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대 중반에 이르기까지 미국 국내에서 팔리는 총 의류의 약 70%가 가먼트 디스트릭트(Garment District)라고 불리는 뉴욕의 맨해튼 중심지역에서 디자인되고 만들어졌다. 이곳에서 만들어진 옷들이 전국으로 운송된 것이다. 이 지역의 조업환경은 아주 열악하여 일찍이 1900년부터 벌써 노조가 결성될 정도였는데, 갱들은 이 노조를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파업 등, 노동자들의 단체행동을 막아주는 대신 의류 회사들로부터 일정한 사례비를 받을 수 있었다.
1955년의 가먼트 디스트릭트
갱들이 노동자들을 통제하는 힘은 물론 폭력이었다. 그러나 공식적인 자리에서 갱들이 직접 노조원을 다루는 일은 없었고 모든 것이 노조 고위층의 명령이라는 형식을 통해서 내려왔다. 항의하는 사람들은 어느 날 어두운 골목길에서 폭행을 당하거나 그래도 조용히 있지 않으면 어느 일요일 집에서 쉬고 있을 때에 부엌 창문으로 총알이 날아 들어오곤 했기 때문에 노동자들은 억울함을 참고 집행부의 지침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가먼스 디스트릭트에서의 의류 운송도 큰 이익을 남길 수 있는 대상이었다. 옷감이 맨해튼으로 들어와 한 공장에서 재단된 다음 다시 운반되어 바느질 공장으로 가고, 완성품이 되어 다시 각지의 옷 가게나 쇼핑센터로 배달되는 전 과정에서 트럭이 이용되는데, 이 운반트럭이 갱들의 수중에 있었던 것이다. 비싼 운임을 요구하는 갱들의 트럭에 일을 맡기지 않으면 상품의 운반이 중단되거나, 운송되는 과정에서 상품이 없어지는 일이 발생하므로 울며 겨자 먹기로 그들에게 일감을 주지 않을 수가 없었다. 갱들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는 다른 트럭을 사용해보고자 시도하는 사업자에게 좋지 않은 일들이 생긴다는 것 역시 불을 보듯 명백한 사실이었다.
즉, 루이스 부챌터는 가먼트 디스트릭트의 의류노조뿐 아니라 그곳의 트럭운전수 노조까지 장악함으로서 사실상 당시의 미국의 전 의류산업을 장악하고 있은 셈이었다. 그가 이 사업을 통해서 벌어들이는 수입은 1년에 100만 달러 또는 그 이상이었던 것으로 집계되고 있다. 이렇게 노동조합을 장악하여 그곳으로부터 이익을 뽑아내는 것은 미국 전역에 걸친 마피아의 주요 사업이었다. 또 다른 예를 보면, 뉴욕 브루클린 부두의 항만노조는 그 노조의 보스가 바로 그 유명한 알버트 아나스타샤의 친동생인 안토니 아나스타시오(Anthony Anastasio)였고, 안토니 아나스타시오는 전미 항만노조(조직범죄와 관련된 혐의로 1953년에 전미 노동 단체인 AFL-CIO로부터 축출된다)의 부회장직을 맡고 있었으니 이 노조에 대한 마피아의 영향력을 충분히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겠다.
안토니 아나스타시오
위에서 예를 든 사례뿐 아니라 건설노동자 노조, 청소부 노조, 연극 및 영화 관련자 노조, 호텔 및 레스토랑 종업원 노조, 바텐더와 주류 도매상 노조, 요리사 노조, 택시운전수 노조 등 수많은 노동조합이 있었는데 이들 중 갱들의 입김이 닿지 않는 곳은 거의 한군데도 없다고 생각하면 될 것이다. 브루클린 부두의 항만노조는 그 부패가 워낙 유명하여 영화의 소재로까지 되기도 하였는데 안토니 아나스타시오 이전에는 역시 마피아의 일원인 에밀 까마르도(Emil Camardo)가, 그리고 1963년에 안토니 아나스타시오가 사망한 이후에는 그의 사위이며 갬비노 패밀리의 카포레짐인 안토니 스코토(Anthony Scotto)가 대를 이어 전미 항만노조의 부회장직과 브루클린 항만노조의 보스 자리를 맡았다.
안토니 스코토(왼쪽)
항만노조로부터는 또 어떤 방법으로 이익을 만들 수 있을까? 위에서도 언급하였지만 당시 뉴욕은 미국 산업의 중심지였다. 뉴욕 항구의 물동량은 미국으로 들어오는 전체 화물의 60 내지 70%를 맡고 있었고, 그 화물을 부리는 일을 하는 항만 노동자들의 단체가 바로 항만노조였다. 이는 곧 노동자들이 파업이나 태업을 해버리면 화물이 부려질 수가 없다는 뜻이다. 따라서 갱들은 이 항만노조를 장악함으로써 화물선의 선주나 상품의 수입회사로부터 돈을 뜯어낼 수 있었다.
비싸거나 귀한 화물인 경우에는 그것이 도둑맞아 없어지는 하이재킹도 일어난다. 항만관리청에는 모든 화물의 내용을 미리 신고하도록 되어 있고 또 이것은 서류로 남겨지므로 값비싼 화물이 때로 홀연히 사라질 수 있다는 것은 충분히 이해가 가는 일이다. 또한 부두에 정박한 배의 안전을 보장해주는 대신에 받는 사례비도 있었다. 보호비를 내지 않은 선박에서는 간혹 폭발사고 등의 안전사고가 일어나는 수가 있었으므로 이것 또한 내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그밖에 항구를 통하여 이루어지는 또 하나의 중요한 사업은 밀수와 밀입국이었다. 금주법 시기 동안은 밀주가 아닌 유럽 각국에서 수입되는 오리지날 와인, 위스키, 코냑 등은 부르는 것이 값일 정도였다. 이러한 술들의 밀수입이 쉽게 이루어질 수 있었던 것은 모두가 항만의 하역작업을 총괄하는 항만노조의 부패 때문이었다.
물론 술만이 밀수되는 것은 아니었다. 다른 대표적인 상품으로 헤로인 등 마약이 있다. 당시 마약이 미국으로 반입되는 루트는 터키나 중동지역의 마약 원료가 모르핀으로 만들어져서 프랑스의 마르세이유로 간 다음 다시 헤로인으로 정제되어 대서양을 거너는 정기화물선 편을 통하여 뉴욕으로 운반되는 방식이었다. 이것이 바로 소위 프렌치 커넥션이다. 진 해크먼이 형사로 열연한 <프렌치 커넥션>이라는 영화도 있었다. 마약에 대해서는 다음 기회에 다시 이야기하기로 한다.
영화 [프렌치 커넥션]
그리고 사람도 밀수입되고 있었다. 시실리 인으로 미국에서 새 삶을 찾아보고자 하는 사람들은 매우 많았다. 1920년대에 들어와 이탈리아의 집권자가 된 무솔리니는 무자비하게 마피아를 탄압하였고 그것을 피해 사람들은 주로 신대륙인 미국으로 건너오기를 원하였다. 미국에서는 형제들이 무제한으로 돈을 벌고 있다는 소식을 자주 전해 듣고 있었기 때문이다. 갱들은 일정액의 수수료를 받고 그들을 밀입국시켰으며, 그렇게 해서 이 나라에 들어온 시실리 인들의 대부분이 다시 갱들의 조직원이 되었다.
요컨대 마피아들에게는 모든 것이 수입을 올릴 수 있는 대상이었다. 그들의 오리엔테이션은 오직 돈이었으며, 영화나 소설에서 우리가 흔히 접할 수 있는 이유 없이 총 쏘기와 사람 죽이기를 밥 먹듯이 하는 갱 조직은 한마디로 상상의 산물이거나 아니면 뿌리가 없는 건달들이다. 마피아의 히트에는 단 두 가지의 이유가 있을 뿐이다. 그 하나는 그들의 사업에 방해가 될 때, 그리고 또 하나는 그들 자신의 목숨이 위험할 때이다.
노조를 통한 갱들의 사업, 또는 노조와 갱단간의 결탁에 대한 또 하나의 예가 트럭운전수 노조인 팀스터(Teamster)이다. 위에서 맨해튼의 트럭운전수 노조를 루이스 부챌터가 장악하고 있다고 하였는데, 이러한 지역 단위의 트럭운전수 노조가 모이고 모여, 전 미국 규모의 조합으로 커진 것이 바로 팀스터이다. 전미 팀스터의 제3대 회장으로 제임스 호파(James R. Hoffa)가 재직하고 있을 때가 팀스터 노조와 조직범죄와의 연합이 가장 긴밀하였을 때였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결국 제임스 호파는 그와 관련하여 1963년에 유죄판결을 받고 연방 형무소에 수감되게 되는데, 호파와 마피아의 스토리는 너무나 유명하여 그 사연이 영화화된 것이 바로 잭 니콜슨과 대니 드비토가 주연한 <호파>이다. 팀스터의 제6대 회장인 재키 프레서(Jackie Presser)와 마피아의 관련도 후에 영화화되었다.
팀스터의 마크. 각 지역마다 차이는 있으나 공통적으로 말 두마리의 머리와 수레바퀴를 마크로 사용한다.
제임스 호파
영화 '호파'. 잭 니콜슨과 대니 드비토의 명연기가 돋보이지만 지루한 얘기이다.
재키 프레서
재키 프레서를 소재로 1992년에 만들어진 영화 '팀스터 보스'
그렇다면 이렇게까지 노동조합이 부패할 동안 경찰과 정치가들은 과연 무엇을 하고 있었던가? 비단 노동조합 문제뿐이 아니다. 금주법 시기 동안 수천, 수만 곳의 비밀 술집이 번창하고 있었는데, 이를 단속하고 법질서를 지켜야 할 경찰은 어디로 갔으며, 시민의 안녕을 지켜줄 최종 책임을 지고 있는 정치가들은 어느 곳으로 눈을 팔고 있었던가? 그 유명한 미국의 FBI는 해야 할 일은 않고 그냥 팔짱만 끼고 서있었던 것인가? 여기에 대한 답을 말하자면 그래도 당시의 모든 경찰과 정치가들이 다 갱으로부터 매수되었던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경찰 등 사법관리들의 상당수가 조직 범죄단의 자금력에 의하여 매수되어 있었으며, 정치가들의 경우도 거의 마찬가지였다.
원래 미국의 정치에는 예로부터 강력한 실력을 가진 보스가 지배하는 정치세력이 있었다. 일종의 막후 실력자들의 집단이라고 할 수 있으며, 특히 지방의 정치문대에서는 이러한 세력의 입김이 매우 셌다고 한다. 이들 중 특별히 뉴욕 민주당의 것을 태머니 홀(Tammany Hall)이라 하는데 이것은 단지 뉴욕뿐 아니라 전국으로 그 세력을 뻗치고 있었다. 이들 막후 세력들은 미국의 정가, 관가에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으며, 뉴욕 주지사였던 프랭클린 루즈벨트(제32대 미국 대통령)가 1932년의 대통령 선거에서 이 태머니 홀에 대하여 반기를 들고도 대통령으로 당선되기 전까지는 대통령 후보 지명 등 대통령 선거에서도 막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뉴욕 맨하튼에 있었던 민주당사 태머니 홀. 지금은 영화학교로 쓰이고 있다.
이들은 또한 때로 갱들 간의 분쟁을 조정해주는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1903년 8월에 일어났던 파이브 포인트 갱단과 몽크 이스트맨 갱단 사이의 전쟁은 이 태머니로부터의 조정을 받고 나서야 겨우 중단될 수 있었다고 한다. 갱들은 밀주사업 등으로 거둬들인 엄청난 돈을 가지고 이들 정치가들에게 자금을 대주어 이들로부터 보호막을 제공받고 있었다. 갱들 중 특히 이러한 쪽, 이렇게 정치가와 사법 관리들을 매수하는 쪽으로 뛰어난 능력을 발휘하고 있었던 사람이 루치아노 패밀리의 프랭크 코스텔로와 죠 아도니스라고 할 수 있었다.
FBI는 1930년대 초까지는 주로 기관총 켈리나 딜린저와 같은 무장 강도나 유명인사의 아이를 납치하여 몸값을 요구하는 유괴범들의 검거에 힘을 기울이고 있었고, 1930년대 중반이 되어서야 덧치 슐츠, 루이스 부챌터와 같은 이름난 갱을 수사하려는 의지를 보인다. 그러나 그러다가 부챌터의 체포 이후로는 조직범죄에 대한 FBI의 수사 의지가 완전히 사라져 버리게 되는데 여기에 대하여는 나중에 다시 자세히 언급하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