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개석 총통 친위대의 모습
그야말로 일대 결전이었던 상해전투는 중국군의 대참패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서안에서 풀려난 장개석은 모처럼 큰 맘 먹고 그간 아까두었던 최정예부대를 비롯한 중앙군 대부분을 투입해 쪽수로 밀어붙였지만 그 결과는 실로 참담하였죠. 근 80만이상의 대군을 동원해 3개월간의 전투에서 30만이상의 사상자를 내었고 10년이상 심혈을 기울여 만들어두었던 정예군과 장비 대다수를 잃었습니다.
11월 9일 상해에서 전면 총퇴각 명령이 내려집니다.약 40만에 달하는 짱개대군단이 머리위로 일본기의 폭탄세례를 받으며 정신없이 도주합니다.
원래 계획은 설령 상해전투에서 패하더라도 상해-남경 사이에 설치된 수백개의 콘크리트 토치카 진지(이른바 "장개석 라인")에서 적을 저지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독전대의 기관총조차도 이미 "우리는 안돼~~" 물결을 막을 도리는 없었고 장개석 라인에 배치된 병력도 분위기에 휩쓸려 함께 도주하는 판국이었습니다. 토치카에 남은 것은 발목에 쇠고랑을 채운 불쌍한 짱개 소년들뿐이었죠.
한편, 이겼다고는 하지만 일본군의 피해도 4만이상이라는 예상을 완전히 뛰어넘는 것이었고 그동안 들어간 물자, 인적자원의 손실은 일본도 큰 부담이었습니다. 더구나 갈수록 악화되어가는 소련에 대한 두려움은 일본이 중국전선에만 신경쓸 수가 없도록 하고 있었습니다. 스탈린의 붉은 군대가 만주로 밀고 들어온다면 무대포 관동군이라도 이길 수 있을 리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중국 요지를 점령해 나가고는 있다지만 그만큼 병력은 자꾸 분산되었고 중국군의 게릴라전술에 병참은 위협당하고 소부대는 포위 섬멸당했으며 점령했다고 생각한 마을은 어느 사이 중국군에게 다시 탈환당해 또 병력을 급파해 재점령해야 하는, "지옥의 묵시록"의 미군꼴이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동경 정부와 대본영, 황실 모두 "이쯤에서 적당히 먹고 떨어지자"라는 분위기였고 이번 승리를 이용해 우월한 입장에서 정전교섭을 하기를 원했습니다.
교섭의 역할은 일본, 중국 양측에게 신뢰를 받고 있던 독일에게 의뢰되었습니다. 30년대 당시 한창 콧수염 총통이 설치던 독일은 일본에게도 맹방이었지만 중국에게도 주요 군사원조국이자 맹방이기도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 역할은 독일 재중대사인 트라우만에게 떨어졌습니다.
일본의 요구안(트라우만 안)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①내몽고에 자치정부를 수립한다.
②화북과 상해의 비무장지대를 대폭 확장한다. 국민정부는 화북 전역에 대해 행정권을 가질 것이며 그 행정관은 친일적 인물로서 임명한다.
③배일운동을 중지하도록 한다.
④중일 양국이 공동으로 공산당에 대처한다.
⑤일본 엔에 대한 관세율을 인하한다.
⑥중국에 있어서의 외국의 권리를 인정한다.
12월 2일 트라우만은 장개석을 만나 일본측 안을 전달하였습니다. 하응흠, 백숭희, 당생지, 고축동등 최고 참모들을 비롯해 장개석은 이 안에 수락할 의지를 보였습니다. 백숭희는 "만일 일본이 요구하는 조건이 이것뿐이라면 우리들은 무엇 때문에 여태까지 싸웠단 말인가?" 라는 말로 일본측의 속셈을 의심하였으나 트라우만과 일본측은 "이이상의 요구는 없을 것"이라며 자신있게 보장하였습니다.
협정안은 12월 6일 수락되어 주일 독일 대사를 통해 동경정부로 전달되었습니다. 그러나 일본측의 대답은 없었습니다. 백숭희의 우려대로 원숭이들의 마음은 뭔가 갈대와 같았던 것입니다.
현지군은 현지대로 불만이 높앗습니다. 소련을 의식한 동경에서 "자숙" 명령이 내려왔지만 승리로 도취된 현지군은 동경의 명령과 관계없이 조금만 더, 조금만 더 라는 식으로 멋대로 자꾸자꾸 전선을 넓혀나가고 있었습니다.
중지나방면군 사령관 마쓰이대장은 3개월간의 혈전으로 큰 피해를 입은 상해파견군을 일단 재정비 한 연휴에 남경 공격에 나설 계획이었습니다만 항주만 상륙이래 별다른 전투를 겪지 못해 혈기왕성했던 제 10군은 명령도 없이 즉각적인 남경 추격을 개시하였습니다.
동경에서도 육군 참모차장 오오다중장은 남경공략은 하지 않는다, 라는 입장이었고 작전부장 시타무라소장이 남경공략을 강력히 주장하고 있었습니다. 대체적으로 참모총장을 비롯한 군 최고 수뇌부가 신중한 입장이었던 것에 반해 정작 실무 과장 클래스들중에 시타무라소장에 동조하는 강경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또 해군은 해군대로, 상해전은 어디까지나 중국군에게 포위당했던 "상해특별육전대"를 구하는 것에 그 목적이 있었지 중국 대륙의 전투는 육군의 것으로 그들의 관심거리는 아니었습니다. 따라서 중국에서의 육전의 확전에 대해서도 "니들 멋대로 해라"라는 식이었고, 그것을 이른바 "해군 먼로주의"라 부르는 자도 있었습니다.
대본영은 강력하게 자중할 것으로 명령하고 마쓰이대장도 정지를 명령하였고 대신 진격 한계선을 최초의 소주-가흥 선에서 무석-호주까지 연장해 주었습니다.(요만큼만 먹고 떨어져~~라고)
그럼에도 명령을 정면으로 무시했던 제 10군에 대해 당연히 건방진 짓에 대한 본때를 보여 주어야 할 대본영은 본때는 고사하고 "소부대단위의 추격은 상관없다" 라는 식으로 못 본 셈 처주었습니다.
군벌연합체로 이름난 장개석의 국민당군이었지만, "황군"의 내부사정도 만만치 않아 파벌대립은 극에 달하고 암만 자기 상관이라도 같은 파가 아니면 "개X"취급도 아니었습니다. 육군과 해군의 대립은 말할 것도 없었죠. 중장, 대장급 원로들은 중좌, 대좌급 눈치보느라 정신없고. 괜히 강직한 척하다가는 총리, 황족이라도 일개 소위의 칼부림에 목이 달아날 판이었습니다. "황군"은 콩가루 군대인가?
기존 방침을 바꾸어 천황의 "남경공략" 재가가 떨어진 것은 12월 1일이었습니다. 결국 바보된 것은 그것도 모른채 혼자서 열나게 뛰어다니던 트라우만뿐이었죠.
재가가 떨어지자 상해파견군과 제 10군 총 30만 대군이 남경을 향해 경쟁적으로 내다르기 시작했습니다. 그중에 상해와 항주의 주둔병력, 잔적소탕부대, 도중의 마을을 점령하고 그기에 병력을 또 배치하여 실제 남경전투에 투입되는 것은 20만정도였습니다.
상해 파견군(제 3, 제 9, 제 11, 제 13, 제 16사단 제 101 지대, 제 5 야전중포여단)이 북쪽에서, 제 10군(제 6, 제 18, 제 114사단 및 쿠사나기 지대, 제 6 야전중포여단)이 남쪽에서 남경으로 포위해 갔습니다.
총 8개 사단, 2개 여단, 2개 지대 20만에 달하는 대부대였습니다.
중국군도 두개로 나누어, 태호 북쪽 주랑에 좌군(제 15군, 제 19군, 제 21군)이 방어하고, 우군(제 8군, 제 10군, 제 23군)이 태호, 난징, 항주의 방어를 맡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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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13일, 일본군은 남북 두 방향으로 동시에 공격을 개시하고, 그날 밤, 중국 좌익군은 복산(福山), 쑤저우 방위선 진지까지 후퇴하고, 양측은 창서우(常熟), 싱룽(興隆), 복산에서 격전이 벌어졌습니다.
11월 19일, 상숙(창서우,常熟), 쑤저우(蘇州), 자싱(嘉興)이 연달아 함락되고, 우푸(吳福)전선이 무너져, 중국 군대는 시청시앤(錫澄線)까지 후퇴합니다.
11월 20일, 전황이 점점 악화되자 남경에 있던 국민당 장개석 정부는 중경으로의 천도를 선포하고, 남경수비사령부를 설립하게 됩니다.
장개석은 막료회의를 열어 최고 막료들과 남경 수비에 대한 논의를 합니다. 백숭희를 비롯한 막료들 대부분은 "남경의 수비는 어렵다"라는 것을 이유로 남경 포기가 대세였습니다만 당생지가 강경히 남경방어를 주장합니다. 장개석은 숙고끝에 "남경의 무조건 포기는 국제 여론에도 국내 여론에도 좋지 않다"라며 남경 결사 방어를 공포합니다. 그리고 가장 강력히 주장했던 당생지에게 그 임무를 내리죠. 니가 하
자고 했으니 니가 해라라는 것. 그것이 11월 24일입니다.
여러 잔존부대를 모아 남경방어에 나서게 되는데 총 13개 사단에 정규군, 헌병, 병참부대, 경찰, 비정규군, 노무자까지 합해 15만명정도였습니다. 하지만 상해-항주전투에서 후퇴해온 잔존부대들을 긁어모은 것으로 장비도 빈약했고 병력도 사단 정원에 훨씬 미치지 못했습니다. 이런 부대로 항공지원을 받으며 중포와 전차까지 보유한 일본군 정예부대에 맡선다는 것은 처음부터 무리였습니다. 그러나 사기만은 충천했고 "최후의 일인까지" 결사항전을 외치고 있었습니다.
부대배치는 제 72군의 제 88사단이 수서문, 중화문, 무정문, 우화대의 수비를 맡고, 제 78군 제 36사단이 현무문, 홍산, 막부산, 읍강문의 수비를 맡았습니다. 본대가 광화문, 중산문, 태평문, 자금산, 기린문, 천보성의 수비를 맡고, 제 71군 제 87사단이 통제문, 광화문 일대를, 헌병대가 정회문, 한중문, 청량산을 맡았습니다.
거기에 상해방면에서 철수해온 병력과 증원된 부대가 또 방어진지를 구축하여 제 74군이 우수산에서 순화까지, 제 66군, 제 83군이 탕산 동쪽과 서쪽 양측에 배치되었습니다.
당생지는 원래 호남군벌출신으로 염석산등과 대립하다가 장개석의 북벌과정에 참여한 인물입니다. 국민당의 요직을 거치다가 남경전투에 패한후 좀 조용히 지내다가 국공내전때 배신하여 공산당쪽에 넘어가 호남성 부성장까지 지낸 인물입니다. 국민당에서도 입지적인 "생존력"을 지닌 인물이라 할 수 있겠죠.
결전이 다가오자 당생지는 전장병들에게 "남경사수"를 명령하고 무단 후퇴자는 참수하겠다고 엄포합니다. 그리고 남경성 뒤로 흐르는 양자강 선착장에는 독전대의 기관총이 배치되었습니다.
12월 4일부터 일본전투기와 폭격기 편대가 5대씩 무리를 지어 남경을 폭격하기 시작합니다.
12월 6일 일본군은 서하산, 탕산, 순화, 말릉까지 진격하여 남경 전면을 포위합니다.
12월 7일 마쓰이 중지나 방면군 사령관의 이름으로 중국군에게 무조건 항복을 권유합니다. 물론 사생결단의 각오를 다진 중국군은 일언지하에 거부하였습니다.
12월 9일 오전을 기해 일본군이 총공격을 개시합니다. 제 16사단이 기린문을 공격해 점령하고 제 9사단이 효령문을 공격하였습니다. 그리고 남경비행장을 점령한후 광화문, 통제문, 중화문으로 진격합니다. 제 6사단이 우수산을 점령, 주력은 중화문으로 진격합니다.
12월 10일 재차 남경 수비대에 투항을 권고한후 정오 12시부터 남경시 총공격에 나섭니다. 제 제 6, 제 114사단이 중화문을, 제 9사단이 광화문을, 제 16사단이 중산문과 태평문에서 성내로 돌입하려 하였습니다. 중국군의 저항도 맹렬하여 돌격하는 일본군에게 집중포격을 퍼붓습니다. 중국군포병은 영국, 미국, 독일, 스위스제에 일본제까지 뒤섞여 사용되고 있었으나 밤낮을 가리지 않고 포탄이 쏟아부었습니다.
장개석 직속으로 상해에서 활약했던 제 87, 88사단의 혈투도 대단하여 여단장들이 줄줄이 전사하지만 일본군으로서도 그야말로 일진일퇴의 대 혈전이었습니다.
<남경성으로 진입하는 일본군 전차대>
사실 일본군의 형편도 그리 좋은 편은 아닌 것이, 남경시밖 10리이내의 민가는 모조리 불태워져 식량 한톨 없는 상태에서 그동안 보급도 무시한채 미친듯이 달려온 일본군은 며칠째 쫄쫄 굶어가며 싸우는 상태였습니다.
12일까지 전투는 외곽 성벽을 사이에 두고 양측의 피로 물들뿐 전투는 고착화됩니다. 그러나 제 9사단 36연대 공병대가 광화문의 일부를 폭파시키고 1개 대대가 성벽을 돌파하는데 성공합니다. 이것을 본 종군기자가 "남경공략"이라고 속보를 보내어 NHK가 그대로 방송하여 일본 거리는 그야말로 축제분위기가 되었습니다만 실제로는 그때까지도 남경은 대혈전중이었고 간신히 광화문을 돌파한 부대조차도 좀처럼 성내로 진입하지 못하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12일 저녁이 되면서 남경 최대 요새였던 자금산이 2일간 유례없는 공방전끝에 함락되고 요지들이 줄줄이 떨어지자 광화문, 중화문, 중산문을 돌파해 돌입한 일본군과 중국 수비대간의 시가전이 벌어집니다. 일본 제 3함대가 우룽산 강 수면에 도착하고 쿠니사키지대가 하화현을 공격하여 포구를 향해 돌진합니다.
이미 11일에 장개석으로부터 남경포기 명령이 내려지고 남경함락이 목전에 다다르자 당생지는 수비대에게 "본대는 포위망을 뚫고, 나머지는 양자강을 도강해 퇴각하라"라고 명령합니다. 그리고 12일 밤에 참모들과 함께 제일 먼저 탈출해 버립니다.
그러나 상세한 후퇴계획이 각 부대에 제대로 전달되지도 않고 또 "무단 후퇴 금지"의 명령도 그대로 유효한 상태에서 "남경 사수"를 외치던 지휘관부터 도주해 버리자 그때까지 잘 싸우고 있던 장병들이 동요하고 사기가 급격히 떨어집니다.
13일 중국군이 후퇴하는 것을 감지한 일본군이 성내로 돌입합니다. 오후 4시. 중산문을 통해 들어온 제 16사단이 국민 정부 청사에 점거하고 일장기를 내 걸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남경함락의 순간이었습니다.
"D"가 사단, "iB"는 보병여단, "i"는 독립보병연대.
중국군의 조직적인 저항이 붕괴되고 잔존부대의 일부는 "비무장"으로 선포되어 있던 외국인 거주지로 도망가고 대다수는 선착장으로 밀려듭니다. 수십만에 달하는 민간인들과 중국병들에 의해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가 되지만 그 위로 끝까지 명령에 충실한 독전대의 기관총이 불을 뿜습니다. 뒤로는 일본군이 밀려오고 포탄이 피난민들 위로 떨어집니다. 그들은 포탄과 기관총세례를 받으면서 양자강을 뗏목이나 또는 헤엄쳐서라도 탈출하려 하지만 그 앞에는 이미 우회해 온 일본군 기관총이 배치되어 건너오는 중국인 무리들에게 불을 뿜었습니다. 양자강은 수만의 시체들로 붉게 물들게 됩니다.
탈출에 성공하는 것은 15만명중 겨우 2만정도였고 나머지는 학살에 미친 일본군들에게 끝까지 쫓겨다니며 사살당하였습니다. 일본군은 심지어 협정을 어기고 외국인 거주지를 포위해 중국군 부상자들을 일일히 색출해 처형하였습니다. 거대한 남경대학살의 일부였죠.
<남경성에서의 일본군 전승 퍼레이드>
[출처] [중일전쟁사] 남경방위전. 그 처절했던 순간.|작성자 욱이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