氣를 찾아서
기氣! 한의대 입학 후 지금까지 나의 의식세계를 강하게 지배해온 기氣!
숱하게 쏟아져 나오는 기氣에 관한 정보, 여러 사람의 입방아 속에 등장하는 기氣에 관한 신비. 이처럼
왜곡된 기氣의 현실에 이제부터 나는 반기를 들고자 한다.
기氣는 없음(無)의 자리를 나타나는 관념적 용어범주이다. 따라서 기氣의 실체를 찾고자하는 일체의 과
학적 접근은 모두 왜곡이다. 사실 '기氣의 실체'라는 용어 자체가 웃기는 말이다. 기氣는 실체를 논할 수
없다. 있음(有)을 통해 없음(無)의 빈자리를 느낄 수 있듯이 기氣 또한 이러한 느낌을 통해서만 제대로
볼 수 있으니 요새 단전호흡이나 기공체조 등이 유행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나의 몸은 있음
(有)이나 내 몸의 일체 행위는 없음(無)의 자리에서 나온다. 예컨대 나의 손(有)이 연필을 잡고 글을
쓸때 글 쓰는 행위는 없음(無)의 자리에서 이루어지는데 이것을 기氣라 한다. 대뇌의 어떤 부분에서
내려진 명령에 따라 팔과 손가락의 무슨 근육이 어떤 각도로, 어떤 방향으로 움직이면서 글이 쓰인다
라는 설명가지고는 결코 내 손가락들의 무궁무진한 변화의 움직임을 표현할 수가 없다. 즉 있음(有)의
자리에서는 그 쓰임의 변화를 자세히 논하기가 처음부터 불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우리 조상들은 무궁
한 쓰임의 변화를 너무도 훌륭히, 너무도 완벽하게 설명해냈으니 그 설명의 도구가 바로 기氣이다. 그리
고 태극太極이니 음양陰陽이니 사상四象이니 오행五行이니 하는 용어도 모두 없음의 자리, 기氣의 자리에서 나온 것인바 음양오행陰陽五行에 통달한 사람은 기氣를 운용할 줄 알고 없음(無)의 자리를 바로 봄으로써 무궁한 쓰임의 변화에 능통하니 이에 그는 사람의 질병을 다스릴 뿐만 아니라 길흉화복을 예언하고 천문과 지리에도 밝을 수 밖에 없다.
나의 이러한 견해((지금까지의 이야기는 나의 '기철학氣哲學' 제1단계이다.))는 여러분들을 황당하게 만들 것이다. 특히 고학년일수록 더욱 그러할 것이니 이는 기氣, 태극太極, 음양陰陽, 사상四象, 오행五行등의 용어들이 예과때 조금 만지작거려지다가 학년이 올라가면서 무슨 혈자리, 무슨 처방에 밀려 의식속에서 점차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여러분이 오히려 더 훌륭한 한의사가 될 것이다.
어쩌면 나는 스스로 만든 기氣의 관념적 망상속에서 모든 정력을 쏟으며 허우적거리는지도 모른다. 작년 한맥지韓脈誌에 실렸던 나의 산문散文,『물은 올리고, 불은 내려라!』에서도 언급했듯이 나는 기氣에 관한 독특한 견해를 가지고 있다.(이 기회를 통해 인내심을 가지고 그 글을 끝까지 읽어주신 극소수의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그것은 지난 5년간 오직 기氣 하나에만 매달린 결과이나 나는 이를 학문적 성과라기보다는 기氣에 대한 스스로의 합리화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런 합리화로 인해 기氣의 실체를 잡았구나하는 착각에 빠지는 부작용도 있었지만 한편으론 한의학韓醫學이 절대 비과학非科學이나 미신迷信이 아니라는 확신을 가지는 성과도 있었으니 이 점은 앞으로 내가 가야할 길, 오직 나만의 길(道)을 힘차게 걸어가는 원동력이 될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음기陰氣, 양기陽氣; 간기肝氣, 심기心氣, 비기脾氣, 폐기肺氣, 신기腎氣; 청기淸氣, 곡기穀氣, 정기精氣; 종기宗氣, 원기元氣, 영기榮氣, 위기衛氣 등등
이상은 한의서韓醫書에서 흔히 언급되는 기氣의 용어들인데 이들 각각에도 개념정의가 있으나 여기서는 생략한다. 잘못하다가는 기氣에 대한 문자상의 정의가 머리속에 박혀 느낌을 못 가지게 하기 때문이다. "A는 A이고, B는 B이다."라고 말해버리면 A가 곧 B가 되고, B가 곧 A가 됨을 못보게 하기 때문이다. 그 예로 대부분 간기肝氣, 심기心氣, 비기脾氣, 폐기肺氣, 신기腎氣를 각기 다른 기氣처럼 정의내리는데 이는 어림반푼어치도 없는 착각이니 명가명名可名, 비상명非常名; 그 용用에 따라 그 명名이 달라지듯이 위의 다섯가지 기氣 또한 그 쓰임에 따라 나뉘었을 뿐 모두 하나의 기氣에 불과하다.
궁-상-각-치-우; 피리의 다섯 구멍에서 나는 소리가 각기 다른 것 같지만 모두 피리를 부는 한 입김
에서 나온다. 그 한 입김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오직 다섯 소리에만 매달린다면 남의 피리 소리엔
왈가왈부할 수 있을지 몰라도 스스로는 절대 피리를 불 수 없다. 이처럼 불 수 없는 피리가 무슨 소용
인가. 한 기氣를 모르고서 논하는 폐기肝氣, 심기心氣, 비기脾氣, 폐기肺氣, 신기腎氣가 무슨 소용인가.
앞서 氣는 없음(無)의 자리라 하였는데 사실 있음(有) 또한 기氣의 자리이다.((나의 '기철학氣哲學' 제2단계))
따라서 없음(無)에 의해 있음(有)이 쓰여(用)지고, 있음(有)에 의해 없음(無)이 실존(體)하는 것은 오
직 기氣로써 가능하다. 없음에서 있음이 등장하고, 그 있음이 다시 없음으로 돌아가는 절대적 순환의
진리는 오직 이 기氣 하나로써 인식되는 것이다. 이처럼 우리는 없음과 있음을 하나로 묶는 기氣 때문에
없음의 자리에서도 있음의 자리를 충분히 헤아릴 수 있다. 그러므로 양洋, 한방韓方이 하나되는 의료일원화는 동양의학東洋醫學이 중심 위치에 있어야 동서양東西洋이 함께 공존하며 발전할 수 있지 서양의학西洋醫學이 그 중심이 된다면 이는 곧 기氣의 상실이요, 동양의학東洋醫學의 종말이다.
아내가 죽었는데도 항아리를 두들기며 노래 부르던 장자는 친구 혜시에게 이렇게 말한다.
"처음에는 나도 슬펐다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 보니 애초에 그녀라는 존재가 있지 않았는데 뒤에
기氣가 변화하여 그녀가 되었음을 알게 되었네. 이제 그녀는 죽었으니 사람이 다시 기氣로 변화한 걸세.
이것은 사계절이 변화하여 자연이 바뀌는 것과 같지 않은가? 그러니 어째서 곡을 해야 하는가?
사람이 태어난다는 것은 기氣가 모여서 이루어지는 것이며 죽으면 다시 흩어져 기氣가 되네. 이처럼
삶과 죽음은 끊임없이 서로 뒤바뀌는 것에 불과한데 죽음에 대해서 무엇을 슬퍼해야 한다는 말인
가? "
장자는 없음(無)의 자리를 기氣로 표현하여 기氣→ 그의 처→ 기氣라고 이야기하는데 그의 말속엔 있음(有)의 자리, 즉 그의 아내 또한 하나의 기氣에 불과하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기변이유형氣變而有形 형변이유생形變而有生 금우변이지사今又變而之死 시상여위춘추동하사지행야是相與爲春秋冬夏四時行也'라는 그의 말대로 그의 아내, 있음의 형形은 기합체氣合體에 불과한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반드시 고민해야 할 것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기氣→ 그의 처→ 기氣라는 설명에 있어서
'→'의 의미이다. 우주 생성론(기독교의 창조론)의 한계에 붙잡혀 있는 우리에겐 그 화살표의 의미가
시간적 흐름으로서 쉽게 간과될 수 있을지 몰라도 생성론 그 자체가 '자무이유생自無而有生'이란 표현을 통해 시간적으로 있음(有) 이전에 존재하는 없음(無), 즉 절대적인 무無를 강조하는 이상 이 논리는 기氣를 중심으로 하는 순환 원리에서 크게 벗어난다. 쉽게 말해 기氣의 순환 원리가 처음 없음(無)에서 시작하여 있음(有)이 되었다가 다시 없음(無)이 되는; 이처럼 시작과 끝이 있는 법칙이 절대 아니라는 것이다. 상식적으로도 순환에 있어서의 시종始終은 논할 수 없다. 그러므로 나는 노자의 '천하만물생어유 유생어무天下萬物生於有 有生於無' 그리고 장자의 '찰이시이본무생 비도무생야 이본무형 비도무형야 이본무기 잡호망홀지간 변이유기 察其始而本無生 非徒無生也 而本無形 非徒無形也 而本無氣 雜乎芒笏之閒 變而有氣'에서 나타나는 절대적인 무無를 인정할 수 없다. 수박 겉핥기의 얕은 학식으로 그분들의 높은 뜻에 반反하는 것이 죄스럽지만 만약 내가 절대 무無를 통한 우주의 시종始終을 인정한다면 나의 기철학氣哲學은 모래밭 사과나무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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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작약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12.06.21 저 솔직한 자세와 권위에 그냥 맹종하지 않는 자세가 좋네요~ 일반적으로 철학과 관계된 것은 실체를 진짜 알기 보다는 자신이 체험한 것을 근거로 한 합리화가 될 수밖에 없는 측면이 많다고 생각하는데요 (블랙스완 효과라고 해서 객관성의 환상에서 벗어나자는 이론도 있고...)그 합리화로 얼마나 실제적 구현력을 발휘하느냐가 관건이라고 생각합니다.
'작용하는 것이 진리다'라는 가정으로 진리를 탐구해 나가는 것이 방편의 덫에서 어느정도 자유를 획득할 수 있는 길인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