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평시장 진덕순과 지나주둔군 참모장 하시모토간의 정접협정과 송철원측의 무조건적인 양보에도 불구하고 화북의 상황은 점점 악화일로에 치닫습니다. 2개 혼성여단 5천여명에 불과한 지나주둔군을 지원하기 위해 관동군 2개 여단과 조선군 제20사단 등 2만명의 병력이 산해관을 넘어 북평과 천진을 위협하고 본토에서도 18개 항공편대가 만주로 이동하는 한편 3개 사단이 출동 준비에 들어갑니다. 일본은 이번 기회를 이용해 그동안 꿈꿔오던 화북의 완전 지배를 실현하겠다는 것이었죠.
장개석은 송철원이 중앙정부의 사전 승인없이 자의적으로 일본과 맺은 모든 협약에 대해 그게 어떤 내용이건간에 무효이며 일본과의 모든 교섭권은 중앙정부에게 있음을 명확히 합니다. 그리고 7월 12일 군사위원회를 개최하여 일본의 화북 침공에 대응해 방어전략을 신중하게 검토합니다. 당일 오후 7시부터 화남, 화중일대의 모든 병력을 하남성 정주에 집결할 것을 명령하는 한편, 창현-보정방면의 병력은 북경으로 증원토록 하고 이 방면에 대해서는 대신 유치의 제2집단군을 전개하여 제2방어선을 구축하고 이들을 지원토록 합니다. 또한 찰합이성으로 15개사단 및 9개 여단을 보내어 남하하는 관동군의 측면을 위협하고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평수철도(화북과 내몽고에 걸친 철도로 북평에서 찰합이성을 관통해 수원성 포두까지 연결)를 방어토록 합니다. 이들의 수송을 위해 각 철도에 군용열차를 최대한 집결시키고 신속하게 투입할 수 있도록 만전의 준비를 합니다.
이러한 화북에서의 장개석의 포진은 송철원의 제29군의 역량으로는 일본군의 초기 공세를 막아낼 수 없다고 보고 최일선에서의 초기 결전은 회피하는 대신, 최대한의 지연전을 펼치며 단계적으로 후퇴하면서 적의 진격을 둔화시킨후 공세 종말점에 도달했을때 반격하겠다는 전형적인 종심방어 전략이었습니다. 이는 일본군이 충분한 예비병력의 확보와 장기전 대비가 되어 있지 않다는 냉철한 판단에 의한 것이었죠. 이는 군사전략보다 정치적인 부담을 이유로 단 한치의 영토도 내줄 수 없다는 의지만 내세워 열세한 병력을 무턱대고 국경을 따라 선형으로 분산 배치했다가 단숨에 돌파당했던 폴란드군이나 맹목적으로 "사수"만 외쳤던 스탈린의 전략과는 대조된다 할 수 있습니다.
여산회의에서 항일을 연설중인 장개석. 이 회의를 통해 장개석, 송자문을 중심으로 한 구미파가 왕정위의 친일유화파를 완전히 누르고 주도권을 잡습니다.
바로 당일날 완평성을 포위하고 있던 일본군 일부 부대가 정전협정을 무시하고 완평현성과 장신점에 대해 포격을 개시합니다. 장개석은 송철원에게 급전을 보내 "일본군이 북평을 공격할 가능성이 있으니 즉시 대비하라"라고 지시했음에도 송철원은 일본군에게 빌미를 주어 전면전이 될 것을 두려워한채 묵살합니다. 체엄벌린의 근시안적이고 무사안일적인 유화정책이 히틀러에게 날개를 달아주었듯, 송철원의 일방적인 양보가 도리어 상황을 더욱 악화시킵니다. 송철원이 아무리 양보한들 어차피 일본의 목적은 화북 전체의 지배에 있었고 송철원과의 협상은 단지 병력의 집결과 공격의 명분을 얻기 위한 상투적인 책략에 불과함에도 송철원은 그 사실을 애써 외면하였죠.(똑같은 짓을 독소전쟁직전 스탈린이 반복했죠.)
정전협정에도 불구하고 일본군의 도발과 국지적인 충돌은 계속 반복됩니다. 7월 25일에는 북평~천진을 가로지르는 철도가 관통하는 낭방에 대해 일본군이 군용 전화선이 절단되었다며 1개 중대를 보냅니다. 이곳은 중국군 주둔지역이었는데 일본군이 사전 협의도 없이 진입한 것은 명백한 도발이자 주권 침해였죠. 쌍방은 기관총과 박격포를 동원해 치열한 전투를 벌입니다. 밤새동안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으나 다음날 새벽에 항공기로 폭격하고 병력을 증원하자 중국군은 패주합니다.
또한 북평성의 성문중 하나인 광안문으로 일본군 1개 대대가 무단으로 진입하자 중국군은 재빨리 성문을 닫고 이들을 성내에 고립시킨후 사방에서 포위공격을 가합니다. 이들은 전멸의 위기에 처했으나 송철원의 명령으로 전투를 중지함으로서 간신히 목숨을 건질 수 있었죠.
부하들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송철원은 일본의 비위 맞추기에 급급했지만 지나주둔군은 드디어 송철원에게 최후 통첩을 날립니다. 26일 저녁 지나주둔군측은 28일 정오까지 시간을 줄테니 북평 교외에 배치된 모든 중국군은 영정하 서쪽으로 철수할 것이며 이 시간을 넘기면 총공격을 시작하겠다고 엄포하죠. 그러나 일본군은 기한을 28일 정오로 정해놓고도 실제로는 기한이 되기도 전인 28일 오전8시부터 북평~천진일대에 대해 전면적인 공격을 개시합니다. 이런 기습은 청일전쟁이래 일본군이 상투적으로 써먹는 수법이었습니다. 이는 증원병력이 도착하여 3만으로 증강된 일본군이 우세해진 것도 있지만 30만이 넘는 대규모 중국군이 북상중이었기에 더이상 시간을 끌지 않고 신속하게 제압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최후통첩을 받은 송철원은 그제서야 일본의 속셈을 깨닫고 백기를 들지 않는한 일본군의 공격을 중단시킬 수 없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는 허둥대며 북평성 방어사령부를 설치하고 성곽에 병력을 배치합니다. 또한 장개석의 명령에 따라 보정에 주둔중인 손연중, 만복린 등에게 신속하게 북상하여 지원해 줄 것을 요청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너무 늦은 조치였죠.
28일 아침부터 일본군은 북평-천진-당고 등 화북 전역에 걸쳐 송철원군에 대한 전면적인 공격을 시작합니다. 조선군 제20사단과 지나주둔군 주력은 북평 남쪽의 요충지인 남원과 풍대를, 관동군 독립보병1여단과 제11혼성여단이 서원을 공격하여 풍치안의 제37사단과 장자충의 제38사단에게 치명타를 가합니다.
8월 18일 북평성 점령을 기념하여 시가지에서 승전 퍼레이드를 하고 있는 일본군
※ 사진출처 : 일중전쟁, 태평양전쟁연구회 저
천진에서는 송철원군 소속의 보안대 500여명이 일본조계와 지나주둔군 사령부를 선제공격했으나 항공기의 엄호를 받은 일본군의 반격으로 격퇴됩니다. 천진 외항인 당고항에서도 중국군 해안포가 포문을 열어 일본군을 공격했으나 일본 해군의 엄호를 받은 관동군 야전중포병 제7연대의 공격으로 제압됩니다. 이렇게 북평과 천진의 외곽부터 하나하나 방어선을 무너뜨린 일본군은 제5사단, 제6사단, 제10사단 등 3개사단이 삼면에서 북평과 천진을 포위 공격해 수비대인 장자충의 제38사단을 격파하였고 7월 30일밤까지 북평과 천진이 모두 함락됩니다. 장개석이 후퇴명령을 내리자 잔존부대는 철도를 따라 남쪽과 서쪽으로 후퇴합니다. 3일간의 전투에서 일본군은 600여명이 전사한데 반해, 중국군은 무려 1만6천명의 전사자를 냅니다.
일본 항공기의 폭격으로 불바다가 된 천진 시가지
※ 사진출처 : 일중전쟁, 태평양전쟁연구회 저
한편 북평 동쪽 통주는 당고협정이래 비무장지대로서 일본의 괴뢰인 소위 "기동방공자치정부"가 수립되어 있었는데 이 보안대 5000명이 반란을 일으켜 주석이자 매국노인 은여경을 체포하고 일본군 수비중대(100여명)와 특무기관, 재중 일본인들을 공격하여 260명이 살해되는 사태가 벌어집니다. 이때문에 북평방면에서 1개 연대가 급파되어 이들을 진압하는 이른바 "통주사건"이 일어납니다.
중일전쟁기간 대표적인 매국노중 하나인 은여경. 일본 유학파로 장작림밑에서 외교부장을 지냈으나 이후 남경정부로 진영을 바꾼후 외교총장이 되어 주로 대일교섭을 맡습니다. 33년 당고협정후 일본의 앞잡이가 되어 35년 소위 "기동방공자치정부"를 수립합니다. 원래 그의 희망은 제2의 만주국 건설이었으나 이 비무장지대가 독립국가가 되기에는 너무 작다는 이유로(면적이 3만평방km정도로 현재의 대만보다도 작음) 그냥 일개 자치정부로 만족해야 했습니다. 통주사건의 책임을 지고 물러난후 북평에서 백수로 살다가 2차대전에서 일본이 패망하자 "한간(매국노)"로 체포되어 47년 12월 사형당합니다. 그가 만든 기동방공자치정부는 일본군이 화북을 제압한후 괴뢰정권으로 세운 "중화민국 임시정부"에 38년 2월 1일 편입되어 없어집니다.(일본은 만주국, 몽강국, 왕정위의 중화민국 국민정부 등 모두 6개의 괴뢰정부를 만들어 냅니다.)
만주사변당시 부저항으로 일관했던 장학량과 달리 제29군은 나름대로 선전했음에도 유리한 시기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한채 병력을 증강한 일본군의 선제공격을 허용함으로서 패주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완전히 와해된 것은 아니며 어느정도 전력을 유지한채 하남성과 수원성, 찰합이성 등으로 후퇴하여 중앙군과 연계함으로서 계속해서 일본군과 싸우게 됩니다.
이렇듯 북평, 천진이 함락됨으로서 쌍방은 이제 단순한 국지적 충돌이 아니라 사실상 전면전에 돌입합니다. 일본의 야욕이 명확해지자 국민정부 주석인 임삼은 8월 2일 대국민 성명을 발표하여 "전 국민은 정부를 신뢰하고 대일항전에 임할 것"을 촉구합니다. 8월 7일에는 남경에서 전군 국방회의가 개최되어 대일 전면항전을 결의합니다. 여기에는 주덕, 주은래, 섭검영 등 공산군 대표도 참석합니다.
서안사변이후 공산군에 대한 토벌은 잠정적으로 중단된 상태였으나 아직 공식적으로 국공합작이나 공산당의 존재를 인정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1월부터 비밀리에 서안에서 양측은 국공합작을 위한 의견을 지속적으로 조율하고 있었습니다. 드디어 여산회의에 참석한(단 회의장에 직접 들어가지는 않았음) 주은래는 국민당에 대한 적대행위의 중단과 적화통일의 포기, 소비에트 정권의 취소 및 홍군을 국민혁명군에 복속할 것을 선언합니다. 그리고 8월 19일 장개석은 주은래와 담판하여 홍군을 국민혁명군 제8로군(제18집단군)으로 개칭하고 3개사단으로 개편하여 주덕을 총사령에, 팽덕회를 부사령, 섭검영을 참모장에 임명합니다.
각 사단은 2개 여단 편제(4개 연대)이며 개편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제115사단 : 홍군 제1방면군, 제74사단을 근간, 사단장 임표, 제343여단, 제344여단, 1만 5천명
제120사단 : 홍군 제2방면군, 제27, 제28군을 근간, 사단장 하룡, 제358여단, 제359여단, 1만 4천명
제129사단 : 홍군 제4방면군, 제29, 제30군을 근간, 사단장 유백승, 제385여단, 제386여단, 1만 3천명
주석 : 모택동, 부주석 : 주덕, 주은래
위원 : 모택동, 주덕, 주은래, 장문천, 팽덕회, 임필시, 임표, 하룡, 유백승, 서향전, 섭검영
이리하여 홍군에서 개칭된 팔로군은 섬북의 연안을 떠나 황화를 건너 산서성으로 들어가 바로 얼마전까지 철천지의 원수였던 중앙군을 비롯한 산서군, 서북군, 동북군과 연합해 일본군과 싸우게 됩니다.
그러나, 모택동을 비롯한 당지도부는 덕분에 당초 약속 따위 가볍게 씹고 중일전쟁을 이용해 적극적으로 세불리기부터 나서죠. 이는 합작직후 모택동이 비밀리에 각 간부들에게 내린 지시에서도 여실하게 보여줍니다.
"중일전쟁은 우리 당이 발전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다. 국공합작은 70%가 자기 발전이고, 20%는 타협이며, 10%만이 일본과의 투쟁이다. 이를 위하여 제1단계는 타협이며 표면상으로 국민당정부에 복종하지만 실질적으로는 당의 생존과 발전을 엄호한다. 제2단계는 경쟁단계로서 공산당의 정치와 군사력의 기초를 2~3년내에 완성하여 국민당 정부에 대항할 수 있도록 발전시킨다. 제3단계는 공격단게로서 공산당의 근거지를 확대시키고, 국민당 정부군을 고립시켜 주도권을 장악한다" <중국인민해방군사, 국방군사연구소>
"국민당에 대해서 고도의 경계심을 유지해야 한다. 우리 군의 행동은 우리 자신에 의해서만 결정될 수 있을 뿐 장개석의 명령에 따를 수 없다. 우리 홍군이 언제 어느 전선으로 가서 싸울 것인가는 오로지 우리 사정에 의해서 결정될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조속히 출병할 필요가 없으며 출병해도 한번에 모두 나가서는 안된다. 일부는 남아서 당중앙과 섬북변구를 지켜야 한다"<낙천 중앙정치국회의에서>
"홍군은 본질적으로 분견대다. 홍군은 어떠한 결정적인 역할도 수행하지 않는다" <장제스 일기를 읽다, 레이황>
중국 인민들의 항일에 대한 열망에 편승해 그토록 "단결"과 "항일"을 주장해 왔던 그들이지만, 실상은 오로지 자기들의 이익만을 위한 기회로만 생각했던 것입니다. 이런 이중적인 태도는 장개석에 대한 불신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그들의 원래 방식이기도 했습니다. 따라서 곧이어 벌어지는 반목과 갈등에는 그들 자신도 절반의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모스크바로부터 돌아온 왕명이 "항일투쟁을 위해 적극적인 연합과 복종"을 주장했지만 모택동은 우경투항주의라며 묵살합니다. 뭐, 장개석도 이들을 진심으로 신뢰하지는 않았겠지만요.
8월 11일에는 항전을 총지휘하기 위한 이른바 "국방최고회의"가 설치됩니다. 이는 우리의 국가안전보장회의(NSC)나 나치독일의 독일국방군 총사령부(OKH)와 유사한 것으로, 장개석을 주석으로 하고 왕정위를 부주석으로 선출합니다. 여기다 국민정부 주석인 임삼은 형식적으로 군 통수권을 가지고 있었으나 사실상 장개석의 바짓사장이나 진배없었는데 주석의 군통수권을 장개석에게 위임함으로서 명실상부한 육해공군 총사령관이 됩니다. 8월 13일 제2차 상해사변이 일어나자 15일 국가 총동원령이 선포되었고 군 통수권외에 행정, 사법 등 모든 권한도 장개석에게 집중됩니다.
8월 20일에는 장개석 군사위원장 주재로 국민정부 군사위원회에서는 일본의 침략에 대응하여 최일선에 해당되는 동부 중국에 대해 아래와 같이 5개 전구로 편성합니다.
제1전구 : 사령관 장개석(이후 정잠, 위립황, 호종남 순으로) 관할구역 하북성, 산동성 북부
관할부대 : 제1집단군(송철원), 제2집단군(유치), 제14집단군(위립황)
총 25개사단, 2개 보병여단, 2개 기병사단 등
제2전구 : 사령관 염석산, 관할구역 산서성, 찰합이성, 수원성
관할부대 : 제6집단군(양애원), 제7집단군(부작의), 제18집단군(모택동, 주덕)
총 27개사단, 3개여단, 3개기병사단 등
제3전구 : 사령관 풍옥상(이후 장개석) 관할구역 남경, 상해, 강소성 및 절강성
관할부대 : 제8집단군(장발규), 제9집단군(장치중), 제10집단군(류건서), 제15집단군(진성),
제19집단군(설악), 독립 신4군(엽정, 공산계열)
총 24개사단, 6개여단, 기타 편제에 속하지 않는 공산유격부대 등등
제4전구 : 사령관 하응흠(이후 장발규) 관할구역 복건성, 광동성
관할부대 : 제4집단군(장정문), 제12집단군(여한모)
총 9개사단, 2개여단, 해남도내 요새수비부대 등
제5전구 : 사령관 장개석(이후 이종인) 관할구역 산동성 남부, 강소성 일부
관할부대 : 제3집단군(한복구), 제5집단군(고축동)
총 27개사단, 3개여단 등
또한 여기에 포함되지 않는 후방의 사천, 운남, 귀주 등 서남지구에 대해서는 별도로 4개의 예비군으로 지정하여 일종의 유격구로서 이들은 필요시마다 병력을 전국의 각 전선에 파견하게 됩니다. 이 전구는 전쟁이 점점 내륙으로 확대됨에 따라 최대 12개 전구까지 늘어납니다.
다음으로 개전당시 중-일 양측의 군사력과 군사전략은 어떠했는가.
당시 중국육군은 정규군 200만에 비정규군까지 합해 300개 사단에 약 430만명에 달했습니다. 그러나 이 숫자는 어디까지나 서류상일뿐이며 정확한 숫자는 어느 누구도 알지 못했습니다.(사실 중국군의 규모는 자료마다 천차만별입니다.) 30년대 전기간에 걸쳐 군의 재편과 "국군화"를 추진했음에도 여전히 군의 지휘권을 일원화하지 못했으며 편제도 엉망인데다 무기와 훈련도 모두 제각각이었습니다. 독일 군사고문단장으로 왔던 폰 젝트장군 역시 "중국군은 숫자만 많을뿐 제대로 된 부대는 거의 없다"라고 혹평하였습니다.
300개 사단중 그런대로 현대식으로 재편성한 부대는 중앙군 30개 사단에 불과했고 이중 독일식 사단이 8개 사단이었습니다. 남경정부는 38년까지는 모든 사단을 재편성할 계획이었으나 노구교 사변의 발발로 제대로 추진하지 못했죠. 특히 포병이나 화학전, 차량, 기계화 등 현대전에 대비한 장비는 매우 초보적이었고 각국에서 잡다하게 수입한 장비가 뒤섞어 있었으며 노후화도 심각했습니다. 유일한 기계화사단인 제200사단(사단장 두율명)은 겨우 1개 기갑연대와 1개 차량화연대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독일제 1호전차, 이탈리아제 CV-33, CV-35, 소련제 T-26, 프랑스제 르노 FT-17 등 200여대의 잡다한 경전차와 장갑차를 보유했습니다.
장개석에 의해 8월부터 국가 총동원령이 선포되었으나 실제로 징병을 할 수 있는 지방행정체계가 구축되어 있지 않았기에 실제로는 지역 유지들에 의한 모병제나 다름없었습니다. 특히 군수와 병참, 징병, 의료 등 행정 전반적으로 매우 초보적인 수준이었죠.
반면, 일본 육군은 5개 군관구(관동군, 조선군, 지나주둔군, 대만군, 본토방위군)에 17개 사단(전시에는 30개 사단까지 확대), 4개 혼성여단, 4개 기병여단, 5개 포병여단, 3개 전차연대 등 38만명을 보유하였고 예비군은 약 190만명에 달했습니다. 그러나 열강들과 달리 국력이 취약한 일본은 소수의 정예군에 의존하였고 예비군의 숫자는 많아도 실제로 유사시 신속하게 이들을 동원하고 무장하고 훈련시켜 전선에 투입할 수 있는 체계가 제대로 구축되어 있지 못했으며 특히 잘 훈련된 간부와 부사관이 매우 부족했습니다. 일본군은 단지 제한된 국지전에서만 강력한 전투력을 발휘할 수 있었습니다. 이런 문제점은 8월 13일부터 시작되는 2차 상해사변에서 이미 증명되어 중국군의 강력한 방어선 앞에서 30대의 중년 예비군으로 구성된 일본군은 실탄도 제대로 지급받지 못한채 무턱대고 투입되었다가 참사에 가까운 패배를 당합니다.
해군에서는 중국은 5개 함대 120척 총 배수량은 6만톤정도였으나 정해와 영해 두 경순양함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청말 청일전쟁에서 북양해군이 괴멸한후 해군을 재건하면서 건조하거나 군벌들이 외국에서 수입한 소형함들을 중앙에서 일괄적으로 끌어모은 것으로 노후화가 매우 심했습니다. 따라서 해상작전은 고사하고 기껏해야 제한된 강상작전이나 수송임무를 맡을 수 있는 수준에 불과했죠.
개전당시 중국해군의 전투 편제는 다음과 같습니다.
제1함대 : 경순양함 4척, 구축함 1척, 포함 6척, 수송함 2척
제2함대 : 포함 13척, 수뢰정 6척
제3함대 : 경순양함 3척, 포함 3척, 구축함 1척, 포뢰정 8척
제4함대 : 경순양함 1척, 포함 4척, 구축함 1척, 포뢰정 19척
연습함대 : 경순양함 2척
해군육전대 : 2개 독립여단
일본 해군은 주력 전함만도 9척에 항공모함 4척, 순양함 33척, 구축함 102척 등 285척에 배수량은 115.3만톤으로 영, 미 다음으로 세계 3위를 자랑하였습니다. 승무원의 질적 수준도 세계 최고 수준이었죠. 해군력에서 격차가 워낙 압도적이었기에 개전과 함께 중국 연해와 황하강, 양자강 전역에 대한 제해권을 일방적으로 차지합니다. 중국해군의 대부분이 단숨에 일소되었고 간신히 살아남은 극소수의 군함은 양자강 중상류지역에서 적의 수송함대를 상대로 치고 빠지는 식의 유격전이나 함포 사격을 지원하는 수준이었습니다.
공군에서는 라이프지 2차대전사 "중국-버마-인도"편에서는 중국공군을 매우 평가절하하지만 실제로는 미국과 소련, 이탈리아 등 서구 열강의 적극적인 원조를 유치하여 500~700여기의 항공기를 보유하였고(그러나 이 자료도 천차만별이라 신뢰성 있는 자료가 없습니다. 하응흠의 회고록에서는 314대로 기록하고 있는 반면, 동아일보 37년 8월 20일자 기사에는 32년 상해사변이래 중국공군이 급속히 성장하여 총수가 무려 940대에 달하며 일선기만도 650대에 달한다고 기술하고 있습니다.) 총 9개 대대, 26개 중대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남창 - 공군 사령부, 제 1대대(폭격), 제 4대대(전투기), 제 5대대(전투기), 제 6대대(정찰), 제 8대대(중폭격)
광덕 - 제 2대대(폭격)
구용 - 제 3대대(전투기)
남경 - 제 6대대(정찰)
서안 - 제 7대대(정찰)
방부(蚌埠) - 제 9대대(지상공격)
또한 주요 비행장 12곳과 간이비행장을 포함해 총 262곳의 비행장을 보유합니다. 조종사는 항주, 광주, 낙양비행학교 등 3곳에서 약 700여명이 조종훈련을 마친 상태였습니다. 파일럿들의 실력도 결코 "도련님"들이 아니라 매우 엄격하여 졸업생은 절반도 되지 못했습니다. 따라서 파일럿의 실력에서는 일본에도 결코 뒤지지 않을 정도였죠.
중일전쟁 초반 중국 공군 최고의 에이스였던 진서진. 미국과 독일에서 비행훈련을 받은후 남경 교외의 구용비행장에 배치되어 남경을 폭격하는 G3M 1기를 격추한 것을 시작으로, 39년 12월 중상을 입어 더이상 비행기를 탈 수 없게 될때까지 총 8기를 격추합니다. ※ 사진출처 : 위키백과
그러나 항공기가 대부분 군벌들이 잡다하게 보유한 것을 끌어모은 것이었기에 기체의 절반 이상이 매우 노후된 복엽기였으며 정비불량과 부품 부족으로 가동률은 절반 이하였습니다. 또한 무전을 평문으로 했기에 일본측에게 쉽게 누수되어 항공기를 집결했다가 일본측의 선제공격을 받기 일쑤였습니다.
일본은 별도로 공군이라는 병종이 없었고 육해군이 각각 항공대를 보유했는데, 육군이 800여기(일선기 500기), 해군기가 730기(육상부대 360기, 항모기 370기)를 보유했으며 개전당시 중국 전선에 가용한 숫자는 육군기 196기, 해군기 247기로 총 443기에 달했으며 파일럿은 3천명을 보유하였습니다. 항공기의 양적, 질적 우세와 가동률을 고려한다면 중국공군에 비해 월등히 우세했다고 할 수 있죠.
이렇듯, 가용가능한 군사력부터 일본이 중국을 압도하기도 했지만 경제력과 전쟁수행능력에서는 그 격차가 더욱 컸습니다. 일본은 30년대이래 중화학과 군수산업에 대한 적극적인 투자로 연간 1,500여대의 항공기와 대포 700문, 전차 300대, 차량 1만대를 생산할 수 있었고 군함도 연간 5만톤의 건조 능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비록 자원이 빈약했으나 한반도와 만주, 대만 등 식민지와 해외 수입을 통해 해결할 수 있었죠. 그러나 중국은 농업과 가내수공업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태였고 군수산업에서도 소총과 경기관총, 경포, 탄약을 생산할 수 있는 정도였고 이조차도 완전히 자급할 능력을 가지지 못했습니다. 항공기와 군함도 자체 생산할 수는 있었으나 항공기는 연간 십수대정도, 군함은 수백톤규모의 소형함만 건조가 가능했습니다. 방대한 영토에 자원은 풍부했으나 대부분 미개발되거나 청말에서 크게 변화하지 않은채 원시적인 수준이었습니다. 따라서 전적으로 해외 수입과 원조에 의존할 수 밖에 없었죠.
따라서 중국이 우세한 것은 내선작전이라는 이점과 광대한 영토와 인구였습니다. 노구교사변 6개월전인 37년 1월 중국군 참모본부에서는 "대일작전계획"을 수립합니다.
이 계획에서 "일본은 북평-천진을 먼저 점령한후 정주-제남-서주로 남하하여 아군의 주력을 포위 섬멸하거나 서북의 수원성, 찰합이성으로 진출할 것으로 예상된다. 이에 함께 보정-석가장을 지나 석탄매장이 풍부한 산서성 태원의 공략을 꾀할 것이다. 또한 절대 해상권을 이용해 황하 연안에 상륙하여 화북에서 작전중인 아군의 측면을 위협할 수 있다. 일본은 이를 위해 17개 현역사단과 추가로 17개 예비사단 등 총 60만명을 축차로 중국 대륙에 투입할 것으로 예상된다. 그러나 일본은 영, 미, 소의 위협을 우려하여 해공군력 전부를 중국에 투입하지는 못할 것이며 상당한 전력을 예비로 남겨두지 않으면 안된다."라고 판단합니다. 실제로 일본군의 군사작전은 중국군이 예상했던 대로 진행됩니다.
이에 대한 대응방안으로 지구전과 지연전술, 유격전을 원칙으로 정하고 구체적으로 전국에 대한 각 전구별 편성 및 방어체계의 구축, 국민 총동원의 준비, 병참선의 확보 등의 준비를 계획합니다. 특히 장개석은 피아간의 전력차이를 고려할때 초반의 대규모 결전은 자살행위이며 따라서 병력을 융통성있게 운용하면서 하나의 방어선이 돌파되면 그 뒤에 제2, 제3, 제4의 방어선을 지속적으로 구축하고 또한 이미 돌파된 방어선에서도 병력을 규합하여 유격전을 펼침으로서 적을 지속적으로 지치게 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또한, 일본은 그 특성상 절대 중국의 정복만 노리지 않을 것이며 반드시 태평양 전체의 패권을 노릴 것이기에 영, 미 등 열강과의 충돌은 피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는 일견 장개석 개인의 막연한 희망일 수도 있었으나 실제로 역사가 그가 말한대로 진행되었다는 점에서 예견성이 있다고 할 수 있겠죠.
물론 중국은 장개석이 생각하는 장기전을 위한 대비가 충분히 되어 있지 못했으며 그의 생각대로 지구전과 지연전술도 충분히 실현되지는 못하였습니다. 중국군은 이제 초보적인 수준을 막 벗어나려고 하고 있는 과도기 상태였습니다. 경제적으로도 30년대 전기간 대내외적인 악재로 인해 장기전을 위한 대비가 되어 있지 못했으며 37년에 와서야 비로소 경제가 어느 정도 회복세를 나타내고 있었습니다.(수출은 전년대비 45% 증가하였고 농업에서도 36년~37년간 근래 유례없는 대풍작이 이어집니다. "번영의 시대가 가까이 왔다"라는 말이 성급하게 나올 정도였죠.) 레이황의 장제스 일기에서는 37년 2월 5일 장개석이 "대공보"와의 인터뷰에서 "나는 3년에서 5년의 시간을 더 필요로 한다"라고 말했다고 적고 있습니다. 물론 그 시간만큼 일본도 더 강해졌겠지만 중국은 그 이상으로 성장했을 것은 틀림없으며 따라서 일본보다 더 강해질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더 효율적으로 전쟁을 수행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나름대로 할 수 있는한 일사분란하게 총력전을 대비하는 중국에 비해, 일본은 자기들끼리도 의견을 일치시키지 못한채 명확한 방향과 방침조차 내놓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공명심에 들떤 관동군은 중국에 대한 침략에 혈안이 되어 있는 반면, 정작 육군 중앙은 중국과의 전쟁이 대소 준비의 약화와 소련의 개입을 불러올 수 있다고 반대하고 해군 역시 대미전에 우선순위를 두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일본의 중국 침략은 처음부터 "청일전쟁"이나 "러일전쟁"처럼 국가의 사활을 걸고 총력전을 각오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통상 적국과의 전쟁을 할때에는 먼저 국론부터 일치시킨후 동원 가능한 모든 군사력을 집중시켜 단숨에 적의 심장부를 강타함으로서 전쟁을 속전속결로 끝내는 것이 기본적인 상식입니다. 일본은 원칙적으로는 국력의 열세를 이유로 장기전을 피하고 속전속결을 추구한다라고 "제국국방방침"에 명시하고서도 정작 이를 위한 어떤 준비도 하지 않았습니다. 고노에내각과 육군 중앙은 관동군의 요구에 마지못해 승인하면서도 북평-천진만 먹고 떨어지는 것으로 서로 약조합니다. 그러나 막상 관동군은 그런 지시를 묵살한채 마음대로 전선을 확대시켜 나갑니다. 상해에서도 마찬가지로, 상해파견군은 당초 정해진 진격선을 무시한채 남경까지 진격한후 어떤 사전 조율도 없이 임의로 전선을 확대하며 중국의 중심부인 무한삼진까지 진격합니다. 이런 행동은 일본의 국력과 병참선에 대해서는 완전히 무시한 것이었죠. 그럼에도 일본 내각과 육군 중앙은 이들의 요구에 밀려 사후 승인을 반복함으로서 스스로 자신들의 권위를 떨어뜨리고 작전의 혼란을 초래합니다.
현역병력이 부족한 상태에서 충분한 예비병력의 동원도, 수십만에 달하는 대병력을 위한 병참 준비도 없었습니다. 아무런 근거도, 계산도 없이 "중국따위는 2개월, 길어도 1년이면 끝난다"라는 안이한 생각으로 단기전만 계획한채 무턱대고 전쟁을 시작한 것이 바로 일본이었습니다. 원래 그들에게 중국과의 전면전은 계획에도 없었던 것이기에 단지 향후 대소전을 위한 준비운동쯤으로 여겼으며 유아사 구라헤이 내무장관은 "소련에 대한 방비를 태만히 할 수 없기에 중국과의 전쟁은 속히 끝내어 원래대로 돌려야 한다"라고 말할 정도였습니다. 만주사변당시 무기력한 장학량군을 상대로 손쉽게 이겼던 경험으로 중국의 저항능력을 경시하고 과소평가했기 때문이지만 결국 예상밖의 장기전의 수렁에 빠졌고 이후에는 스스로도 자살행위라는 것을 인정하면서 미국과의 전쟁을 일으켜 몰락의 길을 걷을 수 밖에 없게 되죠.
이 과정에서도 입으로는 "1억의 신민이 하나가 되어"운운하면서 정작 권력층은 그야말로 전략의 부재함과 무능 그 자체에다 자기들끼리는 극심한 파벌과 알력다툼에만 급급한 것이 그들의 모습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압도적으로 우세한 전력을 가지고도 8년이 넘도록 중국 하나에게도 이기지 못했으며 끝판까지 가야 했던 가장 큰 이유였죠.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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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Vv아마게돈vV 작성시간 13.07.24 그냥 서안사변 약속 깡 씹고 그냥 공산당 공격하면 되지 않았으려나? 왜 이렇게 양보했는지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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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댓글 작성자푸른 장미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13.07.24 장학량군 15만, 공산군 10만, 양호성군 7만이면 30만이 넘는 대군이죠. 장개석도 쉽게 손댈수 없었을 겁니다.
직계군을 여기에 몰빵했을때, 이종인이나 염석산같은 지방세력들이 뒤통수를 칠 수도 있고 일본의 침략도 본격화되었으니까요. -
작성자열혈청년 작성시간 13.07.24 결국 이것 저것 다 달아보면 무게가 나오는 것이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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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리블루 작성시간 13.07.25 그런데 결과적으로 보면 중일전쟁은 장개석의 의도대로 흘러가긴했네요. 대륙의 깊은 종심이 일본군을 서서히 녹아내리게 했으니까요.
다만 중국군에겐 이를 포위섬멸할 역량이 소련군의 반의 반도 없었다는게 비극이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