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골고원(蒙古高原, Mongolian Plat)'
우리는 흔히 몽골고원하면 막연한 대륙에의 동경을 꿈꾼다.
단군조선, 부여, 고구려, 발해 등으로 이어지는 한국사(史)의 대륙계 북조(北朝)와 함께 말이다. 저 드넓은 대륙을 말 달리면서 그 이름을 떨쳤을 우리의 선조들과 함께 몽골고원이라는 단어는 어떻게 보면 한국인들에게 막연한 목적 의식마저도 주지 않는가 한다.
주인장 역시 한때 그랬다. 몽골고원이라는 단어를 곧 대륙이라는 말과 연결시켜, 마치 몽골고원이 북방과 서역 등을 대표하기라도 하는 등 주인장은 오래전부터 이 몽골고원에 집착하기도 했었다. 그리고 이런 주인장의 집착은 오래전부터 '고구려(高句麗)' 라고 하는 한국사 최대의 '영토국가' 와 연결시켜 주인장을 오래도록 그 곳에서 헤어나오지 못 하게 했었다. 물론 단군조선이라고 하는 한국사 최초의 국가체제가 그 곳에 진출했다고는 하지만 아무래도 주인장의 공부가 짧았던 탓에 주인장은 단군조선보다는 고구려에 더 집착하지 않았나 싶다.
이 '몽골고원' 은 대략 지금의 '몽골인민공화국' 과 중국의 '네이멍구자치구(內蒙古自治區)' 를 합친 광범위한 지역에 걸쳐 있는 드넓은 지역을 가리키고 있으니 그 범위가 얼마나 넓은지는 익히 알고 있을 것이다. 더 나아가 그 경계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동쪽(東)은 과거 고구려가 선비와 숙신을 정벌해 부용국으로 삼았을때 고구려의 기병 군단이 넘었다고 하는 '대싱안링(大興安嶺)산맥', 서쪽(西)은 우리 민족, 동이족이라고 불릴만한 민족적 특징을 가진 집단이 발흥해 성장했다는 '알타이 산맥', 남쪽(南)은 대대로 대륙계 한족(漢族)의 북방 한계선으로 인식되어 온 '인산(陰山)산맥', 북쪽(北)은 툰드라와 침엽수림이 우거진 시베리아 남부의 '야블로노비산맥' 과 '타누올라산맥' 을 경계로 둘러싸인 거대한 분지가 바로 몽골고원이라고 불리는 지역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중에서도 오늘날 우리가 내몽골고원이라고 부르는 지역은 청(淸)대에 북쪽의 외몽골과 남쪽의 내몽골로 구분된 이후 그렇게 불리어져 왔으며 대대로 중국측 세력의 지배를 받던 지역이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북방 세력과 남방 대륙 세력의 접경지이자 가장 정치적으로 불안정한 지역이라는 소리다. 그 말은 그만큼 이 지역이 군사적, 국제적, 정치적으로 말이 많았고 그 중에는 고구려의 역할도 한몫 단단히 했을 것이다.
우리는 흔히 중국(中國), 하면 오늘날의 중국을 가리키는 것 뿐만 아니라 과거에 북쪽의 황하강과 남쪽의 양자강을 중심으로 한 대륙의 왕조들까지도 모두 싸잡아서 그렇게 말한다.
가령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지금으로부터 몇백년 전 당시 한반도와 만주의 패자였던 고구려는 북쪽의 오랑캐와 남쪽의 백제, 신라, 서쪽의 중국 등등과 끊임없이 패권 다툼을 하고 있었다...
뭐 이런 식으로 말이다. 하지만 중화인민공화국은 근세에 세워진 국가명일 뿐이다. 아마도 대대로 중국인들을 한족(漢族), 그들의 문화를 한문화(漢文化), 그들의 글자를 한문(漢文), 그들의 언어를 중국어 혹은 한어(漢語) 등으로 불리는 것처럼 중국이라는 개념도 오래도록 시간이 흐르면서 대륙을 뜻하는 포괄적인 언어로 바뀌었기 때문일 것이다.
주인장이 왜 갑자기 중국이라는 단어를 가지고 걸고 넘어지냐 하면 바로 내몽골고원의 역사? 라고까지 할 것은 없고 그 지역의 연고성에 대해서 잠깐 언급하기 위해서다. 주인장은 흔히 중국이라는 표현보다는 대륙, 대륙계 왕조라는 표현을 쓰곤 한다. 아무래도 남들에게 '민족주의자' 라고 불리는 주인장으로서는 중국이라는 표현이 달갑지 않다. 아마도 그런 표현을 쓰면 마치 과거로부터 지금까지 존재했던 청대 이전의 모든 왕조들을 두고 중국이라고 하고 그들의 역사를 중국사(史)라고 하면 예전부터 대륙계 왕조의 영토가 오늘날과 같이 거대했다는 오해가 나도 모르게 들기 때문일 것이다. 그 점이 주인장은 싫다.
내몽골고원은 대대로 북방 유목 민족들의 고장이자 고향이었다.
이 지역은 '흉노' 의 남방으로서 한제국을 압박한 지역이기도 하며 그 이후 등장하는 '선비', '오환' 등 북방 세력의 근거지이기도 했으며 '오호십육국' 의 발흥지이기도 하고, '북위' 라고 하는 북조 통일 왕조, '유연' 이라고 하는 몽골계 제국의 영토이기도 했으며 그 후로 등장하는 각종 북방 세력, 돌궐이나 위구르, 거란, 여진, 몽골 등의 영토였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청대 이전까지 이 지역은 대대로 북방 유목 기마 민족의 터전이었고 그들이 살아 숨쉬던 곳이었다.
물론 이들 지역에 남방 대륙계 왕조가 북진해 터전으로 삼았던 적도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중국사의 대부분이 북방 유목 민족의 수혈에 의해 유동적이고 활동적으로 전개되었다는 것에 비하면 새발의 피와도 같으니 이는 굳이 크게 언급하지 않으려고 한다. 주인장은 말하고 싶은 것은 북방계 초원 세력과 남방계 대륙 세력이 교차하는 그 지점에 고구려라고 불리는 거대한 동북방의 제국이 진출했다는 것이다. 그것을 지금 말하려고 하는 것이다.
대대로 흉노나 선비, 유연이나 돌궐 등의 초원에서 대제국을 이루었던 세력들은 그 정확한 영토를 명확하게 남기기 어려운 게 사실이다. 대부분 이동 세력을 하며 살고 있었고 그 유동적인 세력권은 항상 변하기 마련이었으니 말이다. 그리고 대부분 자연적인 지형 조건(강이나 산맥, 호수 등등)을 경계로 삼기도 했으니 말이다. 성곽을 갖추고 대규모 장성으로 선을 긋는 등의 영토 확장이 북방 초원에서는 보기 힘들뿐더러 이뤄지기도 힘들었기에 오늘날 우리가 고구려의 내몽골고원 서방 경계를 추측하는 것이 더 어려운 것이 아닐까 한다.
우리는 다행히 덕흥리고분에서 유주자사 진이라고 하는 고구려의 1급 고위 관리 무덤을 통해 고구려의 서쪽 경계에 대해서 어느정도 추측할 수 있다. 그 지배 기간을 떠나서 고구려가 4세기 말에서 5세기 무렵에 난하 너머 오늘날의 북경, 하북성 근방까지 고구려의 세력권으로 삼았고, 5세기 초에 남조에서 고구려를 영평, 즉 하북성 근방의 지배자로 인정하는 등의 기록을 통해서 고구려가 난하 근방을 영토화 하든, 세력권화 하든지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김용만님이 말씀하시길, 북위는 당시 고구려에 열세였고 고구려는 휘하 속민이었던 거란을 이용해 북위를 침범하고 점점 요서 지역으로 세력을 뻗쳐 난하는 물론 요서 지역에도 상당할 정도의 세력권을 형성했다고 하고 있습니다. 고구려는 당시 영주 지역을 습격해 '한상' 이라는 지방 유력자를 잡아오기도 하고 안주도독이던 '강과' 가 북위의 내분으로 북위를 침범한 적에게 고립되자 고구려로 대규모 망명을 하는 등 고구려의 위상이 당시 동북방에서 극에 달했다고 하고 있다.
그럼 그보다 더 넘어서 고구려의 세력은 미치지 않았을까?
이처럼 북경 지역을 비롯한 하북성과 난하 일대에 세력을 떨쳤던 고구려라면 과연 그 너머 내몽골고원과 더 나아가 외몽골고원 지역에는 어느 정도로 세력을 떨쳤을까? 물론 정확한 경계에 대해서는 주인장도 지도에 대고 선을 그을 정도로 확실히 추정하지는 못 한다. 다만,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을까 하는 추측을 해 볼 뿐이다.
주인장은 늘 고구려의 강성함과 연결지어 거란이라고 하는 속민에 대해서 언급하고는 한다. 고구려는 거란을 지배해 대륙을 지배했고 발해는 거란을 일부만 지배해 대륙 일부만 지배했었다. 즉, 거란 지배로부터 고구려의 대륙 지배는 시작된 것이라 할 수 있겠다.
이 거란이 흔히 '송막 지역' 이라고 하는 지역에 거주했다고 하는데 대릉하 유역인 이 곳이 바로 내몽골고원으로 들어가는 시발점이라 할 수 있겠다. 고구려는 이 지역을 지배했던 것이다. '위서 거란전' 은 386~396년 즈음에 북위의 토벌로 크게 깨진 거란이 고막해와 함께 대릉하 서북쪽인 송막 지역으로 들어와 살았다고 전하고 있다. 우리는 광개토호태왕비와 고구려본기를 통해서 광개토호태왕 시절 거란이 고구려에 복속했음을 알 수 있다. 북위는 물론 고구려 역시 북방으로의 진출을 용이하게 하기 위해 거란을 쳤던 것이다. 그후 거란은 거대한 두 강국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게 된다.
그런 거란의 운명에 대해서 보다 자세하게 말해주는 기록이 있다. 이 기록은 거란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말해주는 기록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 태화 3년(479), 고구려가 비밀리에 '유유(蠕蠕)' 와 공모하여 '지두우(地豆于)' 를 취해서 나누어 가지려 했다. 이것을 알고 거란은 자기 나라를 침략할까 두려워하여 '막불하물우(莫弗賀勿于)' 가 그 부락의 수레 3천 채와 인가 만여 호, 가축들까지 데리고 와서 위나라의 보호받기를 청해서 백랑수(白狼水-대릉하) 동쪽에 와서 살았다. 이들은 이로부터 해마다 조공을 바쳐 왔는데 그뒤 기근이 들었다고 보고하자, 고조(高祖)임금이 이를 불쌍히 여겨 만리장성 안의 시장에 와서 쌀을 사가도록 하였다 --
'막불하물우' 라는 거란의 추장은 5만여 명이라는 대규모 인구를 이끌고 북위에 의탁한다. 그럼 거란이 살고 있던 지역은 공백지가 된 것인가? 아닐 것이다. 고구려는 당시 유연, 즉 유유라는 비칭으로 불린 당시 북방 초원의 패자와 교류를 하였고 그로 인해 '지두우', 흔히 명마가 대량으로 산출되는 이 지역을 분할 통치하려고 했던 것이다. 지두우의 분할 통치 방법이나 통치 기간에 대해서는 주인장이 자세히 알지 못 한다. 하지만 이 시기 거란이 대규모로 이주해 간 것을 보면 실제 고구려의 세력권이 지두우가 있는 내몽골고원 깊숙히 뻗쳤던 것만은 사실인 것으로 보인다.
태화 3년이면 아직 북위가 화북 지역도 다 아우르지 못 한 상태이다. 기실, 고구려가 지두우를 분할하려고 했다는 것 또한 핑계일지도 모른다. 고구려의 끊임없는 요서 지역에 대한 지배 야욕을 보면 고구려는 대릉하 유역과 난하 유역에 대한 연고권을 영구히 확보하려고 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거란은 고구려의 희생양이 되느니 북위에 의탁하는 것을 택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잠깐 뿐이었다.
위서는 거란이 해마다 조공을 보내왔는데 기근이 들자 그들을 만리장성 이남에 와서 식량을 거래하기를 허락했다고 한다. 단순히 거래를 허락했다는 기록일까? 주인장은 아니라고 본다. 이 시기, 고구려는 송막 지역을 지배함은 물론, 지두우를 분할하고 북방 초원의 패자, 유연과 함께 몽골고원을 다스렸을 것이다. 그리고 거란에 대한 압박을 시도했고 거란은 이 시기 고구려에 밀려 다시 북위 내부, 장성 이남으로 밀려왔던 것으로 보인다. 즉, 5세기에 이르러 고구려가 내몽골고원 동부와 대릉하 유역에 대해서 지배적인 위치에 있었던 것이라 할 수 있다.
-- 후위(북위) 시대에 이르러 그들은 고구려에게 침략을 당해서 부락의 인구 만여 명이 중국에 붙이기를 원하여 백비하(白貔河-백랑수?)까지 나왔었다. 그 뒤에는 다시 돌궐에게 침입당해서 또 만 가구가 고구려에 의지하게 되었다 --
'수서 거란전' 또한 이를 증명한다. 바로 거란이 북위-고구려 시절처럼 후대에 오면서 돌궐-고구려 시절에도 양 강국 사이에서 줄타기 외교를 하면서 5만여 명이라는 대규모 인구가 양측 사이를 왔다갔다 하고 있다는 소리다. 거란은 고구려 말기로 오면서 당에 의해서도 그 세력이 쪼개진다. 그 결과 고구려는 거란 세력의 이탈로 멸망의 초석을 마련했고 당과 돌궐은 거란 지배로 대륙을 차지했었다. 이후 당은 돌궐까지 정벌했으나 거란 세력은 당에 반기를 들었고 돌궐의 재흥, 발해의 성장은 당이라고 하는 거대한 제국까지 붕괴시켜 버렸다. 즉, 거란과 내몽골고원은 불가분의 관계이며 그 지역을 차지한 자가 천하를 차지하는 초석을 마련했다고 주인장은 생각한다. 흡사 한반도의 한강 유역과 대륙의 황하 유역처럼 말이다.
몽골고원의 고구려군 정복로를 답사한 서영수님은 이렇게 말한다.
-- "고구려나 유연 모두 성장하는 제국들이어서 당시 군사력의 핵심이었던 말이 풍부한 지두우를 호시탐탐 노렸을 것이다. 말은 아무 곳에서나 자라지 않는다. 지두우는 중가리아 분지와 함께 중국 변방의 2대 말 산지로 꼽히는 곳이다. 양국은 직접 충돌을 피하면서 말 공급기지 확보라는 실리를 거두고 이곳을 양국의 완충지대로 설정한 것 아니냐는 생각이 든다." --
글쎄, 양측의 완충 지대라는 의미도 있겠지만 그것보다는 고구려의 대륙 지배의 초석이라는 의미 역시 강하지 않았을까 하는게 주인장의 생각이다. 여러 문헌 기록이나 고고학적 기록을 토대로 내몽골고원이 고구려의 영토였다는 생각을 갖게끔 하고 있다.
오늘날 내몽골고원에는 현지인들이 '까오리청(고려성)' 이라고 부르는 요왕조의 고성이 있고 '고려하' 라고 부르는 강도 흐르고 있다. 몽골에는 고려인의 석상으로 보이는 유물과 함께 고려인의 것으로 보이는 고성이 작게나마 모습을 보이고 있어 더더욱 고구려의 내몽골고원 진출에 근거를 마련하고 있다. 현재 요서 지역에서는 고구려의 지배 흔적이 확연히 보이고 있지만 내몽골고원 부근은 미약한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지명이라는 것은 일단의 세력이 직접 그 지역에 진출해 수십년간 거주하지 않고는 생기지 않는 것이다. 이것만큼 중요한 증거가 또 어디 있을까? 중국 동부, 흔히 동몽골이라고 하는 지역은 당시 고구려의 땅이었다. 그리고 고구려의 세력권으로서 오래도록 고구려인이 살아 숨쉬었던 곳이었다고 주인장은 말하고 싶다.
대강의 기록들을 통해 우리는 최소한 고구려가 시라무렌강(서요하)을 중심으로 하는 풍요로운 목초지를 토대로 서쪽으로 진출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송막 지역을 차지하고 동몽골 고원의 지두우를 차지했음을 알 수 있다. 지두우 지역은 앞서 말했지만 중국 변방에 위치한 2대 말 생산지역이었다. 고구려의 북방 초원 진출 결과 중 가장 확실하고도 뛰어난 업적이라고도 볼 수 있지 않나 한다.
훗날 '타타르' 라고 불리는 6만가구를 자랑하는 거대 북방 세력이 자리잡는 곳이 바로 이 곳 보이르호 일대다. 이 곳은 몽골고원에서 가장 풍요로운 초지를 자랑하는 곳이다. 오늘날 '메넨긴탈(풍요의 들판)' 이라 불리는 광대한 초원 지대는 몽골 최대의 말 산지이자 명마의 고향으로 유명한데 이 지역에 거주하던 타타르가 시라무렌강을 중심으로 움직이는 거란에 의해 밀려나게 되었다는 것은 유명하다.
즉, 고구려 역시 시라무렌강을 중심으로 이 곳까지 진출했을 가능성이 높다. 몽골고원, 즉 내몽골고원 너머 외몽골고원까지 고구려가 진출했을 가능성은 무궁무진하다. 고구려가 말기에 돌궐과 신성에서 격돌한 것만 봐도 고구려의 영토가 단순히 요양 지역에만 머물러 있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주인장은 아직 지도에 선을 그을 정도로 내몽골고원에 대한 고구려 경계를 정하지 못 했다. 하지만 어느정도 멀리 내다보고는 있다. 고구려는 당시 천하에서 내노라하는 강대국이었다.
고구려하면 막연히 기분이 좋아지는 주인장이다.
내몽골고원에 대해서는 앞으로도 막연한 것에 그치지 않고 자세하게 공부할 생각이다. 그래서 고구려의 내몽골고원에 대한 보다 자세한 경계를 그리고 싶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쓰고 이만 고구려에 대한 명상이라도 할까 한다.
우리는 흔히 몽골고원하면 막연한 대륙에의 동경을 꿈꾼다.
단군조선, 부여, 고구려, 발해 등으로 이어지는 한국사(史)의 대륙계 북조(北朝)와 함께 말이다. 저 드넓은 대륙을 말 달리면서 그 이름을 떨쳤을 우리의 선조들과 함께 몽골고원이라는 단어는 어떻게 보면 한국인들에게 막연한 목적 의식마저도 주지 않는가 한다.
주인장 역시 한때 그랬다. 몽골고원이라는 단어를 곧 대륙이라는 말과 연결시켜, 마치 몽골고원이 북방과 서역 등을 대표하기라도 하는 등 주인장은 오래전부터 이 몽골고원에 집착하기도 했었다. 그리고 이런 주인장의 집착은 오래전부터 '고구려(高句麗)' 라고 하는 한국사 최대의 '영토국가' 와 연결시켜 주인장을 오래도록 그 곳에서 헤어나오지 못 하게 했었다. 물론 단군조선이라고 하는 한국사 최초의 국가체제가 그 곳에 진출했다고는 하지만 아무래도 주인장의 공부가 짧았던 탓에 주인장은 단군조선보다는 고구려에 더 집착하지 않았나 싶다.
이 '몽골고원' 은 대략 지금의 '몽골인민공화국' 과 중국의 '네이멍구자치구(內蒙古自治區)' 를 합친 광범위한 지역에 걸쳐 있는 드넓은 지역을 가리키고 있으니 그 범위가 얼마나 넓은지는 익히 알고 있을 것이다. 더 나아가 그 경계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동쪽(東)은 과거 고구려가 선비와 숙신을 정벌해 부용국으로 삼았을때 고구려의 기병 군단이 넘었다고 하는 '대싱안링(大興安嶺)산맥', 서쪽(西)은 우리 민족, 동이족이라고 불릴만한 민족적 특징을 가진 집단이 발흥해 성장했다는 '알타이 산맥', 남쪽(南)은 대대로 대륙계 한족(漢族)의 북방 한계선으로 인식되어 온 '인산(陰山)산맥', 북쪽(北)은 툰드라와 침엽수림이 우거진 시베리아 남부의 '야블로노비산맥' 과 '타누올라산맥' 을 경계로 둘러싸인 거대한 분지가 바로 몽골고원이라고 불리는 지역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중에서도 오늘날 우리가 내몽골고원이라고 부르는 지역은 청(淸)대에 북쪽의 외몽골과 남쪽의 내몽골로 구분된 이후 그렇게 불리어져 왔으며 대대로 중국측 세력의 지배를 받던 지역이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북방 세력과 남방 대륙 세력의 접경지이자 가장 정치적으로 불안정한 지역이라는 소리다. 그 말은 그만큼 이 지역이 군사적, 국제적, 정치적으로 말이 많았고 그 중에는 고구려의 역할도 한몫 단단히 했을 것이다.
우리는 흔히 중국(中國), 하면 오늘날의 중국을 가리키는 것 뿐만 아니라 과거에 북쪽의 황하강과 남쪽의 양자강을 중심으로 한 대륙의 왕조들까지도 모두 싸잡아서 그렇게 말한다.
가령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지금으로부터 몇백년 전 당시 한반도와 만주의 패자였던 고구려는 북쪽의 오랑캐와 남쪽의 백제, 신라, 서쪽의 중국 등등과 끊임없이 패권 다툼을 하고 있었다...
뭐 이런 식으로 말이다. 하지만 중화인민공화국은 근세에 세워진 국가명일 뿐이다. 아마도 대대로 중국인들을 한족(漢族), 그들의 문화를 한문화(漢文化), 그들의 글자를 한문(漢文), 그들의 언어를 중국어 혹은 한어(漢語) 등으로 불리는 것처럼 중국이라는 개념도 오래도록 시간이 흐르면서 대륙을 뜻하는 포괄적인 언어로 바뀌었기 때문일 것이다.
주인장이 왜 갑자기 중국이라는 단어를 가지고 걸고 넘어지냐 하면 바로 내몽골고원의 역사? 라고까지 할 것은 없고 그 지역의 연고성에 대해서 잠깐 언급하기 위해서다. 주인장은 흔히 중국이라는 표현보다는 대륙, 대륙계 왕조라는 표현을 쓰곤 한다. 아무래도 남들에게 '민족주의자' 라고 불리는 주인장으로서는 중국이라는 표현이 달갑지 않다. 아마도 그런 표현을 쓰면 마치 과거로부터 지금까지 존재했던 청대 이전의 모든 왕조들을 두고 중국이라고 하고 그들의 역사를 중국사(史)라고 하면 예전부터 대륙계 왕조의 영토가 오늘날과 같이 거대했다는 오해가 나도 모르게 들기 때문일 것이다. 그 점이 주인장은 싫다.
내몽골고원은 대대로 북방 유목 민족들의 고장이자 고향이었다.
이 지역은 '흉노' 의 남방으로서 한제국을 압박한 지역이기도 하며 그 이후 등장하는 '선비', '오환' 등 북방 세력의 근거지이기도 했으며 '오호십육국' 의 발흥지이기도 하고, '북위' 라고 하는 북조 통일 왕조, '유연' 이라고 하는 몽골계 제국의 영토이기도 했으며 그 후로 등장하는 각종 북방 세력, 돌궐이나 위구르, 거란, 여진, 몽골 등의 영토였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청대 이전까지 이 지역은 대대로 북방 유목 기마 민족의 터전이었고 그들이 살아 숨쉬던 곳이었다.
물론 이들 지역에 남방 대륙계 왕조가 북진해 터전으로 삼았던 적도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중국사의 대부분이 북방 유목 민족의 수혈에 의해 유동적이고 활동적으로 전개되었다는 것에 비하면 새발의 피와도 같으니 이는 굳이 크게 언급하지 않으려고 한다. 주인장은 말하고 싶은 것은 북방계 초원 세력과 남방계 대륙 세력이 교차하는 그 지점에 고구려라고 불리는 거대한 동북방의 제국이 진출했다는 것이다. 그것을 지금 말하려고 하는 것이다.
대대로 흉노나 선비, 유연이나 돌궐 등의 초원에서 대제국을 이루었던 세력들은 그 정확한 영토를 명확하게 남기기 어려운 게 사실이다. 대부분 이동 세력을 하며 살고 있었고 그 유동적인 세력권은 항상 변하기 마련이었으니 말이다. 그리고 대부분 자연적인 지형 조건(강이나 산맥, 호수 등등)을 경계로 삼기도 했으니 말이다. 성곽을 갖추고 대규모 장성으로 선을 긋는 등의 영토 확장이 북방 초원에서는 보기 힘들뿐더러 이뤄지기도 힘들었기에 오늘날 우리가 고구려의 내몽골고원 서방 경계를 추측하는 것이 더 어려운 것이 아닐까 한다.
우리는 다행히 덕흥리고분에서 유주자사 진이라고 하는 고구려의 1급 고위 관리 무덤을 통해 고구려의 서쪽 경계에 대해서 어느정도 추측할 수 있다. 그 지배 기간을 떠나서 고구려가 4세기 말에서 5세기 무렵에 난하 너머 오늘날의 북경, 하북성 근방까지 고구려의 세력권으로 삼았고, 5세기 초에 남조에서 고구려를 영평, 즉 하북성 근방의 지배자로 인정하는 등의 기록을 통해서 고구려가 난하 근방을 영토화 하든, 세력권화 하든지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김용만님이 말씀하시길, 북위는 당시 고구려에 열세였고 고구려는 휘하 속민이었던 거란을 이용해 북위를 침범하고 점점 요서 지역으로 세력을 뻗쳐 난하는 물론 요서 지역에도 상당할 정도의 세력권을 형성했다고 하고 있습니다. 고구려는 당시 영주 지역을 습격해 '한상' 이라는 지방 유력자를 잡아오기도 하고 안주도독이던 '강과' 가 북위의 내분으로 북위를 침범한 적에게 고립되자 고구려로 대규모 망명을 하는 등 고구려의 위상이 당시 동북방에서 극에 달했다고 하고 있다.
그럼 그보다 더 넘어서 고구려의 세력은 미치지 않았을까?
이처럼 북경 지역을 비롯한 하북성과 난하 일대에 세력을 떨쳤던 고구려라면 과연 그 너머 내몽골고원과 더 나아가 외몽골고원 지역에는 어느 정도로 세력을 떨쳤을까? 물론 정확한 경계에 대해서는 주인장도 지도에 대고 선을 그을 정도로 확실히 추정하지는 못 한다. 다만,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을까 하는 추측을 해 볼 뿐이다.
주인장은 늘 고구려의 강성함과 연결지어 거란이라고 하는 속민에 대해서 언급하고는 한다. 고구려는 거란을 지배해 대륙을 지배했고 발해는 거란을 일부만 지배해 대륙 일부만 지배했었다. 즉, 거란 지배로부터 고구려의 대륙 지배는 시작된 것이라 할 수 있겠다.
이 거란이 흔히 '송막 지역' 이라고 하는 지역에 거주했다고 하는데 대릉하 유역인 이 곳이 바로 내몽골고원으로 들어가는 시발점이라 할 수 있겠다. 고구려는 이 지역을 지배했던 것이다. '위서 거란전' 은 386~396년 즈음에 북위의 토벌로 크게 깨진 거란이 고막해와 함께 대릉하 서북쪽인 송막 지역으로 들어와 살았다고 전하고 있다. 우리는 광개토호태왕비와 고구려본기를 통해서 광개토호태왕 시절 거란이 고구려에 복속했음을 알 수 있다. 북위는 물론 고구려 역시 북방으로의 진출을 용이하게 하기 위해 거란을 쳤던 것이다. 그후 거란은 거대한 두 강국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게 된다.
그런 거란의 운명에 대해서 보다 자세하게 말해주는 기록이 있다. 이 기록은 거란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말해주는 기록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 태화 3년(479), 고구려가 비밀리에 '유유(蠕蠕)' 와 공모하여 '지두우(地豆于)' 를 취해서 나누어 가지려 했다. 이것을 알고 거란은 자기 나라를 침략할까 두려워하여 '막불하물우(莫弗賀勿于)' 가 그 부락의 수레 3천 채와 인가 만여 호, 가축들까지 데리고 와서 위나라의 보호받기를 청해서 백랑수(白狼水-대릉하) 동쪽에 와서 살았다. 이들은 이로부터 해마다 조공을 바쳐 왔는데 그뒤 기근이 들었다고 보고하자, 고조(高祖)임금이 이를 불쌍히 여겨 만리장성 안의 시장에 와서 쌀을 사가도록 하였다 --
'막불하물우' 라는 거란의 추장은 5만여 명이라는 대규모 인구를 이끌고 북위에 의탁한다. 그럼 거란이 살고 있던 지역은 공백지가 된 것인가? 아닐 것이다. 고구려는 당시 유연, 즉 유유라는 비칭으로 불린 당시 북방 초원의 패자와 교류를 하였고 그로 인해 '지두우', 흔히 명마가 대량으로 산출되는 이 지역을 분할 통치하려고 했던 것이다. 지두우의 분할 통치 방법이나 통치 기간에 대해서는 주인장이 자세히 알지 못 한다. 하지만 이 시기 거란이 대규모로 이주해 간 것을 보면 실제 고구려의 세력권이 지두우가 있는 내몽골고원 깊숙히 뻗쳤던 것만은 사실인 것으로 보인다.
태화 3년이면 아직 북위가 화북 지역도 다 아우르지 못 한 상태이다. 기실, 고구려가 지두우를 분할하려고 했다는 것 또한 핑계일지도 모른다. 고구려의 끊임없는 요서 지역에 대한 지배 야욕을 보면 고구려는 대릉하 유역과 난하 유역에 대한 연고권을 영구히 확보하려고 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거란은 고구려의 희생양이 되느니 북위에 의탁하는 것을 택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잠깐 뿐이었다.
위서는 거란이 해마다 조공을 보내왔는데 기근이 들자 그들을 만리장성 이남에 와서 식량을 거래하기를 허락했다고 한다. 단순히 거래를 허락했다는 기록일까? 주인장은 아니라고 본다. 이 시기, 고구려는 송막 지역을 지배함은 물론, 지두우를 분할하고 북방 초원의 패자, 유연과 함께 몽골고원을 다스렸을 것이다. 그리고 거란에 대한 압박을 시도했고 거란은 이 시기 고구려에 밀려 다시 북위 내부, 장성 이남으로 밀려왔던 것으로 보인다. 즉, 5세기에 이르러 고구려가 내몽골고원 동부와 대릉하 유역에 대해서 지배적인 위치에 있었던 것이라 할 수 있다.
-- 후위(북위) 시대에 이르러 그들은 고구려에게 침략을 당해서 부락의 인구 만여 명이 중국에 붙이기를 원하여 백비하(白貔河-백랑수?)까지 나왔었다. 그 뒤에는 다시 돌궐에게 침입당해서 또 만 가구가 고구려에 의지하게 되었다 --
'수서 거란전' 또한 이를 증명한다. 바로 거란이 북위-고구려 시절처럼 후대에 오면서 돌궐-고구려 시절에도 양 강국 사이에서 줄타기 외교를 하면서 5만여 명이라는 대규모 인구가 양측 사이를 왔다갔다 하고 있다는 소리다. 거란은 고구려 말기로 오면서 당에 의해서도 그 세력이 쪼개진다. 그 결과 고구려는 거란 세력의 이탈로 멸망의 초석을 마련했고 당과 돌궐은 거란 지배로 대륙을 차지했었다. 이후 당은 돌궐까지 정벌했으나 거란 세력은 당에 반기를 들었고 돌궐의 재흥, 발해의 성장은 당이라고 하는 거대한 제국까지 붕괴시켜 버렸다. 즉, 거란과 내몽골고원은 불가분의 관계이며 그 지역을 차지한 자가 천하를 차지하는 초석을 마련했다고 주인장은 생각한다. 흡사 한반도의 한강 유역과 대륙의 황하 유역처럼 말이다.
몽골고원의 고구려군 정복로를 답사한 서영수님은 이렇게 말한다.
-- "고구려나 유연 모두 성장하는 제국들이어서 당시 군사력의 핵심이었던 말이 풍부한 지두우를 호시탐탐 노렸을 것이다. 말은 아무 곳에서나 자라지 않는다. 지두우는 중가리아 분지와 함께 중국 변방의 2대 말 산지로 꼽히는 곳이다. 양국은 직접 충돌을 피하면서 말 공급기지 확보라는 실리를 거두고 이곳을 양국의 완충지대로 설정한 것 아니냐는 생각이 든다." --
글쎄, 양측의 완충 지대라는 의미도 있겠지만 그것보다는 고구려의 대륙 지배의 초석이라는 의미 역시 강하지 않았을까 하는게 주인장의 생각이다. 여러 문헌 기록이나 고고학적 기록을 토대로 내몽골고원이 고구려의 영토였다는 생각을 갖게끔 하고 있다.
오늘날 내몽골고원에는 현지인들이 '까오리청(고려성)' 이라고 부르는 요왕조의 고성이 있고 '고려하' 라고 부르는 강도 흐르고 있다. 몽골에는 고려인의 석상으로 보이는 유물과 함께 고려인의 것으로 보이는 고성이 작게나마 모습을 보이고 있어 더더욱 고구려의 내몽골고원 진출에 근거를 마련하고 있다. 현재 요서 지역에서는 고구려의 지배 흔적이 확연히 보이고 있지만 내몽골고원 부근은 미약한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지명이라는 것은 일단의 세력이 직접 그 지역에 진출해 수십년간 거주하지 않고는 생기지 않는 것이다. 이것만큼 중요한 증거가 또 어디 있을까? 중국 동부, 흔히 동몽골이라고 하는 지역은 당시 고구려의 땅이었다. 그리고 고구려의 세력권으로서 오래도록 고구려인이 살아 숨쉬었던 곳이었다고 주인장은 말하고 싶다.
대강의 기록들을 통해 우리는 최소한 고구려가 시라무렌강(서요하)을 중심으로 하는 풍요로운 목초지를 토대로 서쪽으로 진출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송막 지역을 차지하고 동몽골 고원의 지두우를 차지했음을 알 수 있다. 지두우 지역은 앞서 말했지만 중국 변방에 위치한 2대 말 생산지역이었다. 고구려의 북방 초원 진출 결과 중 가장 확실하고도 뛰어난 업적이라고도 볼 수 있지 않나 한다.
훗날 '타타르' 라고 불리는 6만가구를 자랑하는 거대 북방 세력이 자리잡는 곳이 바로 이 곳 보이르호 일대다. 이 곳은 몽골고원에서 가장 풍요로운 초지를 자랑하는 곳이다. 오늘날 '메넨긴탈(풍요의 들판)' 이라 불리는 광대한 초원 지대는 몽골 최대의 말 산지이자 명마의 고향으로 유명한데 이 지역에 거주하던 타타르가 시라무렌강을 중심으로 움직이는 거란에 의해 밀려나게 되었다는 것은 유명하다.
즉, 고구려 역시 시라무렌강을 중심으로 이 곳까지 진출했을 가능성이 높다. 몽골고원, 즉 내몽골고원 너머 외몽골고원까지 고구려가 진출했을 가능성은 무궁무진하다. 고구려가 말기에 돌궐과 신성에서 격돌한 것만 봐도 고구려의 영토가 단순히 요양 지역에만 머물러 있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주인장은 아직 지도에 선을 그을 정도로 내몽골고원에 대한 고구려 경계를 정하지 못 했다. 하지만 어느정도 멀리 내다보고는 있다. 고구려는 당시 천하에서 내노라하는 강대국이었다.
고구려하면 막연히 기분이 좋아지는 주인장이다.
내몽골고원에 대해서는 앞으로도 막연한 것에 그치지 않고 자세하게 공부할 생각이다. 그래서 고구려의 내몽골고원에 대한 보다 자세한 경계를 그리고 싶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쓰고 이만 고구려에 대한 명상이라도 할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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