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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고구려의 유주 지배

작성자나도사랑을했으면|작성시간06.08.18|조회수48 목록 댓글 0
고구려의 유주 지배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유적이 하나 있다.
바로 평양 서북방 대안시 덕흥리에서 발견된 덕흥리 고분이다.
북한이 덕흥리벽화무덤을 발굴한 것은 1976년 8월, 이것이 남한 학계에 소개된 것은 1977년 12월 일본의 한 화보책을 통해서였다. 이렇게 간접적으로 전해진 덕흥리벽화무덤이 이내 한국 고대 문화사의 대표적인 유물로 부상하게 된 것은 무엇보다 6백여자나 되는 문자 기록과 14행 1백54자의 묘지 때문이었다.

사실 고구려 벽화무덤이 80여기 발굴됐다지만 문자기록을 갖고 있는 것은 안악 3호분, 염모묘 두 개에 지나지 않았고 그 무덤이 몇년도에 만든 누구의 무덤인가를 정확히 밝혀놓은 것은 덕흥리 벽화 무덤이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묘지명에 의하면 묘 주인의 이름은 진이며 신도현에서 태어나서 전위장군, 국소대형(고구려 고유 관작), 좌장군, 용양장군, 요동태수, 사지절, 동이교위, 유주자사 를 지냈고 나이 77세에 죽었으며 영락 18년 12월 25일(음력:408년, 양력 409년 1월 26일)에 고분을 만들어 시체를 옮겨 묻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덕흥리 고분이 중요한 이유는 앞서 말했듯이 문자 기록도 그렇지만 또 하나는 벽화 고분이다. 그 벽화 고분은 바로 고구려가 오늘날의 화북 지역인 난하 양안을 차지했으며 유주자사 진이라는 인물이 각 태수들에게서 하례를 받는 모습을 그리고 있었던 것이다.

연군태수, 범양태수, 어양태수, 상곡태수, 광령태수, 대군태수, 북평 태수, 요서태수, 창려태수, 요동태수, 현도태수, 낙랑태수, 글자가 지워져 알 수 없게 된 마지막 태수는 대방태수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지역들이 난하에서 가장 손꼽히는 요지인 것은 말할 것도 없다.

13군이 유주에 속하며 거느리는 현은 75개이고 주의 소재지는 광계이며 지금의 소재지는 연국인데 덕양으로부터 2, 3백리 떨어져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벽화는 당시 두 줄로 늘어선 각 지역 태수들이 유주자사 진에게 하례하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이에 대해 두 가지 견해가 있는데 하나는 전연(前燕) 멸망시 서쪽에서는 전진이, 동쪽에서는 고구려가 진격해 고구려가 차지한 지역이라는 설로 북한 학계가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또 하나는 광개토호태왕이 후연 멸망시 차지하여 대연에서 유주자사를 임명하는 기간 동안만 차지했다고 하고 있다는 설이다.

전자의 약점이라면 거란에게도 공격을 받고 이미 백제에 의해 크게 패한 고구려가 과연 그럴 만한 국력이 있었느냐 하는 것이며 또한 소수림태왕은 무슨 이유로, 어떻게 그 지역을 내 줬느냐 하는 것이다. 전연의 멸망 시기는 370년인데 전진의 동진시 같이 서진했던 고구려는 전진에서 부락을 유주자사로 임명한 376년까지 그 유주를 장악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이 고구려가 그 지역을 차지해 그렇게 관리할만한 국력이 됐느냐 하는 것이다.

후자의 약점은 광개토호태왕의 정벌 기록을 봤을 때 그 점령 기간이 지나치게 짧다는 것인데 유주자사를 대연이 임명한 시기가 영락 18년 5월이기 때문이다. 곧 진이 죽고 대연에서 바로 유주자사를 임명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대연이 과연 유주자사를 임명해서 실질적으로 그 지역들을 다스렸을까 하는 것이다.

이것이 고구려의 유주 지배를 알려주는 거의 유일한 기록이다.

나머지는 추측만 할 수 밖에 없다.
삼국사기를 보면 이때 후연은 멸망하고 새로 들어선 대연은 모용운, 즉 과거에 고구려에서 대륙으로 넘어갔던 가문의 후손인 고운이 즉위하면서 고구려와 대연 사이의 전쟁은 일단락지어진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당시 대연이나 고운을 죽이고 새로 즉위한 풍씨 집안의 북연은 유주 지역을 효과적으로 관리하지 못 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즉, 겉으로는 대연에서 유주자사를 임명했겠지만 실제로는 허울뿐인 유주자사 였을 것이다.

그럼 그 유주 지역은 누가 차지했을까? 당시 북연을 크게 압박하면서 사방으로 진출하던 북위가 그 지역을 차지했었을까? 광개토호태왕은 유주 지역을 어럽게 차지하고 유주자사 진이 죽고나서 유주 지역의 영주권을 북위에게 그냥 넘겨줬을까? 주인장이 가장 의아해하는 부분이 바로 이 부분이다. 과연 고구려는 왜 이 지역을 쉽게 포기했을까? 고구려는 이후 유주 지배를 토대로 산동 지역의 남연과도 교류가 있었는데 태평어람이 이 기록이 남아 있다. 이것만 보더라도 대륙 깊숙히 영향력을 넓힐 수 있는 토대가 되는 유주 지역을 광개토호태왕이 왜 포기했고 장수태왕이 그 지역을 북위가 차지하게 가만 놔뒀을까?

주인장이 보기에 그 난하 일대를 두고 고구려는 오래도록 지배권을 행사했었다고 보여진다. 북위와 고구려는 분명히 접전한 흔적이 없고 또한 외교 기록으로 유추해 본 당시 정황으로는 북위가 고구려에 복속되어 있었다고 말해도 될 정도였다. 그런 상황에서 고구려는 유주 지배권을 왜 포기해야만 했을까? 양서는 오래도록 고구려의 태왕에게 영, 평 이주의 지배권이 있었다고 밝히고 있다. 김용만님은 이를 두고 단지 고구려의 지배욕을 반영하는 것일뿐 실질적인 것은 아니라고 한다.

주인장이 보기에 그렇게 오랜 기간까지 고구려가 이 지역을 온전히 차지했었다고 보기는 힘들다. 하지만 그런 기록이 전혀 근거없는 것이라고는 보지 않는다. 지금 주인장이 보는 유주지배는 최소한 장수태왕때까지는 고구려에서 실질적으로 지배했다고 보고 있다. 그리고 그 이후로도 난하 양안에 존재하는 13군 중 일부에 대해서 고구려가 여전히 지배력을 행사했었다고 보고 있다. 즉, 뚜렷한 주인이 없는 그 지역을 두고 원래 지배권을 가지고 있던 고구려가 관리하지 않았다는 것이 이상하다고 보는 것이다.

실제적으로 난하 동쪽과 대릉하 사이에 있었던 대연, 북연의 영지는 고구려가 초토화시킨(?) 이후 고구려로 귀복시키고 북위가 들어가 차지하게 되었다. 그렇게 봤을때 문제가 되는 것이 고구려가 유주를 차지했다고 하면 난하 동안과 대릉하 사이의 북위 영토가 본국과 단절되고 아니라고 한다면 고구려의 유주가 본국과 단절된 상황이 온다는 것이다. 혹자는 그런 말을 해서 그 주장이 옳지 않다고도 하지만 주인장은 그 본국과 단절된 정도를 별로 개의치 않는다. 얼마든지 그 지역은 해로로도 교류가 가능한 지역이다. 흡사 백제의 식민지가 한반도의 본국과 멀리 있는 대륙에 위치한 것과 마찬가지다.

주인장의 이런 생각은 확실히 근거도 부족하고 학계의 기존 생각과 많이 다른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어느 정도 가능성은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결론을 말한다면 고구려의 유주 지배에 대한 주인장의 생각은 오래도록 고구려가 그 지역에 대해 지배권을 놓지 않았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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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원문 : 뿌리아름역사동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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