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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일전쟁사]20세기 동아시아 최대의 전쟁, 중일전쟁사 11화 < 상해전투, 베르뎅 이래 최대의 격전 >

작성자푸른 장미|작성시간13.07.25|조회수1,903 목록 댓글 9

7월 28일부터 시작된 일본군의 공격은 당일날 이미 노구교와 완평현성을 비롯해 영정하 동쪽 전체를 장악하였고 30일에는 북평, 천진도 함락됩니다. 이어서 영정하를 도하하여 장신점까지 진격한 일본군은 서쪽으로의 추격을 일단 중지하고 본토에서 증원된 3개 사단을 비롯해 주력을 북평-천진 일대에 집결시킨후 보정으로 남하할 준비를 합니다. 이때는 아직 중국과의 전면전을 상정하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전장을 화북으로 국한시켜 이 지역의 중국군에게 결정적인 일격을 가한다면 장개석은 틀림없이 굴복하여 일본이 원하는대로 화북 5성의 분리독립을 실현시킬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었습니다. 물론 이는 이전의 경험만으로 중국군의 저항의지를 막연하게 과소평가한 일방적인 착각이었죠.  

 

이에 맞서 중국군은 평한선(북평-한구를 연결하여 중국을 남북으로 관통하는 주요철도)에 중앙군을 중심으로 약 45만명에 달하는 대규모 병력을 집결시켰고, 천진에서 철수한 송철원군의 잔존병력 1만명이 탁주를 관통하는 진포선(천진과 양자강 하류의 포구까지 연결하는 철도) 주변에 집결하여 반격의 기회를 노리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찰합이성에 제7집단군(사령관 : 부작의, 부사령관 : 유여명) 산하 산서군과 수원군 등 15개사단 및 9개 여단을 집결시켜 내몽고에서의 관동군의 남하를 저지하는 한편 평수선(북평-찰합이성-수원성을 연결하는 철도)을 따라 평진지역에서의 일본군의 측방을 위협합니다. 또 일부 병력은 찰합이성과 열하성 경계에서 만주국 국경을 돌파하여 열하로의 진입을 시도하기도 합니다. 여기에다 공군 역시 덕주-석가장을 제공권 방어라인으로 삼아 약 140여대의 항공기를 하남과 제남 등지에 전개하여 육군을 지원할 태세를 갖추는 등 매우 적극적인 항전 태세를 갖춥니다.

 

특히 탕은백의 제13군은 북평에서 철수해온 송철원군과 연합해 찰합이성과 하북성 사이의 만리장성의 관문인 팔달령을 넘어 북평 서북쪽의 전략적 요충지인 남구까지 진출하여 북평 탈환을 꾀합니다. 이곳은 북평에서 엎어지면 코닿을만큼 가까운 곳이었기에 일본군으로서는 대단한 위협이었죠. 따라서 중앙통수부는 당초 계획했던 보정 공략을 일시 중단하고 지나주둔군과 관동군에게 먼저 이들을 격퇴하여 측방의 위협을 제거할 것을 명령합니다.  

 

8월 11일 독립혼성 제11여단과 제5사단이 평수철도를 따라 남구로 진격하여 탕은백군을 공격합니다. 또한 제 5사단 일부 병력이 남구의 배후에 있는 관문인 거용관으로 우회하고 8월 14일에는 찰합이성파견병단(독립혼성 제11여단 외에 추가 증원된 관동군 3개여단 및 제2비행단으로 구성)을 편성하고 관동군 참모장 도죠 히데키중장을 병단 사령관으로 임명하여 장가구 방면으로 진격시켜 탕은백군을 양면에서 포위합니다.  

 

 

탕은백군은 양면 공격을 받는 상황에서도 험한 지형지물을 잘 활용하여 선전하여 이들의 공격을 강력하게 저지하였고 전선은 일시적으로 교착상태에 빠집니다. 이를 이용해 평한선과 진포선에 주둔한 병력의 일부를 철도를 통해 평수선 방면으로 이동시켜 남구에서 일본군을 격멸하고 북평-천진으로 진격할 계획을 수립합니다. 장개석은 위립황의 제14집단군과 유치의 제2집단군의 일부는 평한선을 따라 북평으로 북상시키는 한편, 주력부대는 평수선을 따라 북평으로 진출해 남구의 탕은백군과 협력해 북평을 남북에서 협격할 것을 명령합니다. 

 

그러나 일본군이 남구방면에 병력을 추가로 증원하여 거용관과 팔달령에 맹공을 퍼붓습니다. 8월 8일부터 시작된 전투는 2주간의 치열한 공방끝에 8월 25일 결국 거용관이 함락됨으로서 만리장성이 돌파되었고 탕은백군은 고립된채 다음날 전면 철수를 명령하여 만리장성을 넘어 찰합이성으로 후퇴합니다. 일본군은 이를 추격하여 찰합이성으로 침입하였고 하화원에서 탕은백군을 격파한 후 27일에는 장가구가 함락됩니다. 탕은백을 구원하고 일본군을 협공하기 위해 평한선을 따라 장신점으로 진출한 중앙군 3개 사단을 비롯해 위립황과 유치, 염석산의 병력은 서로간의 협조 부족과 일본군의 방어선을 돌파하지 못함으로서 작전은 실패로 돌아갔고 탕은백군은 2만6천명에 달하는 막대한 사상자를 냅니다. 여기다 부작의를 비롯한 여타 군벌 부대들은 명령을 무시한채 싸우지도 않고 무단으로 퇴각하면서 이방면의 방어선이 와해됩니다.   

 

37년 8월말까지 화북의 상황도입니다. 중국군은 단순히 수동적인 저항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북평-천진의 탈환을 위해 대규모 반격을 시도했으나 남구에서의 패배로 찰합이성은 물론 수원성과 산서성까지 침입받게 됩니다. 쌍방의 이동은 신속한 병력 기동을 위해 주로 철도 연선을 따라 작전이 진행되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지방 군벌들은 중앙군이 있을때는 나름대로 열의를 가지고 싸우지만 상황이 불리하다고 판단될때는 자신의 병력 유지를 최우선으로 하였고 중앙의 명령을 무시한채 주변의 우군이 어찌되건 독단적으로 철퇴하여 아군의 측면을 노출시켜 다함께 패주하게 만들기 일쑤였습니다. 이것이 통합작전이 불가능한 중국군의 태생적이자 가장 심각한 약점이었죠.  

 

이렇게 화북에서 격렬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와중에, 8월 13일에는 중일전쟁 최대의 격전인 제2차 상해사변(중국명 : 송호회전 또는 8.13전역)이 발발합니다. 상해를 놓고 3개월간 벌어지는 쌍방의 치열한 전투는 단일전역으로서는 1차대전 당시 베르뎅전투이래 최대의 격전이라고 불리울 정도였으며 중일전쟁은 물론 2차대전을 통틀어도 쿠르스크전역 다음으로 큰 전투라고 할 수 있습니다. 

 

8월초만 해도 전투는 북평-천진일대로만 제한되어 있었고 화중과 화남으로는 아직 전화가 미치지 않고 있었습니다. 더욱이 양측은 정식으로 국교단절과 선전포고도 하지 않은 상태였죠. 이것이 여타 전쟁과 다른 중일전쟁만의 특이한 점이었는데, 당초 쌍방은 정전회담의 결렬에 따라 서로에게 선전포고를 할 것을 고려했으나 실익이 없다는 이유로 흐지부지되었습니다. 먼저 중국으로서는 일본과 정식으로 단교하여 전면전화될 경우 이를 명분으로 일본이 중국의 해안가와 해상루트를 차단하고 미, 영, 독 등 중국의 주요 무역국에 대해 수출입 중단을 요구할 것이 뻔했습니다. 그건 중국에게 불리하였죠. 일본도 마찬가지로 전쟁을 이유로 열강들의 간섭과 국제연맹의 개입, 경제제재를 우려하였습니다. 중국이나 일본이나 마찬가지로 경제적으로 열강들에게 예속상태였기 때문에(게다가 갈수록 심화되고 있었음) 전쟁을 빌미로 경제제재를 당한다면 좋을 것이 없었습니다. 즉, 선전포고는 어차피 형식에 불과한 것이고 하나마나하다는 점에서 굳이 할 필요가 없다, 라는 것이 양측의 판단이었죠. 실제로 선전포고를 한 것은 태평양전쟁이 발발한 다음날인 41년 12월 9일입니다.  

 

따라서 그때까지 전쟁은 전쟁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국지적인 무력충돌이었기 때문에 일반적인 전쟁의 상식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황당한 일들이 이 과정에서 많이 일어납니다. 예를 들어 일본이 점령중인 천진의 세관은 여전히 중국이 운용하면서 그 수입을 중국정부로 송금했으며 또한 상해에서 생산되거나 수입된 물자가 내륙으로 지속적으로 수송됩니다. 또한 일본 해군의 해안봉쇄도 중국국적의 선박에 대해서만 검문검색이 가능했기에 중국군이 쓸 군수물자를 실은 외국 선박에 대해서는 아무런 통제도 할 수 없었습니다. 이런 점이 중국의 전쟁 수행에 한동안 큰 도움이 되었죠. 일본도 이 사실을 뻔히 알면서도 어느정도 묵인하죠.  

 

일본 참모본부는 평진지역에서 군사작전을 확대하면서 동시에 해군 제3함대의 건의에 따라 상해와 산동성 청도에 대해서도 공략하는 화중작전을 계획하여 7월 29일 "대중작전계획"을 작성합니다. 이는 남북으로 중국을 공격하여 단숨에 중국의 중심부를 강타하겠다는 생각이었죠.   

 

당시 상해의 일본 조계에는 약 3만명의 민간인들이 있었습니다. 그 외에도 중국 각지에는 토탈하여 모두 9만명의 일본인이 거주하고 있었고 당연히 이들의 안전이 문제가 되었죠. 특히 양자강 중류의 중일간 무역의 핵심인 한구의 일본조계에 대해서는 중국군이 완전히 포위하여 일촉즉발 상황까지 직면하고 있었습니다. 고노에내각은 전면전으로 확대되는 것을 대비하여 모든 민간인들을 8월 19일까지 본국으로 철수할 것을 결정합니다. 그런데 8월 9일 이른바 "오오야마사건(중국명 : 홍교공항사건)"이 일어납니다. 

 

제1차 상해사변이래 상해 조계에 병력 주둔권을 얻게 된 일본은 해군 소속의 상해특별육전대 2500명이 주둔하고 있었습니다. 이와 함께 영국군 2600명, 미군 2800명, 프랑스군 2000명, 이탈리아군 800명이 주둔하여 일본군과 함께 상해 중심가의 각국 조계를 공동 경비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일본군 제3함대가 상해와 양자강의 강상을 통제하고 있었습니다. 

 

상해의 일본조계지의 현재 모습이랍니다.

※ 사진출처 : http://article.joinsmsn.com/news/article/article.asp?total_id=8896270&ctg=2000

 

8월 9일 저녁, 상해특별육전대 소속 중대장인 오오야마 도시오 중위가 부하 1명을 데리고 중국군의 동태를 살피려는 목적으로 차를 몰고 상해 서쪽 외곽에 있는 중국군 군용비행장인 홍교 공항에 무단으로 들어가려고 합니다. 중국군 위병이 이를 막자 권총으로 사격을 가했고 중국군이 응사하여 둘다 그 자리에서 사망합니다. 그야말로 무모한 만용이었죠. 

 

당연히 구실을 찾고 있던 일본측은 이를 트집삼아 중국의 행위는 "상해정전협정 위반"이라며 강력히 항의하는 한편 중국측과 공동조사를 실시하고 공동조계 부근에 주둔한 중국측 보안대의 철수를 요구하면서 동시에 병력을 신속하게 증강합니다. 

 

오오야마 사건을 공동조사중인 중일 양측 조사단.   ※ 사진출처 : 위키백과

 

상해경비사령관인 장치중은 장개석에게 "일본군이 상해에서 병력을 증강하고 있으며 당초 2500명에서 추가로 육전대 2500명을 증원하는 한편 상해 거류민중 재향군인출신 3천명과 지원병 3500명까지 합해 약 1만에 달한다"고 보고합니다. 또한 제3함대도 13척에서 29척으로 증강되었고 제2함대도 큐슈의 사세보항을 출발하여 상해로 오고 있다는 보고가 들어옵니다. 물론 이것은 과장된 정보였으나 중국측으로선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죠. 

 

장개석은 32년 1월에 있었던 제1차 상해사변 당시의 상황을 다시 답습할 것을 매우 우려하고 있었습니다. 특히 상해는 중국에게 있어 금융과 자본, 근대산업의 중심지였고 이곳을 빼앗기는 것은 큰 타격이었죠. 따라서 노구교사변직후부터 장개석은 상해에 대한 방어진지를 대규모로 구축하고 병력을 증파하는 등 미리 대비하고 있었습니다. 이는 상해정전협정 위반이었으나 어차피 일본은 먼저 당고협정과 하메협정을 깨뜨린 이상 쌍방의 협정은 더이상 무의미한 것이었고, 더욱이 일본 내각이 2개 사단(제3사단, 제11사단)의 파병을 결정했다는 정보가 입수되자 상해에서의 전면전은 피할 수 없다고 판단합니다.  

 

장개석은 1차 상해전처럼 일본군이 선제기습할 것을 대비하여 8월 11일부터 독일식 사단인 제87사단과 제88사단 및 2개 포병단을 비롯해 상해 인근의 병력을 상해로 이동시켜 전개하기 시작하여 총 5만명까지 증강됩니다. 이들은 상해 중심부와 갑북, 북정거장, 대양진, 공동조계 외곽, 사천로에 있는 일본 상해육전대 본부가 보이는 맞은편 등 주요 요충지에 배치되어 진지를 구축합니다. 또한 일본군의 상륙에 대비해 오송진과 옥산에도 1천명 규모의 병력을 각각 배치합니다.   

 

8월 10일 상해의 공동조계를 관리하는 4개국 대표들은 32년 당시처럼 또 상해가 전장이 되지 않기를 희망한다고 중일양측에 전달하고 오홍조 상해시장대리에게도 이를 전달했으나 그는 "이미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대답하였고 또한 일본측에도 중국은 전쟁을 바라지 않지만 자위를 위해서는 행동하지 않을 수 없다고 경고합니다. 

 

중국군이 조계외곽으로 병력을 대폭 증강하고 포위하는 형세를 갖추자 일본측은 이런 행위는 상해정전협정 위반이라며 재차 중국군의 즉각 철수와 방어시설의 철거를 요구하지만 중국측은 거부합니다.

 

8월 13일 오전, 일본 육전대 1개 분대가 중국군 진지를 향해 사격을 하였고 오후부터 본격적으로 팔자교를 비롯한 주요 지점에 대한 공격을 시작하여 갑북을 점령하였고 제3함대의 군함들도 함포 사격을 개시합니다. 중국군 역시 여기에 응사하여 갑북을 바로 탈환하고 일본군을 포위하는 등 드디어 상해전투가 그 막을 엽니다.(여기에 대해 쌍방은 서로 먼저 공격했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어차피 일본은 상해로 전장을 확대할 계획이 있었기 때문에 누가 먼저 쏘았나라는 논쟁은 한국전쟁에서 누가 먼저 쏘았나를 따지는 것만큼 무의미한 것이죠.)  

 

숫적으로는 중국군 5만에 대해 일본군은 5천명정도였고 본토에서 출발한 2개 사단의 증원이 도착하는데도 시간이 걸릴 것이니 장개석은 일본군의 증원병력이 도착하기전에 압도적인 전력으로 이들을 신속하게 섬멸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설령 이들을 섬멸시키는데 성공한다해도 일본이 병력을 본격적으로 투입한다면 상해의 수비를 장담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장개석은 전략적으로 화북과 화동에서 축차적인 진지전을 실시하여 단계적으로 적의 공격을 흡수하여 장기전과 총력전에 대비되어 있지 않은 일본을 지치게 함으로서 최종적으로 이길 수 있다고 자신하였습니다.  

 

특히 상해과 남경 사이에는 그동안 폰 젝트를 비롯한 독일 군사고문단의 도움을 받아 대규모로 구축한 이른바 "젝트라인(차이니즈 힌덴부르크라인이라고도 부름)"이 있었습니다. 이는 크게 3개의 선형 방어선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제일선이 남상-가정, 제2선이 소주-상숙, 제3선이 강음-무석까지 구축되어 있었고 더해서 제2선과 가흥까지 연결되는 방어선을 "힌덴부르크라인"이라 불렀습니다. 여기에는 두꺼운 콘크리트로 된 다수의 토치카가 있었고 기관총과 대포가 배치되어 아시아의 "마지노선"이라 할만큼 철벽을 자랑했습니다. 장개석은 설사 상해에서 패해도 여기에서 충분히 막아낼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합니다. 

 

이른바 "젝트라인", 1차대전당시 서부전선에서 독일이 구축했던 힌덴부르크라인의 이름을 따서 "중국판 힌덴부르크라인"이라고도 불렀습니다. 그러나 아직 완공되려면 한참 먼 상태였는데다 방어병력과 무기도 충분히 배치되지 않았습니다. 더욱이 일본군이 우회하여 항주만에 상륙함에 따라 이 방어선들은 고립되었고 따라서 효과적인 방어전략을 구사할 수 없었으나 나름대로 선전하여 일본군은 큰 피해를 입었고 고전을 면치 못합니다.

※ 사진출처 : http://forum.axishistory.com/viewtopic.php?f=101&t=160503 

 

그러나 독일 군사고문단장인 팔켄하우젠장군은 1차대전식의 고정된 방어진지를 통한 수비작전은 이미 시대에 뒤떨어진 것이며 중일 양측의 화력차이와 제해, 제공권의 압도적인 열세를 고려할때 무작정 숫적 우세만 믿고 대규모 병력을 투입했다가 자칫하면 적에게 포위되어 회복할 수 없는 타격을 입을 수 있다고 경고했으나 장개석은 자신만만하게 자신의 작전을 강행키로 결정합니다.  

 

상해 현지에서 이미 중일 양군이 소규모 충돌을 시작했다는 보고를 받은 장개석은 당일날 밤 본격적으로 반격명령을 하달합니다. 상해방면의 모든 병력을 제9집단군으로 재편하고 사령관에 장치중이 임명됩니다. 또한 이들을 엄호하기 위해 수십량의 경전차와 중앙공군소속의 전투기, 폭격기 260대를 동원하고 40척의 해군 함대도 집결시킵니다. 공군은 미군사고문인 센놀트가 직접 지휘하였고 피아간의 전력을 고려해 일종의 "치고 빠지는 식"의 전술을 구사하면서 지상군에 대한 작전 지원과 함께 일본 해군에 대한 폭격을 목표로 삼습니다.  

 

 

 

진소관의 해군은 영해, 평해 두 경순양함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소형의 포함과 어뢰정에다 청말에 건조된 수척의 2~3천톤급 구형 순양함 등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공군과 마찬가지로 일본 해군에 대한 치고 빠지기식 기습과 장강의 항로를 차단하는 역할을 맡았습니다. 

 

중국공군 주력 전투기중 하나였던 소련제 I-15bis. 중국은 자체적으로 연간 수십대정도의 생산능력(부품 조립정도)을 가지고 있었으나 대부분은 해외에서의 원조와 구입에 의존했습니다. 특히 소련은 1천대의 전투기, 폭격기를 제공하여 중국공군 재건에 큰 역할을 하였죠. 

 

드디어 14일 중국은 사실상 전면전을 결의하는 "항일자위선언"을 선언하였고 여기에 대해 일본 역시 15일 "제국정부는 중국의 반성을 촉구하기 위해 단호한 조치를 취할 것"이라고 대응합니다.  

 

장개석의 반격 명령에 따라 장치충은 예하 부대에 상해에서 일본군을 섬멸할 것을 지시하였고 지상군의 공격에 앞서  14일 오전 7시, 가흥 비행장의 제 35중대가 상해의 일본 해군 육상 기지 및 물자 집적장을 폭격을 시작으로 중국공군의 대규모 공습이 개시됩니다. 중국공군은 황포강위의 제3함대 기함 이즈모를 비롯해 일본 군함들을 폭격하고 일본 조계와 육전대사령부, 일본군 진지들을 맹타합니다. 그러나 폭격 기술의 부족과 기후가 나빠 폭격은 큰 성과를 내지 못한채 도리어 민간인지구에 폭탄이 떨어져 많은 사상자를 냅니다. 또, 오송해안에서 해안포들이 불을 뿜고 중국 해군의 포함과 어뢰정들도 제3함대에 대해 공격을 시도하였으나 쌍방의 압도적인 차이로 실패로 돌아갑니다.

 

 

제3함대 기함인 1만톤급 장갑순양함 이즈모. 1898년에 건조되어 러일전쟁에도 참전했던 함으로 당시로서는 초구닥다리의 노친네였으나 구식 소형함위주인 중국해군에게는 충분히 강력한 위협이었습니다. 중국 전투기와 어뢰정의 습격을 받았으나 피해는 없었습니다. 이후 연습함으로 사용되어 태평양전쟁말까지 살아남았으나 45년 11월 해체됩니다.    ※ 사진출처 : http://blog.naver.com/mirejet/110095096376 

 

중국공군의 선제기습에 충격을 받은 일본측도 항공대를 동원하여 반격에 나섭니다. 상해방면에 아직 항공모함과 항공대가 없었던 일본은 8월 15일 오후 3시 대만에 주둔한 해군항공대소속의 96식육상공격기 20대를 출격시켜 남경과 항주, 광덕, 남창 등지의 중국군 진지와 비행장에 폭격을 가했는데, 이는 왕복 1천km가 넘는 거리라 당시로서는 유례없는 작전이었습니다. 심지어 큐슈에서도 출격하려고 했으나 악천후로 취소되죠.  

 

중일전쟁 초반 일본 해군항공대의 주력 폭격기였던 96식 육상공격기. 최고속도는 375km/h에 폭장량도 800kg에 불과한 경폭격기였으나 항속거리는 무려 4400km에 달하는 장거리 폭격기였습니다. 일본군은 이것으로 중국 오지까지 무차별로 폭격할 수 있었으나 속도가 느리고 방어력이 약해 호위기가 없을 경우 중국공군에게 쉽게 격추당했습니다.

 

여기다 항공모함 카가, 류죠, 호쇼 3척도 상해 근해로 이동하여 공격에 가세합니다. 이후 일본 폭격기들은 상해전투 기간내내 남경을 비롯해 소주, 항주, 서주 심지어 내륙 깊숙히 있는 한구에까지 화중, 화남의 여러 대도시에 대해 무차별 폭격을 가하여 막대한 민간인 사상자가 납니다. 게다가 일본측은 중국공군의 암호를 해독하는데 성공하여 이들의 작전과 집결지, 집결시간을 사전에 파악하여 선제공격을 가함으로서 중국공군에 큰 타격을 가합니다. 

 

상해 외곽에 배치되어 상공을 경계중인 중국군 고사포.  

※ 사진출처 : http://www.geocities.jp/torikai007/japanchina/1937.html 

 

15일 새벽부터 장치중의 지휘하에 중국군 제87사단, 제88사단 2개 사단이 본격적으로 일본군에 대해 전면적인 공세를 시작합니다. 일본군에게 빼앗겼던 팔자교를 비롯해 일본조계내 여러 거점들을 신속하게 제압하며 일본 육전대를 밀어붙입니다. 여기다 17일까지 제15사단, 제118사단, 제36사단도 공격에 가세하여 중국군의 병력은 7만이상으로 증강됩니다. 전투가 점점 격화되자 8월 18일 미영프이 4개국 대표단이 다시 한번 양측의 전투 중지를 요청했으나 중일 양국 모두에게 거부됩니다. 오히려 중국측은 국제조계에 일본군의 고사포 설치를 도와줄 경우 이를 묵과하지 않겠다고 경고하죠. 

 

 

 8월 21일에는 중국과 소련간의 불가침조약이 체결되어 소련은 바실리 츄이코프를 단장으로 하는 300여명의 군사고문단과 2억 5천만달러의 차관, 1천대에 달하는 항공기, 전차, 야포 등을 제공키로 결정하였고 37년 12월까지 1차적으로 115mm 곡사포 80문, 76mm 박격포 100문, 37mm 대전차포 80문, 경기관총 900정, 항공기 62대가 신강성 우루무치를 거쳐서 전달됩니다. 또한 38년 2월에는 약 20개 사단을 무장할 수 있는 막대한 물자가 제공되어 중국군 재건에 큰 역할을 합니다. 독일을 비롯한 영, 미 등 여타 열강들이 중립을 지키는 상황에서 소련의 이런 막대한 원조가 없었다면 분명 중국군은 더이상 버틸 수 없었을 것입니다. 

   

전투 초반 중국군은 숫적 우세로 일본 육전대를 마구 밀어붙였으나 예상이상으로 강력한 방어진지와 일본 군함의 함포 엄호, 제공권의 열세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둘 수 없었습니다. 특히 중국군에게는 일본군 진지를 돌파할 대구경 중포가 없었습니다. 기관총과 박격포같은 경화기만으로는 도저히 일본군을 이길 수가 없었죠. 여기다 일본은 15일 이른바 마쓰이 이와네대장을 지휘관으로 하는 "상해파견군"이 출발합니다. 상해파견군은 제 3사단, 제 11사단으로 편성되었으며 전차, 중포, 공성용 중포, 고사포, 항공부대등도 포함되어 있었고 전함 나가토, 무츠 2척, 중순양함 6척, 경순양함 4척이 이들을 수송하였습니다. 통상적으로는 수송함이 수송하고 구축함이 호위하나 고전중인 육전대를 한시라도 빨리 구원해야 한다는 명분으로 이렇게 편성하였죠. 

 

장개석은 대외적으로는 "상해에서 곧 왜적들을 쓸어버릴 것"이라며 호언장담했으나 상황이 녹녹치 않음을 깨닫게 됩니다. 장개석을 대신해 진성과 웅식휘가 현지를 시찰한후 남경으로 돌아와 보고하면서 웅식휘는 "아군의 병력이 부족하고 일본군의 화력이 막강하여 더이상 공세를 지속할 수 없다"라고 솔직하게 말합니다. 그러나 진성은 "이길 수 있는가, 없는가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공격하는가, 하지 않는가이다. 만약 화북의 전황이 더 불리해져 적이 평한선을 따라 남하한다면 우리는 화북은 물론이고 무한을 비롯해 화중 전체를 상실할 것이다. 그러나 적을 송호전장으로 끌어들인다면 적 주력을 양분할 수 있다."라고 주장합니다. 진성의 말은 화북과 화동에서 양면전쟁을 함으로서 일본군의 주력을 양분시킨다면 화북의 부담을 경감시키고 장기전에서 중국에게 유리할 것이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말에 장개석은 흥분하여 "공격! 공격! 반드시 공격해야지!"라고 외치고 화북으로 이동할 예정이었던 주력부대를 상해로 집결시킬 것을 명령합니다.  

 

일개 중위의 돌출된 행동과 쌍방의 소규모 충돌로 시작되었던 상해전투는 이제 양군 합해 무려 100만이 넘는 최대의 격전으로 확대되어 본격적으로 전개됩니다. 

 

일본군 진지를 향해 공격중인 제87사단. 팔켄하우젠이 훈련시킨 첫번째 독일식 사단중 하나로서 중국 최강부대였습니다. 병력은 8천~1만명정도였으며 독일제의 우수한 무기로 무장했고 개개인의 훈련도도 매우 높아 일본군에게 전혀 뒤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중화기가 없었기에 매우 용맹하게 공격했으나 일본군의 방어선을 돌파할 수 없었고 육전대 사령부 점령에 결국 실패하고 맙니다.

 

일본조계에서 중국군의 공격을 방어하고 있는 일본 육전대. 중국군의 대규모 반격은 그들로서도 그야말로 예상밖의 일이었습니다. 그들 역시 중화기가 없었고 중국군의 맹공으로 막대한 희생을 입었으나 대신 해군 함정의 함포와 항공대의 강력한 지원덕에 방어선을 간신히 유지합니다. 

※ 사진출처 : 일중전쟁, 태평양전쟁연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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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답댓글 작성자푸른 장미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3.07.26 죄송합니다. 요즘 제가 결석이 있어 몸이 좋지 않네요. 양해해주십시오.
  • 답댓글 작성자Jitter | 작성시간 13.07.27 좋은 글도 좋지만, 건강회복되시길 바랍니다.
  • 작성자Jitter | 작성시간 13.07.25 읽다보니 장개석에 대해서 크게 오해하고 있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장개석의 처지는 크루세이더 킹즈에서 반감 100을 가진 가신들을 둔(그리고 등 뒤에서 칼꽂을 기회만 엿보는 가신들) 지도자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 역시 장점과 단점을 두루 갖춘 인물이었군요. 모두가 그렇듯이.
  • 작성자2Pac | 작성시간 13.07.26 참 글 재미나게 잘 쓰십니다. 토탈~ 이라는 표현은 ㅋㅋ
  • 답댓글 작성자푸른 장미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3.07.26 이미 밝혔듯이 제가 쓴 글이 아닙니다. 전 그냥 허락을 얻어서 퍼올 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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