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史를 보면 대륙 동북방에 위치한 큰 세력으로 몇개를 꼽을 수 있다. 그 첫째가 '단군조선', 우리가 흔히 고조선이라고 부르는 나라이며 그 둘째가 부여를 흡수하고 대륙 동북방에서 700여 년간을 맹주로 자리잡았던 '고구려' 이며 셋째가 그런 고구려를 뒤이은 정통국가로 자처하며 해동성국으로 군림한 '발해' 일 것이다. 주인장이 주목한 것은 이들 국가를 구성한 구성원(오늘날로 치면 國民들)들이 과연 어떻게 이루어졌을까 하는 부분이다.
주인장은 단군조선이 여러 종족이 다수 혼용된 국가라고 보고 있는데 이들을 한데 묶는 말이 바로 '동이족(東夷族)' 일 것이다. 아마 동호(東胡)나 흉노(匈奴), 북적(北狄), 서융(西戎), 남만(南蠻)이라고 불리는 대륙 주변의 세력들 역시 동이처럼 주변 제족들을 한데 묶는 표현일 것이다. 하지만 분명히 이들을 포괄적으로 묶는 말을 떠나서 이들 세력들은 하나하나 다른 민족성을 띄고 있는 여러 민족들이 혼용되어 있을 가능성이 많다는 것을 알아둬야 할 것이다.
이 단군조선을 구성한 주(主) 민족 구성원이 동이족 중에서도 어떤 민족이었을까? 물론 상고사에 대해 공부가 짧지만, 주인장은 단군조선의 주요 세력으로 부여족, 예족, 맥족 등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이 중에서 부여족은 조선 해체 이후 동북방을 지배하는 새로운 실력자로 등장하고 예맥족은 이후 고구려와 주변 제족들을 이루는 세력으로 재편성된다고 주인장은 보고 있다.
그리고 이들 부여, 예, 맥 세력 이외의 세력이 읍루, 동호, 흉노, 선비 등의 '북방 유목 민족계 세력' 과 대륙에서 유입된 기자조선과 위만조선, 한사군 등의 '대륙 농경 민족계 세력' 이라고 생각한다. 북부여를 비롯해 단군조선 중심부의 여러 국가들은 부여족과 예맥족을 중심으로 재편되는데 동명성왕의 출생지가 북부여인 것으로 봐서 그의 세력은 부여계, 졸본부여나 비류국, 황룡국, 동부여 등과 같이 고구려 초기에 정복당한 국가들은 예맥계로 분류하고 있다. 엄연히 말하면 부여계와 예맥계 역시 한맥락이지만 그 지배적인 위치에서 따로 주인장은 나누려고 한다.
즉, 주인장이 보는 '순종 고구려인' 은 '부여족을 중심으로 한 예맥계 세력' 인 것이다. 이것이 바로 단군조선의 정통을 이었다는 부여와 그 부여를 흡수해 대륙의 주인임을 자타가 공인한 고구려의 순수 지배 세력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고구려라고 하는 나라가 이들만의 국가는 아니라고 본다. 요, 금, 원, 청 등의 정복 왕조에서 순수 민족은 몇이나 되는 줄 아는가? 한번 생각해보자. 민족(民族)이라는 개념과 국민(國民)이라는 개념에 대해서 말이다.
덕흥리고분의 주인인 대륙 출신의 유주자사 '진', 안악 3호분에서 장하독으로 그려진 전연 출신의 '동수' 이들을 두고 어떤 사람들은 이들은 중국인이며 고구려는 중국인을 이용해 대륙의 중국인들을 효과적으로 관리하였던 것으로 보인다고 한다. 다시 한번 중국인이라는 표현에 대해서 생각해보자. 고구려로 건너와 고구려에서 벼슬을 하고 고구려에서 전공을 세우고 고구려에서 부와 명예를 얻어 무덤에까지 그 기록을 남기고 있는 사람들이 바로 이들이다. 그들에게 한번 물어보자.
"진씨, 동수씨, 당신은 어느 나라 사람입니까?"
물론 당신은 어디 출신입니까? 라고 물어본다면 대답은 달라질 것이다. 요동 출신이요, 유주 출신이요, 연인(燕人-연나라 사람)이요, 진인(晉人-진나라 사람), 선비족이요 등등 그들의 대답은 이렇듯이 다를 것이다. 왜냐하면 민족명과 국민명은 다르기 때문이다. 과거 대륙은 춘추전국 시대를 거쳐 '秦-漢 교체기' 에 이르기까지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 출신 지역을 가지고 사람을 나눴다. 이른바 초인(楚人), 제인(濟人), 오인(吳人), 월인(越人) 등으로 말이다.
산동 지방을 오늘날은 '산동성(山東省)' 이라고 한다. 하지만 예전에는 이 지역을 '제(濟)' 라고 했었고 이 지역에서 자리잡고 있던 왕조 역시 '제(濟)' 라고 불렸었다. 즉, 지역명이 곧 국가명으로까지 쓰였다는 것이다. 산동 지방에 태어난 사람이 난 제 지역 출신이요, 제나라 출신이요 등으로 말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현상이 고구려에서도 보여졌다고 주인장은 생각한다. 나는 말갈 출신이요, 난 선비출신이요, 난 전부 출신이요, 난 북부 출신이요, 난 계루부 출신이요 등등으로 말이다.
대륙은 후한이 멸망한 이후 조위, 전연, 전진, 북위 등등 대륙 북부 일부를 통치한 세력은 가끔 있었지만 대륙 전부를 아우를 정도로 강력한 통일 제국은 수나라때에 이르러서야 등장하기 시작했다. 그와 반면에 대륙 동북방에는 고구려라고 하는 세력이 지난 수백년간을 자리잡고 있었다. 즉, 고구려人이라고 불릴 만하지만 이것처럼 국민명을 부를만한 대륙의 백성들은 없었다는 것이 주인장의 생각이다. 오늘은 위인, 내일은 연인 등으로 불리는게 무슨 백성이란 말인가? 통일된 정치 집단이 없다면 국민이라는 개념도 없다는 것이다.
그렇게 봤을때 주인장이 보는 고구려인은 10~20% 정도의 '부여 예맥계' 와 50~60% 정도의 말갈, 읍루, 선비 등의 구(舊) 단군조선의 동북방 거수국들을 이뤘던 '북방 유목계', 그리고 고구려 발전 단계에서 후대에 흡수된 각종 제족들과 대륙계 세력이 나머지를 이루고 있다고 생각한다. 즉, 지배계급을 단계별로 나누면 1계급이 고씨 계루부일 것이며 2계급이 계루부 이외의 다른 4부이며 3계급이 바로 말갈로 대표되는 북방 유목계라고 본다. 훗날 유입되는 거란이나 돌궐, 실위, 선비족 등은 모두 일반 평민으로서 고구려인에 편입된 족속들이라고 보면 될 것이다.
그렇게 봤을때 이러한 고구려인의 범위는 대륙 동북방과 전 북방 유목계를 아우르는 명칭으로도 쓰여도 무관하지 않을까 한다. 과거 단군조선 시절에 '동이족' 이라고 하는 명칭으로 조선족을 정점으로 모든 제족(諸族)들을 표현했던 것처럼 '고구려인' 이라는 명칭 역시 고대 동북방의 모든 제족들을 아우르는 명칭으로 쓰일 수도 있지 않나 한다. 참고로 고고학계에서는 기원전 1세기부터 적석총을 쓰면서 만주 지역에서 거주하던 민족을 고구려족이라고 하는데 부여 예맥계 중에서도 이들 집단이 훗날 고구려를 건국했다고 생각한다.
그럼 이런 고구려인과 발해인은 차이가 없을까? 주인장은 고구려인에 의해 발해가 건국됐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발해를 구성하는 구성원들은 고구려때와 같았을까? 그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온라인상에서 주인장은 '속말인은 예맥(부여)계말갈로써 숙신(읍루)계말갈인 흑수말갈과는 구별되는 종족이다.' 이라는 어떤 분의 글을 본 적이 있다. 그는 말갈부 중에서도 발해의 건국 주체 세력인 속말말갈은 부여 예맥계, 발해에 뒤늦게 합류된 흑수말갈은 숙신 읍루계라고 적고 있다. 하지만 주인장은 그것은 아니라고 본다. 숙신, 읍루, 물길, 말갈 등은 모두 단군조선 이후로 동북방에 거주하던 북방 유목계이며 말갈 내에서 부여 예맥계와 혈연적으로 가까운 세력은 있다한들, 말갈이 부여 예맥계일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7부의 관계성을 떠나서 말갈은 앞서 말했지만 지배계급 중에서도 3계급일 뿐이라는 것이 주인장의 생각이다. 아무리 1, 2계급과 혈연적, 정치적으로 연합했다고 해도 말이다.
그럼 이 말갈에 대해서 우리는 어떻게 인식해야 하는가? 말갈에 대한 정리를 내리면 어느정도 발해인에 대해서도 논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먼저 주인장은 '말갈' 에 대해서 좀 다양하게 생각한다. 윤내현님은 말갈을 두고 중국측이 부르는 고구려인의 비칭(卑稱)이라고 하고 있다. 이는 김용만님을 비롯한 고구려, 발해사 전문가들의 대체로 공통된 의견이 아닌가 한다. 즉, 말갈은 고구려인인데 말갈이라는 표현은 중국측의 안 좋은 표현이고, 고구려인이 올바른 표현이라는 것이다. 서병국님은 아예 중국측의 말갈이라는 표현은 옳지 않은 것이고 발해 역시 고구려인이 세운 것이지, 말갈인이 세운 것이 아니라고 하고 있어 말갈이라는 존재 자체를 무시한 듯한 느낌마저 들게 한다.
이에 대해 주인장은 과거 말갈에 대해서 여러가지 가능성을 생각했었다. 지방 군벌의 표현, 실재했던 북방 유목 민족의 명칭, 좌식자에 대한 중국측의 인식, 경당이나 잡색군 등 평민으로 이뤄진 군대에 대한 지칭, 어쌔씬 등등 말이다. 하지만 이 여러가지 중에서 공통된 것은 말갈이라는 것이 고구려인이라는 의미와 거의 동일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봤을때 대륙 말갈과 한반도 말갈로 이분해서 말갈을 생각해보려는 주인장이다. 대륙 말갈은 과거 동명성왕이 졸본부여 흡수시, 고구려가 건국되자 그에게 투항한 세력을 일컫는다. 즉, 단군조선 시대때부터 그 곳에 자리잡고 있던 북방 유목계로서 중국측이 인식하고 있는 말갈이기도 하다. 이에 반해 한반도 말갈은 삼국사기 등에 나타나고 있는 세력으로서 주인장은 이에 대해 고구려의 지방 군벌 정도로 여기고 있다. 이 지방 군벌이 고구려본기에는 나오지 않고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나오고 있으며 훗날 김상님의 말갈백제도 이들 군벌의 지파로 생각하고 있다. 즉, 민족적인 구분이 아닌 정치적인 구분이 강한 단어라고 본다.
즉, 발해를 말갈이 건국했다면 그것은 대륙 말갈이며 이들 역시 정치적으로 본다면 한반도 말갈로 불릴수도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말갈은 혈연적으로는 3계급 지배계층이며 정치적으로는 고구려의 지방 군벌이기 때문이다. 즉, 말갈이란 고구려인이라는 포괄적인 의미로 쓰여도 무방하다는 것이다.
그럼 발해를 세웠다는 속말말갈은 과연 어떤 세력일까?
636년경에 쓰여진 '수서' 에서 〈말갈전〉이 처음 등장하는데 여기서 말갈 7개 부족 즉, 속말(粟末), 백돌(伯咄), 안거골(安車骨), 불열(拂涅), 호실(號室), 흑수(黑水), 백산(白山)부의 기록이 등장한다. 또한 '구당서' 는 수나라 말기에 속말말갈의 추장 '돌지계(突地稽)' 가 천여가를 이끌고 투항하자 수 양제는 이들을 영주땅에서 살게 하고 요서태수의 벼슬을 주었으며 당나라 무덕 초에는 돌지계가 사신을 파견하여 조공하자 고조는 이들의 거주지에 연주(燕州)를 설치하고 그를 총관으로 임명하였다고 적고 있다. 이와 관련하여 '요사 지리지' 를 보면 수나라 개황 주에 부락민과 함께 투항한 돌지계는 대씨와 같은 부락 사람이라고 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속말말갈, 그것은 고구려의 지방 세력이자 고구려의 지배 계층을 이루고 있는 말갈 7부의 한 세력이다. 이 말갈 7부 전부가 존재했다고는 보지 않는데 말갈 7부라는 것이 나왔다는 것 자체가 독립적인 세력이 등장하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이렇게 강력한 독립 세력이 고구려 내에서 성장하고 있다는 것은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이다. 중국은 지방 군벌인 말갈을 단지 고구려에 복속한 반독립적인 이민족(異民族)으로만 규정해 사서에 남기고 있는 것이다.
천여가를 데리고 투항했는데 요서태수라니, 그리고 조공을 했는데 그 땅을 연주라 하고 그를 총관으로 임명하다니, 이것들은 모두다 중국측이 조공과 책봉이라는 그들만의 국제 외교 체제 속에서만 말갈과의 교류를 이해하고 있는 행위라고 볼수 있다. 고구려 내에서 그렇게 독자적으로 활동하고 외교적으로 분리하려는 말갈이 있는데 그런 말갈이 계속 유지되었다는 것 자체가 상식적으로 맞지 않는 말이라 할 수 있겠다.
일반적으로 고구려 멸망 이후 고구려의 지배계층은 당으로 끌려가 내지 깊숙히 강제 이주 당하거나 혹은 동돌궐로 들어가 그 지배 계층으로 편입되거나 신라로 투항하거나 구 고구려의 영토에 남아 여전히 지방 군벌로서 자리잡았다고 보고 있다. 이것은 고구려의 왕실인 고씨도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사서 곳곳에서 고구려 멸망 이후 등장하는 고씨를 확인할 수 있다. 이것은 발해때도 마찬가지였다. 다만 달라진 것이 있다면 과거 3계급 지배계층이었던 북방 유목계가 말갈이라는 명칭 아래 제 1계급으로 급부상했다는 것이다.
고씨는 고구려 멸망과 함께 구토(舊土)에서 더 이상 그 지지 기반을 잃었을 것이다. 아마 그 지역은 2, 3계급 지배계층에 의해서 산발적으로 지배됐을 것으로 보인다. 구당서는 대조영을 두고 고구려의 별종인 속말말갈인으로, 신당서는 그를 고구려에 의존하고 있던 속말말갈인으로 기록하고 있다. 지극히 정상적이고 정확한 기록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것은 대조영을 막연히 고구려인 혹은 고구려의 구장(舊將)이라고 기록한 우리측 기록보다도 자세한 표현이라고 주인장은 생각한다.
그런데도 서병국님은 이런 중국측 표현을 거부한다. 그는 발해국은 속말말갈 또는 고구려의 별종에 의해 세워진 나라가 아니라 고구려 유민들이 그들의 민족 의식을 바탕으로 세워진 나라라고 하고 있다. 이에 대해서 주인장은 다 같은 표현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속말말갈도, 고구려의 별종이라고 불리는 수많은 세력들도, 다 고구려였다. 하나의 고구려이고 다른 것이 있다면 그 명칭만 다를 뿐이다.
여기서 주인장은 이렇게 반문하고 싶다.
고구려 유민과 말갈인의 차이가 무엇인지? 이민족이라는 단어의 정의가 무엇인지 말이다.
이제 발해가 건국되면서 대씨가 그 지베 계층으로 떠오른 것이다. 고구려의 구장, 즉 과거 고구려에서 장군직에 있었던 그가 혈연적으로 말갈부 중에서도 속말말갈 출신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렇기에 중국 사서는 그를 속말말갈의 부장, 추장이라고 기록했을지도 모른다. 다시 말하지만 말갈 역시 고구려의 일부였을 뿐이다. 우리가 이에 대해 크게 생각하고 말고 할 것도 없는. 새롭게 등장한 대씨는 아마도 당 내지로 강제 이주당한 말갈부 중에서도 어느정도 인지도도 있고 영향력도 있었던 세력으로 보인다. 그렇기에 속말말갈의 대씨 부자를 중심으로 과거 고구려 유민들이 융합할 수 있었다고 보여진다.
발해 시대에 황성인 대씨(大氏) 이외에 등장하는게 우성의 등장이다. '홍호(洪皓)' 라는 사람이 쓴 '송막기문(松漠紀聞)' 을 보면 황족 말고 우성, 즉 최고위급 지배 성씨로 고(高), 장(張), 양(楊), 두(竇), 오(烏), 이(李) 씨가 있었다고 한다. 여기 보면 고씨의 등장에 대해서 우리는 주목해야 한다. 과거 고구려 시대때 최고의 성씨였던 고씨가 이제는 발해에서 우성으로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앞서 3계급이었던 북방 유목계가 1계급으로 올라가고 고씨는 2계급과 함께 발해의 우성이 된 것이다. 고구려인과 발해인의 지배계층 구성원이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우리는 흔히 발해를 지배층은 고구려인, 피지배층은 말갈인으로 이루어진 제국이라고 한다. 이는 주인장 생각에 바뀌어야 할 부분이다. 말갈인은 당시 발해의 지배층이었다. 말갈의 국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말이다. 그런데도 오늘날 '발해가 말갈의 국가다~' 라고 한다면 안될 표현인 것이 사실이다. 왜냐하면 중국측은 이 말갈을 고구려의 일부로, 고구려인의 다른 표현으로 사용하지 않았고 고구려에 예속된 다른 족속, 세력으로 그리고 있기 때문에 흡사 발해를 말갈의 국가라고 한다면 발해는 한국사가 아닌 다른 이민족史로 인식하려는 경향이 강한 것이 사실이다.
주인장은 앞서 순종 고구려인이라고 불릴만한 부여 예맥계는 고구려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적다고 했었다. 마찬가지일 것이다. 같은 말갈이라고 해도 발해에서 대씨를 중심으로 하는 속말말갈은 비중이 적었을 것이다. 고구려의 5부를 이루었던 지배계층은 말갈부와 구 고구려 지배계층에 의해 새롭게 편성되었을 것이며 나머지 피지배층은 고구려때와 동일했을 것으로 보인다.
즉, 순종 고구려인과 순종 발해인은 그 차이가 엄연이 났다는 소리다. 하지만 고구려인이라고 불리우고 발해인이라고 불리우던 사람들은 여전히 큰 차이가 없었으니, 이것은 시대에 따른 명칭 문제일 뿐이다. 고구려인을 두고 우리는 '구(購) 조선인' 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이제는 조선이라는 국가가 사라지고 그 자리에 고구려가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발해인을 두고 '구(舊) 고구려인' 이라고도 하지 않는다. 이제 그 자리에 고구려가 아닌 발해가 있기 때문이다.
물론 거란이나 흑수말갈 처럼 고구려인에서 떨어져나가 발해 시대때는 독립적으로 활동하게 된 세력이 생긴 것도 사실이다. 마치 과거 단군조선 시대때 동호나 흉노, 선비가 조선인으로 불리다가(주인장은 이들을 다 조선의 거수국으로 인식하고 있다) 고구려때에는 독자적인, 고구려인이 아닌 사람들로 남게 된 것과 마찬가지라고 할수 있겠다. 이 정도가 바로 고구려인과 발해인의 차이일 것이다.
북방 초원을 처음으로 지배했던 민족은 '흉노' 다. 그리고 그 자리는 '오환', '선비', '돌궐', '위구르', '거란', '여진', '몽골', '만주족' 등이 거치면서 지배했었다. 이들의 명칭이 다 다르다. 그러면 이들 국가들의 구성원도 다 달랐을까? 그건 아니다. 흉노 제국때나 선비 제국때나 그 구성원은 같았다. 참고로 선비는 흉노 정벌 이후 흉노 민가 10만여가를 받아들이면서 급성장했다. 그럼 이제 그들은 흉노가 아니라 선비로 불리는 것이다. 이것과 마찬가지다. 그들의 국가 구성원들간의 차이만큼 고구려인과 발해인도 차이가 났을 것이다. 단지, 그 국명에 따라 국민명이 달라졌을 뿐이다.
이것이 주인장이 보는 고구려인과 발해인의 차이다.
주인장은 단군조선이 여러 종족이 다수 혼용된 국가라고 보고 있는데 이들을 한데 묶는 말이 바로 '동이족(東夷族)' 일 것이다. 아마 동호(東胡)나 흉노(匈奴), 북적(北狄), 서융(西戎), 남만(南蠻)이라고 불리는 대륙 주변의 세력들 역시 동이처럼 주변 제족들을 한데 묶는 표현일 것이다. 하지만 분명히 이들을 포괄적으로 묶는 말을 떠나서 이들 세력들은 하나하나 다른 민족성을 띄고 있는 여러 민족들이 혼용되어 있을 가능성이 많다는 것을 알아둬야 할 것이다.
이 단군조선을 구성한 주(主) 민족 구성원이 동이족 중에서도 어떤 민족이었을까? 물론 상고사에 대해 공부가 짧지만, 주인장은 단군조선의 주요 세력으로 부여족, 예족, 맥족 등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이 중에서 부여족은 조선 해체 이후 동북방을 지배하는 새로운 실력자로 등장하고 예맥족은 이후 고구려와 주변 제족들을 이루는 세력으로 재편성된다고 주인장은 보고 있다.
그리고 이들 부여, 예, 맥 세력 이외의 세력이 읍루, 동호, 흉노, 선비 등의 '북방 유목 민족계 세력' 과 대륙에서 유입된 기자조선과 위만조선, 한사군 등의 '대륙 농경 민족계 세력' 이라고 생각한다. 북부여를 비롯해 단군조선 중심부의 여러 국가들은 부여족과 예맥족을 중심으로 재편되는데 동명성왕의 출생지가 북부여인 것으로 봐서 그의 세력은 부여계, 졸본부여나 비류국, 황룡국, 동부여 등과 같이 고구려 초기에 정복당한 국가들은 예맥계로 분류하고 있다. 엄연히 말하면 부여계와 예맥계 역시 한맥락이지만 그 지배적인 위치에서 따로 주인장은 나누려고 한다.
즉, 주인장이 보는 '순종 고구려인' 은 '부여족을 중심으로 한 예맥계 세력' 인 것이다. 이것이 바로 단군조선의 정통을 이었다는 부여와 그 부여를 흡수해 대륙의 주인임을 자타가 공인한 고구려의 순수 지배 세력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고구려라고 하는 나라가 이들만의 국가는 아니라고 본다. 요, 금, 원, 청 등의 정복 왕조에서 순수 민족은 몇이나 되는 줄 아는가? 한번 생각해보자. 민족(民族)이라는 개념과 국민(國民)이라는 개념에 대해서 말이다.
덕흥리고분의 주인인 대륙 출신의 유주자사 '진', 안악 3호분에서 장하독으로 그려진 전연 출신의 '동수' 이들을 두고 어떤 사람들은 이들은 중국인이며 고구려는 중국인을 이용해 대륙의 중국인들을 효과적으로 관리하였던 것으로 보인다고 한다. 다시 한번 중국인이라는 표현에 대해서 생각해보자. 고구려로 건너와 고구려에서 벼슬을 하고 고구려에서 전공을 세우고 고구려에서 부와 명예를 얻어 무덤에까지 그 기록을 남기고 있는 사람들이 바로 이들이다. 그들에게 한번 물어보자.
"진씨, 동수씨, 당신은 어느 나라 사람입니까?"
물론 당신은 어디 출신입니까? 라고 물어본다면 대답은 달라질 것이다. 요동 출신이요, 유주 출신이요, 연인(燕人-연나라 사람)이요, 진인(晉人-진나라 사람), 선비족이요 등등 그들의 대답은 이렇듯이 다를 것이다. 왜냐하면 민족명과 국민명은 다르기 때문이다. 과거 대륙은 춘추전국 시대를 거쳐 '秦-漢 교체기' 에 이르기까지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 출신 지역을 가지고 사람을 나눴다. 이른바 초인(楚人), 제인(濟人), 오인(吳人), 월인(越人) 등으로 말이다.
산동 지방을 오늘날은 '산동성(山東省)' 이라고 한다. 하지만 예전에는 이 지역을 '제(濟)' 라고 했었고 이 지역에서 자리잡고 있던 왕조 역시 '제(濟)' 라고 불렸었다. 즉, 지역명이 곧 국가명으로까지 쓰였다는 것이다. 산동 지방에 태어난 사람이 난 제 지역 출신이요, 제나라 출신이요 등으로 말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현상이 고구려에서도 보여졌다고 주인장은 생각한다. 나는 말갈 출신이요, 난 선비출신이요, 난 전부 출신이요, 난 북부 출신이요, 난 계루부 출신이요 등등으로 말이다.
대륙은 후한이 멸망한 이후 조위, 전연, 전진, 북위 등등 대륙 북부 일부를 통치한 세력은 가끔 있었지만 대륙 전부를 아우를 정도로 강력한 통일 제국은 수나라때에 이르러서야 등장하기 시작했다. 그와 반면에 대륙 동북방에는 고구려라고 하는 세력이 지난 수백년간을 자리잡고 있었다. 즉, 고구려人이라고 불릴 만하지만 이것처럼 국민명을 부를만한 대륙의 백성들은 없었다는 것이 주인장의 생각이다. 오늘은 위인, 내일은 연인 등으로 불리는게 무슨 백성이란 말인가? 통일된 정치 집단이 없다면 국민이라는 개념도 없다는 것이다.
그렇게 봤을때 주인장이 보는 고구려인은 10~20% 정도의 '부여 예맥계' 와 50~60% 정도의 말갈, 읍루, 선비 등의 구(舊) 단군조선의 동북방 거수국들을 이뤘던 '북방 유목계', 그리고 고구려 발전 단계에서 후대에 흡수된 각종 제족들과 대륙계 세력이 나머지를 이루고 있다고 생각한다. 즉, 지배계급을 단계별로 나누면 1계급이 고씨 계루부일 것이며 2계급이 계루부 이외의 다른 4부이며 3계급이 바로 말갈로 대표되는 북방 유목계라고 본다. 훗날 유입되는 거란이나 돌궐, 실위, 선비족 등은 모두 일반 평민으로서 고구려인에 편입된 족속들이라고 보면 될 것이다.
그렇게 봤을때 이러한 고구려인의 범위는 대륙 동북방과 전 북방 유목계를 아우르는 명칭으로도 쓰여도 무관하지 않을까 한다. 과거 단군조선 시절에 '동이족' 이라고 하는 명칭으로 조선족을 정점으로 모든 제족(諸族)들을 표현했던 것처럼 '고구려인' 이라는 명칭 역시 고대 동북방의 모든 제족들을 아우르는 명칭으로 쓰일 수도 있지 않나 한다. 참고로 고고학계에서는 기원전 1세기부터 적석총을 쓰면서 만주 지역에서 거주하던 민족을 고구려족이라고 하는데 부여 예맥계 중에서도 이들 집단이 훗날 고구려를 건국했다고 생각한다.
그럼 이런 고구려인과 발해인은 차이가 없을까? 주인장은 고구려인에 의해 발해가 건국됐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발해를 구성하는 구성원들은 고구려때와 같았을까? 그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온라인상에서 주인장은 '속말인은 예맥(부여)계말갈로써 숙신(읍루)계말갈인 흑수말갈과는 구별되는 종족이다.' 이라는 어떤 분의 글을 본 적이 있다. 그는 말갈부 중에서도 발해의 건국 주체 세력인 속말말갈은 부여 예맥계, 발해에 뒤늦게 합류된 흑수말갈은 숙신 읍루계라고 적고 있다. 하지만 주인장은 그것은 아니라고 본다. 숙신, 읍루, 물길, 말갈 등은 모두 단군조선 이후로 동북방에 거주하던 북방 유목계이며 말갈 내에서 부여 예맥계와 혈연적으로 가까운 세력은 있다한들, 말갈이 부여 예맥계일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7부의 관계성을 떠나서 말갈은 앞서 말했지만 지배계급 중에서도 3계급일 뿐이라는 것이 주인장의 생각이다. 아무리 1, 2계급과 혈연적, 정치적으로 연합했다고 해도 말이다.
그럼 이 말갈에 대해서 우리는 어떻게 인식해야 하는가? 말갈에 대한 정리를 내리면 어느정도 발해인에 대해서도 논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먼저 주인장은 '말갈' 에 대해서 좀 다양하게 생각한다. 윤내현님은 말갈을 두고 중국측이 부르는 고구려인의 비칭(卑稱)이라고 하고 있다. 이는 김용만님을 비롯한 고구려, 발해사 전문가들의 대체로 공통된 의견이 아닌가 한다. 즉, 말갈은 고구려인인데 말갈이라는 표현은 중국측의 안 좋은 표현이고, 고구려인이 올바른 표현이라는 것이다. 서병국님은 아예 중국측의 말갈이라는 표현은 옳지 않은 것이고 발해 역시 고구려인이 세운 것이지, 말갈인이 세운 것이 아니라고 하고 있어 말갈이라는 존재 자체를 무시한 듯한 느낌마저 들게 한다.
이에 대해 주인장은 과거 말갈에 대해서 여러가지 가능성을 생각했었다. 지방 군벌의 표현, 실재했던 북방 유목 민족의 명칭, 좌식자에 대한 중국측의 인식, 경당이나 잡색군 등 평민으로 이뤄진 군대에 대한 지칭, 어쌔씬 등등 말이다. 하지만 이 여러가지 중에서 공통된 것은 말갈이라는 것이 고구려인이라는 의미와 거의 동일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봤을때 대륙 말갈과 한반도 말갈로 이분해서 말갈을 생각해보려는 주인장이다. 대륙 말갈은 과거 동명성왕이 졸본부여 흡수시, 고구려가 건국되자 그에게 투항한 세력을 일컫는다. 즉, 단군조선 시대때부터 그 곳에 자리잡고 있던 북방 유목계로서 중국측이 인식하고 있는 말갈이기도 하다. 이에 반해 한반도 말갈은 삼국사기 등에 나타나고 있는 세력으로서 주인장은 이에 대해 고구려의 지방 군벌 정도로 여기고 있다. 이 지방 군벌이 고구려본기에는 나오지 않고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나오고 있으며 훗날 김상님의 말갈백제도 이들 군벌의 지파로 생각하고 있다. 즉, 민족적인 구분이 아닌 정치적인 구분이 강한 단어라고 본다.
즉, 발해를 말갈이 건국했다면 그것은 대륙 말갈이며 이들 역시 정치적으로 본다면 한반도 말갈로 불릴수도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말갈은 혈연적으로는 3계급 지배계층이며 정치적으로는 고구려의 지방 군벌이기 때문이다. 즉, 말갈이란 고구려인이라는 포괄적인 의미로 쓰여도 무방하다는 것이다.
그럼 발해를 세웠다는 속말말갈은 과연 어떤 세력일까?
636년경에 쓰여진 '수서' 에서 〈말갈전〉이 처음 등장하는데 여기서 말갈 7개 부족 즉, 속말(粟末), 백돌(伯咄), 안거골(安車骨), 불열(拂涅), 호실(號室), 흑수(黑水), 백산(白山)부의 기록이 등장한다. 또한 '구당서' 는 수나라 말기에 속말말갈의 추장 '돌지계(突地稽)' 가 천여가를 이끌고 투항하자 수 양제는 이들을 영주땅에서 살게 하고 요서태수의 벼슬을 주었으며 당나라 무덕 초에는 돌지계가 사신을 파견하여 조공하자 고조는 이들의 거주지에 연주(燕州)를 설치하고 그를 총관으로 임명하였다고 적고 있다. 이와 관련하여 '요사 지리지' 를 보면 수나라 개황 주에 부락민과 함께 투항한 돌지계는 대씨와 같은 부락 사람이라고 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속말말갈, 그것은 고구려의 지방 세력이자 고구려의 지배 계층을 이루고 있는 말갈 7부의 한 세력이다. 이 말갈 7부 전부가 존재했다고는 보지 않는데 말갈 7부라는 것이 나왔다는 것 자체가 독립적인 세력이 등장하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이렇게 강력한 독립 세력이 고구려 내에서 성장하고 있다는 것은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이다. 중국은 지방 군벌인 말갈을 단지 고구려에 복속한 반독립적인 이민족(異民族)으로만 규정해 사서에 남기고 있는 것이다.
천여가를 데리고 투항했는데 요서태수라니, 그리고 조공을 했는데 그 땅을 연주라 하고 그를 총관으로 임명하다니, 이것들은 모두다 중국측이 조공과 책봉이라는 그들만의 국제 외교 체제 속에서만 말갈과의 교류를 이해하고 있는 행위라고 볼수 있다. 고구려 내에서 그렇게 독자적으로 활동하고 외교적으로 분리하려는 말갈이 있는데 그런 말갈이 계속 유지되었다는 것 자체가 상식적으로 맞지 않는 말이라 할 수 있겠다.
일반적으로 고구려 멸망 이후 고구려의 지배계층은 당으로 끌려가 내지 깊숙히 강제 이주 당하거나 혹은 동돌궐로 들어가 그 지배 계층으로 편입되거나 신라로 투항하거나 구 고구려의 영토에 남아 여전히 지방 군벌로서 자리잡았다고 보고 있다. 이것은 고구려의 왕실인 고씨도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사서 곳곳에서 고구려 멸망 이후 등장하는 고씨를 확인할 수 있다. 이것은 발해때도 마찬가지였다. 다만 달라진 것이 있다면 과거 3계급 지배계층이었던 북방 유목계가 말갈이라는 명칭 아래 제 1계급으로 급부상했다는 것이다.
고씨는 고구려 멸망과 함께 구토(舊土)에서 더 이상 그 지지 기반을 잃었을 것이다. 아마 그 지역은 2, 3계급 지배계층에 의해서 산발적으로 지배됐을 것으로 보인다. 구당서는 대조영을 두고 고구려의 별종인 속말말갈인으로, 신당서는 그를 고구려에 의존하고 있던 속말말갈인으로 기록하고 있다. 지극히 정상적이고 정확한 기록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것은 대조영을 막연히 고구려인 혹은 고구려의 구장(舊將)이라고 기록한 우리측 기록보다도 자세한 표현이라고 주인장은 생각한다.
그런데도 서병국님은 이런 중국측 표현을 거부한다. 그는 발해국은 속말말갈 또는 고구려의 별종에 의해 세워진 나라가 아니라 고구려 유민들이 그들의 민족 의식을 바탕으로 세워진 나라라고 하고 있다. 이에 대해서 주인장은 다 같은 표현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속말말갈도, 고구려의 별종이라고 불리는 수많은 세력들도, 다 고구려였다. 하나의 고구려이고 다른 것이 있다면 그 명칭만 다를 뿐이다.
여기서 주인장은 이렇게 반문하고 싶다.
고구려 유민과 말갈인의 차이가 무엇인지? 이민족이라는 단어의 정의가 무엇인지 말이다.
이제 발해가 건국되면서 대씨가 그 지베 계층으로 떠오른 것이다. 고구려의 구장, 즉 과거 고구려에서 장군직에 있었던 그가 혈연적으로 말갈부 중에서도 속말말갈 출신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렇기에 중국 사서는 그를 속말말갈의 부장, 추장이라고 기록했을지도 모른다. 다시 말하지만 말갈 역시 고구려의 일부였을 뿐이다. 우리가 이에 대해 크게 생각하고 말고 할 것도 없는. 새롭게 등장한 대씨는 아마도 당 내지로 강제 이주당한 말갈부 중에서도 어느정도 인지도도 있고 영향력도 있었던 세력으로 보인다. 그렇기에 속말말갈의 대씨 부자를 중심으로 과거 고구려 유민들이 융합할 수 있었다고 보여진다.
발해 시대에 황성인 대씨(大氏) 이외에 등장하는게 우성의 등장이다. '홍호(洪皓)' 라는 사람이 쓴 '송막기문(松漠紀聞)' 을 보면 황족 말고 우성, 즉 최고위급 지배 성씨로 고(高), 장(張), 양(楊), 두(竇), 오(烏), 이(李) 씨가 있었다고 한다. 여기 보면 고씨의 등장에 대해서 우리는 주목해야 한다. 과거 고구려 시대때 최고의 성씨였던 고씨가 이제는 발해에서 우성으로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앞서 3계급이었던 북방 유목계가 1계급으로 올라가고 고씨는 2계급과 함께 발해의 우성이 된 것이다. 고구려인과 발해인의 지배계층 구성원이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우리는 흔히 발해를 지배층은 고구려인, 피지배층은 말갈인으로 이루어진 제국이라고 한다. 이는 주인장 생각에 바뀌어야 할 부분이다. 말갈인은 당시 발해의 지배층이었다. 말갈의 국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말이다. 그런데도 오늘날 '발해가 말갈의 국가다~' 라고 한다면 안될 표현인 것이 사실이다. 왜냐하면 중국측은 이 말갈을 고구려의 일부로, 고구려인의 다른 표현으로 사용하지 않았고 고구려에 예속된 다른 족속, 세력으로 그리고 있기 때문에 흡사 발해를 말갈의 국가라고 한다면 발해는 한국사가 아닌 다른 이민족史로 인식하려는 경향이 강한 것이 사실이다.
주인장은 앞서 순종 고구려인이라고 불릴만한 부여 예맥계는 고구려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적다고 했었다. 마찬가지일 것이다. 같은 말갈이라고 해도 발해에서 대씨를 중심으로 하는 속말말갈은 비중이 적었을 것이다. 고구려의 5부를 이루었던 지배계층은 말갈부와 구 고구려 지배계층에 의해 새롭게 편성되었을 것이며 나머지 피지배층은 고구려때와 동일했을 것으로 보인다.
즉, 순종 고구려인과 순종 발해인은 그 차이가 엄연이 났다는 소리다. 하지만 고구려인이라고 불리우고 발해인이라고 불리우던 사람들은 여전히 큰 차이가 없었으니, 이것은 시대에 따른 명칭 문제일 뿐이다. 고구려인을 두고 우리는 '구(購) 조선인' 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이제는 조선이라는 국가가 사라지고 그 자리에 고구려가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발해인을 두고 '구(舊) 고구려인' 이라고도 하지 않는다. 이제 그 자리에 고구려가 아닌 발해가 있기 때문이다.
물론 거란이나 흑수말갈 처럼 고구려인에서 떨어져나가 발해 시대때는 독립적으로 활동하게 된 세력이 생긴 것도 사실이다. 마치 과거 단군조선 시대때 동호나 흉노, 선비가 조선인으로 불리다가(주인장은 이들을 다 조선의 거수국으로 인식하고 있다) 고구려때에는 독자적인, 고구려인이 아닌 사람들로 남게 된 것과 마찬가지라고 할수 있겠다. 이 정도가 바로 고구려인과 발해인의 차이일 것이다.
북방 초원을 처음으로 지배했던 민족은 '흉노' 다. 그리고 그 자리는 '오환', '선비', '돌궐', '위구르', '거란', '여진', '몽골', '만주족' 등이 거치면서 지배했었다. 이들의 명칭이 다 다르다. 그러면 이들 국가들의 구성원도 다 달랐을까? 그건 아니다. 흉노 제국때나 선비 제국때나 그 구성원은 같았다. 참고로 선비는 흉노 정벌 이후 흉노 민가 10만여가를 받아들이면서 급성장했다. 그럼 이제 그들은 흉노가 아니라 선비로 불리는 것이다. 이것과 마찬가지다. 그들의 국가 구성원들간의 차이만큼 고구려인과 발해인도 차이가 났을 것이다. 단지, 그 국명에 따라 국민명이 달라졌을 뿐이다.
이것이 주인장이 보는 고구려인과 발해인의 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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