작식인은 영지지일길간지의 처 거지시해부인과 신육지 사간지의 처 아혜모홍부인이고 작서 모모이지 대사제지이다.

 

追名 : 1.過去乙巳年六月十八日昧沙啄部徙夫知葛文王妹於史鄒女郞王共遊來以後□□八□年過

과거 을사년 유월십팔일새벽 사탁부사부지갈문왕과 누이 어사추여랑왕께서 같이 놀러 오신이후 □□년이 지났다.

2.妹王考妹王過人丁巳年王過去其王妃只沒尸兮妃愛自思己未年七月三日其王與妹共見書

石叱來谷

누이왕을 생각하니 누이왕은 놀아가신분이라 정사년에 왕도 돌아가셨다. 그왕비 지몰시혜비께서 스스로 애닯게 생각하사 기미년 칠월삼일에 왕과 누이가 같이 와 서보고 새긴 돌을 보러 골짜기에 오셨다.

3.此時共王來무(口+力)卽知太王妃夫乞支妃徙夫知王子郞深□夫知共來

이때 왕(왕비)과 함께 무즉지 태왕비이신 부걸지비와 사부지갈문왕자이신 심맥(?)

부지께서 함께 오셨다.

4.此時作功臣啄部知礼夫智沙干支泊六知居伐干支礼臣丁乙尒知奈麻作食人眞육智波珍 干支婦阿兮牟呼夫人尒夫知居伐干支婦一利等次夫人居礼次□干支婦沙爻功夫人分共

作之

이때 작공신은 탁부지례부지 사간지와 박육지 거벌간지이며 예신은 정을이지나마

이다. 작식인은 진육지 파진간지의 처인 아혜모호부인과 이부지 거벌간지의 처인

일리등차부인 거례차 □간지의 처인 사효공부인이 나누어 행하였다.

(판독과 해석은 강종훈의 것과 한국금석문종합영상사이트의 것을 주로 참조 하 였음.)

 

번거럽지만 천전리서석의 원명과 추명을 판독 해석하여 보았다.

여기서 기존연구성과와 합쳐 몇가지 거의 확실한 사실을 정리해 보면

1.사부지 갈문왕은 법흥왕의 동생이자 진흥왕의 아버지 입종이다.

2.지몰시혜비와 심□부지 왕자랑은 지소부인과 진흥왕이 틀림없다.

3.무즉지태왕은 법흥왕이며 태왕비 부걸지비는 지소의 어머니 보도부인일 가능성이 높다.

4.사부지갈문왕의 동생이라는 어사추여랑왕의 정체는 기존 사료로서는 알 수 없다.

덧 붙여서 본론과는 별 상관이 없지만 몇가지 사항만 지적해보겠다.

1.원명에는 입종과 그누이가 처음 놀러온 년도만 적혀 있지만 추명에는 정확히 월일과 시 각까지 (6월18일 새벽) 적혀있다. 어떻게 알았을까? 15년전의 일을 달력조차 흔치 않았을 (솔직히 있었겠나?) 때 정확히 기억해서 기록한다는게 가능한가? 더구나 당사자들은 다 죽은 후에...답은 하나밖에 없을 듯 하다. 즉 그때도 갈문왕을 따라다니며 기록하던 사관(?) 비슷한 직책이 있었다고 밖에는 추론할 수가 없다. 즉 비문의 어린애 장난같이 갈겨놓은 글자체와 대조적으로 의외로 당시에 문자가 상당히 쓰였다는 것이다. 아니면 암송을 통해 기록을 했던지...

2.원명과 추명에 다 등장하는 신육지란 인물은 봉평비에도 등장한다. 문제는 이인물이 봉

평비에서는 법흥왕과 함께 교를 내리는 14인중 하나로 나타난다는 점이다. 그래서 부체 제설이 유력해진 근거가 되었다. 즉 당시 왕은 신하와 더불어 연명으로 결정하는 일개 부의 장으로 신라를 대표하는 대표자의 신분에 불과 했다는 건데 여기서 왕과 평등하게 국사를 논의하는 파진찬(진골이 틀림없다.)의 부인이 겨우 갈문왕이나 갈문왕비를 따라

다니며 유원지에서 밥이나 해주는 도우미 아줌마였다는 사실이다...뭐 신라의 실상이

갈문왕이란 존재가 왕에 버금가는 센 존재였던지...아니면 부체제설이 좀 과장된 면이

있는 건지...즉 화백이나 대등회의 전신에서 왕과 같이 연명으로 교를 내린다 하여 왕과

맞먹지는 못한 것이 틀림없다. 적어도 천전리서석은 부체제설을 거부한다 할 수 있지 않

을까?

3.원명4에 나타는 식다살자공인은 아무리 생각해도 짐승을 도살하는 이 즉 조선시대의

백정노릇하는 자로 보인다. 짐승을 잡고 요리를 하고 제사를 진행하는 잡다한 일들을 진골이나 진골일 수 있는 귀족들의 부인과 벼슬아치들이 몸소하고 있다. 왜 화랑세기에서 귀족들이 왕이나 아니면 자기보다 조금 격이 높은 상급귀족에게 스스로를 奴라고 낮춘 사례가 많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2.남당유고 (금천대제 법흥진왕기)와 비교

 

 

1.입종의 죽음 :

천전리 추명에 의하면 정사년에 죽은 걸로 되어있다. 그러나 남당유고에 의하면 입종이 죽은 시기는 추명이 쓰여진 바로 직전 즉 기미년 6월로 되어있다.

즉 진흥왕이 즉위하기전 법흥왕이 죽기전 입종이 죽은 사실은 같으나 시기가 다르다...

하지만 천전리 추명의 정사년 입종의 죽음이 과연 제대로 해석한 것인지는 좀 불분명하다...

예를 들어 좀 억지 스럽긴 하지만 정사년에 입종이 아니라 어사추가 죽은 것으로 해석해 볼 여지도 좀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정황상 입종이 남당유고의 기록대로 추명이 쓰여지기 바로 전달에 죽었다는 것이 좀 자연스러운 점도 있다. 즉 지소가 몇 년전에 죽은 남편이 새삼스럽게 생각나서 찾아왔다는 것보다는 남편이 죽은 지 얼마 안돼 남편의 추억을 떠올리려 기록을 쫓아 아들과 함께 찾아온 것이 라는 설명이 좀 더 자연스럽기 때문이다.

2.남당유고로 추정한 어사추의 정체

어사추는 일단 입종의 누이또는 누이에 준하는 상당히 가까운 혈족관계인 여성이라는 사실은 분명하다. 그런데 남당유고상 입종의 친누이(아버지 어머니가 같은...)는 단 한사람 보현공주이다. 그래서 나는 어사추는 남당유고가 맞다면 보현일 수 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최근 좀 생각이 달라졌다.

일단 보현은 입종보다 나이가 9살이나 많은 누나이다(보현 482년生 입종491년生) 누이 妹자를 못쓸 이유는 없지만 손위누이 姉자가 그리 어려운 글자도 아니고 友妹란 단어가 꼭 남매관계를 가르키는것과는 좀 다른 뉘앙스를 풍기기 때문이다. 요즘도 남편이나 애인을 “오빠”라고 부르지 않는가?

또한 입종과 어사추는 기미년 추명이 쓰일 당시에는 모두 이승사람이 아니었다.

입종은 어쨌던 기미년6월 즉 추명이 씌여진 전달에 죽은 걸로 되어 있지만

보현은 기록이 없다. 주요인물에 대한 생몰기사는 거의 누락 되지 않은 걸 보면 보현은

법흥왕 재위시에는 죽지 않았을 가능성이 많다. 사망기사를 누락시키기엔 보현은 좀 비중있는 인물이다.

여기서 나는 다른 후보인물을 찾아보기로 했다.

입종과 가까운 혈족이면서 기미년 이전에 죽은 공주나 그에 준하는 여성....

그중 유력한 인물이 바로 사실(梭失)이다.

사실은 법흥과 보현(친남매간임...) 사이에서 503년 출생한 바로 보현의 딸이다.

517년 입종과 결혼하여 522년 오종(五宗)이란 아들을 낳았으며

536년(을묘년) 7월에 죽는 걸로 되어 있다.

참고로 입종이 혼인한 것은 530년이고 534년 진흥이 태어난 것으로 되어 있으니

사실은 지소입장에서 보면 배다른 언니이자 남편의 본부인이 되는 셈이다.

입종의 입자에서 보자면 누이(妹)가 아니라 조카딸(姪)인 셈인데

우매(友妹)라고 쓴 표현이 손아래 친척인 부인을 뜻한다고 보면 오히려 어사추의 정체는 보현보다 그 딸 사실이 아닐까?

또한 지소의 입장에서 남편과 손위언니가 다 죽은 후 그 자취를 돌아보기 위해 찾아 온 것이 이해가 된다.

사실의 혈통은 친남매간의 사통으로 태어났으나 아마도 신라 사회에서는 예외적으로 귀한 혈통이었을 수 있다는 점에서 여랑왕(女郞王)으로 불릴 수 있는 자격이 충분했을 것이다.

 

 

3.천전리 서석기록과의 불일치.

 

1.입종은 법흥이 죽기전에 죽은 사실은 일치한다. 그러나 죽은 연도가 다르다.

천전리서석의 해독이 정확하다면 입종은 정사년(추명을 새기기 2년전)에 죽은 것으로 보이지만 남당유고로보면 전술한 바 기미년 6월에 죽은 것으로 되어있다.

여기서 정사년에 죽은 것이 혹 입종이 아니라 어사추가 아닐까? 하는 의문의 여지가 있긴하다. 비문을 좀 억지스럽게 해석한다면 입종이 죽은 것은 한달전이니 굳이 정사년이라고 쓸 것이 없고 정사년에 죽은 것은 어사추라고 본다면 사실의 죽은 시기와 겨우 1년 차밖에 나지 않는다. 고신라의 역법을 현재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다고 자신 할 수 없다면 1년의 차이는 날 수 있지 않을까?

 

2.남당유고가 사실이라면 추명에 지몰시혜비(지소)와 함깨 온 부걸지비는 지소의 어머니이자 법흥왕의 부인인 보도부인이 될 수가 없다.

왜냐하면 남당유고에는 보도부인이 528년(무신년)즉 원명이 쓰여진지 3년후 죽은 것으로 되어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분명하다. 또 연대가 일이년 차이도 아니므로 역법을 탓 할 수도 없다. 그럼 여기서 남당유고의 거짓이 명확하게 탄로 난 것인가?

그럴 가능성이 높다. 다만 남당유고에는 보도부인의 죽음에 대한 기사에서 다른 묘한 단서를 달아놓았다. 법흥과 보도의 사이에는 두딸 (지소와 설소)가 있었는데 아직 어리므로 벽화후(碧花后)가 그어머니 역할을 하도록 법흥왕이 명했다는 것이다.

벽화는 삼국사기 소지왕조에 나오는 바로 그 벽화이다. (남당유고에 따르면 벽화는 소지.지증.법흥 3대를 모신 왕후라고 한다.)

따라서 부걸지비가 보도가 아닌 벽화후라면 얘기는 또 틀려진다.

 

3.결론 : 금석문과 남당유고의 비교분석을 통해 남당유고의 신뢰성 검증을 해보았습니다.

역시 뚜렷한 결론을 내놓지는 못했군요. 좀더 시간을 두고 천착해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다만 남당유고에 등장하는 또한 범위를 좁혀서 화랑세기에 등장하는 인명들이 독자적으로 금석문에 등장하는 예는 거의 전무하기에 남당유고의 한자식 작명법만 탓하기엔 너무 설득력이 부족한 것 같습니다.(제가 이흔(伊昕)공의 자취를 희미하게 나마 봉평비에서 발견 한 바 있습니다만 너무 미흡하군요...)

  ps: 이말은 쓰지 않을려고 했는데 어차피 완벽하지 못 할 바에야 써 놓고 다른 분의 가르침을 청합니다. 부걸지비의 얘기인데요...

   고어가 어떻게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벽화(碧華)가 파란 꽃이란 뜻이라면 파란 (부) + 고지, 꽃의 고어(걸지)로 보도(保刀)보다는 좀 뜻이 통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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