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한일교류

길광웅 선생과의 추억(야마모토 히로시)

작성자카페지기|작성시간19.12.14|조회수65 목록 댓글 0

길광웅 선생과의 추억

사무국임원, 그리스도교다이신 집회

야마모토 히로시(山本浩)

 

길광웅 선생, 75년의 지상의 여정에 수고하셨습니다. 지금은 하나님 품에서 평안히 쉬고 계시리라 생각합니다. 아직 해야 할 일이 너무나 많다고 생각하지만,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해결해 주시리라 생각합니다.

길형은 송두용 선생과 만나 무교회에서 신앙생활을 시작했다고 들었습니다. 신학대학에서 공부하였기 때문에 일찍부터 전도자가 되겠다는 뜻을 가지지 않았겠습니까?

 

길형에게 저는 너무 많은 도움을 받아, 정말 감사합니다. 제가 한 살 연상인 까닭도 있지만, 언제나 신경을 써서 친절하게 대해주셨습니다. 길형을 처음 만난 것은 1996년이었습니다. 일한청년우화회 발족 후, 두 번째 초대로 일본에 오셨을 때였습니다. 우리 집에서 2박을 하셨는데, 우리 가족과 적극적으로 커뮤니케이션을 해주셨습니다. 주로 필담을 했지만, 아이들에게도 부드럽게 대해주셔서, 그때 일을 아이들은 지금까지 기억합니다.

귀국 후, 교통사고를 당해 큰 수술을 하셨습니다. 그 무렵 저는 노평구 선생의 병문안을 위해 한국에 갔었는데, 길 형이 저를 만나러 와주셔서 정말 감동했습니다. 그런데 수술로 얼굴조차 변해 있었고, 고통스런 모습이었습니다. 병원에서 달려오신, 의리 가득한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그 후에도 모임을 통해, 청년들을 인솔하여 일본에 오셨을 때나, 우리가 방한했을 때, 서로의 명소와 기념관 등을 함께 둘러 보았습니다.

특히 생각나는 것은 저의 유학시절 일입니다. 저는 20035, 회사에서 정년퇴직을 한 후, 6월부터 13개월간 한국으로 어학을 배우러 갔습니다. 현지에서 언어를 배우고, 한국을 알고싶은 생각이었습니다. 그 기간 중 길형은 한국 여러 곳을 안내해 주셨습니다.

백제의 부여에 갔을 때 일입니다. 둘이서 낙화함으로 향하는 언덕을 오르던 도중, 가랑비가 내리고 있어 우리 외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때 백제 사람들의 소리가 들려오는 듯 느꼈습니다. 길 형에게 이야기했었는데, 훗날 둘만의 화제가 되었습니다. 신라의 경주에도 함께 갔었습니다. 경주에서 처음 분묘를 모았을 때, 저는 우리의 뿌리가 여기라고 직감했습니다. 왜 그랬는지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 일도 길형에게 이야기했습니다. 제암교회에도, 풀무학원에도 데려가 주셨습니다. 부산도 안내해 주셨습니다. 돌아오는 경부선 열차의 차창으로 보는 낙동강과 연이어 보이는 거대한 산들은, 산수화처럼 아름다운 풍경이었습니다.

기독교가 한국에 전해졌을 때의 박해 기록이나 박해 때 사용한 도구를 전시한 기념관에도 데려가 주셨습니다. 기독교가 한국에 들어올 당시는, 일본과 마찬가지로 박해와 탄압을 받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유교정책 때문에 불교의 절들이 산 위로 쫓겨간 상황도 실제로 데려가 보여 주셨습니다. 절의 경내는 흙과 모래와 나무 등 일본의 산사 풍경과 같았습니다. 절의 지붕 형태에서 한국 특유의 부드러움을 볼 수 있다고 길형이 설명해주어 알게 되었습니다. 진귀한 대나무를 재배하고 있는 절이나 다양한 품종의 연꽃이 만개한 논에도 데려가 주셨습니다.

유학 전에 일본에서부터 소개를 받았던 원경선 선생(풀무원 농장의 설립자) 댁을 길형이 운전한 차로, 많은 시간이 걸렸지만, 방문할 수 있었습니다. 또 속초에 가서 설악산에도 올랐습니다. 고목으로 둘러싸인 어둑어둑한 언덕길을 둘이서 잠시 걸었습니다. 도중에 비가 와서 찻집에 들어가 접이 우산을 샀는데, 그 접이 우산은 적당한 길이에 손잡이도 잡기 좋아, 일본에 돌아와서도 오랫동안 애용하였습니다.

길형은 이 모든 것을 제가 쉬는 날 시간과 노력을 들여 안내해 주었습니다. 아직 직장에 다닐 때였습니다. 장애인 수첩을 가질 만큼 결코 온전하지 않았던 몸으로 저를 위해 귀중한 시간과 노력을 들였던 것입니다. 게다가 이것저것 챙겨주셔서 정말 머리가 수그러집니다.

인천집회의 예배에는 몇 번이나 참석했습니다. 당시는 송문호 선생의 댁에서 열리고 있었습니다. 넓은 마당을 배경으로 대청에 앉아 예배를 드렸다고 기억합니다. 길형은 계명원의 아이들과 주일예배를 본 후, 인천집회의 예배에 참석하고 있었습니다. 계명원의 아이들뿐 아니라, 원장님도, 선생님들도 길형을 좋아하고 신뢰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나중에 학생들은 한국 전통악기 연주를 배워, 해외에서 연주활동을 하였습니다. 이는 길형의 아이디어였다고 생각합니다. 해외 연주활동 초기에 일본의 오사카에 와주셨는데, 만나러 가지 못하여 죄송했던 게 지금도 생각납니다.

댁에 갔을 때, 길형의 어머니도 만났습니다. 식민지 시대의 고통을 체험한 어머니의 눈에, 일본인에게 너무나 친절한 아들이 어떻게 비쳤을까요? 어머니 앞에서 긴장했던 게 떠오릅니다. 하지만 어머니도 친절하게 대해주셨습니다. 잘 대해주실수록 죄송하기 그지 없었습니다. 한국에 대해 언제나 느끼는 일입니다.

길형은 최근 회보에서, 자신은 일본인을 정말로 용서했는가 쓰신 적이 있습니다. 자신이 발행하고 있던 잡지에 다음과 같은 일화를 소개하기도 했습니다. 오래전, 사죄하는 일본인 앞에서 일본인이 한 일을 용서하지만, 잊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곁에 있던 송두용 선생은 그 분을 향해, 용서하지만 잊지 않는다는 게 무엇인가 하고 꾸짖었다는 것입니다. 우리 일본인은 한국 사람들을 괴롭게 했던 일을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장례식장에서 사모님과 다시 만났습니다. 사모님은 풀무학원 제1회 졸업생입니다. 오래전 아내와 함께 댁으로 찾아뵈었을 때, 사모님이 직접 전통요리들로 대접해 주셨습니다. 고별예배가 끝난 후 식사자리에서, 사모님이 밝게 맞이해주신 것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장례식장에는 눈물이 없고, 모두가 천국에서의 재회를 굳게 믿고 있는 듯, 밝고 평화로우며, 미소마저 보였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함께 해주실 것이라는 길형 부부의 신앙과 인품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저에게는 길형이 주신 두 권의 한국어 성서가 있습니다. 한국의 교회와 집회에서 많이 읽고 있는 성서들로, 길형이 골라 선물해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다면, 그곳에서 길형과 다시 만나고 싶습니다. 송문호 선생 부부, 이진구 선생, 유희세 선생그리고 길광웅 선생. 주께서 은혜를 주신다면, 다시 만나고 싶은 한국의 여러분들이 그 땅에 점점 많아지고 있습니다.

길광웅 선생, 정말 감사했습니다. 사모님을 비롯하여 가족 여러분 위에도 하나님의 은혜와 평안을 기도하고 있습니다.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