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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의 힘

작성자수줍은하늘|작성시간20.07.07|조회수219 목록 댓글 18


     용서

              

당숙모님의 허리가 많이 굽었습니다.

약이 없으면 거동하기가 무척 불편하고 힘이 든다고 하소연을 하십니다.

나이 80이 되면 살아야 할 이유가 하나도 없다며 죽지 못해 산다고 하시니

자식들의 가슴에 못이 박힙니다.

수명이 길어졌다한들 의료인을 위한 존재일 뿐 아이들마저 회피하는 세상,

슬픈 여름이야기가 되지않을까 발을 동동 굴러봅니다.

 

형과 저는 여름날, 비가오면 예외없이 화투를 쳤습니다.

수박과 참외도 좋았지만 포도를 더 좋아했던 형제는,

그 날도 빈 노트에 점수를 적어가며 누가 포도서리를 갈 것인지 내기를 했습니다.

한번도 형을 이겨보지 못한 난, 오늘은 이기겠지하며 점수를 검산하며 투정을 부렸습니다.

훗날 억지와 속임수란 사실을 알았지만 어쩔 수 없이 그 날도 제가 지고말았습니다.

 

바지의 단을 묶어 자루를 만들고 아버지께서 논물을 보러 나가실 때 입으시던 우비를 걸칩니다.

물론 입이 댓발이나 나와있습니다.

서리는 비가 많이 올수록 들킬 염려가 없기에 계속 비가 내기길 기도하며

당숙부댁의 과수원을 넘봅니다.

언제나 그 자리, 울타리에 구멍이 생겼습니다. 서릿구멍입니다.

 

그 해 들어서 세번 째의 서리입니다. 가장자리의 포도는 전에 다 훑어버려 중심부로 이동을 합니다.

늦여름이라 소름이 돋아납니다. 물이 뚝뚝 떨어지는 포도송이를 또깍 또깍 따서 바지로 만들어진

자루에 담습니다. 따봤자 먹을 걸 고르면 반도 채 안되지만 추억과 스릴의 포로가 되었던 것입니다.

 

" 누구야! 꼼짝마!!"

 

걸렸습니다. 듬성 듬성 뜯어먹은 자리를 보고 비오는 날이면 어김없이 드나드는 도둑고양이를

지켰보았던 것입니다. 

 

" 너, 상민이 아니냐!? 비가 오는 날이면... 날마다 너였어? 쯧쯧"

 

할 말이 없습니다. 고개를 숙인 채...숙부님의 손에 들린 손전등의 옅은 불빛이

바지자루에 담겨진 포도, 포도에서 흐르는 빗물에 부딪쳐 땅에 떨어집니다.

 

결과가 처절하게 상상이 됩니다.

형과 나는 아버지에게 흠씬 두드려맞을 것이 뻔합니다. 

동네에선 도둑놈이라고 손가락질을 할 것이고,

이웃에 사는 순희가 나쁜 놈이라고 놀려댈 것이 뻔합니다.

 

" 이왕 딴 포도니깐 가져가서 먹고 내일 보자.

빨리 가봐! 감기 걸릴라." 

 

사색이 되어 집에 들어가니 형이 걱정스레 묻습니다. 그래도 바지자루가 온전한 걸 봐서인지

걱정이 되면서도 의아한듯 고개를 기우리며 묻습니다.

 

" 왜 이제와? 왜그래? 무슨 일 있었어?"

"응.................들켰어.....아저씨한테....내일 아버지께 이를 거야."

" 뭐? 에이...병신같이...그럼...에이 씨..."

 

다음 날이 되었습니다. 슬픈 사연을 간직한 채 늦여름을 장식하던 빗방울도 멎었습니다.

형제는 한 잠을 못자고 아침 식사를 마칩니다.

아버지의 얼굴도, 여동생의 얼굴도 볼 수가 없습니다.

어머니께 차비를 타야하지만 비상금을 털어 차비에 보탭니다.

어머니께서 두 녀석의 행동이 이상하다며 따라나섭니다.

 

" 이녀석들아 차비 가져가야지~"

 

그러나 형제는 아무런 대답도 할 수가 없이 차에 올라탑니다.

 

저녁이면 오뉴월 보리 타작하듯 타작이 시작될 것입니다. 

 

완고하신 아버님, ...........

 

형제는 그 날 늦게 귀가를 했습니다.

 

이상한 일입니다. 아버님께서 아무 말씀이 없으십니다. 분명 회초리를 드실 분이신데

아무런 말씀이 없으십니다.

 

하루가 또 지나고...한 달이 지나고...

 

과수원을 지날 때마다 눈치를 살피는 것 외에는 차츰 잊혀져가고 있었습니다.

 

그 후 25년이란 긴 세월이 흘렀습니다.

25년간 잊었던 먼 추억을 꺼낸 것은 형이었습니다. 

당숙께서 암으로 고생을 하신다며 같이 찾아보자고 한, 형의 제의를 받아 

숙부어른을 찾았을 때입니다.

 

형이 무릎을 꿇더니 숙부님께 질문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 숙부님...예전 포도밭 사건 아시지요? "

" 그럼. 알다마다.허허허. 왜 옛날 이야기를 새삼스럽게..."

" 제가 동생을 꼬득여 '서리를 해오라'고했었는데, 숙부님 뵈올 때면 항상 죄스러워서요.

고맙기도하구요."

" 허허허. 다 옛 일인 걸 ...허허허."

" 그런데 궁금한 것이 있어요. 왜 저희 아버님께 말씀을 안드렸는지요..."

" 그것이 뭐가 궁금하다고 그런데? 허허. 당시엔 포도가 흉년이라 상품가치가 없어 포기를 했어.

그리고 너희가 포도밭을 망가뜨렸다고 네 아버지께 이르면 너희가 맞아죽을지도 모르겠더란

생각이 드는 걸 어쩔텐가. 그냥 넘어간 거지 그냥......

사람은 매보다도 용서를 하는 것이 효과가 더 클 수도 있는 거야. 나는 너희들을 믿었으니깐......"

 

당숙모님을 두고, 두 조카에게 용서라는 낱말을 선물하시고 그 해 여름날 숙부님은 하늘나라로 가셨습니다.

꼭 15년 전의 일입니다.

오늘 기일을 맞아 당숙모님께 당숙부님과의 이런 이야기를 꺼내면,

당숙모님의 다소 굽은 허리가 펴질런지 모르겠습니다.


세월은 어찌 멈추지 않고 흘러만 가는 것인지요...

오늘은 세월을 잠시라도 멈추고싶은 날입니다. 잠시 멈추고...싶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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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댓글 리스트
  • 답댓글 작성자수줍은하늘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0.07.08 어른들의 지혜는 항상 귀감이 됩니다.
    잘하든 못하든 우리들에게 많은 교훈을 주지요.
    인간에겐 나이가 주는 지혜가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가득한 기쁨 함께 하소서 늘보리님~~
  • 작성자산토끼 | 작성시간 20.07.08 당숙분의 지혜로운 용서와 하늘님의
    많은 세월속에 추억하시는 님의 글이
    마음을 쓸쓸하게 합니다
  • 답댓글 작성자수줍은하늘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0.07.08 마음을 쓸쓸하게 만든 죄 무엇으로 갚아야 할 지요...
    다음 글에서 작은 웃음으로라도 갚으면 될까요? ㅎㅎ
    곱고 평온한 날 이어가시길요~~^^

  • 작성자김민정 | 작성시간 20.07.08 찡하게 눈물나는사연 재미지게 읽고
    갑니다 ,늘좋은글 기대합니다
  • 답댓글 작성자수줍은하늘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0.07.09 ^^ 평온한 기쁨 가득한 날 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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