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안공주 묘 written by 한국의 능원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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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안공주(현종의 3녀) 묘역 전경 |
명안공주 묘는 소재지 지번 정보를 알 수 없었으며, 수인산업 도로변에 위치하고 있다는 정보만으로 무작정 안산시 사사동으로 향했습니다. 사사동을 접어들면서 수인산업도로 변에서 묘역을 보았습니다만, 진입이 어려워서 한참을 헤메었습니다. 지번을 모르는 관계로 처음 찾아 가시는 분들을 위해서 하단에 항공사진 두 장을 집어 넣었습니다.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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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회가 보이는 마을로 접어들어 위 사진의 골목으로 들어가면 묘역이 보입니다. |
안산시 상록구 사사동에 위치한 명안공주 묘는 안산에서 손에 꼽을 만큼 몇 안 되는 왕실관련 묘 중에 한 곳이다. 그러하기에 그 삶을 살펴보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일 것이라 생각된다. 명안공주(1664-1687)는 본명이 온희(溫姬)로 현종과 김우명(金佑明)의 딸인 명성왕후(明聖王后)의 사이에 1남 3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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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단에 위치한 양자인 오원(吳瑗) 묘) |
▲ 하단의 오원 묘에서 바라본 명안공주 묘역(중앙) |
현종은 외아들(훗날 숙종)과 명선(明善)·명혜(明惠)·명안(明安)공주 등 세 공주를 두었는데, 명안공주의 언니가 되는 두 공주는 모두 일찍 사거(死去)하였다. 그래서 그녀는 현종의 극진한 사랑을 받았으리라 생각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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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안공주와 해창위(海昌尉) 오태주(吳泰周)의 묘 |
부왕 현종이 딸을 생각하는 글을 통해 당시의 상황을 엿볼 수 있다. 국립중앙박물관 역사관 한글실에는 현종이 명안공주에게 보낸 한글 편지가 있다. 두 딸을 일찍 잃고 막내 딸을 더 고이 여기는 아버지의 따스한 마음이 가슴을 울린다. “새 집에 가서 밤에 잠이나 잘 잤느냐”며 잠자리 걱정으로 시작해, 병풍을 보내니 몸조리 잘하라고 이르기도 하고, “밥에 나물을 넣어 잘 먹어라”는 등 당부로 끝나는 편지엔 시집간 공주를 생각하는 아버지의 애틋한 정이 넘친다. 또한 딸을 시집보내고 “섭섭 무료하기 가이 없어 하노라”하는 등 한 나라의 왕이기 전에 한 아버지로서의 정이 절절히 배어 있음을 느낄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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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묘역내 석물 모습. 묘역 입구에 안내판을 설치 중에 있는 것을 보니 향토유적으로라도 지정될 모양입니다. |
명안공주는 1679년(숙종 5년) 판서 오두인(吳斗寅)의 아들인 오태주(吳泰周)와 혼인하였다. 남편 오태주는 오위도총부도총관(五衛都摠府都摠管)․조지서제조(造紙署提調)·귀후서제조(歸厚署提調) 등을 지냈는데, 1689년 희빈 장씨(禧嬪張氏) 소생 왕자를 세자로 책봉하려는 숙종과 남인(南人)들에 대하여 노론(老論)의 송시열(宋時烈) 등이 반대운동을 일으키자 이에 동조하여 책봉을 반대하는 의견을 상계하였다가 한때 관작이 삭탈되기도 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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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숙종어제 제문비 |
▲ 봉분 우측에 위치한 묘비 |
숙종대는 조선왕조를 통틀어 당파간의 정쟁이 가장 심했던 기간이었다. 중기이래 계속 되어온 붕당 정치가 절정에 이르면서 붕당 내부의 파행적 운영이 심화되어 자체 파탄이 일어났던 시기였다. 그렇기에 그 정쟁속에서 오태주도 결정적인 시기에 어떠한 형태로든 한 쪽으로 결정을 해야했을 것이고, 그 운명에 명안공주도 함께 하였을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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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묘비의 기단부 앞뒤에 새겨진 문양. 마치 살아 움직이는 듯 합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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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포에 있는 김만기선생 묘비 문양과 똑 같은 것으로 보아서 한 석공이 조각한 것 같습니다. 예로 몰년(沒年, 1687년)이 똑 같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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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묘비의 기단부 좌우에 새겨진 문양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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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숙종대는 정쟁이 격화되는 시기이도 하지만 왕권이 강화되어 임진왜란 이후 지속되던 사회 체제의 전반적인 정비 및 복구 작업이 거의 종료되었다고 할 만큼 치적을 남기기도 하였다. 먼저 경상도와 황해도까지 대동법을 실시하여 그 적용범위를 전국으로 확대시켰다. 이는 광해군이래 계속된 세입일원화 계획을 완성시켰고, 광해군 때에 시작된 양전 사업을 계속 추진하여 강원도와 삼남지방에 실시함으로써 서북 지방 일부를 제외하고는 전국에 걸친 양전을 사실상 종결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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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안공주 묘역 뒤에서 바라 본 모습 |
국방면에서도 변경지역에 산성을 쌓고, 대대적인 도성 수리 공사도 하였다. 특히 북한산성을 총체적으로 개축하여 남한산성과 함께 서울 수비의 양대 거점으로 삼았다. 또한 5군영 체제를 완성하였다. 외교적으로도 1712년 청나라측과 협상하여 백두산정계비를 세워 영토의 경계선을 분명히 하였고, 일본에도 통신사를 파견하여 막부 정권을 상대로 협상을 벌여 왜인의 울릉도 출입 금지를 보장받음으로써 울릉도 귀속 문제를 확정지었다. 문화적으로도 사육신이 복관되고, 노산군 단종을 복위시켜 묘호를 단종으로 하였으며 소현세자 빈 강씨를 복위시켜 민회빈으로 복위시켜 왕권강화 측면에서 왕실의 충역 관계를 재정립하는 작업을 활발히 진행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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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안공주의 시어머니인 상주 황씨 묘역 |
명안공주는 오라버니 숙종과 다정다감한 사이였다. 숙종이 누이인 명안공주에게 보낸 한글 편지, 지급한 물품, 그리고 숙종이 하사하였거나 혼례 때 내려준 것으로 보이는 완초화문석(莞草花紋席)·운보문(雲寶文) 겹보자기 등 오늘날까지 전해지는 유물들을 통해 오누이 사이의 따사로운 정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명안공주는 오래 살지 못하고 젊은 나이에 일찍 세상을 여의었다. 그녀의 짧은 생애에 남긴 인간적인 모습은 왕실이건 아니건 우리 삶의 가장 기본적인 가치는 훈훈한 가족간의 사랑임을 다시 한 번 보여준다 하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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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주 황씨 묘비. 묘비는 신도비를 겸하고 있으며, 옥개석이 장명등의 옥개석과 비슷합니다. |
명안공주는 그 복록을 못다 누리고 23세 꽃다운 나이에 갑자기 죽었다. 숙종 13년 5월 공주가 죽자 왕은 소복을 입고 머리를 풀어 슬퍼하고 10일간 육식을 안 하겠다고 하였다. 그리고 이 한여름 날씨에 입관 전에 조문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신하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공주집에 친히 나갈 정도였다.
명안공주는 광주 월곡리에 장사지냈다 하는데 바로 그곳이 현재의 월곡동으로 숙종과 누이 명안공주에 관한 궁중의 전승담이 아마도 그곳에서 비롯된 것 같다. 공주 묘를 화성군으로 옮긴 것은 그 후인 듯이 보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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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주 황씨 묘역 뒤에서 바라 본 모습 |
제18대 현종대왕(顯宗大王) [1641 ~ 1674]
정비 명성왕후 김씨(明聖王后 金氏) [1642 ~ 1683] 적1남 왕세자(王世子) [1661 ~ 1720] : 제19대 숙종대왕 |
명안공주 관련유물(보물 1220호) - 강릉 시립박물관 소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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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현종의 셋째 딸인 명안공주(1664∼1687)와 그가 거처하던 명안궁과 관련된 전적류, 고문서류, 유물 등이다. 명안공주의 본명은 온희(溫姬)로, 숙종 5년(1679) 오태주와 결혼하였다.
전적류는 현종과 명성왕후, 숙종의 한글 편지 등이 수록된 어필첩과 각종 판본, 오태주 일가의 글씨를 모은 유묵첩, 영조의 환갑을 맞이하여 왕세손과 신하들이 만수무강을 기원하는 글모음집 등이 있다. 고문서류로는 각종 물품단자와 진정서이고, 유물들은 궁중에서 명안공주에게 보낸 생활용품들이다. 특히, 명안공주 작명단자는 왕실의 것으로 현존하는 유일한 것이다.
이와같이 여러 관련된 유물들은 그 종류가 다양해 당시 공주궁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들이며, 서예연구는 물론 예술적인 가치가 있고, 당시의 궁중생활사, 사회·경제사연구의 사료로서 소중한 자료들이다. |
명안공주 묘역 위치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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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살표 ↑ 위에 봉분 3기 중에 중앙의 봉분이 명안공주 묘역입니다. 소재지 : 경기 안산시 상록구 사사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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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성 사진의 오른쪽 방향에서 진행시는 시작 지점으로 빠지고, 왼쪽 방향에서 진행시는 시작 지점의 지하도로 U턴을 해야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