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레들>(김애란)
다이제스트: 김유리
장미빌라는 낮은 언덕을 깎아 만든 절벽 위에 지어졌다. 지하와 옥탑을 합해 육 층, 대략 삼십여 가구가 산다. 싱크대 위에 책받침만한 창문을 제외하고, 실내에 난 창은 현관 맞은편에 난 것 하나뿐이다. 창문은 한쪽 벽면의 반을 차지할 만큼 크다. 이곳으로 이사 올 결심을 한 것도 사실 그 때문이었다. 방을 빼주기로 한 날짜는 다가오고, 조건에 맞는 집은 없어 초조하던 차에 장미빌라를 발견했다. 이 동네가 재개발 구역으로 지정됐다는 건 이사 후 한 달이 지나서야 알았다.장미빌라와 A구역의 경계, 그러니까 절벽 아래 부분에는 잡초가 무성하다. 입주 후세 달 쯤 지나서였을까? 창가에 놓인 수납장 위로 손가락만한 애벌레가 기어가는 걸 보고 기겁한 적이 있다. 나는 그것들이 도대체 어디를 통해 들어오는지 알 수 없다. 우리는 이 방에 신을 신고 들어왔다. 401호 내부는 거의 썩어가고 있었다. 고무장을 낀 채 고농축 세제로 만들어진 스펀지를 이용해 바닥을 닦았다. 일을 끝낸 후, 창가에 서서 물을 마셨다. 어느새 다가온 남편이 뒤에서 나를 안았다.“나무네?”“어디?”남편이 손가락을 들어 한 곳을 가리켰다.“저기. 저 집 마당에 있잖아. 애초에 심었을 땐 작았을 텐데. 봐봐, 마당을 다 차지하고 이웃집 지붕까지 덮었잖아. 나무가 집보다 크다 야.”도심 한복판 홀로 서 있는 나무의 검은 실루엣이 바람을 따라 신성하고 아름답게 흔들렸다.달이 차고 배가 부풀수록 공사 속도는 박차를 가했다. 내 몸은 미세하게 차근차근, 또 어느 때는 급격하게 변해갔다. 손가락에 살이 찌자 결혼반지가 손에 맞지 않았다. 창가, 수납장 위 상자에 반지를 넣어 두었다. 바닥에 보증서가 깔린, 파란색 벨벳 상자였다.남편은 늦게까지 오지 않았다. 전화를 하자, 수화기 너머로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자기야, 뉴스 봤어? 초코조코칩에서 구더기가 나왔대.”“....못 와?”남편은 주춤거리며 말했다.“어? 아니야. 가. 갈 수 있어. 상황 봐서 최대한 빨리 들어갈게.”남편은 오지 않았다. 10시가 되도, 11시가 지나도 남편은 오지 않았다.가을바람에 바삭해진 이불에 몸을 감았다. 어디선가 이상한 소리가 났다. 창가에서 뭔가 부스럭대는 소리였다. 왠지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 긴장한 채 엉거주춤 상체를 일으켰다. 창가 쪽 방충망이 약하게 , 규칙적으로 흔들리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곧 경악하고 말았다. 웬 커다란 애벌레가 안으로 들어오려는 듯 부지런히 머리를 찧고 있던 것이다. ‘어떻게 할까?’ 욕실에서 곰팡이 제거용 세제를 들고 나왔다. 상체를 한껏 뒤로 젖힌 채 애벌레를 향해 소독액을 분사했다. 애벌레는 용을 쓰다 기운이 빠지는지 흐느적댔다. 그리곤 얼마 후 고개를 떨구며 싱겁게 죽어버렸다, 씽크대 서랍에서 나무젓가락을 한 벌 꺼내왔다. 그리고 젓가락이 막 그것의 털에 닿은 순간, 애벌레가 벌떡 고개를 들었다. 애벌레는 상체를 세워 나를 똑바로 응시했다.“아악!”나는 두 팔을 휘저으며 뒤로 물러섰다. 동시에 허둥대는 내 손짓에 치어 수납장 위의 반지 케이스도 함께 낙하하고 말았다. 몇 달 전부터 손에 안 맞는 결혼반지를 넣어둔, 파란색 벨벳 상자였다.A구역 안으로 들어가는 일은 생각보다 순조로웠다. 흙 속에서 비릿하고 퀴퀴한 냄새가 났다. 비위가 상해 입으로 숨을 쉬었다. 가슴을 진정시키는 주문을 외웠다. ‘곧 풀숲이 나온다. 상자를 줍는다. 여기서 빠져나간다.’ 그렇게 막, 나무의 뿌리 부분을 지나가는 참이었다. 나는 곧 놀라운 장면을 목격하고 말았다. 엄청난 양의 곤충들이, 벌레들이, 유충들이 떼를 지어 이동하고 있는 모습.벌레의 이동은 나무에서 시작되고 있었다. 나무는 자궁이 적출된 여자처럼 헤프게 다리를 벌리고 있었다. 충격은 곧 공포로 바뀌었다. 본능적으로 집에 가자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아랫도리에서 극렬한 통증이 전해졌다. 다리에 힘이 풀리며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도와주세요.”소리는 허공 위로 아스라이 사라졌다. 아랫도리에서 칼로 에는 듯한 고통이 전해졌다. 멀리 보이는 장미빌라는, 모텔과 교회는, 아파트는 여전히 평화로워 보였고, 나는 이 출산이 성공적일 수 있을지 정말이지 확신할 수 없었다.Copyrightⓒ 독서학교 All rights reserv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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