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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일전쟁사]20세기 동아시아 최대의 전쟁, 중일전쟁사 6화 < 제국주의 일본의 허와 실 >

작성자푸른 장미|작성시간13.07.17|조회수911 댓글 3

300년간 쇄국정책을 고수했던 도쿠가와 막부와 달리, 메이지정부는 정권을 차지함과 동시에 적극적인 팽창주의, 제국주의를 추구합니다. 메이지정부에 반발하는 사족들의 내란속에서도 류큐를 복속시키고 대만을 정벌하였고 2차례의 큰 전쟁을 통해 1910년에는 조선을 병탄하는데 성공합니다.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일본은 남만주에 진출하는 한편, 1차대전중에는 산동 청도에 있는 독일 조차지를 공격하여 그 손바닥만한 땅을 차지하기 위해 근 2천여명의 사상자를 내기도 하였죠. 또한 영국, 프랑스 함대와 연합해 독일 동양함대를 추적하는데 이들은 독일함대와의 전투보다 오히려 사이판, 포나페, 파라오 등 태평양 각지에 흩어져 있는 독일 식민지 섬들을 점령하고 자국령에 편입하는데 혈안이 됩니다.

1917년에는 영국이 일본해군의 지중해 파견을 요청하자 처음에는 실익이 없다는 이유로 거부했다가 연합국내에서 발언권을 높이겠다는 정략적 이유로 순양함 아카시를 비롯한 18척의 군함으로 편성된 제2특무함대를 파견하여 상선호위임무와 대잠작전에 투입되어 36회의 교전과 78명의 전사자를 내기도 하였습니다. 이 덕분에 전후 베르사유강화회의에서 중국에서 독일이 가지고 있던 모든 이권과 팔라우, 마셜제도를 비롯한 적도이북의 남양군도를 위임통치령으로 복속합니다.(이때문에 완전히 엿먹은 중국에서 5.4운동이 일어나죠.) 여기다 국제연맹 5대 상임이사국에도 한자리 차지할 수 있었습니다.

2등 순양함 아카시. 인도양과 지중해에 투입된후 시베리아 출병에도 참가했습니다.

※ 사진출처 : http://blog.naver.com/mirejet/110104482262

 

※ 당시 일본해군은 제1특무함대를 인도양과 남아프리카에, 제2특무함대는 지중해, 제3특무함대는 남태평양과 호주로 파견하여 각종 임무를 수행케 하였습니다.

이어서 러시아혁명이후 적백내전기간 벌어진 열강들의 소위 "간섭전쟁"에도 적극적으로 가담하는데, 러시아의 혼란을 이용해 바이칼동쪽의 동부 시베리아를 소련으로부터 독립시켜 꼭두각시 괴뢰정권을 수립하겠다는 분수에 넘치는 망상을 꿈꾸고 미, 영과 함께 대규모 병력을 파견합니다. 당초 협정에는 백군측의 체코군단을 지원하기 위해 미국 7천명, 영국 5,800명에 일본군 1만2천명으로 구성하기로 했으나, 일본의 목적은 체코군단따위가 아니라 영토 확장에 있었기에 사활을 걸고 무려 7만3천명을 파견합니다.(그 중에는 미래의 꼴통 무다구치 렌야 소좌도 있었습니다.)

관동군 산하 제7사단이 북만주에서 바이칼호로 진격하고 제12사단이 연해주로, 제3사단이 동부시베리아로 진군하였으나 욕심에만 눈이 멀어 충분한 동계작전 준비도 없이 무턱대고 진출했다가 전비만 10억엔에 3천여명의 전사자와 수많은 동사자만 낸채 결국 22년 10월 잔여병력을 철수시킵니다. 특히 20년 5월 니코라예프스크항에서는 일본군 수비대와 거류민 등 720명이 소련군의 공격으로 몰살당하는 참사가 벌어지죠. 25년 5월에는 소련의 압박을 받아 그동안 차지하고 있던 북사할린도 반환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블라디보스톡에서 행진하는 일본 간섭군. ※ 사진출처 : 네이버

 

이에 대해 일본의 역사서에서는 "시베리아 출병"이라고 축소 왜곡하고 있지만 전형적인 침략전쟁입니다. 이 전쟁에서 일본군은 이전의 청일, 러일전쟁에서 없었던 수많은 문제점을 이미 드러내고 있었습니다. 전쟁목적 자체가 불명확했고 국가전략과 군사전략도 일관성이 없었습니다. 병사들은 자신이 왜 싸워야 하는가에 대한 당위성도 없었고 방한복조차 부족하여 추위에 떨다가 전의를 상실하고 대대병력 전체가 무기를 버리고 투항하기도 했습니다. 군기위반과 탈영사건도 비일비재했습니다. 이 무의미한 전쟁의 전비확보를 위해 국민들은 무거운 세금에 허덕거려야 했죠. 그럼에도 이런 문제점들은 당시 일본 수뇌부들에게 어떤 교훈도 주지 못한채 결국 그들이 패망할때까지 무한정 반복되죠.

 

일본에서 군부의 위치는 매우 독특한 것이었습니다. 민주국가이건 독재국가이건 군부는 정부의 통제를 받는게 일반적입니다. 영, 미를 비롯한 민주국가에서 군은 철저하게 정치적 중립을 지키면서 민간인 수장의 명령에 복종한다면, 히틀러나 무솔리니, 스탈린은 정권 획득 과정에서 군의 지지를 받지는 않았지만 정부의 최고수반이면서 동시에 최고사령관의 자리를 겸임함으로서 군을 장악하였습니다. 중국의 장개석정권이나 이라크의 후세인, 리비아의 카타피처럼 반대로 군사지도자가 군부를 배경으로 국가와 정부 전체를 장악한 케이스도 있죠. 어쨌든 방식의 차이는 있지만 한명의 지도자가 군을 장악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공통되죠.  

그러나 일본군은 한마디로 "국가속의 국가"로서 완전히 독립된 별개의 개체였습니다. 이는 1878년 야마가타 아리토모의 주도로 제정된 "참모본부 조례"와 "육군직제"에 따라 "군의 통수권은 오로지 천황만이 가질 수 있다"라고 명시함으로서 정부에서 완전히 독립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말만 천황의 명령에 복종한다고 할뿐 천황은 아무런 실권이나 발언권이 없었기에 실제로는 허수아비 천황을 핑계로 군대가 외부의 간섭을 배제시키는 꽁수를 부린 격이죠.  

 

즉, 군의 통수권이 우리의 대통령에 해당하는 총리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천황에게 있는데다 이조차 형식에 불과하다보니 군을 견제하거나 통제하는 제도적 장치가 전무했습니다. 천황밑에는 대본영이 있었고(이론상으로는 우리의 합참이나 독일의 OKW에 해당) 육군 참모총장과 해군 군령부 총장이 각군을 통솔하면서 천황에게 형식적인 보고를 하였습니다. 그러나 대본영의 권한으로는 육해군 각군간의 조율이나 통합된 전략계획의 수립이 불가능했고 군내와 예하부대끼리도 출신과 배경에 따른 극심한 파벌을 형성하고 있었습니다. 사실상 군벌들의 집합체나 다름없었습니다. 그러니 콩가루군대가 될 수 밖에 없는 것이었죠.

 

또 한가지 문제점은 우리의 "국가안전보장회의(NSC)"와 같은 정부 수반이 주도하는 각 정부부처와 군부를 망라하는 조직체가 없었습니다. 따라서 정부와 군부간에 손발이 맞을 수가 없었고 서로간의 갈등과 질시로 정보공유조차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통일된 국가전략이 부재하고 목적과 계획도 없었으며 단지 군부가 먼저 사고를 저지르면 정부가 마지못해 그때그때 따라가며 뒷치닥거리를 하는 식이 됩니다. 정부와 군부가 대립하고 육군과 해군이 대립해도 이를 조정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는 전무했습니다. 패망하는 그날까지도 서로 책임 회피와 무책임함이 극에 달한 것도 이때문이었습니다.

이렇듯, 강력한 리더쉽을 갖춘 지도자가 부재한데다 정치적 역학구도에 따라 내각이 수시로 교체되다보니 정치적으로 매우 불안정하였고 정부의 위상과 영향력은 감소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따라서 1930년대 이후가 되면 군부가 정부의 주도권을 쥐게 됩니다. 설령 도죠 히데키같은 군출신이 총리에 임명되어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배에 선장이 없다보니 정부부처와 군부는 서로 손발을 맞추기는 커녕 따로 놀기 일쑤였고 정부와 군부내에서도 수많은 파벌이 형성되어 치열한 암투와 대립을 벌입니다. 견원지간이었던 육군과 해군은 물론이고 육군내에서도 출신성분과 배경에 따른 극심한 편가르기는 태평양전쟁으로 완전히 몰락할때까지도 반복되는 모습이었죠.  

 

장교단의 극단적인 배타성과 폐쇄성도 일본군부가 가진 문제점이었습니다. 장교들의 50%이상이 아버지가 메이지시절 고급장교를 지냈거나 관료, 사무라이, 지주출신이었습니다. 즉, 신분의 세습화인 것이죠. 예를 들어 일본제국시대 최대의 군사반란이었던 1936년 2.26사건당시 쿠테타를 주도한 육군 장교 15명의 대부분이 아버지가 소장이상의 고위장성이었습니다. 장교들은 동기들끼리도 끈끈한 유대관계를 가지고 있었을 뿐더러, 군과 정재계의 원로들과 이렇게 저렇게 연계되어 있었던 것이죠. 여러차례의 군사반란이나 관동군의 독단적인 월권행위는 명백히 군법회의에 회부되어 중형에 처해질 일임에도 대부분 흐지부지 넘어갈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이들의 뒷배경이 막강했기에 아무도 그들을 제어하려고 하지도 않았고 그들 역시 이런 특권의식을 가지고 거리낌없이 설쳤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함께 있을때 두려운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이것이 당시 일본군 장교들의 마음가짐이었다고 할 수 있는데 학교 일진도 아니고 명색이 장교란 것들이 이렇게 겁대가리를 상실하고 있었으니 나라가 망하는 것은 당연한 결과이죠.

※ 사진출처 : http://blog.daum.net/helpervirus/120

 

이런 일본도 이른바 "다이쇼 데모크라시"라 하여, 사회 일각에서 서구 민주주의식 시민운동이 일어나면서 군부의 위상도 일시적으로 축소되기도 하였습니다. 중국에서 신해혁명이 발발했을때 당시 육군의 실세였던 야마가타 아리토모는 청조를 지원한다는 명목으로 2개 사단 규모의 대규모 만주출병을 주장했으나 당시 일본 내각은 국제적인 지탄을 받을 수 있다는 이유로 1개 연대 규모의 소규모 병력을 관동주에 추가 파견하는 선으로 마무리합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북평과 천진에 병력을 주둔시키고(북지파견군) 1912년에는 한구에도 병력을 주둔시킵니다.(중지파견군) 또 1차대전을 이용해 중국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하고 시베리아 출병도 단행하죠.

1차대전이 끝난후에는 이른바 "우가키 군축"을 단행하는데, 1921년 11월 워싱턴 해군군축조약에 참여하고 육군에 대해서도 4개 사단과 9만의 병력을 축소시킵니다. 국민의 군비축소 여론과 날로 방대해지는 예산 부담으로 인한 경제적 어려움때문에 마지못해 군축을 추진했으나 군 내부의 강력한 반발로 실제로는 전혀 축소되지 않았습니다. 병력 축소로 절감된 예산은 낙후된 군 장비의 개선에 활용되다보니 여전히 국방비는 국가예산의 30%에 달했으며 군부가 정부를 주도하는 30년대 이후가 되면 기하급수적으로 확대됩니다. 군비 증대를 억제하려고 했던 다카하시 고레키요 대장성 장관이 2.26사건에서 암살되면서 더이상 자기 목숨 걸고 군부에 대항하려는 정치가는 전무했고 중일전쟁이 발발하는 37년에 오면 국방비는 국가예산의 무려 70%에 달합니다.  

여기다 20년대와 30년대 초반까지 수차례의 감군으로 많은 장교들이 군에서 쫓겨난데다 극심한 승진 적체, 29년 10월에는 봉급의 일괄 10% 삭감으로 군의 불만은 극에 달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불평불만에 가득찬 청년장교들은 자기들끼리 파벌을 형성하여 외부로는 충동적인 중국침략과 내부로는 군사반란을 통한 소위 "국가개조"라는 극단적인 방법을 택하게 됩니다.

이렇게 정부와 군부가 정체성을 상실한채 혼란스럽다보니, 국가전략과 군사전략에서도 도무지 원칙과 일관성이 없었습니다.  

   

러일전쟁 종결직후인 1907년 천황을 비롯해 육해군 참모총장과 해군군령부장, 군의 각 원로들이 참석한 가운데, 이른바 "제국국방방침"을 최초로 제정되었는데 이는 국가전략과 군사전략의 기준을 처음으로 마련한 것이었습니다.

이 제국국방방침은 이후 3차례 개정되었으며(1918년, 1923년, 1936년) 1936년의 3번째 개정은 중일전쟁을 코앞에 두고 있었다는 점에서 상당히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 개정은 원래 해군의 요구에 따라 추진된 것으로, 일본제국의 안보를 위해 당시의 군병력을 당초 평시 17개사단, 전시 30개사단에서 평시 27개 사단, 40개 비행중대와 전시 50개 사단, 140개 비행중대로 확대하고, 최대 가상적국으로 미국과 소련, 중국을 상정하였습니다. 또한, 1차대전의 경험을 바탕으로 총력전과 지구전의 필요성을 강조하면서 또한 1차대전 초반 독일의 주된 단기결전전략이었던 "슐리펜계획"을 기초로 하여 개전과 동시에 조기에 단기결전을 위한 상비전력을 정비할 것을 강조합니다.

또 유사시를 대비한 작전계획으로 총 8가지 안을 상정합니다. 이는 가장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되는 것부터 차례대로 우선순위를 매기고 있는데, ①작전전반에 대한 계획 ②대소작전계획 ③대미작전계획 ④대중작전계획 ⑤대영작전계획 ⑥이들 4개국중 2개국이상의 국가와의 작전계획 ⑦이들 4개국을 제외한 국가와의 작전계획 ⑧동맹국과의 작전계획, 이런 순입니다.

그런데 이 제국국방방침 3차 개정안은 심각한 문제점과 모순을 내포하고 있었습니다.  

 

첫째로, 군사전략이란 어디까지나 국가전략의 하위개념에 불과하며 전쟁과 군사력은 국가가 추구하는 정치 목표의 수단일뿐입니다. 그러나 군부의 독주로 인해 정부가 군을 통제하지 못하다보니 오히려 이것이 정반대로 바뀌어 군이 정한 군사전략에 국가전략이 따라가는 격이 됩니다. 모든 정부 방침과 정치, 외교, 경제전략 역시 군의 요구에 맞추어지고, 군내부에서도 육군과 해군간, 또 하위부대와 지휘관들끼리 심각한 파벌대립을 보여도 정부와 군 수뇌부는 이를 조정하고 조율할 능력자체를 상실합니다. 이래서 한마디로 막장이 된 것이죠.

둘째로, 총력전과 지구전에 대한 "각오"와 "준비"를 강조하고서도 원론적 차원에서만 거론했을뿐 정작 구체적인 실천계획과 세부사항에 대해서는 쏙 빼놓고 있었습니다. 아예 이에 대한 개념 정립과 연구 자체도 제대로 진행되지 않았습니다. 1차대전에서 유럽 열강들이 국민총동원과 국가총력전의 양상을 보여주자 일본 역시 그 필요성을 깨닫고 1918년 군부의 주도로 "군수공업동원법"이 제정되어 유사시 국가에 의한 동원과 징발에 대한 관련 규정을 제정합니다. 이 법은 무엇보다 일본의 산업구조를 전시체제에 맞추어 재편하겠다는 의도였으나 당시 일본의 후진적인 산업구조와 재벌들의 비협조로 20년대 전기간동안 사실상 유야무야했습니다. 

또한, 한 국가가 가진 모든 유무형의 자원을 전쟁을 위해 총동원하기 위해서는 평시부터 일정한 교육과 훈련을 받은 대규모 예비병력의 확보, 전시 소요되는 예비간부요원의 대량 양성, 군 편제의 개편, 정치, 문화, 경제, 사회 전반의 총력전 체제의 정비 등이 뒤따라야 가능한 것입니다. 즉, 서구열강들처럼 국가 체제자체가 거대한 대중군의 동원을 위한 정치적, 경제적 능력과 전시의 자본, 공업동원을 위한 준비가 있어야 함에도 아직 미숙하기 짝이 없는 반근대화되고 반봉건적인 일본이 어느날 갑자기 흉내낼 수 있는 것이 아니었죠. 또 교육수준이 서구보다 상대적으로 형편없이 낙후된 일본은 그만큼 병사들의 숙련도를 위해 복무를 장기화할 수 밖에 없어 대규모 예비군을 확보하는데 애로가 많았습니다.

더욱이 일본군부는 국민에게 극심한 불신의 대상이었고 군부 역시 국민을 불신하여 서로 완전히 괴리되어 있었습니다. 일본군은 국민개병제를 실시하고 있음에도 제도적으로 정부와 국민에 의한 조직이 아니기에 "국군"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황군"이었습니다. 이점이 히틀러나 무솔리니정권과의 결정적인 차이이며 일본군의 특수성이었죠. 군부가 일반 국민과 괴리되어 있다보니 소수의 정예군을 유지하는 것을 택함으로서(평시 17개 사단, 전시 30개 사단) 유사시 대규모 예비군을 확보하는데 심각한 애로를 겪게 됩니다. 제2차 상해사변당시 중국군의 저항이 예상을 뛰어넘자 중장년층의 예비군을 대거 동원하여 훈련도 없이 무턱대고 최일선에 투입했다가 90%가 죽어나가는 막대한 희생을 치루게 되죠.

또한, 우수한 장교와 하사관의 확보에서도 많은 문제가 있었습니다. 군 수뇌부는 "많이 배운 도시출신은 사회주의에 물들었다"라는 막연한 편견과 선입견을 가지고 교육수준이 낮은 농촌출신을 선호하였고 예비간부 확보에도 소극적이었습니다. 이렇게 군수뇌부의 사고가 하나같이 구태의연하다보니 전략, 전술과 교리의 연구에서도 시대의 변화를 무시하고 백병만능주의와 공격지상주의만을 고집하였고 기계화부대보다는 보병에 중점을 둡니다. 전차부대는 구색용에 불과했고 포병이나 기관총 등 지원화력도 형편없었습니다. 따라서 전투력의 핵심은 보병의 소총과 총검에 있었죠. 독일군이 처럼 자유로운 군사토론은 금지되었으며 일체의 비판이나 논평조차 거부되었습니다.

셋째로, 이 방침을 수립한지 바로 1년후에 중일전쟁이 발발함에도 위에서 보듯, 이 시기 일본의 전쟁계획에서 대중작전은 대소전과 대미전보다 우선순위가 더 낮았다는 것입니다. 여기다 대중작전계획은 중국과의 전면전 발발시 화북에 5~8개 사단, 화중에 5개 사단, 화남에 1개사단을 투입하여 요지를 점령하겠다는 개략적인 계획만 수립하고 구체적인 세부계획은 없었습니다.

 

당시 일본 중앙 참모본부의 주요 관심사는 어디까지나 대소전쟁에 있었고 중국과의 전쟁에 대해서는 노구교사변 직전까지도 계획 자체가 전무한 상태였습니다. 단지 유사시 산해관의 중국군 방어선을 돌파해 북경, 천진 등 요지를 장악하겠다는 추상적인 생각만 하고 있었죠. 이런 상태에서 일본은 확실한 군사전략도 구체적인 방침도 계획도 없이 "노구교사변"이라는 돌발적인 상황에 아무 준비도 없이 갑자기 중국을 상대로 전쟁을 시작한 것이었습니다. 당시 일본정부와 군부가 얼마나 아무 생각도 없이 그야말로 무책임하고 근시안적이고 무능했는지 알 수 있죠.  

다음으로 일본의 군사방침을 본다면 첫째 공세지향주의, 둘째 적주력에 대한 대규모 섬멸전, 셋째 단기속전속결전, 넷째 국가정책과 군사전략의 일치 이렇게 네가지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이런 방침은 열세한 국력으로 우세한 적과 싸워야 했던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의 경험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이 두 전쟁에서 일본은 산업역량이 빈약하고 경제력이 약하다보니 장기전에 대한 아무런 대비도 없었음에도 개전 초반의 기습전략으로 국력의 차이를 극복하고 결국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따라서 이런 방법이 향후 전쟁에서도 계속 통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전쟁지도와 작전, 용병술의 성공모델로서 교리화합니다.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서 그들이 이긴 것은 그들이 주장하듯 단순히 선제공격과 속전속결 전략때문이라기보다, 그들의 상대였던 청과 러시아가 가진 내부적인 모순탓이 더 컸음에도 이들은 이런 점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간과하였습니다.

그리고 네번째의 "국가정책과 군사전략의 일치"는 러일전쟁당시 정부와 군부간의 의견 불일치와 불협화음으로 혼선이 빚어진 경험때문에 최초의 제국국방방침에서는 포함되었으나 2차 개정에서는 오히려 삭제됩니다. 따라서 정치와 군사의 통합은 모든 국가의 기본 상식임에도 일본의 경우에는 심각한 모순이 발생하게 되죠. 그보다도 근본적으로 일본이라는 나라가 메이지 유신이래 태생적으로 가질 수 밖에 없는 내부적인 문제라고 밖에 할 수 없습니다. 

 

결론적으로, 일본군은 근본적으로 근대화에 막 발을 담구었을뿐인 반봉건적인 군대였다는 것입니다. 이렇듯 국가의 수준이 낮고 국력과 공업력이 미비한데다 총력전을 위한 국민들의 지지를 기대하기 어렵다보니 총력전과 지구전보다는 소위 "상대의 허를 찌르는" 기습에 의한 단기결전과 속전속결같은 변칙적인 방법에만 의존합니다. 즉, 공세주의, 기습작전, 속전속결이 육군의 기본사상이었고 이런 사고는 중일전쟁은 물론 태평양전쟁까지도 유지되었죠. 원칙도 일관성도 없었으며 침략에 대한 미련은 버리지 못하면서 동시에 2류국가로서 열강들의 간섭과 고립은 두려워 하는 것이 당시 일본이 가진 모순이었죠.  

 

무기개발에서도 구미열강에 비해 매우 낙후되었는데 항공기를 제외한 소총, 대포, 전차 등 주요 무기 대부분이 민간이 아닌 군부의 직접 통제에 놓여 있다보니 기술력은 낙후되었고 생산설비도 매우 부족했습니다. 미국이나 독일 등에서는 민간기업들간의 경쟁을 통해 기술력을 적극적으로 향상시킨 것과는 대조되는 것이죠. 기술력이 뒤떨어져 있다보니 프랑스를 비롯한 서구의 무기를 짝퉁으로 베끼는 수준이었는데, 이조차도 30년대 이후에는 국제사회에서 고립되고 구미열강과의 관계가 악화되면서 선진 기술 확보에도 심각한 애로를 겪게 됩니다. 따라서 우수한 체코제나 독일제 무기로 무장한 중국군을 상대할때는 고전을 면치 못했고 자군의 무기보다 월등히 우수한 이들의 무기를 적극적으로 노획해 사용하기도 했죠. 화력보다 백병전을 중시하고 병사들의 자발성 대신 생명과 인권은 무시한채 정신력 제일주의를 고집한 것도 근본적으로 이런 후진성 때문이었습니다. 

일본군이 33년부터 사단포병 화력으로 사용한 91식 105mm 유탄포. 1924년에 프랑스 슈나이더사에 의뢰해 수입한후 국산화한 야포입니다. 기술력이 낙후된 일본은 구미열강에서 무기를 수입해 국산화함으로서 기술을 축적하는 방식을 택했으나 군부의 무모한 독주로 인해 국제사회에서 고립되면서 기술력은 정체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 사진출처 : http://blog.naver.com/mirejet/110041853259

 

33년 5월 열하침략의 승리와 당고협정의 체결 이후 일본의 중국침략은 일시적으로나마 소강상태가 됩니다. 9월에는 "대중타협"을 주장하는 히로다 고키가 외상이 되었는데, 그는 일단 만주 경영에 주력하면서 중국 본토에 대해서 적극적인 행동을 자제함으로서 더이상 양국간의 분쟁을 격화시키지 말 것을 방침으로 정합니다. 일본 재계 역시 이를 환영했는데 중국과의 관계 악화로 대중수출이 90%이상 격감할만큼 심각한 타격을 받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군부에서도 일단 소련의 위협에 대비하기 위해 전력을 재정비할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죠.

 

이에 따라 관동군의 추가적인 돌발적 행동을 단속하는 한편, 35년 1월에는 주중 일본공사관을 대사관급으로 격상시키는 등 어느 정도 관계가 호전되기도 합니다. 장개석은 이 기간을 적극 활용해 공산군 토벌과 지방 군벌들을 복속시켜 중앙정부의 통치력을 강화하고 경제건설에도 적극적으로 노력하죠.

 

외무성은 오로지 만주국에 올인하여 국력을 넘어서는 무모한 일을 벌이지 말자는 현실론적인 입장이었으나, 육군은 "장개석정권의 친일적 태도는 어디까지나 일시적인 위장술일 뿐이며 힘을 키워 미, 영과 협력하여 반격할 것이 뻔하기에 타협은 있을 수 없으며 철저히 강경하게 나가야 한다"라고 주장합니다. 더욱이 관동군은 정부의 방침은 무시한채 만리장성을 넘어 화북을 침략할 기회만 노리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일시적인 평화는 곧 깨지고 관동군은 본격적으로 화북 침략의 음모를 꾸미기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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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레이* | 작성시간 13.07.17 천황은 옛날에도 호구더니....저 시대도 호구군요....
    아 그런데 난징 대학살사건도 관동군이 화북침략하면서 일어나는건가요?
  • 작성자리블루 | 작성시간 13.07.17 문민 정부의 군에 대한 통제력 부재가 어떤 막장을 불러올 수 있는지 몸소 보여준 게 일본이죠.
    결국 메이지 헌법이 문제...독일식 전제군주제를 참고했으면서 애매하게 입헌군주정을 섞어서 천황의 권력을 거세해버리니 군대가 제멋대로 날뛸 수 있도록 등 떠민 격;;;
  • 작성자VOCALOID 時代 | 작성시간 13.07.18 예나 지금이나 덴노는 명분이나 프로파간다로 쓰일 뿐인 존재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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