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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후경의 난과 백제

작성자나도사랑을했으면|작성시간06.08.18|조회수148 목록 댓글 0
'삼국사기' 를 보면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 성왕 27년(549) 겨울 10월에 왕이 양나라 수도에 반란의 적도가 있는 것을 알지 못하고 사신을 보내 조공하게 하였다. 사신이 그 곳에 이르러 성과 궁궐이 황폐하게 무너진 것을 보고 모두들 대궐문 밖에서 소리내 울자, 길가던 사람들이 보고는 눈물을 뿌리지 않는 이가 없었다. '후경(侯景)' 이 이를 듣고 크게 노하여 그들을 잡아 가두었다. 그 후 후경이 평정된 뒤에야 귀국할 수 있었다 --

이 기록은 삼국사기에 보다 자세할 뿐이지, 중국사서인 '양서' 와 '남사' 에도 똑같이 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삼국사기가 중국측 기록을 인용하였다고 볼 수도 있지만 그 기록의 자세함으로 인해서 아마 삼국사기 편찬시에도 독자적인 기록이 남아 있었다고 봐도 무관할 것 같다.

'후경(503~552)' 은 본래 북위 말의 장군으로 수비병으로 북위 말의 혼란한 시대에 출세하였고 동위 시대에는 고환 휘하에서 대장까지 진급하였던 인물이다. 그는 동위의 실권자였던 고환이 죽자 소관하는 주군(州軍)을 이끌고 양 무제에게 투항했으니 이 역시 난세에 자신의 출세를 위해서 주인을 바꾼 처사라고 할 수 있겠다.

그후 동위와 양의 관계가 호전되자 그는 양을 등지고 '강제모병(强制募兵)' 과 '해방노예' 로써 10만 대군을 만들어 양의 수도인 '건강성(建康城)' 을 포위하고 태청(太淸) 3년(549) 드디어 '대성(臺城)' 을 함락하니 50여년간 양을 다스렸던 양 무제는 그 해에 유폐당하고 울분 속에서 병사하고 말았다. 이 난으로 인해서 건강은 황폐화가 되고 남조의 귀족 문화는 크게 타격을 받았으니 '교성대족(僑姓大族)' 이 몰락한 것이 바로 그 증거라 할 수 있다.

그 뒤 후경은 '간문제(簡文帝)' 를 피살하고 대보(大寶) 2년(551) '예장왕(豫章王)' 을 세웠으며 스스로 '한왕(漢王)' 을 일컫다가 551년 선양의 형식을 빌어 '한제(漢帝)' 가 되었다. 그 후 후경은 552년 원제(元帝) 휘하 '왕승변(王僧弁)', '진패선(陳覇先)' 의 군사에 패해 잡혀 죽었으나 이후 양나라는 이 군벌들에 의해 황제가 여러명 폐위되는 사태가 발생하게 되었다.

백제는 이전에도 무령왕 21년(521), 성왕 2년(524), 12년(534), 19년(541)에 양나라와 교류했었다. 백제는 양에 사신을 보내 박사를 청해오기도 하였으며 각종 불교 경전과 함께 남조의 장인들을 청해오는 등 양측은 밀접한 관계에 있었다고 보여진다. 대개 주기적으로 양과 백제가 사신을 보내 교류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지난 수개월간 양나라는 후경에 의해 짓밟혔을 것이고 기습적인 반란으로 인해 무제는 이렇다할 반격도 하지 못 한채 당했을 것이다. 이 전란으로 인해 건강은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을만큼 폐허로 둔갑하였다. 하나같이 역사서는 후경의 난으로 인하여 건강이 폐허가 되고 남조 귀족 문화가 크게 몰락했다고 하고 있으니 이 당시의 피해가 어느정도였는지 쉽게 알 수 있지 않나한다.

'일본서기' 를 보면 흠명천황 재위 기간 동안 성명왕과 교류를 지속적으로 벌이는 왜국은 온통 임나 관련 기사밖에 등장하지 않는다. 백제는 왜국에 사신을 누차 보내 임나와 함께 방어를 공고히 하여 북적(고구려)에 대비하라고 계속 명한다. 이 시기 한반도 동남부는 부산 등지에 위치한 임나를 두고 백제, 신라, 왜가 예민하게 대립하던 시기였다. 그리고 백제 성명왕은 상국으로서 이들을 통제하고는 있지만 임나의 존폐가 위태위태하던 상황이었다. 일본서기는 당시 백제의 임나 부흥에 대한 노력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보여주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백제는 성장 일로를 걷고 있었고 양나라와 밀접한 교류가 있었다고는 하지만 후경의 난으로 인해 사신이 통곡할 정도는 아니었지 않나 하는게 주인장의 생각이다.

솔직히 지나갔던 남조 국가들 '송(宋 - 420~479)', '제(齊 - 479~502)', '양(梁 - 502~557)' 은 모두 반란으로 이뤄진 군사 정권들인데 백제 사신이 굳이 후경의 난때 사신으로 갔다가 통곡했다고 하는 것은 쉽게 이해가 가지 않는다.

'주서' 백제전을 보면 중국측은 백제를 다음과 같이 인식하고 있었다.

-- 진, 송, 제, 양나라가 강동에 웅거하고 후위가 중원에 자리하였을때 모두 사신을 파견하여 번국이라 칭하였고 겸하여 작위를 받았다. (북)제가 중국의 동쪽에서 세력을 떨치자 백제의 왕 융 역시 사신을 파견하였다 --

백제는 당시 남조 왕조가 자리한 강동 지역에 위치하고 있었다. 오늘날 남경에서 발견된 청동거울하며 주산군도의 백제 흔적들이 이를 증명해주고 있는데 '수서' 등에서 말하기를 그 나라의 서남쪽에는 사람이 사는 섬 15곳이 있고 그 곳에는 모두 성읍이 있다고 적고 있어 그 존재를 확인시켜 주고 있다. 이렇게 백제의 영토가 대륙 깊숙히 자리잡고 있었는데도 백제가 후경의 난을 몰랐다고 하는 것은 말이 안 된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도 삼국사기를 비롯한 각종 사서는 백제 사신이 후경의 난인 줄 모르고 조공을 바치러 갔다고 적고 있어 의아하게 한다.

주인장은 후경의 난으로 인해 건강이 완전히 황폐화되면서 백제측에서 통곡할만한 무엇인가가 있었다고 생각된다. 만약 백제 사신들이 양나라가 몰락하고 후경이라는 무장이 집권한 것을 가지고 울었다고 한다면 후경은 화를 내고 그들을 잡아 가둘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후경이 화를 냈다는 것은 백제 사신들의 통곡 행위가 후경의 마음에 들지 않았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고 그들을 잡아 가두고 처리하지 않았다는 것은 그들의 행위가 옳았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그렇게 봤을때 백제 사신은 단순히 건강이 초토화되었기 때문에 울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건강의 황폐화는 백제 사신이 당시 상황을 알텐데도 통곡하면서까지 몇년간 옥살이를 할만한 이유가 되지 않는다.

주인장은 당시 국제 사회에서 이 사건을 정치적, 외교적으로 해석할 수 없었다. 그야말로 기록대로 백제 사신이 건강이 황폐화된 것을 보고 그냥 통곡했다는 것 밖에 할말이 없었다. 이 부분은 양나라와 백제간의 교류史에서 찾아야 할 듯 한데 그 중심틀이 잡히지 않는 것 같다.

하지만 상식적으로 봤을때 타국의 도성이 반란으로 깨졌는데 거기서 통곡했다는 것은 첫째, 백제가 그만큼 양나라와 밀접한 관계에 있었다는 것을 뜻하고 둘째, 백제 사신이 단순히 건강의 황폐함으로 전란의 참혹함때문에 통곡했다는 것을 뜻하고 셋째, 건강이 황폐화됨에 따라 백제측에 직접적으로 안 좋은 일이 생겼다는 것을 뜻하고 넷째, 더이상 양과의 교류가 없는 것으로 봐서 외교적인 문제가 생겼다는 것을 뜻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도학님의 '새로 쓰는 백제사' 를 보면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나온다.

-- 무령왕에 관해서는 문헌적으로나 고고학적인 점에서 볼때 몇가지 의문이 항상 따르고 있다. 첫째 무령왕은 역사상 두 인물이 있었다. 백제 25대 임금인 무령왕이 그 한 사람이요, 또 한 사람은 '무령군왕(武寧郡王)' 에 봉해졌다가 13세의 어린 나이로 살해된 양나라의 왕족이다.

'양서' 는 후자에 대해 "무령왕 대위는 자가 인요인데 풍채가 아름다웠고 얼굴이 그림같았다." 라고 기록하였다. 그런데 이 구절은 '삼국사기' 에 기록된 백제 무령왕의 "신장이 8척이요 얼굴이 그림같았는데 인자관후하여 민심이 귀부했다." 라는 기록과 상응하는 면이 있다. 즉, "미풍의(美風儀) 풍채가 아름다웠다." 는 것은 "신장이 8척" 인 기록과 그리고 "얼굴이 그림 같았다" 는 문구마저 서로 정확히 부합된다.

우연의 일치로 돌리기에는 어딘지 석연찮은 2인의 무령왕에 관한 인물묘사의 상호 부합은 많은 추리를 유발시켜준다. 백제와 양나라가 빈번하게 교섭을 가졌음은 무령왕릉의 구조와 그 부장품이 웅변으로 말하고 있으며 또 이들 2인의 활동 시기가 같은 6세기대인 점에서 더욱 그러하다. 이 문제에 관하여 필자는 확실히 흥미를 느끼고 있는 만큼 체계적인 소견을 밝힐 날이 오리라고 믿는다 --

'무령군왕 소인요'

혹시 백제 사신들은 양나라 왕족의 고향인 건강이 파괴된 것을 알고 그렇게 슬피 울었던 것은 아닐까? 양인(梁人)에게 있어서 건강은 고향과도 같은 곳이었으니, 당시 양으로 건너갔던 백제 사신들이 고향에 돌아와 폐허가 된 도시를 보고 그렇게 슬피 울었을 가능성도 없지만은 않은 것 같다.

이 문제는 주인장에게 많은 궁금증을 자아내게 한채 이대로 끝마치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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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원문 : 뿌리아름역사동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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