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을 지나갈 때가 있습니다. 새벽이 와도 밤의 기운이 종일 지배하는 때가 있습니다. 난치병이나 불치병이 찾아오거나, 벗어날 수 없는 가난에 짓눌리거나, 돌이킬 수 없을 것 같은 실패를 경험하거나, 사랑하는 사람을 잃거나, 악한 자가 잘 되고 악한 권력의 지배를 받거나, 진보해야 할 역사가 퇴행할 때면, 새벽이 와도 빛이 없는 밤 같습니다.
구름이 가리지 않는다면 추석엔 밤에도 빛을 만납니다. 밤이지만, 보름달이 떠 가장 환한 밤이 추석입니다. 가장 환한 밤을 맞이하며, 오랫동안 사람들은 쉬고, 놀고, 배불리 먹으며 하루를 보냈습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추석만 같으라고, 말하곤 했습니다.
밤의 복판에 빛이 있습니다. 밤하늘 가장 높은 곳에 빛이 있습니다. 악이 지배하는 세상에 선이 있습니다. 악한 세상에도 한 줌 선이 있습니다. 밤이 지배하는 시간에도 한 점 빛이 있어 추석이듯, 악한 기운이 덮쳐오는 때에도 한 줌 선이 있어 살만합니다.
다수의 악인 때문에 망해야 할 도시 소돔에 소수의 의인이 있다면 망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밤이 깊어 살지 못하는 게 아니라, 한 점 빛을 보지 못하면 죽는 것입니다. 악은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 선이 부족할 때 드러나는 것이요, 밤은 그 자체로 어두운 게 아니라 빛이 없을 때만 무섭습니다. 빛이 있습니다. 환한 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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