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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랑

여적餘滴 / 이기철

작성자플로우|작성시간19.06.21|조회수126 목록 댓글 0

 

나무는 제 몸속 어디에 진홍을 숨겨두었다가

봄이면 한꺼번에 저 많은 꽃송일 터뜨리는 걸까

 

가난은 숭고한 것

들꽃이 백 년 동안 한 벌 옷만 입고 나오는 것

 

산을 사랑하는 것은

벼랑 끝 바위를 끌어안은 한 그루 소나무다

 

새의 지혜는 나무 위의 가장 고요한 곳에 둥지를 트는 것

 

도랑물이 끈을 풀어 두 마을을 하나로 묶어놓았다

그것이 천 년을 떠나지 않는 마을의 이유

 

봉숭아꽃에 잠든 나비, 그 백 년의 고요

 

음악의 출생지는 추녀 끝에 듣는 빗방울

 

지금 어디에 살고 있을까

산 이름 강 이름 지어놓고 떠난 사람들은

 

나는 신을 생각하며 시를 쓴 일은 한 번도 없다

다만 고뇌하며 사는 인간을 생각하며 시를 쓴다

 

내 꿈은 비애에게 아름다운 이름 하날 지어주는 일

 

익은 열매를 터뜨리면 한 해가 쏟아진다

손에 닿은 흑요석

 

사람에게는 출생이 있고 나무에게는 발아가 있다

 

꽃이 웃음소리를 낸다면 나는 꽃을 사랑하지 않았을 것이다

 

말이 걸어올 때 전율하는 사람이 시인이다

 

노래를 만든 사람

 

침묵에게 색동옷을 입혀주고 싶은 사람

 

나뭇잎이 땅으로 떨어지는 시간이 지상에서의 영원이다

 

낮달은 누가 쓰고 버린 티슈조각

손때 묻은 16절지 백지 한 장

 

 

달밤에는 강물의 키가 큰다

마을이 강의 젖 빠는 소리

 

내 발이 도달한 곳은 유한, 내 정신이 도달한 곳은 무한

 

누가 제 마음을 길어 새 이름 꽃 이름을 지어놓았을까

내 시는 그 이름을 종이 위에 옮기는 일

 

내가 한 번 시에 쓰고 버린 말들이

언젠가는 나에게 복수하러 올 것이다

 

 

[산산수수화화초초山山水水花花草草],서정시학,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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