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인걸선생 묘(경기 기념물 58호) written by 한국의 능원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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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인걸선생 묘역 입구 전경 |
조선 중기의 유학자이자 청백리의 한 사람이던 휴암(休庵) 백인걸(白仁傑, 1497∼1579) 선생의 본관은 수원(水原), 자는 사위(士偉), 호는 휴암(休菴)으로 아버지는 왕자사부 백익견(白益堅)이고, 어머니는 단양(丹陽) 우씨(禹氏)로 우종은(禹從殷)의 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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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실 입구 및 재실 모습. 예전의 사진을 보니 휴암문/휴암재였는데 가의문/가의재(嘉義齋)로 이름을 바꾸었네요. |
조선 중기의 문신이며 조광조의 문인이다. 한성에서 태어났는데, 일찍이 김식이 성균관에서 강의하는 것을 보고 크게 깨우쳐 학업에 힘썼으며 조광조를 존경하여 그에게 가르침을 받고자 그 집 옆에 방을 만들어 기거하면서 배웠다. 그러나 중종 14년(1519) 기묘사화로 인하여 스승과 동료들을 모두 잃자 금강산에 입산하여 심신을 수양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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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실 우측에 묘역으로 오르는 계단이 있습니다. |
1537년 문과에 급제하여 예문관 검열·예조좌랑·호조정랑 등을 역임하였다. 1545년 을사사화 때 윤원형을 반대하다가 문정왕후의 미움을 사서 파면되고, 명종 3년(1548)에는 양재역 벽서사건에 연루되어 안변으로 유배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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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휴암 백인걸선생 묘역 전경 |
1567년 선조가 즉위하자 다시 기용되어 홍문관교리·양주목사·승정원승지·이조참판·사간원 대사간을 역임하고, 선조 2년(1569) 대사헌에 올랐다. 이어서 병조참판·동지경연사·의금부사를 겸임하고, 1571년 다시 대사헌에 보임되어 조정의 권신을 탄핵하다가 뜻대로 되지 않자 1574년 사임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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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생의 계배(후실)인 순흥 안씨와 합장묘로 조성되어 있습니다. |
벼슬에서 떠난 그는 조석을 끓이지 못할 정도로 청빈하였는데, 이를 안 감사 윤근수의 상소로 양곡을 하사받았다. 1568년부터는 조광조를 문묘에 배향할 것을 여러번 건의하였고, 1579년에는 지중추부사로서 이이와 함께 동서 붕당의 폐단을 지적하고, 국경의 군비강화를 강조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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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인걸선생 봉분 뒤에 있는 묘는 선생의 조부인 참교공 백사수(白思粹)의 묘입니다. |
《명종실록(明宗實錄)》 편찬에 참여하여 청백리로 뽑혔고 충숙(忠肅)의 시호를 받았으며, 순종 3년 문경(文敬)으로 개시(改諡)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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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부의 묘역 뒤에서 내려다 본 모습 |
묘를 정면으로 하여 왼쪽 편으로는 묘비가 서 있으며, 묘 앞에는 단을 쌓았는데 좌우로 동자상·망주석·문인석이 각 1쌍씩 놓여 있다. 묘소 아래에는 신도비가 있는데 송시열이 글을 짓고 송준길이 글씨를 쓴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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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묘역을 내려오면 우측에 신도비가 있습니다. |
▲ 신도비의 이수 모습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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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도비각 우측 언덕에는 백인걸선생 첫 부인(元配)인 평택 임씨의 묘가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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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묘비의 두께가 정사각형입니다. 드문 경우입니다. |
▲ 평택 임씨의 묘역 뒤에서 내려다 본 모습 |
백인걸선생 묘역 위치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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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살표 ↑ 위치에 백인걸선생 묘역이 있습니다. 소재지 : 경기 양주시 광적면 효촌리 산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