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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다이제스트

<크리스마스 캐럴>(김영하)

작성자글사람|작성시간13.02.19|조회수91 목록 댓글 0

<크리스마스 캐럴>(김영하)

 다이제스트:  이은혜

 
  영수는 종종 은혜에게 이런 말을 했다. “진숙이가 돌아오면 어떡하지? 난 걔가 너무 무서워.”
  영수는 그럴 때마다 눈 밑 살이 바들바들 떨렸다. 잠을 뒤척인 얼굴로 진숙이의 애기를 꺼낼 때면, 영수의 표정은 더 어두워졌다. 이번 진숙이의 살인 사건만 해도 유력한 용의자는 영수였다. 은혜도 그 앞에서 티는 안냈지만, 속으론 영수라고 꼬집고 있었다. 
  은혜에게 진숙이의 사망소식을 전하던 영수. 그때 은혜는 영수의 입꼬리가 꿈틀거리는 걸 발견했다. 그리고 며칠 전에 영수가 진숙이를 죽일 거라 말했던 것이 생각났다. ‘그 년의 배를 칼로 찌르고 창자가 터져 오르도록 칼로 쑤셔버리고 싶어, 붉은 피가 얼굴까지 튀기면서…!.’ 그때 비록 영수가 만취상태였다 할지라도 은혜는 그 말을, 술에 취해 농담으로 하는 소리라고 웃어넘길 수 없었다. 얼마나 악감정을 품고 있으면 사람을 죽일 생각까지 했을까… 것도 칼로 복부를 쑤셔버리고 싶다는 잔인한 말을…. 은혜는 영수와 진숙의 관계에 대해 잘 알고 있지는 않았다. 하지만 영수가 진숙이를 싫어한다는 것과 매번 술이 들어가면 진숙의 욕을 하는 것, 맨 정신으로는 진숙이의 얘기를 피한다는 것. 이 정도까지 추측해 봤을 때, 그 둘은 안 좋게 끝난 사이임이 분명했다.
  진숙이가 죽기 불과 몇 주 전, 영수가 은혜를 찾아왔다. 그리고 불안하게 술잔을 집어 들고, “난 너무 무서워… 우리끼리 모임을 갖자는데, 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어…”라는 말을 내뱉었다. 그때, 은혜의 눈에 들어 온 영수의 모습은 처량했다. 꼽추마냥 오므라진 체구에 노인처럼 쪼그라든 입술. 영수는 무언가에 쫒기는 늙은 누에 같았다. 어떻게든 필사적으로 도망치기 위해 엉덩이를 올리고, 무릎을 바닥에 벅벅 끌면서, 몸통을 꾸물떡거리는 누에.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아…아니야, 어 맞아, 그래서 누가 범인인 줄은 모르고?” “응, 아직 밝혀지진 않았어.” 영수가 아무렇지 않게 술잔을 기울였다. 죄책감도 없는 놈. 은혜는 눈살을 찌푸렸다. 영수와 은혜는 고등학교 동창이었고, 사회에 나와서도 직장동료가 되었지만 은혜는 영수를 신뢰할 수 없었다. 영수는 것도 모르고 은혜를 속풀이 대상으로 삼았고, 술자리에 자주 불러내곤 했다. 
  몇 분후, 영수의 친구, 정식도 술자리에 끼었다. 그때만 해도 영수는 술이 잔뜩 취해, 혀가 반쯤 고꾸라져있었고 알아듣기 어려운 말들을 나열했다. 중권 또한 분위기에 취해 술병을 몇 병 기울인 상태였다. 은혜는 가만히 그 둘을 바라봤다. 중권이의 얼굴이 금세 빨개졌다. 처음 이곳에 들어오면서부터 술이 달다며 껄떡껄떡 잘도 넘기던 것이 화근이었다. 
  중권이가 진숙이의 얘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술에 취한 영수도 진숙이의 얘기를 꺼리지 않았다. 둘은 속이 쓰리도록 소주를 들이키며 진숙이를 대화의 화두에 올려놓았다. 그 둘의 대화는 진숙과 처음 만난, 대학시절로 거슬러 올라갔다. 은혜는 가만히 그들의 대화를 들으며 올라오는 구역질을 참아냈다. 
  영수가 생각하기에 진숙의 죽음은 자신과는 별개였다. 나와는 상관이 없노라며 곱씹어 보길 수십 번, 하지만 진숙이에 대한 생각은 끊이질 않았다. 불과 몇 년 전 일인데, 영수는 그때 일을 잊지 못했다. 기분이 더러웠다. 몇 번을 생각해도 지울 수 없는 과거였다. 진숙이와 육체적 관계를 맺은 것이 영수만의 잘못이 아니었다. 그녀의 그런, 자유분방한 성관념이 문제였다. 자신과 중권 그리고 정식이, 이렇게 셋이 진숙이를 노리개 취급했다 할지라도 우리에겐 잘못이 없었다. 그래, 이 모든 건 진숙이의 멍청한 태도 때문이었다. 영수는 매번 진숙에 대한 죄책감이 올라 올 때마다, 이런 식으로 책임을 회피했다. 
  진숙이가 인도로 이민을 간 후,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을 때, 영수의 심장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그때의 진숙이는 자신이 알던 멍청한 진숙이 아니었다. 환경주의자의 아내에 자신만의 관점으로 사회를 바라볼 수 있는 능력까지 갖춘, 이지적인 여자로 변해있었다. 그때부터 영수는 두려움에 떨기 시작했다. ‘저 여자의 입에서 과거 일이 나온다면… 나에겐 아내도 있는데… 저 여잘 어떻게 해야 하지…정말 죽여서라도…!’ 이런 잔혹한 생각까지 한 영수였다. 물론 정식과 중권도 영수와 비슷한 생각을 품고 있었다.
  “걸레 가튼 년, 주그라면 조용히 주글 것이지” “그라니까 기분 더럽다 퉷!” “근데 마리지…살인버미 누구까?” “몰러, 내 예상컨대… 정식이일 수도 이써” “미친 놈!” 영수의 입에서 나지막한 욕설이 흘러나왔다. 그 소리에 은혜가 술잔을 내려놨다. 영수는 간신히 흔들리는 시야를 바로잡고 은혜를 눈에 담았다. 은혜의 눈에도 추하게 늙어있는 누에 두 마리가 들어왔다. “내가 보기엔… 살인범은 너희 둘이야” 은혜가 툭 말을 던졌다. “뭐…뭐라고?” 영수의 입이 밉게 쪼그라들었다. 그리고 바닥에 일그러져있는 누에로 변해가기 시작했다. 거친 바닥을 몸통으로 쓸어대며, 살이 맞물릴 대로 맞물리고 주름이 져도 도망치기에만 바쁜 누에. 공포감에 질려 그 누구보다 빨리, 더 추하게 늙어버린 누에. 
 
 하루가 지났다. 진숙이가 죽은 지도 이틀째가 되는 날이었다. 진숙이의 뉴스는 수많은 매스컴에 묻혀 사라졌다. 사라진 진숙이의 소식처럼 은혜도 어제의 기억을 지우고 출근길에 오르는 중이었다. 자동차에 몸을 실은 순간, 은혜의 핸드폰이 진동을 타기 시작했다. “여보세요?” “어, 나야…영수” “어, 그래 어젠 잘 들어갔냐.” “응, 그……진숙이 말이지.” 은혜가 눈살을 찌푸렸다. 진숙이, 진숙이. 이 여자의 이름에 실물이 날 것 같았다. “응, 그 여자가 왜” “살인범 잡혔어…참나…그 녀석일 주는…” 
  뭐? 너희가 살인범이 아니고? 그럼 어떤 누가, 여잘 죽인 거야? 라고 말이 나올려다 멈칫 숨을 멈추었다. 그 뒤로 영수의 밝은 목소리가 수화기를 타고 흘러나왔다. “정식이래, 풉! 미친놈….” 분명 목소리가 밝았다. 가벼웠다. 홀가분하니? 여자가 죽어서? 네 비밀을 떠벌리고 다닐 입이 드디어 난도질당해서? 은혜의 가슴에서 영수를 향한 분노가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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