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준선생 묘(경기 기념물 120호) written by 한국의 능원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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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준선생 묘역 뒤에서 내려다 본 모습 |
조선 선조∼인조 연간의 문신인 뇌진자 이준(李準, 1545∼1624)을 모신 유택이다. 이준은 전주 이씨로 덕천군 이후생(李厚生)의 후손이다. 봉분은 부인과의 합장묘로 쌍분이다. 봉분은 화강암 호석을 원형으로 둘렀다. 쌍분의 중앙 앞에 월두형(月頭形) 묘비·상석·향로석이 밀집되어 있고, 상석에 가깝게 좌우로 동자상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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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묘역 입구의 사당 모습. 이 안에 이준선생 영정이 모셔져 있다고 합니다. |
상석을 중심으로 묘역 좌우에는 망주석·문인석이 1쌍씩 배열되어 있다. 묘역 우측에는 근래에 건립된 묘비가 위치하고 있는데, 이 묘비를 제외하고 비교적 원형의 석물이 잘 보존되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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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당 우측에 소나무가 한 그루 있는데 수령이 400년입니다. 이천의 반룡송과 같이 나무 가지가 비비 꼬였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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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입구는 철책으로 막혀있으나 좌측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
▲ 저는 처음에 쓰레기장인줄 알았습니다. 벽돌을 제거했으면... |
이준은 선조 원년(1568)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한 뒤 주서(注書)·정언(正言)·헌납(獻納)을 거쳐 진주목사(牧使)·의주목사를 역임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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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처음에 만나는 묘역. 이 곳에는 이준선생 묘가 없습니다. 후손들의 묘역인듯...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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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후손들 묘역 상단 좌측으로 가면 이준선생 묘역이 보입니다. |
선조 22년 정여립(鄭汝立)의 모반 사건이 일어나자 도승지(都承旨)로서 죄인을 다스리는데, 공을 세워 평난공신(平難功臣) 2등에 책록되고 전성군(全城君)에 봉해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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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준선생 묘역 전경. 이 곳에는 3단의 묘역이 있는데, 2단(중간)에 있는 묘역이 이준선생 묘입니다. |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운향사(運餉使)가 되어 명나라 군사의 군량미 조달 책임을 맡았으나 병으로 은퇴하였다. 그 뒤 한성부좌윤(漢城府左尹)·춘천부사(府使)를 거쳐 예조·병조의 참판(參判)을 지내고 선조 33년 대사간(大司諫)이 되었으나 북인(北人) 홍여순(洪汝諄)의 일파로 몰려 한때 파직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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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준선생 묘역 전경 |
그 뒤 안동부사·경주부윤(府尹) 등의 지방관을 거쳐 광해군(光海君) 때 좌참찬(左參贊)·형조판서(判書)·공조판서 등을 역임하고 광해군 7년 개성부유수(留守)가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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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준선생 묘비는 탄흔으로 중간 중간 깨져 있습니다. |
▲ 부인 청주 경씨(淸州 慶氏)와 쌍분입니다. |
이조판서에 이르렀으나 계축옥사(癸丑獄事)가 일어나고 인목대비(仁穆大妃) 유폐 사건 등 정사가 어지럽자 벼슬을 버리고 은퇴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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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준선생 묘역 위에는 선생의 부모 묘가 있습니다. 봉분 앞의 묘비는 깨져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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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준선생 부모인 완계부원군(完溪府院君) 이유정(李惟貞)과 부인 안동 김씨의 쌍분 뒤에서 내려다 본 모습 |
전성부원군 이준선생 영정(경기 문화재자료 81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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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의 문신인 이준(1545∼1624) 선생의 초상화이다.
머리에 오사모를 쓰고 정장 관복을 차려입은 채, 오른쪽을 바라보며 의자에 앉은 전신상으로, 두 손은 소매 안에서 마주잡고 있다. 얼굴은 묵으로 선을 그린 후 채색하였으나 손상이 심해 최근에 다시 수리하였다.
관복의 옷주름은 날카로운 직선으로 처리하였는데, 이는 당시 공신상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특징이다. 문화재청 사진 ▶ |
이준선생 묘역 위치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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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살표 ↑ 위치에 이준선생 묘역이 있습니다. 소재지 : 경기 양주시 남면 신산리 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