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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일전쟁사]노구교 사변에 대해

작성자푸른 장미|작성시간13.09.21|조회수529 목록 댓글 0

1937년 7월 7일 이른바 노구교(루거우차오) 사건(중국에서는 7.7사변이라고 함)으로 중일전쟁이 시작되었죠.

 

1931년 만주국 수립후 일본은 계속해서 북중국일대로 세력을 확장해 나갑니다. 이어 열하사변이 발발하자 화북일대까지 위기에 쳐했지만 장개석은 유화정책으로 일관했고 1933년 당고협정을 맺어 북경일대를 비무장지대로 선포하게 됩니다. 송철원의 제 29군은 북경이남으로 철수했죠.

 

그러나 이런 장개석의 유화정책은 관동군을 우쭐하게 만들었을뿐이었습니다. 당시 일본정부는 침략행동으로 파탄직전인 재정을 생각해 더이상의 확전을 어떻게든 막고 관동군을 제어하려 했지만 수상이 암살당하는 등 도저히 막나가는 군부를 막을 수가 없었습니다.

 

당시 북경 서남쪽 8km에 위치한 노구교 주변에 주둔한 관동군산하 북지나방면군 소속 병사 한명이 실종되자 일본군 지휘관은 과민반응을 보이며 중국군의 음모라고 단정, 중국군 진영으로 일본군이 들어가 수색할 것을 요청했지만 중국군은 자체 수색해 보겠다고 거절했죠. 흥분한 일본군은 당장 중국군에 대해 공격을 개시했고 곧바로 노구교를 점령했습니다. 웃기는 것은 그 실종되었다던 병사도 바로 돌아왔다는거죠. 그럼에도 현지 관동군은 중국군의 사과와 모든 책임 배상, 송철원의 제 29군의 무조건 철수를 요구했죠.

 

당시 만주일대에 주둔한 일본군은 겨우 1개 사단 5천여명에 불과했고 노구교 사건 당일 전투에 참가한 것은 겨우 1개 중대 130여명에 불과했습니다. 중국군은 제29군만 해도 5만이 넘었으나 확전을 우려해 소극적으로 대응했습니다.

 

그러나 서안사건이후 장개석은 항일 일변도로 노선을 바꾸고 행정부와 군부내 친일파를 제거, 반일 영미파로 바꾸는 등 강경한 입장을 보이고 있었습니다. 같은 시기 일본은 상해에서도 비슷한 음모, 이른바 "홍교공항사건"을 벌였습니다. 일본군 병사가 실종되었다고 수색허가를 요청했지만 중국군이 바로 실종병사를 찾아다 주었습니다. 이번에는 일본군 장교가 무단으로 중국군의 군용비행장인 홍교공항으로 들어갈려다가 경비병에게 살해되자 이를 빌미로 육전대를 증파하죠.

 

고노에 내각은 강경한 입장으로 북중국에 3개 사단을 파견하고 상해에도 해군 육전대 5천명을 파견했습니다. 이른바 송호회전이 시작되었습니다. 중국군은 상해에 중앙군을 비롯해 광서, 광동, 저멀리 사천과 운남군까지 85개사단 약 80만명이 투입되어 일대 대전투가 벌어졌습니다. 일본군은 악전고투끝에 상해에 총 6개사단 20만명을 투입했고 약 4만명의 사상자를 내며 간신히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화북전선에서는 송철원군을 비롯해 이종인, 백숭희의 중앙군과 염석산의 산서군을 중심으로 장학량의 동북군과 양호성의 서북군(제17로군)이 중앙군에 편입되어 일본군과 맞섭니다.  그러나 압도적인 전력차이로 연패를 당해 북경, 천진이 함락되어 서주까지 위협받게 되죠. 그러나 태아장전투에서 이종인, 백숭희군이 일본군을 격파했고 서주에서도 이종인, 탕은백군이 일본군에게 막대한 피해를 주었습니다. 평형관전투에서도 산서군을 중심으로 중앙군과 팔로군 약 10만명이 일본군 제 5사단의 공격을 격퇴했죠.(평형관전투가 마치 팔로군 혼자 싸운양 알려져 있지만 임표의 제 115사단은 단지 일본군의 소규모 수송부대를 습격해 약 100여명을 사살했을뿐입니다. 그의 전투는 평형관전투의 단지 일부였으며 정면에서 가장 치열하게 싸운 것은 산서군 제 84사단이었습니다.)

 

1937년부터 1939년까지 중국군의 항전은 처절했으며 엄청난 희생을 치루었지만 일본군에게도 막대한 댓가를 치루게 했습니다. 중국 대륙에서 일본군은 약 40만명이 전사했으며 이는 태평양전쟁 전체 전사자의 1/3을 차지합니다.

 

중국군의 항전은 영웅적이었지만 전술적으로는 지휘관들의 무능함과 파벌대립으로 상당히 문제가 많았습니다. 숫적으로는 매우 우세했지만, 대부분 지휘관들이 전술적으로 무능하고 서로간의 신뢰부족으로 병력을 집중하지 않고 협력하지 않아 화력이 열세해도 인해전술로 밀어붙이면 간단히 이길 수 있음에도 소대단위로 적진의 기관총 정면에 돌격시킴으로서 각개격파당했습니다. 특히 일본군은 독가스와 공중 폭격을 무차별로 감행했고 중국군은 이에 속수무책이었습니다.

 

그러나 중일전쟁에서 국민당군은 소장이상의 고위장성만 115명(206명이라는 말도 있음)이 전사했습니다. 그들의 무능함은 어쨌든 용기와 투지만큼은 평가절하할 부분은 아니라는 것이죠. 반면 항일투쟁을 스스로 자랑하는 공산측의 고위장성은 단 2명만이 전사했을뿐입니다.

 

공산측의 전술적 역량 자체는 매우 뛰어났고 임표, 주덕, 팽덕회등 고위 지휘관들은 국민당군이 가지지 못한 군사적 융통성과 유연함을 가지고 있었지만, 항상 정면 공격을 회피하고 전투보다는 정치구호를 우선시 하였습니다. 이런 점이 장개석이 공산측의 속셈과 전쟁의지를 의심케 했고 국공합작을 깨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른바 환남사변(국민당군과 신4군간 전투)은 국민당쪽은 공산군이 먼저 공격했다고 주장하고, 공산군은 그 반대를 주장하고 있죠. 전쟁전에는 항상 항일투쟁을 주장했던 것이 공산측이었지만 막상 항일전쟁에 소극적이었던 것은 공산군이었고 적극적이었던 것은 국민당군이었습니다.

 

1940년이 되면 국민당군은 너무 큰 타격을 받아 거의 힘이 빠져 전쟁 수행 능력을 거의 상실하게 됩니다. 특히 일본은 중국을 말려죽이려고 복건-광동일대 해안가와 남령-월남간 공로가 폐쇄하여 경제, 군사적 원조루트가 거의 차단되어 버려 심각한 인플레에 직면하죠.  

 

서안사변후 장개석이 마지못해 전쟁을 시작했는지, 기왕 이렇게 된거 운명이라 생각하고 한판 붙어본건지 모르지만, 중국입장에서는 결과적으로 가장 안 좋은 시기에 개전을 택한 것이었습니다.

차라리 만주사변이나 열하사변때 강경하게 나갔다면 이 시기의 관동군의 전력은 대단치 않았기에(고작 5~6천명) 설령 이기더라도 큰 희생을 치루어야 했을 것입니다. 중국의 항전의지를 조기에 깨달았다면 관동군도 쉽사리 막나갈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만주와 열하에서 중국의 소극적인 저항이 관동군을 우쭐하게 함으로서 점점 브레이크 고장난 기차마냥 마구 질주하게 되었죠.

 

반대로 만약 차라리 좀 더 늦게 개전했다면(2~3년정도) 장개석은 공산군을 완전히 괴멸시켰을 것이고, 군사 경제적으로 상당부분 개혁되었을 것입니다. 민주주의보다 장개석 일인 독재와 전체주의 성향이 더 강해졌겠지만, 영-미-소의 경제적 원조속에서 보다 일사분란하게 전쟁을 수행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사실 일본도 통일 중국이 더 강력해지기전에 장악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았습니다.

 

1937년은 참으로 애매한 시기로, 중국은 여전히 분열되어 있었고 군사적으로는 막 개혁에 착수했을 때 였습니다. 중원대전과 양광사변, 공산군과의 전쟁으로 재정은 피폐했죠. 중국 지도자중 가장 강경한 정치가조차도 일본에게 이길 수는 없을 것이라고 공공연히 얘기하고 있었습니다.

실상 처음부터 일본에게 군사적으로 패배할 것을 각오하고 시작한 것이었습니다. 대신 외교적으로 일본을 고립시켜 종국에 승리를 거두겠다라는 생각을 했죠. 그러나, 그 시절의 영프는 그다지 중국의 투쟁에 관심이 없었고 당장 발등에 떨어진 불 끄는게 급선무였습니다. 오히려 일본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중국을 경제적으로 압박했습니다. 미국은 민간차원에서 중국을 도우려는 움직임이 있었지만, 정부차원에서는 남의 집 불구경이었죠. 진주만에서 호되게 당한후에야 그제서 자기 일이 되었습니다.

 

정식으로 중국이 대일선전포고를 한 것은 진주만 기습후인 1941년 12월 9일이었습니다. 미국이 일본에 선전포고를 한 후였죠.

그 전까지 중일전쟁은 전쟁이 아니라 "사변"이었습니다. 단지, 국지적인 분쟁이었지 정식 전쟁이 아니었다는 거죠.

일본 역시 중국에 선전포고하지 않았습니다.

 

이는 양측 모두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중국은 일본에 선전포고할 경우 경제적으로 완전히 고립되고, 일본내 수십만에 달하는 중국인들을 고려해야 했으며 특히 독일에서 각종 기계장비과 전략물자 수입에 큰 지장이 생기기 때문이었죠.

일본 역시 선전포교와 단교를 고민했으나, 결론은 선전포고로 인해 국제적으로 고립되고 물자 수입에 지장이 생길 것을 우려하였습니다. 이런 이유로 양측 모두 서로의 필요 때문에 중일전쟁은 선전포고가 없는 전쟁으로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미국이라는 든든한 친구를 얻은 중국은 더이상 눈치를 볼 것 없이 바로 선전포고를 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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