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소식 봄노래(10)
중세 끝자락에 펼쳐진 봄날의 덧없는 사랑,
'카를 오르프'의 <카르미나 부라나>
길 양쪽은 붉은 장미꽃이며 재스 및 꽃으로 덮여 있어 꽃향기 그윽한 그늘로 어디로나 걸어갈 수 있었습니다. 잔디밭 중앙에는 훌륭하게 조각된 대리석 분수가 물을 뿜어 올리고 있었습니다. 그 풍부한 물은 천연수인지 인공수인지 알 수 없었읍니다만, 대리석 중심의 기둥 위에 서 있는 조상(彫像)에서 하늘에 이를까 여겨질 만큼 높이 치솟고 있었습니다. (중략) 이 정원의 그 아름다운 양식과 수목과 분수를 보고, 일곱 명의 부인들과 세 명의 청년들은 여간 기뻐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 낙원을 만들 수 있다면, 이와 같은 모양 이외는 있을 수 없고, 생각할 수도 없고, 이 이상 아무것도 보탤 것이 없다고 생각할 정도였습니다.
그들은 이것저것 구경하면서 주위를 거닌 끝에, 분수 주위에 식탁을 갖다 놓게 하고 여섯 곡 정도 깐초네(Canzone)를 부르며 춤을 춘 다음, 여왕이 바라는 대로 식사를 시작했습니다. 여유있게 마련된 훌륭한 시중으로 맛있는 고급 요리를 먹고 충분히 쉰 다음, 그들은 일어서서 다시 악기를 울리며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었습니다. 그리고 낮잠을 잘 시간이 되었다고 여왕이 생각할 때까지 놀았습니다. 개중에는 연인끼리 낮잠을 자러 간 사람도 있었고, 정원의 아름다움에 끌려 침실로 가지 않은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남은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이 자고 있는 동안, 줄곧 사랑의 이야기를 하기도 하고, 장기를 두기도 하고, 주사위 놀이를 하기도 하면서 놀았습니다.
'복카치오' 저, <데카메론> 중 셋째 날, 서문에서-
독일 뮌헨의 바이에른 주립도서관에는 남부독일 바바리아 지방의 베네딕트 수도원에서 발견된 13세기 말의 수사본(手寫本)이 소장되어 있다. 1803년에 우연히 발견된 이 중세의 시가집(詩歌集), <카르미나 부라나(Carmina Burana)>는 대략 11세기에서 12세기에 쓰여진 수백 여 편의 시가들을 수록한 필사본인데, 텍스트는 라틴어나 중세 독일어로 되어 있으며, 그 중의 상당수는 교회와 도덕에 대한 풍자를 비롯하여 세속 생활과 남녀간의 사랑이나 술 도박 등을 소재로 하고 있는데, 어떤 것은 외설적이고 또 어떤 작품은 슬픔이 어려 있다. 기독교적인 노래가 있는가 하면, 이교도적인 가사도 눈에 뜨인다. 그리고 이 모든 시에는 인간적이고 정감어린 성정(性情)이 가득 배어 있다.
교회의 권위가 최고조에 달했던 중세 유럽에서 이토록 풍자적이고 적나라한 세속 텍스트가 창작될 수 있었다는 것 때문에 이 시가집은 발견 당시뿐만 아니라 오늘날까지도 큰 관심을 불러 일으키고 있다. 그러나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모든 시대에는 '언더그라운드'적 요소가 다분히 그 문화의 저변을 흐르고 있기 때문에 마치 불교 이데올로기를 가졌던 고려의 시가(詩歌)에 '만전춘'이나 '쌍화점' 같은 노골적인 연애표현이 가능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중세 유럽의 사회 또한 세속적인 노래들이 많이 불려지고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 가사집의 주요 저자들은 유랑학자나 교회직을 이탈한 수도사들, 혹은 신학교에서 쫓겨난 학생들이었다. 이들은 우리 고려조의 <청산별곡> 저자처럼 당대의 지식인이면서 낙오자였으며, 현실비판적이면서 염세적 경향의 소유자였는데, 가톨릭의 거룩한 얼굴 속에 가려진 이중적인 모습을 풍자하고 조소하며 일생을 술과 방황으로 소일하였다. 이들의 술과 도박, 그리고 사랑의 노래에는 이와 같은 시대 상황이 묻어 있다.
가사집이 발견된 지 백여 년 후에 독일의 저명한 음악가이자 음악교육자였던 '카를 오르프(Carl Orff:1895-1982)'가 이 노래들을 토대로 하여 전대미문의 합창모음곡을 세상에 내어놓았다. 당시 가장 권위있는 교육학자였던 그가 세속적인 사랑이야기를 그린 문학작품을 가사로 선택한 것에 대해 비난하는 사람들이 많았으며, 더욱이 1939년 초연 당시의 파격적인 악곡구성과 리듬양식으로 인해 또 다시 큰 반향을 일으켰었다. '카를 오르프'는 전형적인 남부 독일 태생으로, 중심지에서 소외돠고 동떨어진 남부지역 인사였던 탓에 보다 낙천적이고 골계(滑稽)적인 기질을 지니고 있었다. 그런 점에서 바이에른-뮌헨 출신인 그가 중세의 동향(同鄕) 지식인이 지은 시가집을 바탕으로 걸작을 만들어 내었다는 것은 개연성이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카를 오르프'는 원래의 시가집을 변형하고 재창작하였다. 그래서 1847년에 '요제프 슈멜러'가 간추린 <카르미나 부라나> 원본 가사집과 차이가 있다. 합창단이 딸린 세속 칸타타 형태를 띠고 있는 이 곡의 주제는 인간을 창조하고 파괴하는 세상의 지배자인 '운명의 여신'에 대한 찬사이다. 주제 악곡은 곡의 첫 부분과 끝 부분에 똑같은 모습으로 나타나 '운명의 수레바퀴'가 끊임없이 돌면서 행운과 불행을 가져다주는 것을 상징하였다. 이 운명의 수레바퀴는 남녀가 어울려 즐기는 인생의 세 국면 - 싱그러운 자연(제1부:봄의 노래, 목장에서), 먹고 마시기(제2부:술집에서), 그리고 사랑의 뜰(제3부:사랑 이야기)을 통하여 굴러간다.
그는 이 악곡을 '세계극(世界劇:Welt-Theatre)'이라고 칭하였는데, 고대 연극의 세 가지 기본요소인 음악과 언어, 동작(특히 무용적인 요소)의 세 가지 기본적인 요소를 완전하게 합일시키는 것을 목표로 하였고, 그 결과로 이루어진 악극(樂劇)만이 세계를 투영(投影) 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즉 자연 그대로의 본능에 가까운 충동으로 존재하는, 단순한 리듬의 반복과 낭송조의 선율이 음악의 본질과 가장 부합된다고 본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작곡의 방향을 고대의 원시음악과 중세의 '그레고리안 찬트(Gregorian Chants)'에서 찾았다. 그 결과로 탄생된 이 작품은 선율과 리듬이 극도로 단순화되어 반복 재현되고 있다. 도처에 불협화음이 쏟아지고 있으나 항상 강한 박자 위치에 협화음을 배치하고 있기 때문에 선명하고 에너지 넘치는 울림을 느끼게 하고 있으며, 중세의 교회 선법을 채용한 선율은 매우 독특하면서도 자연스러운 모습으로 반복되며 리듬부와 합일되고 있다. 또한 합창 선율은 중세 교회에서 자주 사용되는 교창(交唱:Antiphon/미사전례시 회중이 둘로 나뉘어 서로 번갈아가며 기도문을 낭송하는 형식)의 형식을 따르며 고풍스러우면서도 강렬한 이미지를 낳게 하고 있다. 이로 말미암아 악곡 전체는 신선하고 충동적이며 활력에 넘치고 있으며, 고대의 원시음악에서 중세 단성(單聲)음악의 선법(旋法), 현대의 전위(前衛)음악에까지 아우르는, 시대를 뛰어넘는 보편적이고 근원적인 새로운 음악적 시도가 엿보이고 있다.
티에리 푀즈 작, <PSycho Tropical>
작곡가는 아울러 가사의 억양을 그대로 살리면서 리듬의 표현력과 절묘하게 맞추어지게 하였다. 또한 여러 타악기를 적절하게 사용하고, 때로는 피아노와 성악부까지 타악적으로 연주하게 하여 리듬이 시종일관 주도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악곡 대부분을 합창을 중심으로 구성한 그는, 합창단의 규모나 유형을 각 부분별로 다양하고 융통성있게 결합시켜 풍부하고 새로운 효과를 나타내게 하였으며, 의상을 갖추어 입고 발레 동작으로 연출되도록 처음부터 의도되어 종합예술로서 무대음악의 신기원을 이룩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은 이유로 인해 이 세속 칸타타는 오늘날에 가장 유명한 무대 합창음악이 되었으며, 세계 도처에서 꾸준히 상연되고 있다. 특히 가장 유명한 첫 곡 '운명의 여신'은 영화나 TV드라마, 혹은 CF의 배경음악으로 즐겨 채용되고 있다.
제 1 부는 '봄의 노래(Primo Vere)'와 '목장에서(Uf dem Anger)'로 구분되어 있으며, 대체로 전자는 라틴어 가사, 후자는 중세 독일어 가사로 불리어 진다. 각기 3,4,5곡과 6,7,8,9,10곡으로 되어 있으며, '목장에서'의 제 6곡은 순수 기악곡(무용)이며, 제 9곡의 전반부 또한 무용음악으로 짜여져 있다. 이 여러 곡들 중에서 세 번째 곡, '아름다운 봄의 얼굴'을 소개한다.
제 3 곡 아름다운 봄의 얼굴(Veris leta facies)
Veris laeta facies 베리스 레따 빠치에스
Florae fusus gremio 훌로래 후수스 그레미오
Cytharizat cantico 치따리자뜨 깐띠꼬 |
봄은 그 아름다운 얼굴을
태양의 신 '포에부스'는 아!-
아름다운 '필로메나(밤꾀꼬리)'는 아!- |
플루트, 오보에, 타악기가 기묘한 새의 지저귐 같은 소리를 세 번 울리며 자연이 깨어남을 묘사한다. 제 1부 '봄'의 첫 노래인 <아름다운 봄의 얼굴>은 반복조의 가사와 리듬으로 봄의 환희와 설레임을 점층적으로 강조하고 있다. 알토와 베이스가 두 번씩 노래한 후 소프라노와 테너가 이에 응답한다. 합창의 하모니에 호른과 트럼본, 피아노(첼레스타)의 지속적인 화음이 더해진다. 단순한 반복과 약동하는 리듬 속에서 분위기는 신비롭고 마술적이며 인상깊게 흘러간다. 합창의 세 절 모두 탄식처럼 '아'라는 부드러운 감탄사로 끝난다. 가사는 중세 기독교 문화를 조롱하듯 그리스 신화에 맞추어 구성되어 있다.
중세 독일의 수도원에서 찾아낸 세속 텍스트는 당시 기독교 사회가 자유분방하고 세속적인 축제와 유희로 가득차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이 신선하고 약동적인 독일 민중의 춤과 노래를 통해 일상의 타성 속에 갇혀 있는 봄의 에너지를 꺼내 보는 것도 좋을 듯 하다.
Evelyn Mandac, soprano
Stanley Kolk, tenor
Sherrill Milnes, baritone
Seiji Ozawa, 지휘
Boston Symphony Orchestra
New England Conservatory Chorus
Children's Chorus of the New England Conserva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