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의 유주 지배 이후 대륙 동부는 고구려 문명권으로 새로이 편입되었으니 이 시기 덕흥리 고분의 유주자사 진의 무덤에서 우리는 국제적이고 개방적인 고구려 문명의 특징을 알 수 있다. 흔히 안악 3호분을 두고 '중국식 묘제다.' '동수는 중국인으로 이 지역을 통치하던 중국인이다.' 라는 말을 하는데 다시 한번 말하지만 고구려 문명은 다양하고도 복잡한 국제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으니 그런 주장은 어불성설이라고 할 수 있다.
고구려는 유주를 지배하면서 대륙 동부에 대해서 널리 영향력을 행사했다고 보여지는데 주인장이 쓴 글에서 다음과 같은 부분을 여기에 잠깐 옮겨 적으려 한다.
--(전략)...이렇듯 유주를 차지하고 난하 일대를 차지한 고구려는 모용운의 대연과도 교류를 맺으면서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였고 아울러 남연(南燕)*과도 교류를 맺었다.
'태평어람' 은 이를 두고, 숙신 등 30국이 있는데 '춘추(春秋)' 에 이르기를 '高句驢에서 千里馬와 곰가죽으로 된 障泥(馬具)를 남연에 헌납했다.' 라고 하였고 연왕은 이에 매우 크게 기뻐하여 물소와 앵무새를 가지고 답례하였다고 한다.
남연은 동진의 북쪽, 산동 지역과 하남성 일대에 위치했다고 보여지는데 그런 남연까지 고구려는 영향력을 넓혔다고 보여진다. 앞서 봤겠지만 남연은 역사가 채 10여년 밖에 안 되는 나라로 그다지 강력한 국가도 아니었는데 고구려가 그런 남연에게 방물은 헌납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남연이 고구려에 조공을 바친 것은 아닐까 생각한다.
당시 북위는 화북의 강자였던 후연을 대파하며 연이어 화북 지역에서 그 기반을 공고히 하고 있었는데 국력이 약한 남연이 당시 동북아 최강의 국력을 자랑하던 고구려에 손을 벌리지 않았을 리 없다--
이렇듯이 산동 지방에 대해서도 고구려는 영향력을 넓혔다. 그리고 이런 강력한 국가력을 바탕으로 고구려는 남조의 여러 왕조는 물론 북위와도 밀접한 교류를 가졌고 외교대국이라는 명칭에 걸맞게 천하를 경영했던 것이다. 당시 고구려는 당대 최강대국이었다. 흡사 오늘날 미국이 그러한 칭호를 받듯이 말이다.
*남연은 연이라고도 칭하는데 후연왕 모용수가 북위를 공격하다가 參合坡에서 대패하여 憤死하고 수도 中山이 북위군에게 함락되자 滑臺(河南省 滑縣)에 있던 수의 아우 慕容德이 398년 南燕國을 창건하고 燕王이라 칭하였다. 그러나 북위의 공략을 받고 400년 수도를 廣固(山東省 益都縣)로 옮긴 후 황제에 올랐다. 덕이 죽은 후 그의 조카 慕容超가 제위를 승계하였으나, 410년 동진의 장군 劉裕의 공격을 받고 멸망하였다. 초는 이때 포로가 되어 진나라의 수도 建康(南京)으로 압송된 후 살해되었다.
고구려는 유주를 지배하면서 대륙 동부에 대해서 널리 영향력을 행사했다고 보여지는데 주인장이 쓴 글에서 다음과 같은 부분을 여기에 잠깐 옮겨 적으려 한다.
--(전략)...이렇듯 유주를 차지하고 난하 일대를 차지한 고구려는 모용운의 대연과도 교류를 맺으면서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였고 아울러 남연(南燕)*과도 교류를 맺었다.
'태평어람' 은 이를 두고, 숙신 등 30국이 있는데 '춘추(春秋)' 에 이르기를 '高句驢에서 千里馬와 곰가죽으로 된 障泥(馬具)를 남연에 헌납했다.' 라고 하였고 연왕은 이에 매우 크게 기뻐하여 물소와 앵무새를 가지고 답례하였다고 한다.
남연은 동진의 북쪽, 산동 지역과 하남성 일대에 위치했다고 보여지는데 그런 남연까지 고구려는 영향력을 넓혔다고 보여진다. 앞서 봤겠지만 남연은 역사가 채 10여년 밖에 안 되는 나라로 그다지 강력한 국가도 아니었는데 고구려가 그런 남연에게 방물은 헌납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남연이 고구려에 조공을 바친 것은 아닐까 생각한다.
당시 북위는 화북의 강자였던 후연을 대파하며 연이어 화북 지역에서 그 기반을 공고히 하고 있었는데 국력이 약한 남연이 당시 동북아 최강의 국력을 자랑하던 고구려에 손을 벌리지 않았을 리 없다--
이렇듯이 산동 지방에 대해서도 고구려는 영향력을 넓혔다. 그리고 이런 강력한 국가력을 바탕으로 고구려는 남조의 여러 왕조는 물론 북위와도 밀접한 교류를 가졌고 외교대국이라는 명칭에 걸맞게 천하를 경영했던 것이다. 당시 고구려는 당대 최강대국이었다. 흡사 오늘날 미국이 그러한 칭호를 받듯이 말이다.
*남연은 연이라고도 칭하는데 후연왕 모용수가 북위를 공격하다가 參合坡에서 대패하여 憤死하고 수도 中山이 북위군에게 함락되자 滑臺(河南省 滑縣)에 있던 수의 아우 慕容德이 398년 南燕國을 창건하고 燕王이라 칭하였다. 그러나 북위의 공략을 받고 400년 수도를 廣固(山東省 益都縣)로 옮긴 후 황제에 올랐다. 덕이 죽은 후 그의 조카 慕容超가 제위를 승계하였으나, 410년 동진의 장군 劉裕의 공격을 받고 멸망하였다. 초는 이때 포로가 되어 진나라의 수도 建康(南京)으로 압송된 후 살해되었다.
다음검색
스크랩 원문 :
뿌리아름역사동아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