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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명사학자 계봉우(桂奉禹)애국지사

작성자조영희|작성시간19.04.22|조회수915 목록 댓글 0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활동했던 계봉우(桂奉禹1880.8∼1959.7) 선생 부부 유해가 22일 봉환돼 꿈에도 그리던 고국 땅에

안장됐다. 카자흐스탄에 묻힌 지 60년 만의 귀환이다.이날 오전 서울공항을 통해 봉환된 유해는 국립서울 현충원으로 봉송돼

오전 11시 유가족, 광복회, 일반 시민 등 50여 명이 지켜보는 가운데 안장됐다.
피우진 국가보훈처장은 추모사를 통해 "조국 광복을 향한 험로를 걷다가 이역만리에서 숨을 거둔 지사님의 의로운 삶 앞에

한없는 존경의 마음을 바친다"며 "선열들의 위국헌신 정신을 깊이 새기고 계승하겠다"고 말했다.


국내에서는 잘 알려져있지 않은 계봉우(桂奉禹)이다.
그는 역사학자이자 국어학자로 1880년 함경도 영흥에서 출생하여 평생을 4개의 국가를 넘나들며 다양한 활동을 펼쳤다.
국내 구국계몽운동을 시작으로 북간도와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와 하바롭스크, 상해 그리고 카자흐스탄을 넘나들며
독립운동과 역사 및 국어연구에 힘썼다.그는 항일운동으로 1916년 일본 경찰에 체포돼 3년의 옥고도 치렀다.

북간도로 망명한 선생은 이동휘 선생과 독립운동에 헌신하였으며 3·1 운동 이후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과 함께 북간도 대표로써

 상해에서 임시정부 일을 도왔다. 이 때에 월간지 <대진>,<구국일보>, <권업신문>의 기자 등으로 조국의 독립을 위한 글들을

많이 남겼다. 계봉우 선생은 <권업신문>의 기자로 10여 회에 거쳐 ‘만고의사 안중근전’을 연재하여 독립운동의 의식을

고취시키기도 했다.
선생은 국어학자 뿐만 아니라 역사학자로도 많은 저서를 남겼다. 북간도에서 중등학교 교과서 [조선역사]와 초등학교 교과서

 [오수불망] 등을 편찬했으며 이 교과서를 민족 교육 자료로 사용하였다. 그리고 북간도와 연해주를 거쳐 블라디보스토크,

하바롭스크에서도 꾸준히 우리말과 관련 된 책을 집필하고 한인들에게 한글을 보급했다.
그러나 그 역시 1937년 스탈린의 강제이주정책에 의해 중앙아시아 카자흐스탄으로 가게 되었다. 
이주 이후에도 선생은 꾸준히 한글 교육과 한국사 연구와 교육에 힘썼다. 이곳에서 선생은 <이두집해>, <북방민족어>,

<조선문법>, <조선역사> 등 다수의 책을 남겼다. 특히, <조선역사>는 망명지에서 이뤄낸 한국사 체계화의

 결정으로 평가되고 있다. 망명으로 얻은 계봉우 선생의 경험은 한국사를 바라보는 통찰력과 시각을 심어주었으며

이를 바탕으로 집필 된 역사서는 한국 사학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남아있다.

국가보훈처의 대표 블로그 <훈터>에 2010년 10월 19일 윤병석 인하대 명예교수가 쓴

<한국사 연구에 중요한 사료를 남긴 망명 사학자 계봉우>를 옮겨 그의 삶의 족적을 살피려고 한다.


역사학자이자 국어학자인 계봉우 선생은 시대의 격변 속에서 4개국을 망명하며

한국사 연구에 중요한 저작들을 남겼다. 선생의 망명 경험은 한국사에 대한 독특한

시각과 예리한 통찰력을 제공하였으며, 특히 유물사관에 영향을 받고 저술된

선생의 역사서들은 한국 사학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남아 있다. 또한 망명지 한인이

주민들의 개척생활 등을 기록한 선생의 논고들은 당시 한반도 주변의 정세와 이주 한인들의

경험을 알려주는 귀중한 연구자료라 할 수 있다.
계봉우(桂奉禹, 1880.8.1~1959.6.5)선생은 1880년 함경도 영흥에서 출생하였다.
일생 동안 언어와 풍속이 서로 다른 4개의 국가를 넘나들며 살아온 선생의 삶은 그가

활동한 지역에 따라 크게 4시기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대한제국시기에 국내에서 성장하여 구국계몽운동에 참여하던 시기, 나이 스물 이후 북간도와

 연해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에 참여하던 시기, 블라디보스토크와 하바롭스크, 상하이를

오가며 공산주의운동과 국학연구에 투신하던 시기, 그리고 마지막으로 스탈린의 한인 강제이주 이후 중앙아시아 카자흐스탄 크즐오르다에서 국어연구와 역사연구를 계속하던 말년의 시기가

그것이다.
선생의 국학연구와 저술은 북간도 망명직전부터 시작하여 크즐오르다에서 세상을 떠날 때까지

 근 반세기에 걸쳐 진행되었다. 그것도 연구와 저술을 위한 적절한 환경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닌, 망국인으로 조국을 떠나 이념과 체제가 급변하던 지역들을 넘나들며 불안과 격동 속에서 수행된 것이었다.

                                                                선생의 자필 이력서(1936년)
이러한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선생은 국어와 국문학, 국사 연구에 매진하였으며 그 밖에도 북간도에서 월간지 <대진>의

주필로, 연해주와 상해에서 각 <권업신문>과 <구국일보>의 기자로, 시베리아에서 한글잡지 <새사람>의 주필 등을

역임하면서 조국독립을 위한 많은 논설과 시문을 남기기도 했다.
국어학자인 선생은 자신의 한글 저작물에 스스로의 이름을 발음이 나는 대로 표기하여 ‘게봉우’로 명기하였다.
또한 호를 ‘북우(北愚)’라고 하였으나 뒤에 필명만으로 발표할 때는 ‘뒤바보’라고 한글 필명을 사용하기도 했다.
이 때문에 최근까지도 항일독립운동사와 민족주의자들의 연구에 매우 중요한 선생이 연재한 사설 및 논고,

집필 저서들 중 일부는 저자를 확정 짓지 못하고 논란이 제기되기도 하였다.
선생은 국어 연구 못지않게 한국역사 연구에 심혈을 기울여 주목할 역작을 남겼다.
특히 그는 연공이 쌓일수록 나름대로 역사연구의 목적이 뚜렷하여 분명한 사관을 세웠다.
그의 역사저술은 망명 직후 ‘길동기독학당’의 역사교재로 [신한독립사]를 편찬하면서 시작되었다.
1912년에는 북간도에서 중등학교 교과서로 [조선역사]와 초등학교 교과서로 [오수불망] 등을 편찬하였고
이를 민족주의 교육기관에 보급하였다. 이를 통해 선생은 일제의 식민지사관에 의한 ‘일선동조론(日鮮同祖論)’ 등의
한국사 왜곡을 폭로하고 일제의 동화정책에 맞선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들 교과서는 1917년 하얼빈에서 간행된 [최신국사]로 개정되어 북간도 전역에 보급된 것으로 보인다. 
 이후 선생은 연해도 이만에서 초등학교용 [신찬주신사]를 편찬하였는데, 이 교과서는 두 가지 측면에서 두드러진 특색이 있다.
한 가지는 제목에서 ‘주신’이란 용어를 쓰고 있다는 점이다. 선생은 고대이래로 조선을 ‘우왈숙신(虞曰肅愼) 하왈주신(夏曰州愼)
주왈조선(周曰朝鮮) 금왈주리신(金曰珠里申) 청왈주신(淸曰州申)’으로 칭하였다고 주장하였다.
곧 ‘주신’은 ‘조선’보다 오래된 ‘조선’의 원어이며, 또한 금, 청나라대까지도 불리던 호칭이었다는 논지이다.

이런 연고로 조선사를 ‘주신사’라 한 것이다.
다른 한 가지는 역사의 흐름을 경제의 변천에서 추구하는 유물사관에 입각해 한국사를 기술하고 있다는 점이다.
선생은 최초의 한인 공산주의 단체인 한인사회당을 조직한 이동휘를 따라 공산주의를 수용하였을 뿐만 아니라

고려공산당 창당 이후는 그 운동에 적극 참여하였던 인물이므로, 유물사관에 입각한 그의 조선사 재구성은 당연한

수순이라 할 수 있다.
그 자신도 [신찬주신사]가 그러한 사관에 의한 첫 편찬이었다고 밝히고 있다.
 선생은 이에 만족하지 않고 한국사 연구를 계속하여 1937년 연해주에서 중앙아시아로 이주하던 봄,
3년간의 집필 끝에 [조선역사]를 저술, 유물사관에 의한 조선사를 그 나름대로 체계화하였다.
유사 이전부터 시작하여 ‘한일병합’까지를 총 6편으로 편제한 이 저술은 종래의 조선사 개설과는
판이한 사서임을 부각시키고 있다. 서문에서 선생은 아래와 같이 밝히고 있다.
3년의 적년(積年)으로 조선역사 제1, 제2의 양 권을 완성하였다.
그 내용 대개를 들어 말하면 역사 있기 전으로부터 한일합병에 이르기까지의 사실을 두 권에 나누어 기입하였다.
그런데 계급과 계급에 관한 재료를 옳게 논단하고 바르게 비정하는 것도 어려운 일이거니와 역사 있기 전의 사실은

더욱 어려운 일이었다. 그것에 대하여는 엥겔스의 [가족], [사산] 및 [국가기원]과 한인정치학교용의 [인류사회발전사]에서

많은 도움을 받았나니 이 공작(工作)은 사학가들이 종래로 한번도 건드려 보지 못했던 실로 나의 첫걸음이었다.
선생의 [조선역사]의 제6편은 근대사 부분의 서술인데, 무엇보다 ‘동학당폭동’이라는 5장 중 3장의 제목이 의미심장하다.
 선생은 여기서 동학농민혁명운동을 개관하면서 그 역사적 의의를 강조하고 있는데, 김상기 박사가 국내에서 종래

동학란(東學亂)이라 부르던 동학농민혁명운동을 학문적으로 새로운 이해를 시도한 [동학과 동학란]을 토대로 그는 국외에서

‘동학란’을 유물사관에 의하여 재해석한 논술인 것이다.
특히 제4장에서는 동학농민운동을 엥겔스의 저작 [독일농민전쟁연구]를 전거로 인용하면서 동학농민운동을 독일농민전쟁과

비교를 시도하고 있다. 이 부분의 서술내용과 논지는 기존의 어느 연구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것으로써 선생의 사관과

이 저작을 집필하게 된 배경을 읽을 수 있게 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결국 그는 동학농민운동을 ‘농민전쟁’의 개념으로 규정한 것이라 하겠다.

노래가사 모음. 일본의 탄압과 횡포에 시달리던  조선민족의 애환과 해방의 날을 염원하던 심정을 노래로 엮은 것이다.

선생은 1905년 가을 마지막 망명지인 카자흐스탄에서 [조선역사]의 속편으로 [반일투쟁사] 집필을 시작하여

1952년 이를 완성하였다. 여기서 6․25사변을 ‘미구(米寇)’라 칭하는 미제국주의의 침략으로 확신하면서,

반일투쟁사를 통하여 반미(反美) 제국주의를 강조하고 있는 것이 주목된다.
 3권의 서문에서 선생 스스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는 대목에서도 이점은 분명히 드러난다.
일본 제국주의가 조선을 강점한지 36년 동안에 어떠한 죄행을 범한 것과 조선애국자들의 반항투쟁이

어떻게 계속 하였던 것을 쓰게 되었나니, 만일 기회가 허락한다면 영웅적 조선인의 반미투쟁사(反米鬪爭史) 또

한 쓰려고 생각하노라. 
 -1952년 2월 11일 쓴 [조선역사] 권3 서문 중

선생은 특히 근대 한민족의 국외이주와 민족운동에도 지대한 관심을 가져 이 분야에 중요한 몇 편의 논고를 연이어 발표하였다.
이러한 논고들은 그가 이동휘를 따라 상하이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북간도 대표 의정원 의원으로 활동하던 무렵 <독립신문>에

연재물로 발표한 것이다. 그 가운데 [북간도 그 과거와 현재]와 [아령실기]는 연해주 지역 한인들의 이주개척과 항일민족독립운동

 연구에 있어 매우 중요한 사료가 되고 있는 저술이다. 또한 [김 알렉산드리아 소전]은 초기 공산주의운동의 핵심인물인

김 알렉산드리아 페트로브나의 간략한 생애와 활동을 기술한 것으로 이 소고를 통해 볼세비키혁명 전후의 연해주 한인사회의

정치적 동향을 이해할 수 있기도 하다.
그리고 [의병전]은 일제에 의한 민족수난을 극복하기 위한 반세기에 걸친 항일민족운동을 선도한 한말 의병의 희귀한 활동기이다.
 특히 이 [의병전]은 각 시기마다 국내뿐 아니라 북간도와 연해주 등 국외에서 활동한 의병까지도 포함시켜 중요한 의병장을

 중심으로 서술되어 있지만, 그 활동을 한국측 입장에서 이만큼 체계적으로 개관하면서 그 의의를 논술한 기술은 찾기 어렵다.
선생이 1920년 전반기에 발표한 이상 네 편의 논술은 다같이 연해주에 볼세비키혁명이 일어나고 그 속에서 한인사회당을 중심으로

 펼쳐진 초기 공산주의 활동을 목도한 뒤 발표된 저술이지만, 선생 자신은 아직 공산주의를 수용하거나 그에 적극적으로

가담하지 않은 입장에서 기술된 역사물이다.
그러므로 이들 네 편의 논술은 근대사학사에서 박은식과 신채호의 그 전후 [한국통사] 등, 일련의 역사물을 이어 민족주의 사학을

상징하는 대표적 저술로 규정지을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조선역사]는 선생으로서는 망명지에서 성취한 한국사 체계화의 결

정이라 하겠다. 게다가 미완성본이지만 [만고의사 안즁근젼]은 또한 박은식의 [안중근전]과 대비되는 망국민의 역사의식의

산물인 것이다.
한편 이와 같은 저술을 포함하여 고려어라고 부르던 국어와 한국문학, 그리고 조국역사에 대한 선생의 전후 50여 년에 걸친

각고 끝에 삭막한 망명지에서 나온 여러 연구저술은 제국주의에 의한 한민족 수난기에 기구한 역사를 전개시킨 러시아지역

고려인(한인)사회를 상징하는 ‘한국학’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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