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국번은 강희를 "영민함과 명철함이 그 누구보다도 뛰어났던 황제"로서 주문황과 비견되는 인물로 평가했다.
강희제는 항상 한족 관리들에게만 명대 말기에 한족 신하들이 저질렀던 과오를 본받지 말 것을 당부했다.
오배가 세력을 영합하여 붕당을 만들고 어명도 무시한 채 대신들을 함부로 죽이며 전횡이 날로 심해지자, 강희제는 오배 세력의 존재를 알게 된 강희 5년(1666)부터 8년 5월까지 단 3년 동안 오배 세력에 대한 철저하 숙청을 진행했다. 사실 엄밀히 따지면 강희 6년 7월에 강희제가 친정을 시작한 후부터 본격적인 숙청이 이루어졌으므로 2년도 채 안 되는 짧은 기간이었다.
황종희는 "명의 모든 폐단은 명 태조 주원장이 재상제도를 폐지했을 때부터 시작되었다."라고 했다.
원대元代의 재상제도는 북방 신흥 몽고족 특유의 봉건영주제도의 특징을 반영한 것으로서, 재상이 매우 강력한 권력을 손에 쥐고 있었기 때ㅔ문에 강력한 권세를 지닌 재상이 황제를 폐위시키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강희16년(1677) 겨울 삼범 세력과의 전쟁이 최대 고비를 넘기고 조금씩 승리의 희망이 보이기 시작하자, 강희제는 곧 문치를 위한 준비에 돌입했다. 그는 대학사들에게 한림원에서 박학다식한 관리들을 선발하라고 명했다.
강희 22년(1683)애는 만주족과 한족이 서로 무시하고 반목하여 국사를 그르치지 않도록 여러 가지 조치를 발표했으며, 같은해 9월 9일에는 "짐은 이 나라 백성이라면 민족을 가리지 않고 모두 짐의 적자赤子라고 생각하노라. 짐이 백성들을 어여삐 여기는 것은 모두 그들이 행복하게 살고 편안하게 생업에 종사할 수 있게 하기 위함이라."라고 말했다.
팔기의 노비들 중 아주 극소수만이 주인에게 총애를 받거나 최소한 학대를 면할 수 있었고, 절대다수는 매우 비참한 생활을 했다. 그들은 또 설령운이 좋아 관직을 갖게 된다 해도 받는 녹봉이 대부분을 주인에게 바쳐야 했다. 이 때문에 팔기 내부에도 계급 간의 갈등이 심했고, 순치제 통치 기간과 강희제 통치 기간 초기에 사회가 극도로 문란하고 절도와 강도 사건이 빈번하게 발생했던 것도 이 같은 갈등과 무관하지 않다.
역사적으로 대만에 처음으로 지방 정권이 수립된 것은 송대와 원대였지만 당시에도 팽호도에 관청을 두었던 것이었고, 대만 본토에 지방관청이 설치된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으며,정씨 세력이 건립한 부현을 기초로 설립되었다.
거의 몬든 전쟁이나 반란이 그렇듯 삼번의 난도 갑작스럽게 일어난 일이었다. 오삼계가 하늘을 찌를 듯 맹렬한 기세로 군사를 일으켜 조정을 압박하자 강희제는 대군을 출정시켜 반란군을 제압하기로 결정했다. 강희 14년(1675) 강희제는 병부에 오삼계에 대한 선제공격을 지시하고,
청의 녹영병은 녹기영 도는 녹기라고도 불렸으며, 전국에 60만 명 가량이 있었지만 지위가 낮고 대우도 별 볼일 없어 오삼계 세력이 호시탐탐 노리는 세력이었다. 오삼계가 반란을 일으킨 후, 운남과 귀주, 호광, 사천의 제독과 홍병들이 자신의 군대를 이끌고 잇따라 오삼계에서 투항하면서 오삼계 세력이 급속히 불어났고, 다급해진 강희제는 녹기병에 대한 경계와 방비를 서두르기 시작했다.
(강희 12년(1673) 12월 21일..오삼계가 반란을 일으켰다는 소식이 조정에 알려진다.)
오삼계가 청과 천하를 양분하자는 제안을 하자, 강희제는 북경에 있는 오삼계의 아들 오응웅吳應熊과 손자 오세림吳世霖을 처형하라고 명했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오삼계는 경악하며, "나이도 어린 것이 이렇게 대담하다니 앞으로 희망이 없구나!"라고 찬식하며 큰 충격을 받았다.
명대 초기에는 성리학이 통치 지위로 올라서고, 명대 중엽에는 왕양명의 학설이 급속히 발전하게 되었다. 하지만 명대 말기에 이르자 유학은 쇠퇴기로 접어들었고, 명이 멸망하자 학술계에서는 약속이나 한 듯 모두 망국의 원인을 통치자의 부패와 실제와 동떨어진 성리학에서 찾았다. 그리고 성리학과 반대로 경세치용을 주장하는 실학이 득세하기 시작했다. 육구연과 왕수인이 주창한 심학의 지위가 이미 당에 떨어진 상황에서 강희제는 정호와 정이, 주희의 성리학을 제창했다.
강희년간의 유명한 한인 관료들
이부시랑 馮溥
좌도어사左道御使 범승훈范承勛
유약내劉若 곽명기郭明奇 원교袁橋 추사총鄒士 채진蔡珍
대명세戴名世 여담예余湛藝 왕호汪灝 방정옥方正玉 주수朱收 왕원王源 유암劉岩 우운악憂云鄂 방등역方登 방운려方云旅 방세제方世濟 방세초方世樵 방세장方世庄
1무畝=0.6667헥타르
150경頃(논의 면적을 세는 단위, 1경=2만여 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