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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강화도와 함께한 고구려 제해권 장악史

작성자나도사랑을했으면|작성시간06.08.18|조회수35 목록 댓글 0
'강화도(江華島)'

총 면적 302.14㎢, 남북 길이 30㎞, 동서 길이 16㎞에 해안선 길이가 무려 112㎞에 이르는 커다란 섬이 바로 강화도다. 지도를 보면 강화도 이외에도 교동도, 볼음도, 주문도, 석문도, 신도, 장봉도, 삼목도, 영종도, 용유도, 무의도, 우도, 연평도 등의 군도(群島)가 서해안 여기저기에 퍼져 있음을 우리는 알 수 있다.

그 중에서 강화도는 가장 클 뿐만 아니라 지정학적으로도 아주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북으로 예성강, 임진강, 한강의 한반도 중부의 3대강이 교차하는 지점이 바로 이 강화도이며 주변으로 연백평야, 김포평야 등이 자리잡고 있어 그야마로 천혜의 요충지라고 할 수 있는데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에 따르면 강화도호부는 '바다 섬 가운데 있는데, 동으로 갑곶나루까지 10리, 남으로 해안까지 40리, 서쪽으로 인화석진까지 26리, 북으로 승천부진까지 15리, 서울과의 거리는 135리.' 였다고 적고 있다.

강화도의 지정학적인 기록인데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지 않나 한다. 주인장같은 범인이 봐도 강화도의 중요성이 새삼 느껴지는데 귀인이 보는 강화도는 오죽하랴 하는 생각을 가만히 해 본다.

주인장이 오늘 말하려고 하는 것은 강화도와 고구려 해양사 일부에 대한 부분이다. 아직 주인장의 공부가 미진한지라 고구려 해양사에 대한 부분은 대부분 윤명철 박사님의 의견과 생각을 많이 따르고 있는 것이 사실이며 거기에 주인장 개인적인 생각이 반영되어 있음을 미리 알리고 싶다.

이 곳 강화도는 태고적부터 우리 민족과 함께 한 섬이었던 것 같다.

강화도 남부에 위치한 '마니산(摩尼山 - 468m)' 이 어떤 산인지는 다들 잘 알 것이다. 바로 우리 민족의 시조라고 할 수 있는 단군에 대한 천제를 드리는 제단이 위치한 곳이다. 왜 한반도 중부 서해안의 작은 섬에 단군에 제를 올리는 제단이 있을까? 이것은 마치 왜 남한산성에 온조대왕의 제를 올리는 사당이 있을까? 하는 의문과 비슷한 맥락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가져본다. 이 강화도는 일반인에게 아마 다음과 같은 이름으로 많이 알려져 있을 것이다.

'관미성(關彌城)'

http://100.empas.com/img/md/33/1333.jpg
- 경기 파주군 탄현면. 발굴 조사 현장 -

한때는 황해 연안에 위치했다고 하지만 파주시에서 성터가 발견된 뒤로는 이 곳이 새로운 관미성터로 부상하고 있는 실정이다. 하지만 주인장이 보기에는 임진강 연안의 파주시보다는(파주는 거의 내륙이라 할 수 있다) 강화도에 있다는 설을 지지하고 싶은 입장이다.

그럼 이제부터 강화도와 고구려에 대해서 간략하게 논해보기로 하자.

윤명철님은 강화도를 두고 다음과 같은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 동아지중해에서 가장 의미있는 역학관계의 核이고, 실제로 힘의 충돌과 각축전이 벌어진 곳은 '경기만' 이다. 황해도와 충청도 사이에 있는 한반도 최대의 만으로서 동아지중해에서 일본열도를 출발하여 압록강 하구와 요동반도를 경유하여 山東까지 이어지는 南北沿近海航路의 중간깃점이고 동시에 한반도와 산동반도를 잇는 東西橫斷航路와 마주치는 해양교통의 結節点이다.

또한 강화도를 거쳐 해주지역이나 옹진지역으로 북상하고 남으로는 남양만 아산만을 지나 충청도 지역으로 내려가는 서해연안항로의 중간경유지이기도 하였다. 더구나 농경지가 발달하여 경제적으로도 매우 유리한 위치에 있었다. 그 경기만의 심장부에 있는 곳이 강화도이다 --

즉, 강화도가 당시 '동아지중해(윤명철님은 황해를 두고 이런 표현을 사용하고 있는데 주인장도 이 단어 사용에 동의하는 바이다)' 의 핵인 '경기만'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심장부와도 같다는 소리이다. 그럼 과연 그러한지, 알아보도록 하겠다.

'삼국사기 지리지 신라' 는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기고 있다.

-- '해구군(海口郡)' 은 본래 고구려의 '혈구군(穴口郡)' 으로 바다 가운데 있는데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으며 지금의 '강화현(江華縣)' 이다. 거느리는 현은 셋이다. '호음현(冱陰縣)' 은 본래 고구려의 '동음나현(冬音奈縣)' 인데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으며 '혈구도(穴口島)' 안에 있고 지금의 '하음현(河陰縣)' 이다. '교동현(喬桐縣)' 은 본래 고구려의 '고목근현(高木根縣)' 으로 바다의 섬인데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으며 지금도 그대로 부른다. '수진현(守鎭縣)' 은 본래 고구려의 '수지현(首知縣)' 인데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으며 지금의 '진강현(鎭江縣)' 이다 --

그리고 '삼국사기 지리지 고구려' 역시 이와 같은 기록을 남기고 있다.

-- '혈구군(갑비고차甲比古次라고도 한다)' '동음나현(휴음休陰이라고도 한다)' '고목근현(달을참達乙斬이라고도 한다)' '수지현(신지新知라고도 한다)' --

이 기록들을 토대로 우리는 대강 강화도에 대한 명칭이 어떻게 바뀌어 왔는지를 알 수 있다. 혈구군은 갑비고차라고도 불렸다고 하는데 '대동지지(大東地志) 개성 강화부' 의 내용을 보면 고구려 이전, 백제 시대때 그렇게 불렸다고 한다. 그리고 이후 신라가 강화도를 차지하면서 경덕왕때 '해구군(海口郡)' 으로 고쳐졌고, 원성왕때에는 '혈구진(穴口鎭)' 으로 개명되었다는 사실이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과 '조선각도읍지(朝鮮各道邑志)' 에 유사하게 남아있어 사실을 전하고 있다.

그럼 이 관미성이 얼마나 중요하길래 윤명철님을 비롯한 해양사 전문가들이 이 강화도와 관미성에 매혹되는지를 알아보자.

주인장은 이미 고구려가 국초부터 수군을 보유했다고 생각한다. 하백의 세력으로 일컬어지는 강상수군을 두고 주인장은 '고구려의 수군' '고구려의 해상 상업 세력' '고구려의 좌식자' '고구려의 표국 세력' 등등 여러 가지 방향으로 연결시켰던 적이 있다. 물론 이 중에서 어느 것 하나라고 확실하게 단정짓고 있는 것은 아니며 연계성을 찾아서 핵심이 될만한 부분을 찾으려고 노력하고 있다.

국초부터 수군 활동도 했고 수군도 보유했다고 보는 고구려는 개인적으로 국조태왕-차태왕 시절을 겪으면서 조직적으로 정비되지 않았을까 한다. 그리고 그때 조직적으로 정규군으로 편제된 수군은 그 이후 3세기에는 서해안에서 외교 활동을 벌이고, 동해안에서 군사 활동을 벌이는 등 활발한 활동을 보이고 있다. 아울러 4세기로 넘어오면서 고구려는 적극적으로 이 수군을 활용하는 자세를 보인다. 각국의 해양 교류는 물론 해안 경비, 초계, 해전 등등에서 말이다. 그리고 그런 해상 활동이 극에 달하니 바로 광개토호태왕대의 일이다.

혈구군, 해구군, 혈구진, 갑비고차 등의 강화도 옛 지명을 보자.

바다의 구멍, 입구, 바다 입구의 요새, 예로부터 갑옷을 갖춘 섬 등등 강화도는 하나같이 군사적인 목적이나 전승과 연결되어 우리에게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이것은 강화도가 오래전부터 군사적인 요충지로서의 역사를 갖고 있었다는 말도 된다. 그럼 왜 이 강화도를 주인장이 강화도로 보고 있는지 이제부터 설명하도록 하겠다.

일단, 고구려와 백제사를 보면 알겠지만 4세기, 고구려가 관미성이라고 불리는 성을 함락하면서 한반도 중부에서 백제가 기를 펴지 못 하게 된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고국원태왕때 백제의 근초고왕이라고 하는 강력한 군주가 한강에서 강력한 중앙집권국가를 경영하고 북진을 거듭해 남평양(장수산성으로 비정 중)에서 적국의 왕을 전사시킨 것과 사뭇 다른 양상이다. 주인장은 한강을 두고 온조백제의 힘의 원천이자 발전의 근원지라고 표현한다. 그리고 그런 온조백제의 발전의 근원지인 한강 유역을 지키는 임무를 띈 곳이 바로 이 강화도인 것이다.

'삼국사기' 를 둘러보자.

-- 광개토호태왕 원년(392) 겨울 10월에 백제의 '관미성' 을 쳐서 함락시켰다. 그 성은 사면이 깍아지른 절벽이고 바닷물이 둘러 있어 왕이 군사를 일곱 갈래로 나누어 20일 동안 공격해서야 함락시켰다 --
-- 진사왕 8년(392) 겨울 10월에 고구려가 관미성을 쳐서 함락시켰다 --

고구려본기는 비교적 자세하게, 백제본기는 짧게 관미성 관련 전투 기록을 적고 있다. 그런데 이보다 앞서 이런 기록이 있어 눈에 띈다.

-- 진사왕 3년(387) 가을 9월에 말갈과 관미령에서 싸웠으나 이기지 못 하였다 --
-- 진사왕 7년(391) 가을 7월에 나라 서쪽의 큰 섬에서 사냥했는데 왕이 친히 사슴을 쏘아 맞혔다 --

고구려의 관미성 함락 5년 전에 '관미령' 이라는 고개(嶺)가 등장하고 있는 것이다. 마니산, 고려산, 낙조봉, 혈구산 등의 4백여m에 달하는 산들이 여기저기 강화도에 포진해 있는 것을 감안한다면 고구려는 이미 고국양태왕 시절부터 강화도에 대해서 지속적으로 정복 야욕을 드러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말갈이라는 단어는 다들 알겠지만 고구려와 대치해서 써도 무관할 정도이기 때문에 여기서는 말갈을 고구려 휘하 예속군이라는 뜻으로 사용하기로 하겠다.

말갈과 관미령에서 싸웠다고 하는데 관미성이 아닌 것으로 봐서 관미성을 침입한 고구려군을 백제가 공격했든, 그 지역의 백제 요새를 고구려군이 공격했든 전투가 벌어졌고 백제군이 패한 것으로 보인다. 이 전투 기록을 봤을때 이미 강화도에 대해 고구려군이 발을 디딜만큼의 여지가 생기게 되었고 이후 고구려군의 대대적인 상륙전에 의해 관미성이 함락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진사왕 7년조의 사냥 기록이 보이는데 이것은 강화도에서 진사왕이 무력 시위 혹은 군대 사열을 했다는 것을 표현한 것으로도 보인다. 진사왕은 친히 활을 쏴서 사슴을 잡았다고 한다.

바다로 사면이 둘러싸인 성을 일곱갈래로 공격해 20일만에 겨우 함락했다고 하는데 만약 전부 수군만 동원됐다면 불가능한 작전이었을 것이다. 이미 고구려군은 관미성을 공격하기 위한 교두보를 마련했을 것이고 그 상태에서 수륙 양군이 무려 일곱 갈래에서 공격했는데도 20일이나 걸렸다는 것은 관미성이 얼마나 험준한지를 알려주는 기록이라고 할 수 있겠다. 현재 파주는 내륙에 위치한 지역이며 바다와 맞닿아 있기는 커녕 강물과도 맞닿아 있기 힘든 지역에 위치해 있으니 이 얼마나 우스운 일인가.

주인장은 일곱 갈래로 성을 공격했다는 기록을 통해서 당시 관미성에 총 7개나 그 이상의 관문이 있었던 것은 아닐까 한다. 분명 관미성이 해안에 위치한 성이었다면 해안 요새는 물론, 항구까지도 겸비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본다면 성의 규모는 상당했을 것이고 주둔군과 공격군 또한 만 단위가 넘어가는 대규모 군대였을 것이다. 관미성에서 당시 고구려군과 백제군의 사상자도 수천명에 달했을 것이며 20일이나 계속되었다고 기록을 남긴 것으로 봐서 전투가 굉장히 치열했음을 알려주고 있다. 보면 알겠지만 고구려본기는 전투에서 그 기간을 잘 기록하지 않는다. 그말은 관미성 전투가 남다른 의의를 가지고 있다는 소리다.

광개토호태왕비 역시 고구려본기와 마찬가지로 관미성 함락에 대한 기록이 있다. 비문에는 관미성이 아니라 '각미성(閣彌城)' 이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대개 동일한 지명으로 보고 있으며 고구려식 표기라고도 생각된다. 관미성의 위치에 대해서는 여러 의견들이 많은데 대개 '해안 방어선과 연결된 지역의 연장선상에서 이해' 하는 공통점을 보이고 있다. 주인장 역시 학계의 대세를 따라 관미성을 강화도로 보고 있다. 실제로 관미성를 고구려에게 뺏기고 백제측이 어떤 행동을 했느냐를 보면 이 지역이 강화도라고 하는 경기만 최고의 심장부라는 것을 더더욱 알수 있을 것이다.

-- 아신왕 2년(393) 가을 8월에 왕이 진무에게 이르기를 "관미성은 우리 북쪽 변경의 요충인데 지금 고구려의 소유가 되어 있다. 이야말로 내가 매우 유감으로 여기는 바이니 그대도 마땅히 마음을 기울여 치욕을 씻어야 할 것이다." 라고 하였다. 마침내 군사 1만 명을 거느리고 고구려의 남쪽 변경을 치고자 계획하였다. 진무가 몸소 사졸들보다 앞에 서서 화살과 돌을 무릎쓰고서 석현성 등 5개 성을 회복할 것을 작정하고 먼저 관미성을 에워쌌다. 고구려 사람들이 성을 둘러 견고하게 지키자 진무는 군량 수송이 이어지지 않는다 하여 군사를 이끌고 돌아왔다 --
-- 광개토호태왕 2년(393) 가을 8월에 백제가 남쪽 변경을 침노하므로 장수에게 명해 막게 하였다 --

무려 1만이나 되는 대군을 이끌고 북진한 백제군은 관미성에서 기가 꺽인다. 이는 이후 벌어진 수곡성, 패수 전투에서 백제군이 속소무책으로 당하면서 무수히 많은 인명 피해를 입은 것만 봐도 잘 알 수 있다. 진무가 관미성 전투에서 물러나면서 말하기를 군량 수송의 어려움을 들었다. 그렇다. 섬에 있는 성을 공격하는데 군량 수송은 물론 상륙전 역시 당연히 수군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하지만 그들은 관미성을 함락하지 못 했고 이후 벌어지는 전투에서도 군량 수송을 이유로 패했을 소지가 크다. 아신왕이 북변 요새로서 고구려의 소유가 된 것을 심히 안타까워하던 관미성은 백제가 끝내 되찾지 못 하고 고구려의 전진 수군 기지로 활용되었을 것이다.

기실, 관미성 전투 이전에도 강화도는 양측의 서해 제해권 장악의 필수 요소였을 것이며 고구려로서는 한강 유역의 온조백제를 치는데 있어서 필수적인 조건이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백제로서는 황해도 이북 고구려의 남방을 치는데 이 강화도가 필수적인 조건이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기록상으로는 양측의 강화도를 둘러싼 대립이 어떠했는지 과정과 결과를 살필만한 것은 보이지 않고 있어 안타까울 뿐이다.

이상하게 진사왕 시절부터 백제는 해안 방어선에 대해 강화하는 기록이 나온다. 진사왕은 즉위하자마자 다음해에 장정들을 모아 청목령-팔곤성-해안선에 이르는 지역에 관방을 설치하였고 곧 고구려의 침공은 시작되었다. 이는 이전 근초고왕때까지만 해도 백제가 절정기의 국력을 자랑하며 북방으로 진출하던 시기였고 진사왕 무렵부터 그런 백제의 북진 야욕이 한풀 꺾이면서 이제는 오히려 수세로 돌아섰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근초고왕때는 백제군이 황해도 지방의 예성강 근방을 자유자재로 돌아다니면서 군사 활동을 벌이는 모습이 보이지만 이후 그런 모습은 찾아보기 힘든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관미성 함락은 이후 한성에 자리잡아 수백년간 한강 유역의 패권을 잡고 있던 온조백제를 멸망에 이르게 한다.

관미성 함락으로 인해 한반도 중부의 제해권을 장악한 고구려군은 대규모 수군과 지상군으로 상륙전을 감행해 금강 유역까지 단숨에 남진하기 시작한다. 그 결과 전방이 뚫린 상태에서 비류백제는 멸망하고 그 잔여 세력은 각지로 흩어지게 된다. 맥아더 장군의 인천 상륙작전으로 인해 6.25 동란이 전세가 획기적으로 바뀌었다면 관미성 전투 이후 금강 유역 상륙 작전으로 한반도의 역사는 획기적으로 바뀌었다. 금강 유역이 고구려군에게 짓밟히고 한반도는 곧 온천지가 전쟁의 폐해를 겪게 된다.

앞서 '책계왕때(286)' 백제는 '아단성' 과 '사성(蛇城)' 을 수리해 북으로 고구려의 위협에서 벗어나려고 했었다. 이 사성은 훗날 '개로왕때(475년 이전 어느때)' 다시 등장하는데, 왕이 강을 따라 둑을 세워 사성 동쪽에서부터 숭산 북쪽까지 이르게 했다는 것이다. 이 기록은 당시 백제의 해안 방어 시설에 대한 단면을 엿보게 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아신왕 이후 백제는 감히 북으로 고구려를 도발할 생각을 하지 않는다. 50여 년동안 백제는 고구려에 대항조차 하지 못 한다. 이는 아마도 한강으로 들어오는 강화도, 혈구도에서 한강 깊숙히 백제의 심장부를 노리는 고구려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개로왕때는 백제가 대륙에서 활동을 재개함과 동시에 활발한 외교전을 펼치고 고구려와도 대립하게 된다. 그 시기에 개로왕이 했던 것이 바로 사성부터 동쪽 숭산까지 해안선을 따라 쌓은 강둑이었다.

강화도를 뺏기고 백제측에서 했던 것은 최소한의 피해를 막는 것이었을 것이다. 대개 풍납토성을 비롯한 성들이 한강변을 따라 거대한 장성의 일익을 담당했을 것으로 생각한다. 여담이지만 주인장은 이 풍납토성을 백제의 도성으로 보지 않는다. 단지 경제, 교통의 요지로 보고 있을 뿐이다. 풍납토성은 군사적으로 방어의 역할이 산성에 비해 현저히 떨어지는 평지성이다. 이런 평지성은 북방 유목 민족이 성곽 도시의 개념으로 쌓아 후퇴가 용이하게끔 쌓지 않는 이상, 방어적인 목적을 크게 이루지는 못 할 것이라고 주인장은 생각하고 있다.

개로왕의 이런 노력은 물거품처럼 사라진다.

-- 장수태왕 63년(475) 가을 9월에 왕이 군사 3만명을 거느리고 백제를 침공해 그 왕도 한성을 함락시켰으며 그 왕 부여경을 죽이고 남녀 8천 명을 잡아서 돌아왔다 --
-- 개로왕 21년(475) 가을 9월에 고구려왕 거련이 군사 3만명을 거느리고 와서 왕도 한성을 에워쌌다. 왕이 성문을 닫고 나가 싸우지 못 하였다. 고구려 사람들은 군사를 나누어 네 갈래 길로 끼고서 공격하였다. 또 바람을 타고 불을 놓아 성문을 태우니 사람들의 마음이 위기감과 두려움에 휩싸여 혹간 성을 나가 항복하려는 이들도 있었다. 왕은 형세가 군색해 어찌할 바를 몰라하다가 기병 수십명을 거느리고 성문을 나가 서쪽으로 달아났는데 고구려 사람들이 쫓아와 살해하였다 --

'삼국사기' 는 당시 한성이 일사천리로 짓이겨 들어오는 고구려군에 의해 쉽게 정복당했다고 적고 있다. 이는 다 한강의 외측을 지키던 강화도가 고구려군에 의해 경영되었기 때문이라고 볼 수 밖에 없다. 해상에서 백제군은 그 어떤 고구려군의 군사 작전을 막아내지 못 하였다.

이 기록은 '일본서기 웅략천황조' 에도 남아 있다.

-- 웅략천황 20년 겨울, 고구려왕이 크게 군사를 일으켜 백제를 쳐 멸망시켰다. 그때 조금 남은 잔병들이 창하(倉下-곳집 아래)에 모여 있었다. 군량은 이미 다 하고 근심하고 울 뿐이었다. 고구려의 여러 장수가 왕에게 "백제인의 심정은 뜻밖으로 이상합니다. 신이 볼 때마다 저도 모르게 마음이 스스로 무디어집니다. 다시 퍼지는 것이 아닙니까? 청컨대 쫓아가 없앱시다." 라고 말하였다. 왕이 "불가하다. 과인은 백제국은 이론국의 관가(官家)로서 유래가 오래 되었다고 들어왔다. 또 그 왕이 천황을 섬기고 있다. 이웃의 나라가 다 아는 바다." 라고 말하였다. 드디어 그만두었다 --

이 기록은 왜곡된 부분을 제하면 고구려군이 당시 백제를 쳐 사지에까지 몰아넣었다는 사실을 알게 해 준다. 그리고 일본서기는 '백제기(百濟記)' 를 인용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 개로왕 을묘년(475) 겨울, 맥(고구려)의 대군이 와서 대성(한성)을 친지 7일 7야에 왕성이 함락되어 드디어 '위례' 를 잃었다. 국옹 및 대후, 왕자 등 다 적의 손에 죽었다 --

참혹했다. 일주일간을 버티던 백제군은 모두 패전하였다. 관미성은 과거 무적의 군대라고 불리는 광개토호태왕 휘하 고구려군에 의해 20일간이나 버티던 천혜의 요지였다. 그런 관미성이 사라지자 백제 도성은 채 일주일도 버티지 못해 함락당하고 한강 유역은 고구려군에 의해 유린되어 이후 고구려가 관리하게 된 것이다.

주인장은 오늘 강화도와 관미성에 대해서 간략하게 알아봤다. 고구려가 세계적인 북방 대국으로 거듭나기 위해서 주인자은 거란 지배가 필수적이었다고 말하곤 한다. 아울러 고구려가 세계적인 해상 제국으로 거듭난 시초는 바로 한반도 중부의 강화도 지배부터라고 주인장은 과감히 말하고 싶다. 강화도야말로 고구려와 백제, 신라의 해상력 발전에 크게 기여한 일등공신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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