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르는 수레는 바퀴자국을 남기게 마련이다
천지만물天地萬物을 하나의 수레로 비유하면 오행五行(동정動靜)은 수레의 구름을 나타내고, 사상四象(음양陰陽)은 수레의 바퀴자국을 나타낸다. 오행五行은 없음(無)의 자리이고 음양陰陽은 있음(有)의 자리, 상象이기 때문에 우리가 천지만물天地萬物이 굴러감을 알 수 있는 것은 오직 바퀴자국을 통해서이다. <주역周易>에서 강조되는 '취상取象'이란 그 바퀴자국을 찾아내어 수레가 구르는 방향을 예측하는 것이다. 한의학韓醫學도 결국은 취상取象의 문제이니 환자로부터 음양陰陽, 사상四象, 팔괘八卦의 바퀴자국을 통해 오행五行이 굴러가는 상태, 간심비폐신肝心脾肺腎이 돌아가는 상태를 파악하여 이를 다스리는 것이 한의학韓醫學의 요점이 된다. 명의名醫라 함은 취상取象의 능력을 가진 사람을 가리키는데 한의학계韓醫學界에 수많은 학파가 존재하는 것은 象을 취하는 방법이 다양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진정 우리가 명의名醫를 바란다면 한문을 얼마나 많이 아느냐, 책을 얼마나 많이 읽었느냐가 아닌 철학하는 정신을 얼마나 가지고 있느냐, 상象을 취하는 능력이 얼마나 되느냐에 중점을 두어야한다.
취상取象에서의 '상象'은 사상四象의 '상象'과 같다. 음양陰陽을 뜻하는 양의兩儀(두 헤아림)와도 같다. 그리고 양의兩儀, 사상四象은 동정動靜, 오행五行의 드러남이 되고 동정動靜, 오행五行은 양의兩儀, 사상四象의 변화가 된다. 이러한 사상四象과 오행五行의 관계를 사계절 순환의 예로 설명해보자. 즉 봄, 여름, 가을, 겨울의 사계절이 사상四象이라면 봄-여름-가을-겨울-봄...의 순환은 오행五行이다. 계절이 순환함은 봄, 여름, 가을, 겨울을 통해서 알 수 있고 사계절이 각각 독립된 위치로 존재함은 계절이 순환하기 때문인 것처럼 오행五行은 사상四象을 통해 그 변화를 드러내고 사상四象은 오행五行에 의해 존재하게 된다. 여기서 잠시 여러분에게 한가지를 묻고자 한다.
'지금이 무슨 계절이지? 만약 지금이 겨울이라면 내일은 무슨 계절이지? 내일 모레는? 도대체 언제
까지가 겨울이고 언제부터가 봄이지?'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은 확실치 않다. 우리는 언제까지가 겨울이고, 언제부터가 봄이다라고 확답 할
수는 없지만 언젠가는 "아! 이제 봄이구나"라는 말을 하게 된다. 여기서 '아! 봄이구나'하는 것이 바로
취상取象의 결과이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의 사상四象 중에서 한가지 상象을 취取한 것이다. 이처럼 사상四象은 흐름에서 튀어 나오는 상象이기 때문에 결코 고정 불변의 성질이 아니니 이는 지금을 겨울이라고 말할 수 있으나 이 겨울이 언제까지 지속되어 봄으로 변하는지는 확답할 수 없음과 같다.
나는 이제마 선생의 사상의학四象醫學을 계절변화의 관점에서 생각해 본다. 소양인少陰人, 태양인太陽人, 소양인少陽人, 태음인太陰人을 봄사람, 여름사람, 가을사람, 겨울사람으로 보는 것이다. 그러나 소음인少陰人과 봄사람은 개념차이가 크니 사상의학四象醫學의 소음인少陰人이 체질불변에 따라 다른 태양인太陽人, 소양인少陽人, 태음인太陰人과 구별되는 독립된 체질이라면 봄사람은 봄, 여름, 가을, 겨울의 사계절이 모두 갖추어진 상태에서 유독 봄의 성질이 강한, 봄의 기간이 비교적 길거나 짧은 체질인 것이다. 소음인少陰人이라 하여 소음少陰 뿐이라면, 봄사람이라 하여 봄 뿐이라면 모든 것이 순환 변화하는 원圓의 자리에서 이 사람은 이미 생명체가 아니다. 오행五行과 사상四象은 원圓의 한자리에서 나온 것이기에 오행五行을 부정하면서 사상四象을 논함은 바퀴 없는 바퀴자국을 주장함과 같고,
사상四象을 부정하면서 오행五行을 논함은 자국을 남기지 않는 바퀴를 주장함과 같으니 이제마 선생의 사상의학四象醫學이 진실로 사상四象을 의미한다면 요즘 사람들이 사상의학四象醫學을 논함에 있어서 오행五行을 부정함은 심히 그릇된 것이다. 그래서 나는 사상의학四象醫學을 오행五行의 관점에서 바라본 한동석 선생님의 통찰력에 감동하고 있다.
사상의학四象醫學에 있어서 제일 중요시 되는 체질 감별 또한 취상取象의 문제이다. 상象을 취取함에 있어선 철학적 느낌이 핵심인 바 어떠한 기구나 도구, 편협된 관점만으론 올바른 취상取象을 할 수 없다. 예컨데 우리가 지금을 겨울이라 함은 전체적인 느낌을 통해서다. 살을 에는 차거운 공기, 입에서 뿜어 나오는 입김, 하얗게 내리는 눈, 앙상하게 뼈만 드러낸 나무들, 두터워진 사람들의 옷차림, 거리의 군고구마 장수, 구세군의 종소리 등등... 이러한 전체적인 상황을 통해서 우리는 겨울을 느낀다. 만약 어느 누가 온도 하나만을 가지고 겨울을 느끼려 한다면, 사람들의 옷차림 하나만을 가지고 겨울을 느끼려 한다면 이는 정확한 감별이 될 수 없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체질 감별에 있어서 이와 같은 오류를 범하고 있다.
전체적인 느낌을 찾기보다는 간단하고 정확한 진단을 욕심으로 편협된 방법에만 매달리고 있다. 너무
성급한 것이 문제다. 이제 우리는 전체적인 느낌에 필요한 삶의 여유를 가져야 한다. 쉴새 없이 목을
죄는 현실의 답답함에서 벗어나야만 한다. 하숙집 골방에서 5년을 살아온 나, 답답함에 대한 참을성이
부족한 나, 글자의 시체들로 가득찬 차거운 책보다는 살아있는 인간의 따듯한 체온이 소중한 나에겐
현실은 돼지우리와 같다. 이런 돼지우리 속에 허우적거려온 나는 이미 전체적인 느낌을 잃어버렸다.
그러나 나는 현실을 원망치 않는다. 모든 원인이 바로 나, 나의 편협된 분심分心에 있기 때문이다.
장경악張景岳과 노자老子는 <유경도익類經圖翼>과 <도덕경道德經>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화생어일시명태극 化生於一 是名太極
변화는 하나에서 생하니 이것을 이름하여 태극이라 한다.
태극동정이음양분 고 천지지차동정 太極動靜而陰陽分 故天地只此動靜
태극은 동정과 음양으로 나누어지니 천지는 다만 이 동정일 뿐이다.
동정편이음양 음양편이태극 차외경무여사 動靜便是陰陽 陰陽便是太極 此外更無餘事.
동정이 곧 음양이고 음양이 곧 태극이다. 이것 외에 또 다른 것은 없다.
무 명천지지시 유 명만물지모 無 名天地之始 有 名萬物之母
없음은 천지의 시라 하고 있음은 만물의 모라 한다.
고상무 욕이관기묘 상유 욕이관기 故常無 欲以觀其妙 常有 欲以觀其
그러므로 상무로써 그 묘를 보고자 하고, 상유로써 그 언저리를 보고자 한다.
차량자동 출이이명此兩者同 出而異名
이 두가지는 같은 것이니 나와서 이름을 달리했을 뿐이다.
동위지현同謂之玄
그 같음을 현이라고 한다.
현지우현 중묘지문玄之又玄 衆妙之門
현하고 또 현하도다! 모든 묘함이 그 문에서 나오는도다!
태극太極은 노자老子가 말한 있음(有)과 없음(無)을 하나로 묶어주는 현玄이다. 이러한 태극太極의 없음(無)의 자리에서는 동정動靜이 이루어지는 바 이 동정動靜은 오행五行으로 나뉘고, 태극太極의 있음(有)의 자리에서는 음양陰陽이 이루어지는 바 이 음양陰陽은 사상四象으로 나뉜다. 여기서 '나뉜다'라는 표현은 시간적 흐름에 따른 것이 아니라 서로 등에 타는 '승乘'의 개념임을 앞서 말했다. 본래 음양陰陽과 오행五行은 서로 달리 시작되어 후에 하나로 합쳐진 사상思想인데 있음의 자리를 논한 음양가陰陽家의 음양론陰陽論과 없음의 자리를 논한 오행가五行家의 오행론五行論이 유무有無가 하나되는 현玄, 즉 태극太極의 자리에서 하나가 됨은 극히 당연하다.
오행五行을 상생상극相生相剋으로 이루어진 둥근 공이라 한다면 사상四象은 음양대대陰陽對待로 이루어진 육면체 주사위이다. 계속 구르기만 할 뿐 어떤 특정한 면으로 멈추지 않는 공처럼 오행五行은 드러냄이 없는 무無의 자리이다. 그리고 굴리면 곧 특정한 면을 나타내며 멈추는 주사위처럼 사상四象은 드러냄이 있는 유有의 자리이다.
그러나 유有와 무無는 하나다. 사상四象과 오행五行은 하나다. 여기서 하나라 함은 서로 완전히 융합되는 '='의 개념이 아니다. 분심分心을 가진 인간은 완전한 융합을 논할 수 없다. 우리가 이미 有와 無를 말하고 있음은 有와 無가 완전한 하나가 아님을 스스로 인정하는 것이기에 有와 無가 하나로 융합된다는 표현은 모순이다. 유무有無가 하나됨을 깨달은 자는 그 하나됨을 논함에 있어서 有와 無를 빌려 말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내가 말하는, 有無가 하나란 말은 무슨 뜻인가? 그것은 有와 無가 서로 승乘함이다. 승乘의
자리에서는 유무有無가 하나도, 둘도 아니면서 하나이자 둘이다. 이율곡 선생의 이기론理氣論 또한 승乘의 자리를 논하니 선생은 이기불상리理氣不相離함과 동시에 불상리不相雜함을 말하면서 이기理氣는 본래 둘이 아니고 하나라는 것(일원적一元的인 이기理氣의 유행流行) 그리고 이理(무위無爲, 형이상形以上)와 기氣(유위有爲, 형이하形以下)는 또한 둘이라는 것, 다시 말하면 이기理氣는 하나면서 둘이라는 일원적 이기이원론一元的 理氣二元論을 주장하였다. 후세 사람들은 율곡 선생께서 이기일원론理氣一元論과 이원론二元論 사이에서 방황하셨다고 말하지만 나는 방황이 아니라 이기理氣의 관계를 올바로 직시하셨다고 생각한다.
有와 無가 서로 승乘하고, 음양陰陽과 동정動靜이 서로 승乘하며 사상四象과 오행五行이 서로 승乘한다. 그리고 동시에 음양陰陽과 사상四象이, 동정動靜과 오행五行이 서로 승乘한다. 무엇이 먼저이고 무엇이 나중이냐가 결코 아니다. 다만 서로를 등에 업은 것 뿐이다. 구르는 수레가 바퀴자국을 남기는 그 순간에 있어서는 구르는 바퀴가 먼저냐 자국이 먼저냐가 있을 수 없다.
작은 웅덩이에 물이 있다. 나는 그 속에 손을 넣고 휘저어 본다. 순간 안개처럼 일어나는 흙들. 곧
웅덩이의 물은 흙탕물로 변한다. 휘젓던 손을 멈추고 잠시 기다리면 바삐 움직이던 흙들은 다시
가라앉고 웅덩이의 물은 처음의 깨끗한 물이 된다. 하루종일 나의 손은 휘젓고 멈추는 일을 반복하
고 있다.
물은 태허太虛이자 태극太極이다.
물 그 자체는 태허太虛이나 웅덩이 속의 물은 태극太極이다.
웅덩이를 떠난 물은 존재할 수 없기에 태허太虛는 곧 태극太極이고 태극太極은 곧 태허太虛이다.
태허太虛의 물에는 본래 청淸(깨끗한 물), 탁濁(흙탕물)이 없으나
태극太極의 물은 청淸과 탁濁 그 자체이다.
휘젓는 손의 움직임은 동정動靜이고
흙탕물과 깨끗한 물은 음양陰陽이니
태극동정이음양분太極動靜而陰陽分이라함은
바로 휘젓는 손의 움직임에 따라
본래 청탁淸濁이 없는 물이,
청탁淸濁을 모두 가지고 있는 웅덩이의 물이
흙탕물과 깨끗한 물이 됨을 가리킨다.
내 손의 움직임은 나의 마음에서 비롯되니
태극太極이 동정動靜하고 음양陰陽이 분分함은
모두 분심分心에서 일어난다.
나는 이제 나의 틀을 깨고자 한다
석가모니께서 하루는 마니주摩尼珠(투명한 구슬)를 가지고 오방신장五方神將에게 물었다.
'이것이 무슨 색이냐?'
그러자 오방신장五方神將은 투명 구슬에 비춰진 자신의 옷색깔에 따라 대답하였다.
'푸른색 입니다.'
'붉은색 입니다.'
'누런색 입니다.'
'흰색 입니다.'
'검은색 입니다.'
내가 이제까지 말한 모든 내용은 스스로 짜집기한 작은 틀속에서 바라본 극히 부자연스러운 세상이
야기이다. 만약 내가 이 자리에서 나의 철학이 곧 진리임을 주장한다면 이는 투명한 구슬에 비춰진 자신의 옷색깔을 가지고 본래의 구슬색임을 주장하는 오방신장五方神將의 아집과 다를 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지금 부끄럽게 이글을 쓰는 이유는 나홀로 깨버리기에는 너무나 단단한 망상의 틀, 나를 그토록 아프게한 분심分心의 틀을 부숨에 있어서 여러분의 힘을 빌리고자 함이다.
이제 나는 더이상 편협된 분심分心을 일으키고 싶지 않다. 사실 글을 쓰고 있는 지금 이 순간에도 나는
엄청난 분심分心을 일으키고 있다. 비교하는 마음, 비판하는 마음에서 야기되는 육체적 고통을 순전히
약藥발로 버티면서 글을 쓰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나의 글쓰기 작업은 일종의 살풀이와도 같다. 오래
기억하기 위해 쓰는 것이 아니라 잊기 위해 쓴다. 도道는 앎을 쌓아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점점
덜어냄으로써 이루어진다는 옛 성현의 말씀처럼 나의 글쓰기는 덜어냄을 그 목적으로 시작되었다.
이제부터 나는 나누어 쪼개는 마음보다 한곳으로 모으는 마음을 가지고자 한다. 말로만 잘난 체하기
보다 말없이 행동하고자 한다. 이번 겨울방학이 시작되면서 많은 사람들이 나에게 묻는다. 이번엔
무슨 공부를 할거냐고. 이에 대한 나의 대답에 친구들은 한심하다는 듯이 나를 쳐다본다.
지금까지 해본적 없는 아주 큰 공부를 할거라구.
눈물겹도록 진한 사랑 말이야.
숨쉬는 것만으로도 아름다운 생명 그자체를 사랑하고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