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세리아와 마란자노의 갈등이 깊어지고 있을 무렵 찰스 루치아노는 뉴욕의 다른 그룹들과 마찬가지로, 마세리아에게 상납금을 바치고 있는 마세리아의 편이었다. 루치아노는 애초에 마세리아 패밀리의 보호막 안으로 들어가면서 가지고 있던 여러 이권 중 일부를 마세리아에게 넘겨주었지만, 그 중 수입 스카치 위스키에 대한 권리만은 넘겨주지 않고 있었다. 그것은 엄청난 수익을 보장하는 사업이었기 때문에 마세리아에게 넘겨줄 수 없었던 것이다. 당시 루치아노는 스코틀랜드로부터 오리지날 위스키를 직수입하는 루트를 확립해 놓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마세리아가 최초의 약속을 어기고 이 위스키 이권까지 요구하기 시작하자 루치아노는 마란자노와의 제휴를 생각하기 시작한다. 원래 루치아노 패밀리는 마세리아에게 부하를 제공하거나 하여 마란자노와의 전쟁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지는 않고 내심 양편을 저울질하고 있었는데, 이제 마세리아 측에서 먼저 배반의 빌미를 제공한 것이다. 마침 이때 전쟁을 끝내기 위한 마지막 카운터 펀치를 준비하고 있었던 마란자노 쪽에서도 루치아노에게 회유의 손길을 뻗쳐 결국 루치아노는 마란자노와 직접 대면을 한다.
루치아노와 마란자노는 직접 만나 회담을 가졌다. 그러나 이 회담은 대등한 관계의 회담은 아니었던 것 같다. 마란자노는 루치아노에게 대환영의 뜻을 분명히 했으나 대신 한 가지 조건을 제시하였는데, 그것은 마세리아를 루치아노 자신의 손으로 죽여야만 한다는 요구였다. 그 까닭은 이 당시만 해도 보스를 직접 죽인 자는 결코 다음에 보스가 될 수 없다는 전통적인 시실리의 관습을 많은 멤버들이 신봉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루치아노 그룹의 힘을 알고 있던 마란자노가 일부러 내건 요구사항이었다.
조건이 거절되자 마란자노는 부하를 시켜 루치아노를 고문하였고, 그대로 그를 없앨 수도 있었으나 그래도 아직은 이용가치가 남아 있다고 판단하여 죽이지 않고 산 채로 돌려보냈다. 루치아노의 얼굴에서 보이는 좌우의 불균형은 바로 이 고문으로 생긴 것이다. 루치아노가 마란자노의 손아귀로부터 무사히 살아 돌아온 것은 거의 믿기 어려운 행운이었으므로 마이어 랜스키는 그에게 ‘럭키’라는 별명을 붙여주었다.(루치아노의 행운에 대한 또 하나의 예가 있다. 1929년 10월 루치아노는 허드슨 강의 부두에서 헤로인을 부리는 일을 감독하고 있던 중 잭 다이아몬드 갱단에 의해서 납치되어 피투성이가 되도록 얻어맞고 수 차례 얼굴과 목, 등판을 칼과 얼음 송곳에 찔린 후 강에 버려졌는데, 기적적으로 경찰에 발견되어 병원으로 이송돼 겨우 목숨을 건진다. 병원과 경찰서에서 루치아노는 어떻게 된 일인지 전혀 모르겠다는 진술로 일관하였다. 잭 다이아몬드는 이 사건이 있은 지 약 2년 후인 1931년 12월 18일에 뉴욕 주 알바니에 있는 자기 소유의 밀주집에서 2명의 갱이 쏜 총에 맞아 죽고 만다.)
잭 다이아몬드
잭 다이아몬드가 살해된 장소인 집
마세리아를 직접 처치하는 것은 거부하였지만 루치아노는 마란자노와 연합하기로 합의를 보았고, 이를 지키기 위해서 우선 마세리아의 주변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한 전략을 구사하기로 하여, 먼저 브롱크스에 근거지를 두고 활동하며 마세리아의 편으로 돌아선 가에타노 레이나(Gaetano Reina)를 제거하였다. 이때의 히트맨은 비토 제노베제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가에타노 레이나가 가족과 찍은 사진
비토 제노베제
다음에는 마세리아의 경호원이자 마세리아 패밀리의 언더보스였던 피터 모렐로(Peter Morello, 닉네임은 The Clutch Hand)를 제거하였는데 이것은 죠 아도니스의 오른팔이었던 알버트 아나스타샤가 집행한 작전이었다. 마세리아는 계속 루치아노의 배반을 눈치채지 못하였다. 그는 심지어 피터 모렐로의 히트가 시카고 쪽에서 꾸민 짓이라는 루치아노가 흘린 소문을 믿고 부하를 시카고로 보내 용의자로 지목한 죠셉 아이엘로(Joseph Alello)를 해치우기도 하였다.
피터 모렐로
앨버트 아나스타샤
조셉 아이엘로
마침내 때가 왔다고 판단한 마란자노는 루치아노와 최종회담을 가졌고 그 얼마 후인 1931년 4월 15일, 루치아노는 마세리아를 코니 아일랜드에 있는 이탈리아 레스토랑 ‘스카르파토(Scarpato's Restaurant)'로 초청하였다. 오랜 심복 부하였던 루치아노의 제의에 마세리아는 별 의심 없이 동의를 했다. 두 사람은 풀 코스의 정식과 와인으로 약 두 시간에 걸친 정찬을 들었고 식사 후에는 루치아노의 제의로 카드 게임도 하였다. 한 시간 가량 카드 게임을 하여 시간이 꽤 늦어지게 되자 홀 안은 그들 이외에 다른 손님이 하나도 없게 되었는데 이때 루치아노는 양해를 구한 후 화장실에 가기 위하여 자리를 떴다.
루치아노가 화장실에 간 후 4명의 남자가 레스토랑 안으로 들어왔고, 그들은 불문곡직 권총을 빼들어 마세리아를 향해 쏘아, 20발 이상의 총알을 맞은 마세리아는 그 자리에서 절명하였다. 이때의 히트맨은 죠 아도니스, 벤자민 시겔, 비토 제노베제, 알버트 아나스타샤 등 네 사람이었으며, 알버트 아나스타샤가 마지막으로 마세리아의 머리에 권총을 갖대 대고 확인 사살을 하였다. 후에 경찰로부터 조사를 받을 때 루치아노는 “그때 나는 화장실에서 소변을 보고 있었다. 나의 소변은 항상 오래 나온다.”라고 진술했다고 한다. 루치아노는 무혐의로 판정받았다.
살해된 마세리아. 불행을 뜻하는 스페이드의 에이스를 쥐고 있다.
마세리아의 장례식
카스텔라마레세 전쟁은 이렇게 끝이 났고, 뉴욕의 지하에는 수년 만에 평화가 찾아왔다. 마란자노는 최초로 뉴욕의 암흑가를 통일한 보스가 되었으며, 따라서 전 미국의 보스로 추대되었다. 마란자노는 보스 중의 보스, 즉 이탈리아 어로 카포 디 카피(Capo di Capi)의 영광을 차지하게 된 것이다. 그는 브롱크스의 그랜드 콘코스(Grand Concourse)에서 회합을 소집하여 그의 지위를 분명히 하는 대관식과 같은 의식을 열었다.
브롱크스의 그랜드 콘코스
여기에는 이탈리아-시실리 갱들만이 참석하도록 허락되었는데 전국의 각 지역으로부터 약 400명 가까운 갱들이 모여서 카포 디 카피, 살바토레 마란자노에게 충성을 맹세하였으며, 그 표시로 현금이 든 봉투를 준비하여 이날 하루 동안에만 약 100만 달러 이상의 돈이 거두어졌다고 한다. 마란자노는 높은 단상 한가운데 앉아 있었고, 전쟁 종결의 일등 공신인 루치아노는 그보다는 한 칸 아래이지만 다른 사람들보다는 약간 높은 위치에 앉았다.
마란자노는 이 자리에서 자기 자신을 공식적으로 카포 디 카피로 선언하였고, 그들의 조직을 ‘라 코사 노스트라(La Cosa Nostra, LCN)라고 처음 명명하였다. 굳이 우리 말로 번역하자면 ’우리들의 것, 우리들의 임무‘라는 뜻이다. 그리고 조직의 서열을 만들어 공표하였는데 이때 그가 만든 위계질서가 바로 보스에서 언더보스, 카포데치나(카포레짐), 그리고 솔다티로 이어지는 서열이다. 마란자노는 이와 같은 조직표를 로마 시대의 군대 서열로부터 따온 것이다. 시저를 존경하던 그였으므로 이해가 가는 일이다. 이때는 아직 콘실리에리, 즉 고문의 위치는 생기기 전이다.
그리고 마란자노는 형제들에게 라 코사 노스트라의 다섯 가지 규칙을 발표하였다. 그 첫째가 바로 침묵의 법으로 시실리의 오랜 전통인 오멜타의 맹세를 다시 한번 강조한 것이다. 코사 노스트라의 멤버는 그들의 일에 대하여 외부 인사에게는 물론, 자기의 친구와 가족을 포함한 그 누구에게도 말을 해서는 안 된다는 규칙이었다. 심지어는 코사 노스트라라는 단어를 입 밖에 내는 것조차도 금지하였다.
이 법을 어기는 사람에게 내려지는 벌은 재판 없는 즉각 처형이었다. 코사 노스트라라는 말이 처음으로 당국의 공식적인 자리에서 오르내린 것은 이로부터 30년이나 더 지난 1963년이 되어서였다. 그때 조직의 비밀을 상원 조직범죄 조사위원회에 누설한 사람은 보나노 패밀리의 솔다티였던 사람이다. 그의 진술 내용은 후에 영화로 제작되어지기도 한다.
두 번째 규칙은 마란자노가 정한 조직의 위계질서가 엄정한 것이 되어야 한다는 복종의 법이다. 솔다티는 카포데치나에게, 카포데치나는 언더보스에게, 그리고 언더보스는 보스에게 절대 복종해야 하며 윗사람의 명령에 대해 반론을 제기하거나, 명령을 내리는 까닭을 물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아랫사람은 어떤 문제가 생겼을 때 직접 그것을 그의 보스에게 가져가서는 안 되고 일단 그의 직속상관에게 먼저 보고를 해야 한다고 하였다.
세 번째는 어떤 일이 있더라도 같은 코사 노스트라의 회원을 죽여서는 안 된다는 규칙이다. 회원 간에 갈등이 생기는 일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을 보스에게 알려 위로부터의 처분을 기다려야지 절대 자기 멋대로 해결하려 들면 안 된다는 것이다. 이 법을 어기는 자 또한 재판 없는 처형의 벌을 받게 된다.
그리고 네 번째는 과거의 일을 잊으라는 명령으로, 마란자노는 계속된 연설에서 과거는 이제 완전히 끝났으며 더 이상 복수가 계속되어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그의 말을 그대로 옮기면 누군가가 너의 친형제를 죽였다 할지라도 그 범인을 찾으려 하지 말 것이며, 복수를 용납지 않겠다는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다섯 번째는 동료가 하는 일을 방해하지 말고 동료의 부인을 넘보지 말라는 것이다. 이렇게 다섯 가지의 계명은 이때로부터 꽤나 긴 세월이 흐른 오늘날까지도 대체로 잘 지켜지고 있는 편이다.
다시 마란자노는 뉴욕을 5개 지역으로 나누어 할당하였는데, 같은 카스텔라마레 출신이며 전쟁기간 동안 자신의 오른팔이었던 죠셉 보나노에게 자신의 브루클린 영역을 배당하였고 스스로는 카포가 되었다. 또 브루클린의 다른 가문의 보스로 역시 동향인 죠셉 프로파치를 임명하였으며 그 언더보스로 죠셉 말리오코(Joseph Magliocco, 닉네임은 ‘뚱보’)를 임명하였다.
보나노 패밀리의 두목 '조 바나나' 조셉 보나노
조셉 프로파치
조셉 말리오코
그리고 브루클린 부두 지역을 포함한 또 다른 브루클린 가문의 보스로 빈센트 망가노와 언더보스로 알버트 아나스타샤를 임명하였고, 맨해튼과 뉴저지의 일부 지역을 토마스 갈리아노(Thomas Gagliano)에게 배당하며 그 언더보스로 토마스 루케제(Thomas Lucchese, 닉네임은 ‘세 손가락 브라운’)를 지명하였다. 마지막으로 가장 큰 수훈을 세운 루치아노에게는 마세리아가 다스리던 지역 모두를 배당하며 그 언더보스로 비토 제노베제를 임명하였다.
빈센트 망가노
토마스 갈리아노
법정에서 선서하는 토마스 루케제
또한 뉴욕 주의 서부에 있는 버팔로 시는 스테파노 마가디노(Stefano Magaddino)를, 오하이오 주의 클리블랜드 시는 프랭크 밀라노(Frank Milano)를 각각 보스로 임명하였고, 시카고는 알 카포네의 기득권을 인정하였다. 버팔로의 스테파노 마가디노는 카스텔라마레 출신이며 마란자노의 언더보스인 죠셉 보나노에게 아저씨 뻘이 되는 가까운 친척으로 오래 전부터 마란자노, 보나노와 사업을 같이 해온 사이였다.
시카고의 알 카포네는 전쟁 기간 내내 마세리아에게 호의를 보였지만 시카고에서 그의 권위가 워낙 막강했으므로 그를 그대로 인정해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때의 시카고는 거의 뉴욕의 영향권 밖에 있었기 때문에 마란자노가 시카고에 대해 간섭할 수 있는 여지는 별로 없었다는 것이 더 진실에 가깝다.
스테파노 마가디노
프랭크 밀라노
스테파노 마가디노(왼쪽 끝)와 조셉 보나노(그 오른쪽)
마란자노가 인정한 뉴욕의 5대 조직은 이름만 바뀌어 마리오 푸조의 소설 <대부>에 그대로 등장하기도 하는데, 이상이 바로 오늘날까지도 이어져 내려오는 뉴욕의 5대 마피아 가문의 모체이다. 마란자노와 죠셉 보나노의 가문은 오늘날에도 보나노 패밀리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으며, 토마스 갈리아노와 언더보스 토마스 루케제의 가문은 루케제 패밀리로, 찰스 루치아노와 언더보스 비토 제노베제의 가문은 제노베제 패밀리로 각각 그 언더보스의 이름을 따서 현재 통용되고 있다.
가문들의 관할구역과 관리사업은 세월이 지나면서 약간씩 변하였고, 주도권을 쥔 가문도 이쪽에서 저쪽으로, 그리고 또 다른 쪽으로 계속 변천하여 갔지만, 이 5대 패밀리는 오늘날까지도 존재하고 있으며 지금 이 시간에도 변함없이 활동하고 있다. 각 가문들의 이름이 달라지게 된 연유를 비롯한 그 후의 이야기는 뒤에서 또 살펴보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