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는 제 몸속 어디에 진홍을 숨겨두었다가
봄이면 한꺼번에 저 많은 꽃송일 터뜨리는 걸까
가난은 숭고한 것
들꽃이 백 년 동안 한 벌 옷만 입고 나오는 것
산을 사랑하는 것은
벼랑 끝 바위를 끌어안은 한 그루 소나무다
새의 지혜는 나무 위의 가장 고요한 곳에 둥지를 트는 것
도랑물이 끈을 풀어 두 마을을 하나로 묶어놓았다
그것이 천 년을 떠나지 않는 마을의 이유
봉숭아꽃에 잠든 나비, 그 백 년의 고요
음악의 출생지는 추녀 끝에 듣는 빗방울
지금 어디에 살고 있을까
산 이름 강 이름 지어놓고 떠난 사람들은
나는 신을 생각하며 시를 쓴 일은 한 번도 없다
다만 고뇌하며 사는 인간을 생각하며 시를 쓴다
내 꿈은 비애에게 아름다운 이름 하날 지어주는 일
익은 열매를 터뜨리면 한 해가 쏟아진다
손에 닿은 흑요석
사람에게는 출생이 있고 나무에게는 발아가 있다
꽃이 웃음소리를 낸다면 나는 꽃을 사랑하지 않았을 것이다
말이 걸어올 때 전율하는 사람이 시인이다
노래를 만든 사람
침묵에게 색동옷을 입혀주고 싶은 사람
나뭇잎이 땅으로 떨어지는 시간이 지상에서의 영원이다
낮달은 누가 쓰고 버린 티슈조각
손때 묻은 16절지 백지 한 장
달밤에는 강물의 키가 큰다
마을이 강의 젖 빠는 소리
내 발이 도달한 곳은 유한, 내 정신이 도달한 곳은 무한
누가 제 마음을 길어 새 이름 꽃 이름을 지어놓았을까
내 시는 그 이름을 종이 위에 옮기는 일
내가 한 번 시에 쓰고 버린 말들이
언젠가는 나에게 복수하러 올 것이다
[산산수수화화초초山山水水花花草草],서정시학, 2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