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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과학 사상사(박상래,유스북,2005) 중에서

작성자나도사랑을했으면|작성시간06.08.18|조회수38 목록 댓글 0

길조로 생각한 것도 적지 않다. 신라의 기록에서 특히 많이 보이는 가화(嘉禾)와 서지(瑞芝), 고구려의 기록에서 많이 나타나는 백록(白鹿)과 백작(白鵲) 따위의 흰빛 동물이 그런 예이다. 농업이 기본산업이었던 신라에서는 곡식에 얽힌 상서가 많은 반면 사냥이 중요한 활동이었던 고구려에서는 짐승이나 새에 관한 상서가 많다는 점이다.

좀더 분명하게 일식에 대한 사상이 드러나기 시작한 것은 고려 초기부터다. 고려의 경우 삼국시대와 달리 처음 1세기 동안에는 일식 기록이 없지만, 다음 4세기 동안에는 일식기록이 아주 고르게 분포되어 있다. <<고려사>>에는모두 138회의 일식 기록이 남아 있는데, 그 첫 기록은 1012년(현종 3)의 것이다. 일식 기록 가운데 설명이 붙은 긴 기록은 1047(문종 1)에나 발견된다. 이미 일식 기록이 14회나 나온 다음의 일이다.

두 나라에서 함께 기록된 경우가 3건 있는데, 124년과 186년의 일식은 고구려와 신라에서, 그리고 165년의 일식은 고구려와 백제에서 함께 기록되었다.

1434년 유럽에서는 세 개의 태영을 보았다는 보고가 있었고, 이를 큰 변고가 일어날 징후로 여겼다. 그리고 1453년 콘스탄티노플의 함락으로 그런 예상이 실현된 것으로 당시 사람들은 생각하였다.

그 시대는 바로 신돈이 자기 나름의 개혁정치를 내세워 철권을 휘두르고 있을 때였다. 당연히 공민왕은 임금으로서의 권위를 잃고 있었을 것이다.

중국과 한국에서는 오래전부터 태양 흑점을 관측하였던 것과 달리 서양 사람들은 17세기까지 흑점의 실재를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 하늘은 물론 태양도 완전한 세계에 속한다고 믿었던 그리스 이래의 서양의 천문관으로서는 '완전한' 하늘의 태양에 어떤 변화가 있다는 것은 믿을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한국사의 기록에서는 흑점을 까마귀로 표현한 경우를 찾지 못했다.

조선 시대로 들어오면서 흑점의 의미가 상당히 줄어들었음을 나타내는 것으로 보인다. 즉 고려시대에 비해 조선시대에 기록의 숫자가 줄었다는 것은 그에 대한 반응 역시 달라졌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필자의 조사에 따르면 실록에 기록된 햇무리의 통계 중 1520년 한 해동안의 햇무리는 모두 67회로, 세종 초년인 1419년의 70회에 이어 두 번째로 많다. 이는 조광조의 죽음을 햇무리와 연계하려는 마음이 당대 또는 그 직후 많은 역사가들로 하여금 햇무리 기록에 더 주목하게 만든 것으로 보인다. 조광조 사건을 임금의 총기가 간신들에 의해 흐려져 일어난 것으로 보았다는 뜻이다.

왕과 왕비 또는 대신의 죽음을 월식이 예보한 것으로 해석한 경우도 여럿 있다.

월식이 대단히 심각한 자연현상으로 여겨졌던 것 같은 징조는 별로 없다. 이는 해가 임금을 상징하였기에 중요하게 여겨졌고, 따라서 일식을 비롯한 여러 가지 일변이 크게 주목받고 논란이 되었던 것과 달리, 달은 왕비의 상징이어서 조금 경시되었기 때문이다.

백제에서는 249년(고이왕 16) 정월 갑오일에 역시 태백이 달을 침범하였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백제의 기록 가운데 두 번째 것은 아주 흥미로운 기사가 아닐 수 없다. 249년 정월 갑오일에 있었다고 날짜의 간지가 분명하게 밝혀져 있기 때문이다. <<삼국사기>>의 초기 기록은 일식 기록 이외에는 어느 것에도 간지가 밝혀져 있지 않은데, 유독 이 기사만이 분명하게 날짜가 밝혀져 있는 것이다. 어쩌면 이 기사에 나타난 날짜는 이때쯤부터 백제의 천문관측이 고구려나 신라에 앞서 아주 확고하게 시행되고 있었음을 증명해 주는 것일지도 모른다.

(오위합취(五緯合聚) 기록은) <<삼국사기>>에는 149년 고구려 기록과 790년 신라 기록이 있을 뿐이며, 여기에 <<증보문헌비고>>의 보충된 150년 고구려의 기록 하나가 더 있을 따름이다.

백제 초고왕 40년(205) 7월과 고이왕 16년(249) 정월에 금성이 달을 범하였다는 기록인데, 이 가운데 첫 기록은 신라의 첫 기록과 완전 일치한다는 사실이다. 즉 205년 7월 금성이 달을 범하였다는 기록이 <<삼국사기>> <신라본기>와 <백제본기>에 모두 기록되어 있다. 물론 이외에도 두 나라 사이에 겹치는 기록이 없다. 기원 205년이면 아직 삼국 어느 나라에서도 기록을 제대로 남기기 전이라고 생각된다. 따라서 이 기록은 뒷날 역사가들에 의해 확인되는 과정에서 약간 수정됐을 가능성이 크다.

조선왕조가 개국한 1392년부터 1527년가지를 필자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실록에 기록되어 있는 '달이 행성을 범한' 기록은 모두 38회뿐이다. 고려시대의 기록보다 빈도에서 그리 많지 않은 것이다.

조선시대로 들어가면 행성이 서로 접근하는 천변의 기록은 아주 크게 줄어든다. 필자의 조사에 의하면 초기 100여 년 동안 이 천변의 기록은 13회 뿐이다. 그것도 세종 때까지에 관측된 기록이 실록에서 발견될 뿐, 세종 이후 중종 때까지는 하나도 조사되지 않았다.

조선시대의 태백주현(태백이 낮에 보이는)은 실록에 아주 많이 기록되어 있다. 필자가 조사한 바로는 1392년 개국 초부터 1524년(중종 19)까지 약 130년 동안 적어도 1231회나 된다. 이들의 분포 상황을 보면 단연 중종 때에 가장 많다. 중종의 경우 재위 39년 가운데 처음 19년 동안에 자그마치 596회나 기록되어 있다. 전체 기록의 절반이 중종 재위 전반기에 속한다는 것은 분명히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세종의 경우는 재위 32년 사이에 66회밖에 기록되어 있지 않다. 중종이 연평균 31회 이상인 데 비해 세종은 연평균 2회밖에 되지 않는 것이다.

치우기란 꼬리 뒷부분이 마치 깃발처럼 구부러졌다고 해서 그런 이름이 붙어졌다.

영국의 과학자 에드먼드 핼리가 약 77년의 주기로 같은 혜성이 다시 나타난다는 사실을 17세기 말에 발견한 후,...

중국은 이미 기원전 240년 세계 최초로 핼리혜성을 관측하였다.

 

-혜성 출현 년도-

 

218. 5. 중국,그리스, 고구려 217년(산상왕 21) 10월, 성패우동북(星悖于東北) <<삼국사기>>

530. 9. 중국,유럽(?)

684. 9. 중국, 독일, 신라(신문왕 3) 10월 또는 연말 /일본 685년(천무 13) 7월 임신 

760. 5. 중국, 유럽

837. 2. 중국, 일본, 유럽

912. 7. 중국, 일본

989. 9. 중국, 일본, 고려 989년(성종 8) 9월 갑오

1066. 3. 고려, 중국, 일본, 유럽

1145. 4. 고려, 중국, 일본, 유럽

1222. 10. 고려, 중국, 일본, 유럽

1301. 10. 고려, 중국, 일본, 아이슬란드

1378. 11. 고려, 중국, 일본

1456. 6. 조선, 중국, 일본, 이탈리아(?)

1531. 8. 조선, 중국, 일본, 유럽

1607. 10. 조선, 중국, 일본, 유럽

1682. 9. 조선, 중국, 일본, 유럽

1759. 3. 조선, 중국, 일본, 유럽

1835. 11. 조선, 중국, 일본, 유럽

1910. 4. 세계 각국

1986. 2. 세계 각국

 

85년 4월 백제 기루왕 9년 4월 을사일에 객성이 자미에 들었다. 신라 파사왕 6년 4월 객성이 자미에 들었다.

객성이 현대 천문학에서 다루고 있는 신성(nova)과 초신성(super-nova)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우주의 완전성을 굳게 믿고 있던 서양에서는 하늘에서의 중대한 변화라 할 수 있는 새 별의 등장을 인정하지 않고 있었다. 그래서 서양 천문학에서는 신성이나 초신성의 분명한 첫 기록을 1572년 티코 브라헤의 발견으로 잡는다.

허블은 우주팽창론을 정식으로 발표하기 1년 전에 그 증거 중 하나로 1054년 중국에서 관찰하였던 초신성이 바로 지금의 '게 성운(Grab Nebula)'에 해당한다는 의견을 제시하였다.  

1572년(선조 5) 10월의 객성 기록.

율곡 이이가 기록해 남긴 이 객성은 중국뿐 아니라 서양에도 기록이 남아 있는데, 유명한 덴마크의 천문학자 브라헤가 발견한 초신성이 바로 그것이다.

1604년(선조 37) 9월 무진일의 객성은 중국에도 기록된 것이다. 또 서양에서도 관찰되어 '케플러의 신성'으로 불린다.

조선시대로 들어오면서 유성 기록은 눈에 띄게 줄어든다.... 유성에 대한 인식이 조선 초기 이래 많이 합리화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예종은 '고려의 역대 임금 가운데 도교 신앙이 가장 돈독하였으며, 도교가 종교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해주었고, 나아가서는 도교로 하여금 국가의 복조福祚를 기축하는 확고한 지위를 차지하게 만들었다'고 평가될 정도로 도교에 깊이 빠져 있었다. 그는 송의 도교를 수용하여 한국사 최초의 본격적 도겨 사원인 복원궁을 짓고, 1120년(예종 15) 6월에는 여기에서 최초의 초제를 올린 것으로 <<고려사>>는 전하고 있다.

108년의 가뭄이 고구려와 백제에서 함께 기록되었고, 506년의 가뭄이 백제와 신라에서 함께 기록되어 남아 있을 뿐, 그밖의 가뭄 기록은 삼국이 모두 다르다

세종 때에도 여러 차례 실시되었다. 필자의 조사에 의하면 적어도 1427년(세종 9)까지는 원단 기우제를 올린 것으로 보인다.

1002년(목종 5) 6월 탐라에서 산의 네 곳에서 구멍이 뚫려 붉은 물이 닷새 동안 솟구쳐 나오더니 멈추었다. 그것이 모두 기와돌이 되었다. 1007년(목종 10) 탐라의 바다에서 상서로운 산이 솟아 나왔다.

이익의 글 가운데에는 화완포(火浣布)에 대한 글도 길게 남아 있다. 화안포란 석면(石綿)을 가리킨다....화안포는 중국에서는이미 전국시대에 알려져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열자(列子)'에 이미 그 대강이 소개되어 있음을 보아 이를 지작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 언제 처음으로 석면으로 만든 제품이 알려졌는지는 아직 밝혀져 있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어쩌면 이수광 시기(1563-1621)에 처음 알려지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1170년(의종 24)에는 2회 기록이 남아 있다. 그해 2월 갑신일에 남극에 낭성(시리우스,Sirius-큰개자리에서 가장 밝은 청백색의 별)이 나타나자...

<<고려사절요>>를 쓴 역사가들은 고려 후기에 워나라에 복속했던 100년간의 역사를 오히려 백성에게 100년 동안 평화를 누리게 했다 하여 칭찬하고 있다. 또 조선의 제3대 임금 태종은 세자를 중국의 황녀와 결혼 시키면 좋겠다는 의사를 밝힌 일이 있고, 실제로 고관들은 중국 사신을 통해 이를 추진하기도했다. 이에 대해 당시 좌정승 하륜은 "만일 대국의 원조를 얻는다면 동성(同姓)이나 이성(異姓)의 누가 감히 난을 일으키며, 난신 , 적자가 어떻게 생기겠습니까? 전조前朝 때에 원나라에서 공주를 하가(공주나 옹주가 귀족이나 신하에게로 시집감)시켜 100년 동안 내외에 근심이 없었으니, 이것은 지난날의 경험입니다"라고 말하고 있다. 이처럼 조선의 사대부 지식층은 대체로 중국에 대한 형식적 복속을 그리수치스러워한 것은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태종은 의정부의 3정승을 제쳐 놓고 6조가 직접 임금에게 정부 일을 보고하고 처리하도록 하는 이른바 6조직계제를 채택했다.

세종대에는 여러 가지 시계를 발명해 만들었는데, 그것은 농사에 필요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제사 지내는 데 긴요했음을 보여 준다.

세종이 이런 천문기구들을 만들어 이루던 것은 백성에게 좀더 정확한 시간을 알려 주려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실제적으로 제사 지내는 시각을 알기 위함이었고, 보다 폭넓게는 임금으로서의 권위와 의무를 위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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