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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일전쟁사]20세기 동아시아 최대의 전쟁, 중일전쟁사 8화 < 동아시아 역사를 바꾼 두개의 사건 >

작성자푸른 장미|작성시간13.07.20|조회수822 목록 댓글 9

1936년에는 세계를 놀라게 하는 두번의 크나큰 정치적 사건이 중일 양국에서 일어납니다. 이것은 동아시아 역사의 향방을 결정했으며 이후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 나아가 국공내전에까지도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주게 됩니다.

 

1936년 2월 26일 새벽 5시. 육군의 소위 "황도파" 청년장교들이 "쇼와유신 단행"과 "존황토간"을 주장하면서 수도인 도쿄 한복판에서 대규모 반란을 일으킵니다. 주동자는 노나카 시로 대위, 코다 키요사다 대위 등 도쿄에 주둔한 제1사단과 근위사단소속의 20대 초급장교들이었고 제1사단 제3연대 900여명을 중심으로 근위 보병 제3연대, 제1사단 제1연대, 야전중포병 제7연대 등 총 1,483명이 가담합니다.   

 

그들은 부정부패한 원로대신들을 척결하고 쇼와천황(히로히토)을 옹립하여 국가를 새롭게 개조하겠다는 명분으로, 오카다 총리를 비롯해 다카하시 대장성 장관, 사이토 전총리이자 내무장관, 와타나베 육군교육총감, 스즈키 시종장 등을 습격합니다. 또한 수상관저, 국회의사당, 경시청, 육군성, 육군대신 관저, 참모본부 등 정부와 군부의 주요기관과 관청을 점거하거나 포위합니다. 이것이 이른바 "2.26사건"이었습니다. 

 

2.26사건당시 정부청사를 포위한 반란군.

※ 사진출처 : http://cafe.naver.com/kjijon/3963 

 

이 사건으로 사이토와 다카하시, 와타나베가 자신의 집에서 습격을 받아 비명횡사했으나, 오카다는 자신의 여비서 방에 숨어있다가 매제인 마쓰오 덴조 대좌가 반란군앞에서 "내가 오카다 케이스케다"라고 말하고 사살됨으로서 간신히 목숨을 건질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반란군에게 포위된 자신의 관저에서 조문객으로 위장하고 간신히 탈출합니다.  

 

이렇게 하루아침에 나라를 뒤엎고 반란이 성공한 것처럼 보였으나 한낱 철부지 불평불만분자들의 무모한 불장난에 불과한 것이었습니다. 말로는 거창하게 국가개조 운운했으나 진짜 이유는 자신들이 만주로 파견되는 것에 대한 불만때문이었습니다.  

 

일본 군부는 메이지 유신이래 수많은 파벌이 있었지만, 30년대 초반부터는 크게 "황도파"와 "통제파"로 나누어 집니다. 황도파는 아라키 사다오 전 육군대신과 마사키 진자부로 전교육총감을 수장으로 하는 파벌로서 20년대 이른바 "우가키 군축"에 반발하고 부패한 정치가와 재벌을 쫓아내고 천황이 친정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또한 독일의 나치즘을 신봉하고 이를 일본의 사무라이정신과 결합시키자, 소련과 전쟁을 해야한다, 기술력보다 정신력이 우선이다 라고 하는 등 군부내에서도 가장 시대착오적이고 말그대로 수구꼴통적인 집단이었습니다.  

 

이런 아라키가 31년 12월 우가키 가즈시게를 대신해 육군대신에 임명되면서 군부내 실권을 쥐자 군부내 우가키파를 밀어내는 한편 자기 추종 세력들을 요직에 배치하고 도쿄 경비를 맡고 있던 제1사단을 황도파의 주요 무력으로 활용합니다. 그러나 이런 편파적인 인사정책은 도리어 황도파 장교들의 오만함을 불러왔고 이들은 자신들이 실세임을 믿고 겁대가리를 상실한채 안하무인으로 군법을 무시하고 하극상을 저지릅니다. 더 나아가 자신들을 반대하는 비황도파 세력들에 대한 암살과 심지어 국가를 자기들 손으로 전복시키겠다는 쿠테타까지 계획하기에 이르죠. 

 

여기에 반발하여 나온 것이 나가타 데쓰잔소장을 수장으로 한 소위 통제파였는데, 그는 "군은 정치에 관여하지 않고 군법과 기강을 중시해야 한다"라고 주장합니다. 또한 군을 감축하는 대신 현대화를 추구하였습니다. 그러나 나가타가 35년 8월 12일 이른바 "8월사건"에서 황도파 장교에게 암살된후 통제파는 황도파와 달리 명확한 리더가 없는 대신 육군내 30~40대의 중견 간부층이 중심이 되었는데, 바로 도조 히데키, 이시하라 간지같은 쓰레기 극우론자들이 통제파의 리더가 되면서 "군의 정치적 중립"과 "군 기강 확립"이라는 원래의 취지가 무시되고 서로간의 정체성마저 모호하게 됩니다. 단지 군내 파벌로서 황도파와의 주도권 경쟁만이 주된 목적이 되어 버리죠.  

 

이렇게 군부의 고위층들은 자신의 파벌과 군부의 체면만 생각하고 "결과만 좋으면 모든 것이 좋다"라는 식으로 만주사변이래 반복되는 관동군의 월권행위나 애송이들의 난동에 대해서도 강경하게 군법으로 처벌하기보다 오히려 제 식구 감싸기에만 급급함으로서 군의 기강을 스스로 문란하게 만들었습니다. 한술 더떠 자신은 직접 나서지 않는 대신 "배후의 흑막"으로서 이들을 선동하고 전위부대로 활용하기까지 한 것이 또 하나의 특징이었죠. 2.26사건 역시 단순히 몇몇 청년장교들이 주도해서 일어난 것이 아니라 배후에는 이런 군부 원로세력들의 비호가 있었던 것입니다. 

 

※ 주의, 주장은 다르지만 방법은 똑같은 사례가 바로 70년대 중국의 "홍위병"들입니다. 보수 반동적인 권력자가 자기 권력을 유지를 위해 분별없는 학생들과 청년들을 어용세력으로 부추겨 정부를 무력화시키고 개혁세력들을 탄압했다는 점에서 그야말로 이시기 일본 군부나 다를 바 없다 할 수 있죠. 

 

32년 5월 15일에는 이누카이 츠요시 총리가 군부를 억제하고 숙군을 추진한다고 불만을 가진 해군소속의 위관급 장교들과 사관후보생들 20여명이 반란을 일으켜 총리관저를 습격하고 총리를 살해하는 "5.15사건"이 일어납니다. 고작 20살 남짓한 소위들과 사관후보생들로 구성된 소수의 반란군들에 의해 쿠테타가 일어나고 총리가 백주대낮에 살해되었음에도 군부는 이들에 대한 처벌을 매우 가볍게 처리하고 대충 넘어가 버립니다.   

 

5.15사건 당시 이누카이 총리가 암살되었음을 알리는 아시히 신문. 오른쪽의 영감님이 이누카이 총리.      

※ 사진출처 : 위키백과 

 

아라키 역시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기 위해 자신을 따르는 세력을 "황도파"로서 키워줬지만 이들의 세력이 지나치게 커져버려 수장인 자신조차 통제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고 34년 1월에 결국 자리에서 물러나야 했습니다. 이때문에 통제파가 실권을 잡았고 황도파의 세력은 위축되었는데 11월에는 황도파 장교들이 쿠테타를 꾀하다 발각되어 황도파의 또다른 실세였던 마사키 진자부로가 교육총감에서 물러나고 여기에 연루된 장교 3천명이 예편되거나 강등됩니다. 

 

특히 통제파들에게 도쿄에 주둔한 제1사단은 아라키가 황도파의 소굴로 만든만큼 언제 들고 일어날지 모르는 불안 덩어리였죠. 당시 관동군은 조선군(19사단, 20사단)과 달리 고정된 배비사단이 없었고 교대파견제를 관행으로 하고 있었는데 제1사단에 대해 2월 22일자로 만주 파견을 명령합니다. 제1사단의 황도파 청년장교들은 "러일전쟁이래 제1사단은 도쿄를 벗어난 적이 없는데 갑자기 이런 명령이 떨어진 것은 통제파의 좌천 음모"라며 반발하였고 이것이 4일뒤 "2.26사건"으로 터져나온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끽해야 중위, 대위급들의 주도로 일어난 반란은 병력 동원부터 목표에 대한 습격과 도쿄 중심부 제압까지는 아주 신속하고 치밀하게 진행되었으나 정작 그 이후의 계획은 전무했습니다. 위관급에 불과한 이들에게는 국가를 전복시키고 정권을 탈취할 역량까지는 무리였던 것이죠. 이들은 우루루 육군대신에게 몰려가 소위 "궐기취지서"라는 것을 내놓고 여기에 동조해 줄 것을 요구합니다. 즉, 쉽게 말해 자신들이 엄청난 일을 저질렀지만 뒷수습할 능력이 없으니  군 상층부에서 해결해 달라는 것이었죠. 내용은 "쇼와천황에게 우리들의 뜻을 전해달라", "통제파의 주요인물의 파면 및 체포", "마사키를 총리대신으로 아라키는 관동군사령관으로 임명할 것" 등 총 8개 항목이었습니다. 

 

육군대신인 카와시마 요시유키는 명색이 육군의 최고 수장이면서도 소심하기 짝이 없는 인물이었고 반란군에게 관저가 포위된 상태에서 허둥대면서 "일단 천황에게 상신하겠다"고 대답한후 오후 3시 천황 히로히토에게 직접 보고합니다. 그러나 히로히토는 그들의 예상과 달리 주제넘다고 격분하고 "반란군을 즉각 진압하라"고 명령합니다.  

 

이에 따라 27일 계엄령이 선포됨과 동시에 근위사단과 제1함대 소속의 해군육전대, 헌병대 등 2만이 넘는 정부군이 출동하여 반란군을 완전히 포위하였고 이들의 해산과 원대복귀를 명령합니다. 만약 저항할 경우에는 무력으로 진압하겠다고 엄포하고 전함 나가노를 비롯해 도쿄만에 정박한 제1함대의 함포가 그들을 겨냥합니다.  

 

반란군 진압을 위해 투입된 전차대.

※ 사진출처 : http://homepage3.nifty.com/time-trek/else-net/topics-08-2-26.html 

 

반란군에 가담한 병사들은 대부분 영문도 모른채 소대장, 중대장의 출동명령에 따랐을 뿐 이들의 반란에 직접 동조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따라서 그제서야 자신들이 사실은 "반란군"이었다는 사실을 알게되자 급동요하기 시작했고 전의를 상실합니다. 또한 자신들이 떠받들었던 천황은 물론이고 아라키조차도 사태가 반란군에게 불리하게 돌아간다고 판단하자 재빨리 자신은 반란군과 아무 관계가 없다면서 즉각 복귀할 것을 명령합니다.  

 

이렇게 되자 반란 주모자들에게는 투항하거나, 스스로 자결하거나 두가지 선택뿐이었습니다. 결국 주모자중 하나인 노나카 시로대위는 자살하고 나머지는 백기투항합니다.  

 

그동안 "온정주의"와 "제식구 감싸기"로 일관했던 군 고위층도 이번 사건은 사안이 너무 큰데다 여론도 극도로 악화되어 대충 넘어갈 수가 없었습니다. 특히 주도권을 잡은 통제파가 적극적으로 나서 이들을 모두 체포하여 이중 15명이 총살형에 처해지고 나머지들도 직위해제 당했으며 반란에 참여한 부사관, 병사들 역시 중국전선으로 보내졌고 중일전쟁 발발이후 제일 먼저 최일선에 투입되어 대다수가 전사합니다.  

 

도쿄경비사령관을 비롯해 반란을 사전에 막지 못한 사단장, 연대장, 대대장 등 지휘관들 역시 죄다 예편되었고 반란군의 주력이었던 제3연대장은 자살할 것을 명령받고 권총을 자살합니다. 아라키, 마사키 등 황도파 수장들을 비롯해 미나미 지로 관동군사령관, 혼죠 시게루 시종무관장 등 6대장도 모두 옷을 벗었으며 3천명이 넘는 황도파 장교들이 모조리 강제 예편됨으로서 황도파의 세력은 급격히 약화됩니다.  

 

그럼에도 2.26사건의 후유증은 엄청나게 컸는데, 정부에서 그나마 소신을 가지고 군부를 견제할 수 있는 원로들이 살해되어 실질적인 승자는 군부였습니다. 명색이 해군의 원로이자 일국의 총리임에도 매제가 옆에서 대신 살해되는데도 혼자만 숨어서 비굴하게 목숨을 건졌을만큼 오카다 케이스케는 아주 유약한 인물이었으며 따라서 3월 9일 총리자리에서 스스로 물러납니다. 그를 대신해 히로다 고키 외상이 신임 총리가 되었으나 그는 오카다보다 더 유약한 인물이었는데다 정부와 의회는 군부를 강력하게 몰아치다가 언제 또 반란이 일어날지 모른다고 겁을 먹음으로서 모든 정책에 대해 군부가 시키는대로 하는 꼭두각시로 전락합니다. 또한 군부내에서도 고위층들조차도 청년장교들의 폭주가 반복되는 것을 두려워 함으로서 이들에 대한 통제를 포기합니다. 비유하자면 폐륜아들이 "칼부림"할까 입도 뻥끗 못하는 부모의 모습이 된 격이죠. 

 

덕분에 도죠 히데키를 비롯한 중견 간부들이 실질적인 일본 정계의 실세가 되었고 이들은 더이상 어느 누구의 견제도 받지 않은채(나섰다가는 목숨을 걸어야 하므로) 마음대로 국정을 전횡할 수 있었습니다. 더욱이 말이 "무슨무슨파"이지 권력과 개인의 출세를 지향하고 "정신력", "황군"을 답습하는 수구꼴통이라는 점에서는 황도파와 전혀 다를바 없었는데다 아라키만 해도 2년도 안되어 히로다 내각의 문부성 장관으로 복귀합니다. 따라서 일본 군부는 요만큼도 바뀐 것 없이 오히려 폭주족마냥 더욱 신나게 수라의 길을 향해 내달리게 되는 것이죠.  

 

36년 연초 벽두부터 일본에서 "2.26사건"이 있었다면 연말에는 중국에서 쿠테타가 일어납니다. 바로 장학량이 주도한 "서안사변"이었죠. 

 

1936년 12월 12일 새벽 6시.  

동북군벌 장학량의 명령에 따라 동북군 1개 중대 200명이 서안 외곽 16km 떨어진 임동의 온천휴양지인 화청지의 호텔을 급습합니다. 그곳에는 장개석이 머물고 있었죠. 동시에 동북군 1개 사단과 서북군 1개 연대가 서안시내에 진입해 섬서성정부를 비롯한 관공서, 경찰서, 남의사본부, 서안비행장등 주요 거점을 모조리 점령합니다. 장개석 참모들의 숙소였던 영빈관도 신속하게 급습하여  모두 포로로 합니다.

 

장개석은 취침중이었는데 정문의 보초들이 침입자를 발견하고 곧 총격전이 벌어집니다. 태평하게 방심하고 있던 장개석의 경호대는 대부분 잠에 빠져 있었고 제대로 저항조차 하지 못한채 무장해제됩니다만, 그 소란중에도 장개석이 튈 시간만큼은 벌죠. 그는 비서 한명만 대동한채 잠옷차림으로 허둥지둥 뒷산으로 튀었습니다. 그러나 신발도 제대로 신지 못한 그는 엄동설한에 멀리 튀지는 못한채 금새 계곡의 바위사이에서 발견됩니다. 이때의 상황을 라이프 2차대전사에서는 이렇게 묘사합니다. 

 

"쏴라! 그것으로 모든 것을 끝내라." 

 

장개석이 외치자 반란군의 대위는 그의 앞에 무릎을 꿇고 대답했습니다. 

"저희는 각하를 쏠 생각이 없습니다. 우리는 단지 각하가 우리를 이끌고 일본과 대항하기를 요청할 뿐입니다." 

 

감금된 장개석을 대면한 장학량은 이것은 결코 쿠테타가 아니며 단지 "병간"(사심없이 충언을 위해 군대를 동원했을 뿐이라는 중국 특유의 표현)일 뿐다라며 장개석에게 8개항을 요구합니다.

 

1. 남경 국민당 정부를 개편하고 각당 각파의 인사를 참여하게 할 것 

2. 내전을 중지하고 무장항일정책을 채택할 것

3. 상해 항일구국회의 지도자를 즉각 석방할 것

4. 전국의 정치범을 석방할 것

5. 집회, 결사 등 모든 자유를 보장할 것

6. 국민의 애국적 조직활동과 정치적 자유권을 보장할 것

7. 손문의 유지를 실천할 것

8. 구국회의를 소집할 것 

 

파라독스한 게임 "HOI2"에서 중국 국민당으로 하면 나오는 "서안사건" 이벤트

 

그러나 장개석은 차라리 "날 죽여라"라면서 일언지하에 거부합니다. 제29군 사령관 송철원, 한복구를 비롯한 화북군벌들과 동북, 서북군 장교들은 모두 장개석을 처형하자고 주장했고, 산서군벌 염석산과 풍옥상은 사태를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광서군벌 이종인, 사천군벌 류상도 장개석 처형을 지지했습니다. 

  

남경정부도 둘로 나누어져 하응흠, 대계도, 왕정위 등은 장개석이 어찌되건 무시하고 무조건 토벌을 주장합니다. 장개석의 처인 송미령과 매형 송자문 등은 장개석 구출이 우선이라고 주장하죠. 장개석으로서는 와이프와 처가를 제외하고는 정적들은 물론 최측근들한테도 외면당하여 목숨이 간당간당한 입장이었습니다. 다들 장개석 죽고나서 그 자리를 자기가 차지할 것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장학량은 연안의 중공에도 급전을 날려 협조를 요청했는데, 중공측에서도 이 사건은 그야말로 뒷통수를 후려갈기는 기습이었습니다. 당내 급진파들은 그동안 쌓이고 쌓였던 장개석에 대한 원한을 되살리며 인민재판에 올려 처형하자고 하지만, 모택동은 냉철하게 아직은 장개석이 필요하다며 우선 주은래를 서안으로 보내 상황을 알아보게 하고 모스크바의 스탈린에게 보고한후 그 결과를 기다립니다. 

 

이에 스탈린은 다음과 같이 판단합니다. 장개석이 죽으면 중국은 분열될 것이고 국민당내 No.2이자 대표적인 친일파인 왕정위가 정권을 잡아서 일본의 괴뢰가 된다면 소련만 좋을 것없다, 따라서 장개석은 살리자 라고 말입니다. 이렇게 스탈린이 장개석의 석방과 평화적 해결을 지시하자 주은래는 장개석과 단독회담을 가진후 다음을 요구합니다. 

 

1. 국민당 정부의 개편, 친일파 숙청, 항일세력 영입

2. 토공정책 중지

3. 연합구국회의 소집과 항일구국노선의 결정

4. 우방국과의 항일연합전선의 형성

5. 섬서의 중앙군은 밖으로 철수하고 서북 각성은 장학량, 양호성이 통치

 

그러나 여기에도 장개석은 찬반은 얘기하지 않고 "노력해보겠다"고만 합니다. 담판은 결렬되기 일보직전이었으나, 송미령이 도착하여 장개석을 설득함에 따라 결국 양측은 합의하게 됩니다. 이 합의는 공식 문서 없이 이른바 장개석의 "나를 믿으라"라는 말 한마디로 결정되었고 그 세부적 내용은 장개석의 체면을 고려하여 일절 공개하지 않기로 합니다. 그리고 장개석은 장학량, 양호성 두 사람을 대동한채 12월 26일 남경으로 돌아옴으로서 서안사변은 더 큰 피를 보지 않고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서안사변 다음날 장학량이 "병간"했다고 알리는 당시 서안일보.

※ 사진출처 : http://www.tnngo.com/History/12/12/Xian_Incident.html 

 

장학량은 왜 그 시점에서 이런 무모한 쿠테타를 일으켰는가.  

만주사변에 이어 열하사변에서도 관동군에게 무력하게 패퇴한 장학량은 대부분의 지반을 잃은데다 정치 생명 자체가 위태로와 집니다. 한때 만주와 화북을 지배하고 장개석 다음의 막강한 세력을 자랑했던 그가 이제는 몰락의 위기에 직면한 것이었죠. 장개석과 회담후 그는 결국 하야를 선언하고 "아편중독을 치료하기 위해"라는 명분으로 유럽으로 건너갑니다. 그는 1년간 유럽을 떠돌면서 독일, 이탈리아를 방문했고 다시 귀국한 후에는 중국도 장개석을 중심으로 이런 파시즘적인 국가가 되어야 한다라고 주장하며 장개석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사유학회"라는 팬클럽까지 조직합니다.  

 

당시 그의 처지로서는 장개석의 바지저고리라도 붙잡고 늘어져야 할 판이었으나 장개석은 그런 그를 냉혹하게 외면합니다. 더이상 이용가치가 없다고 본 것이죠. 여기다 관동군이 열하를 넘어 화북을 야금야금 먹어들어가면서 장학량의 얼마 안남은 지반마저 더욱 축소되자 양자의 갈등은 더욱 심화되죠. 그리고 한창 모택동이 2만5천리의 고난의 행군을 하고 있던 1935년 여름 장학량을 "서북초비부사령관"으로 임명해 섬서성의 서안으로 보내버립니다. 그기서 공산당을 무찌르고 명예를 회복하든지, 말든지 알아서 하라는 것이었죠. 

 

이에 따라 동북군의 잔여병력 15만여명을 이끌고 서안으로 이동한 장학량은 당초에는 실추된 명예를 되찾기 위해 총력을 다해 선제공격에 나섭니다. 그러나 우회전술과 지형지물을 능숙히 활용한 공산군의 반격으로 공격군은 그야말로 아작이 납니다. 노산과 직라진 두차례의 전투에서 2개 사단이 전멸하고(109사단, 110사단) 2명의 사단장이 전사, 1명은 포로가 되었습니다. 이런 막대한 피해를 입었음에도 장개석은 "자신을 실망시켰다"라며 원조와 보급까지 중단시킵니다. 이때문에 동북군은 생계조차 해결하기 어려울 만큼 비참한 지경에 몰립니다. 이러다보니 장학량은 공산군과 싸우다가는 공멸한다고 판단하고 제17로군 사령관 양호성과 의논하여 공산군과 잠정적으로 비밀리에 휴전합니다. 

 

이것을 눈치챈 장개석이 12월 4일 서안으로 직접 날라와 이들을 닥달하며 "한달내로 공산비적들을 무찌르던가, 아니면 우리가 직접 나설테니 니들은 남쪽의 복건성으로 가라"라고 최후 통첩을 합니다. 장학량에게 이 것은 어느 쪽을 택하건 파멸이었습니다. 그의 능력으로는 모택동을 이길 수도 없을뿐더러 그렇다고 아무 기반도 없는 복건성으로 가라는 것은 그곳에서 굶어죽으라는 얘기였죠. 사면초가에 몰린 장학량은 결국 쿠테타를 결심하였고 장개석을 급습하게 된 것이었습니다. 물론 그로서는 치밀하고 신속하게 장개석을 체포하는데까지는 성공했으나 그 뒤에 뭘 어떻게 하겠다거나 내가 그 놈 자리를 대신 하겠다,같은 원대한 계획이나 추진력은 없었습니다. 그가 결코 범용한 인물은 아니지만 그 정도의 리더쉽과 카리스마는 가지지는 못했다는 것이죠.(아마 산전수전 겪은 아버지 장작림이었다면 그런 시시한 "병간"따위가 아니라 정말 그렇게 했을지도 모릅니다.) 따라서 단지 장개석의 선처를 바랄 뿐이었죠. 

 

메리 크리스마스날 풀려난 장개석이 서안비행장에서 남경행 비행기를 탈때 장학량에게 자신과 동행할 필요가 없다고 말했으나 장학량은 "자신이 직접 모시겠다"라며 따라붙습니다. 남경에 도착하자말자 장학량은 체포되어 군사재판에서 10년형을 받았으나 바로 장개석이 군사위원장의 명의로 사면합니다. 그러나 이는 여론을 고려한 연극이었을뿐 자신에게 평생 다시 없을 굴욕을 준 장학량을 조금도 용서할 마음이 없었던 장개석은 그를 평생 연금하고 감시합니다. 장학량은 이후 어떤 지위나 역할도 맡지 못한채 무려 54년간 가택연금 생활을 해야 했고 대만이 민주화되고 그가 92살이 된 1990년 6월에 와서야 연금이 해제되어 하와이로 건너가 여생을 마칩니다. 철저하게 보복을 받은 셈이죠. 

 

하와이에서의 한컷. 장학량은 여기서 11년을 더 살고 2001년 103살의 나이로 죽었으니 어쨌든 천수는 누린 격이죠. 장개석에게 그토록 구박을 받았음에도 참으로 질긴 목숨인듯. 그의 인생은 하도 파란만장하여 중국 근현대사 그 자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장학량은 결코 항일투사는 아니었습니다. 단지 쿠테타의 명분으로 당시 항일 여론에 편승했을 뿐이었고 물론 공산주의와도 전혀 거리가 멀었습니다. 그는 전형적인 군벌이었으며, 그럼에도 모택동의 공산군과 손을 잡았고 또 서안사변을 일으킨 것은 오로지 자신의 정치 생명과 기반을 유지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로서는 자신의 지나친 야심이 불러온 댓가가 얼마나 컸는지, 또 만주사변 당시 일본군에게 저항하지 않고 물러섰던 것이 그야말로 후회막급이었을 것입니다. 이제 궁지에 몰리자 자신의 사활을 걸고 도박을 했으나 결과적으로 실패한 셈이었습니다.  

 

같이 쿠테타를 일으킨 양호성 역시 해외를 떠돌다 국공내전 말기에 와서 살해당합니다. 수장을 잃은 동북군과 제17로군은 와해되어 일부는 공산군에, 일부는 중앙군에 편입되었고, 비적이 되거나 만주군으로 들어가 서로 적이 되어 총부리를 겨누게 되는 운명이 됩니다. 

 

흔히 중국 근대사에서 서안사변의 의미를 아주 높이 부여하는 것이 일반적인 평가입니다. "장학량의 호소와 국내의 항일여론에 못이긴 장개석이 비로소 항일을 결심하게 되었다"는 식으로 기술하고 있죠. 그러나 이는 지극히 일방적인 주장일뿐입니다. 왜냐하면 서안사변이 없었어도 일본이 군국주의를 버리지 않는한 37년 7월에 노구교사변은 일어났을 것이며 전면전의 확대는 전적으로 일본의 결정에 의한 것이지 중국의 의지와는 상관없는 것이었습니다. 장개석은 이미 이전부터 북평-천진은 물러설 수 없는 선이며 일본이 이 선을 넘어 본격적으로 침략한다면 더이상 물러설 수 없다고 판단하고 있었습니다.  

 

오히려 서안사변의 최대 수혜자는 모택동의 공산군이었습니다. 그들은 풍요로운 화남에서 쫓겨나 척박한 섬서성의 산간오지에 고립됩니다. 장개석은 독일식으로 무장하여 제5차 초공전보다 훨씬 강력해진 전력으로 최후의 일격을 먹일 계획이었습니다. 그들에게 서안사변은 그야말로 "할렐루야"일 수 밖에 없었습니다. 서안사변으로 당장 국공합작이 공식적으로 이루어지지는 않았지만 초공전은 사실상 중단됩니다. 이후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정식으로 "제2차 국공합작"이 이루어져 공산군은 형식상 정부군에 편입되었으나 실제로는 독자적인 지휘권을 가지고 한동안은 어떤 간섭도 받지 않은채 마음껏 세력 회복과 포교 활동에 나섬으로서 급격하게 세력이 확대됩니다. 물론 장학량의 원래 의도는 그것이 아니었지만 결과적으로는 그들을 사지에서 살려낸 것이 되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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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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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명일 | 작성시간 13.07.22 메이지헌법 만들때 군의 통수권을 천황직속으로 안하고 수상이 행사하게 했으면 좀 덜했을려나?
  • 작성자강가에서 | 작성시간 13.07.23 젠장 장개석이 중국을 통일했다면 우리가 분단되는 일도 없지 않았을까요?
  • 답댓글 작성자푸른 장미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3.07.23 그럴 확률이 높죠
  • 답댓글 작성자자유주의자 | 작성시간 13.09.17 저도 이점에 대해 생각해 본적이 있는데 분단은 결국 소련 참전의 대가로서 소련에게 주어진 것이고... 다만 6.25전쟁은 확실히 회피할 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해 봅니다... 중국이 공산화 되지 않은 시점에서 한반도의 무력 공산화는 불가능한 시나리오기 때문이죠... 그럼 부카니스탄도 현재의 일가 독재체제로 발전하지 않았을 가능성도 존재하지만...
  • 작성자2Pac | 작성시간 13.07.23 장개석 통수! 제거하려면 확실히 제거하든지 아니면 자기 사람으로 만들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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