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미국의 마피아]미국 마피아 - 3. 뉴욕 마피아의 역사(3), 찰스 루치아노

작성자푸른 장미|작성시간13.10.29|조회수3,117 목록 댓글 0

찰스 루치아노(원래 이름은 살바토레 루치아노, 닉네임은 럭키)18971124, 마피아의 본고장이 시실리 내륙에 있는 작은 마을인 레르카라 프리디(Lercara Friddi)에서 안토니오와 로살리 루카니아(Antonio & Rosalie Lucania) 부부의 셋째 아이,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레르카라 프리디는 인구 13,000명 정도의 유황광산 마을로, 광산 노동에 지친 안토니오 루카니아 부부는 새 삶을 찾아 1906년에 모든 식구를 거느리고 미국으로 건너와 뉴욕의 로우어 이스트사이드의 이민자 거주지에 정착했다. 그러나 이들 부부의 미국 생활도 그리 만만한 것은 아니었다.

찰스 루치아노

 

레르카라 프리디의 위치

 

루치아노 가족이 자리를 잡은 곳은 리틀 이탈리아로부터 몇 구역 떨어진 곳으로 유태계와 슬라브계가 많이 살고 있는 곳이었다. 루치아노는 이곳에서 같은 또래의 소년들과 어울려 다니면서 소매치기, 도둑질 등을 저지르면서 범죄자로서의 경력을 시작하였다. 체격이 큰 편은 아니었으나 머리가 좋았던 루치아노는 이탈리아인이 열세인 이곳에서 무사히 살아남기 위해서는 힘에만 의존할 것이 아니라 외교적인 능력도 필요하다는 것을 배우지 않을 수 없었다.

몇 년 후 루치아노는 당시 브루클린에서 꽤 큰 세력을 자랑하던 파이브 포인트 갱단(초대 보스가 파울로 바카렐리로 이탈리아계 갱단이다)으로부터 심부름 일을 제의받게 되었는데 이것은 갱단의 정식 멤버가 될 수도 있는 후보자가 되었다는 뜻이므로 굉장한 발전을 의미한다. 갱들은 항상 소년들 중에서 그들 조직원의 후보자감을 물색하고 있었고, 테스트를 거쳐 그들을 입단시켰던 것이다.

파이브 포인트 갱단

 

파이브 포인트 갱의 창시자 폴 켈리(본명 파올로 안토니오 바카렐리)

1916년에 루치아노는 한번 경찰에 체포된다. 헤로인을 배달하는 심부름을 하던 중 경찰의 불심검문에 걸려 체포되었던 것이다. 이때 루치아노는 다른 조직원의 이름을 대면 무죄 방면해 주겠다는 경찰 당국의 회유에 넘어가지 않고 끝까지 침묵을 지켜, 6개월간의 감옥 생활을 마치고 풀려난다. 그리고 이 건으로 루치아노는 파이브 포인트 갱단의 정식 멤버가 될 수 있었다. 시실리 출신인 그는 경찰에 입을 열지 않고 침묵을 고수하는 오멜타의 서약(The Oath of Omerta)’을 지키는 일이 몸에 습관화되어 있었던 것이다.

파이브 포인트 갱단의 정회원이 되면서 루치아노는 쟈니 토리오(Johnny Torio), 프랭크 예일(Frank Yale), 치로 테라노바(Ciro Terranova), 알 카포네(바로 그 유명한 시카고의 알 카포네말이다) 등의 동료들을 만난다. 이때는 아직 카포네가 뉴욕에서 활동을 하고 있었다. 그 무렵 루치아노는 만일의 경우, 가족들이 놀라지 않도록 이름을 원래의 살바토레 루카니아에서 찰스 루치아노로 바꾸었다.

'여우' 자니 토리오

 

프랭크 예일

 

치로 테라노바

 

알 카포네

 

그는 라이벌 갱단인 몽크 이스트맨 갱(Monk Eastman Gang, 초대 보스였던 에드워드 이스트맨의 별명을 딴 유태계 갱단)과의 수 차례 전투에서 용맹성을 나타내었고 몇 차례에 걸쳐 이스트맨 갱의 살해 혐의로 기소되었지만 번번이 증거 불충분으로 풀려났다. 19038월에 있었던 파이브 포인트 갱단과 이스트맨 갱단 사이의 전쟁은 유명한 것이었는데 그 이후로도 두 그룹 간에는 계속 잦은 충돌이 있었다. 루치아노는 여가 시간을 주로 도박으로 보내며 기소될 때에는 항상 직업을 도박사라고 진술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루치아노는 1920년 경에는 독립하여 그 자신의 갱단을 만들어 사업을 시작했다.

몽크 이스트맨 갱단

 

몽크 이스트맨 갱단의 군대식 장례

 

원래 갱들의 사업 중 가장 기본적인 것은 거리에서의 보호비 갈취라고 할 수 있다. 갈취(Racketeering)’란 그 내용을 한 마디로 설명하기는 몹시 어렵다. 다만 사전에 의하면 갈취란 위협이나 폭력 등의 불법적인 방법에 의한 부정직한 돈벌이라고 되어 있다. 기초적인 예를 들면, 거리의 작은 상점들은 건달들의 폭력으로부터 보호해주고 대신에 소정의 사례비를 받는 것이다. 이 돈을 내거나 안 내거나 하는 것은 그들의 자유이지만, 보호비를 내지 않은 상점이나 사업장은 보호비를 제대로 낸 곳보다 사고가 일어날 확률이 통계적으로 많아진다.

주차장 연합회를 예로 들어보자. 보통 주차시키는 차 한 대당 매달 1달러의 보호료를 갱들에게 내는 것이 기본인데, 이 연합회의 회원이 아닌 주차장에서는 어떤 한 달 동안에 약 1,000건의 자동차 바퀴 펑크 사고가 일어나게 된다. 따라서 각 주차장들은 서로 앞을 다투어 주차장 연합회의 회원이 되려고 한다. 그리고 이와 비슷한 일이 세탁소 연합회에서도, 청소업자 단체에서도, 수산물 시장, 청과물 시장, 푸줏간, 식료품점에서도 생길 수 있는 것이다.

초기에 루치아노는 주로 윤락가의 사업을 보호하는 일을 하였다. 루치아노에게 보호료를 상납하지 않은 업소에서는 건달들에 의해 집이 완전히 부서지고 마담과 창녀들이 뭇매를 맞아 멍투성이가 되는 일이 자주 일어났으므로 사람들은 기꺼이 루치아노에게 보호비를 가져다 바쳤다. 루치아노의 사업은 별 문제 없이 풀려나갈 수 있었으며 얼마 후 루치아노는 맨해튼 지역 윤락가의 보스가 될 수 있었다. 그런 중에서도 루치아노에게 반항하는 업주들이 몇 있기는 하였으나 그들은 소리 없이 실종되곤 하였고, 루치아노와 유사한 사업을 하고 있는 경쟁 그룹들은 차례로 루치아노에게 제거되었다.

1920년대 중반에 이르자 루치아노는 5,000군데 이상의 매춘업소를 거느리게 되었고 밀주사업에도 손을 대고 있어 1930년이 되기 전에 백만장자의 대열에 낄 수 있게 되었다. 알 카포네가 한 푼의 세금도 내지 않고 있다가 결국 감옥행을 당한 것과는 달리 루치아노는 매년 225,000달러의 수입을 신고하여 이에 해당하는 세금을 꼬박꼬박 납부하였다.

이 무렵 그는 관리들을 다루는 솜씨로 정평이 나 있던 프랭크 코스텔로, 죠 아도니스(Joe Adonis)와 교분을 가지게 되었고, 마이어 랜스키, 벤자민 시겔(닉네임은 벅시), 그리고 비토 제노베제 등을 수하로 거느리게 되어 뉴욕의 암흑가에서 무시할 수 없는 제3의 세력으로 떠오른다. 이들 그룹의 콤비 플레이는 매우 환상적인 것으로, 루치아노의 리더쉽 아래에서 프랭크 코스텔로와 죠 아도니스는 경찰 등 사법관리에게 뇌물을 뿌려 보호막을 만드는 일을 담당하였고, 벤자민 시겔과 비토 제노베제는 대화만으로는 잘 해결되지 않는 일들을 맡았으며, 마이어 랜스키는 조직의 두뇌였다. 당시 프랭크 코스텔로가 뇌물로 사용하는 돈은 1주일에 자그마치 10만 달러씩이나 되었다고 한다. 요즘 가치로 환산할 때 엄청난 돈이 아닐 수 없다.

조 아도니스

 

마이어 랜스키

 

메력적인 마피아의 전형이자 라스베거스의 창시자로 불리는 벤자민 '벅시'시걸

 

루치아노는 마세리아나 마란자노와는 달리 동료들이 시실리나 남부 이탈리아 출신이어야 한다고 고집하지 않았다. 이것만 보더라도 그의 열린 사고방식을 알 수 있다. 그는 사업에서 나오는 이윤을 가장 중시하였고, 그것을 위해서라면 마이어 랜스키나 벤자민 시겔이 유태인이라는 것도 문제가 되지 않았다. 루치아노와 랜스키, 시겔, 제노베제의 4인 연합은 그 동안 여러 차례에 걸쳐 영화의 소재가 되어 왔다. 로버트 드니로 주연의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Once upon a time in America)>, 크리스천 슬레이터가 주연한 <몹스터즈(Mobsters)> 등이 그것이다.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

 

영화 <몹스터즈>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 북마크
  • 신고 센터로 신고

댓글

댓글 리스트

[푸른 장미] 역사 .. 다른글

현재페이지 1234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