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삼국사(신라)

황남대총남분발굴조사보고서(1995,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작성자정성일|작성시간11.02.11|조회수291 목록 댓글 10

 

 

 

첨부파일 황남대총남분 발굴조사보고서(1995).hwp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 북마크
  • 공유하기
  • 신고하기

댓글

댓글 리스트
  • 답댓글 작성자정성일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1.02.12 그러나 現 時點까지의 科學的 方向에서의 調査結果 및 放射性炭素年代 測定結果를 土臺로 한다면 皇南大塚 南墳은 17代 奈勿王(A.D.35l~402), 18代 實聖王(A.D.402~417), 19代 訥祗王(A.D4l7~458), 20代 慈悲王(A.D.458~479) 중의 1名, 北墳을 同 王妃, 天馬塚은 21代 炤知王(478~500), 또는 22代 智證王(510~514)의 陵인 것으로 提案하고 싶다. 年代의 上限을 17代 奈勿王으로 함은 이 時代로부터 新羅王室構成이 金氏系가 되어 있고 皇南大塚, 天馬塚이 相互隣接된 地域에 位置하고 있기 때문이다.
    (金 裕 善 外 全員)
  • 작성자정성일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1.02.12 (유물 참고자료 - 6.고고학적 종합고찰)
    이 古墳의 被葬者는 金冠이 아니라 金銅冠을 착용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고분의 被葬者는 金製銙帶와 腰佩를 착용하고 있었고, 副葬品 가운데에는 金製鳥翼形冠飾이 포함되어 있었다. 지금까지 조사된 新羅古墳에서 金冠과 金製銙帶 및 腰佩는 반드시 세트로 착장되었고, 金製冠飾도 金冠이 출토된 고분에서만 출토되었다. 이 점에서 金製銙帶와 腰佩를 착용하고 있었고 金製冠飾을 부장품으로 가지고 있었던 이 고분의 被葬者가 金冠이 아니라 金銅冠을 착용하고 있었던 것은 분명히 예외적인 사실이고, 이 古墳 被葬者의 婦人이었음이 분명한 北墳의 被葬者가 金冠을 착용하고 있었던 점과도 대비된다
  • 답댓글 작성자정성일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1.02.12 그래서 學界 일부에서는 이 고분의 被葬者가 金冠을 착용하고 있지 않은 사실을 들어 이 古墳 被葬者의 社會的 地位를 金冠이 출토된 다른 고분들의 피장자보다 한 단계 낮추어 보려는 경향도 있다.
    그러나 古墳의 規模와 細部構造도 그렇지만 이 고분에서 출토된 副葬品의 量과 種類, 質을 포함한 水準은 지금까지 金冠이 출토된 다른 어떤 古墳보다도 뒤떨어지지 않고 오히려 월등하다.
  • 작성자정성일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1.02.12 (피장자의 신장과 관련된 부분 - 4.유물의 출토상태)
    內棺 안에서는 被葬者의 遺骨로 頭蓋骨片과 下顎骨이 출토되었지만 頭蓋骨片도 흩어져 있었고 被葬者의 下體部 遺骨은 발견되지 않아 被葬者의 體格을 알 수는 없었다. 被葬者가 착장하고 있던 裝身具들도 크게 보아서는 대부분 제자리를 지키고 있었지만 세부적으로는 약간씩 움직였다고 보아야 할 것이므로 이들의 위치로서도 被葬者의 體格을 짐작하기는 어렵다.
  • 답댓글 작성자정성일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1.02.12 다만 金銅冠의 頂部가 위치하였던 곳에서 大形 腰佩 끝까지의 거리가 181cm, 鐶頭大刀의 끝까지가 177.5cm로,北墳의 金冠 頂部로부터 大形 腰佩 끝까지의 거리 143cm보다는 모두 30cm 이상이나 길었다. 北墳의 경우 大形 腰佩의 上端이 銙帶와 근접하여 있었던 반면,南墳의 경우 大形 腰佩의 上端이 銙帶와는 약 25cm나 떨어져 있었던 차이점이 있지만. 大刀의 끝을 기준으로 하여도 北墳의 被莽者보다는 큰 키였다고 판단할 수 있는 것이다.
댓글 전체보기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