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의 종교관련 기록
- 제천 행사 -
그들의 풍속이 음식에는 몹시 존절하나 주택은 유달리 치장하여 ... 정침(正寢)의 좌우에는 큰 집을 세우고 귀신에게 제사하고 또 영성과 사직을 받들었다. 十月에는 천신에게 제사를 지내는데 온 나라가 대회를 열고 그 이름을 동맹(東盟)이라 하였다. 나라 동쪽에는 큰 동굴이 있는데 그 이름을 수혈(隧穴)이라 하였다. 시월 대회(大會)에는 수신(隧神)을 맞이하여 제사하였다. 그 때의 의복은 모두 금수금은(錦繡金銀)으로 장식하였고,대가(大加)와 주부(主簿)는 머리에 벙거지를 썼는데 그것은 책(幘)과 비슷하면서도 뒤가 없고, 소가(小加)는 절풍건(折風巾)을 썼는데 그것은 고깔과 같았다. 그리고 감옥이 없었다.
(三國志 魏志 東夷傳 高句麗)
- 무속 -
19년 8월에 교시(郊豕)가 달아나니, 왕이 탁리(託利)와 사비(斯卑)란 자로 뒤를 쫓게 했는데, 장옥택중(長屋澤中)에 이르러 발견하고 칼로 그 돼지의 각근(脚筋)을 끊었다. 왕이 듣고 노하여 말하기를, “제천(祭天)할 희생(犧牲)을 어찌 함부로 상(傷)할 것이냐”하고,드디어 두 사람을 구덩이 속에 넣어 죽였다. 9월에 왕이 편치 못하자 무당이 말하기를, 탁리(託利) 사비(斯卑)가 준 병이라 하였다. 왕이 시켜 사과케 하니 곧 나았다.
(三國史記 권13, 高句麗本紀 琉璃王 19년)
7월에 왕이 평유원(平儒原)에 전렵(田獵)하는데 백호(白狐)가 뒤를 따라오며 울었다. 왕이 활이 쏘아 맞히지 못하고 무사(巫師)에게 길흉(吉凶)을 물으니, (巫師가)대답하기를 “狐는 원래 요수(妖獸)로 길상(吉祥)치 못하거늘, 하물며 그것이 흰색임에랴. 더욱 괴이한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늘은 간절히 말을 하지 못하므로 요괴(妖怪)로써 보이는 것이니, 이는 인군(人君)으로 하여금 공구수성(恐懼修省)하여 자신(自新)케 하는 것입니다. 만일 임금으로 덕(德)을 닦으면 화(禍)를 전(轉)하여 복(福)을 이루게 할 수 있습니다.”하였다.
왕이 말하기를“흉(凶)하면 흉하고 길(吉)하면 길할 뿐이거늘, 먼저는 요(妖)하다 하면서도 또 복(福)이 될 수 있다 하니 이 무슨 거짓말이냐?”하고 그를 죽였다.
(三國史記 권15, 高句麗本紀 次大王 3년)
처음 소후의 어머니가 아이를 갖고 아직 해산하기 전에 무당이 말하기를“반드시 왕후를 낳을 것이다”하였다. 그 어머니가 기뻐하여 딸을 낳으니 이름을 후녀(后女)라 했다.
(三國史記 권16, 高句麗本紀 山上王 13년)
태후가 임종에 유언하기를“내가 행실을 잃었으니 무슨 면목으로 국양(國壤)을 지하에서 보랴. 만일 여러 신하가 차마 나를 구덩이에 버리지 아니하려거든 나를 산상왕릉(山上王陵)곁에 묻어 주기를 바란다”하였다. 드디어 그의 말과 같이 장사하였다. 무자(巫者)가 말하기를,“국양왕(國壤王)이 나에게 강림하여 말하기를,‘어제 우(于)씨가 천상에 온 것을 보고 내가 분함을 이기지 못하여 드디어 그와 싸움을 하였는데, 물러와 생각하니 낯이 뻔뻔하여 차마 나라사람들을 볼 수 없으니, 너는 조정에 고하여 물건으로 나를 가려 주게 하라’했습니다.”하므로, 능 앞에 소나무를 일곱 겹으로 심었다.
(三國史記 권17, 高句麗本紀 東川王 8년)
성 안에는 주몽(朱蒙)의 사당이 있고, 사당에는 쇠사슬 갑옷과 날카로운 창이 있었는데, 전하는 말에 전연(前燕)시대에 하늘에서 내린 것이라고 하였다. 적이 쳐들어와 포위가 위급할 때 미녀를 꾸며 부신(婦神)으로 만들고는 무당이 말하기를“주몽이 기뻐하여 성이 완전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三國史記 권21, 高句麗本紀 寶藏王 4년)
- 불교 -
2년 6월에 진왕(秦王)부견(符堅)이 사신과 승려 순도(順道)를 고구려에 보내어 불상과 경문을 전하였다. 왕이 사신을 보내어 감사의 뜻을 표하고 토산물을 전하였다.
(三國史記 권18, 高句麗本紀 小獸林王 2년)
순도는 일찍이 다른 나라에 와서 인도로부터 전해진 자비의 가르침을 전파하였다. 고구려에 지혜의 해를 매달아 인과업보의 준엄함을 보여주고, 행복과 불행은 자신이 지은 업에 의해 결정된다는 이치로써 사람들을 가르쳤다.
(海東高僧傳 권1 順道傳)
진(晉) 효무(孝武) 태원(太元)말(396), 경장과 율장 수십 부를 가지고 요동(遼東)으로 와서 교화하였다. 삼승(三乘)의 가르침을 주고 귀계(歸戒)를 세웠다. 이것이 고구려인들이 불도를 전해들은 최초의 일이다.
(梁高僧傳 권10 釋曇始傳)
그 후 서진의 담시(釋曇)는 가섭마등(迦葉摩騰)이 처음으로 중국에 들어온 것처럼 고구려에 들어았다.
(崔致遠, 鳳巖寺 智證大師 寂照塔碑)
담시는 출가한 이래로 많은 이적이 있었다. 발이 얼굴보다 흰데 진흙탕물을 건너도 젖은 적이 없었으므로 세상사람들이 모두 백족화상(白足和尙)이라고 불렀다.
(海東高僧傳 권1 曇始傳)
지둔이 후에 고구려의 도인에게 보낸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상좌 축법심은 중주 유공의 제자로 덕과 지혜를 갖추고 출가사문과 재가신도를 다스렸다. 일찍이 도읍에 머물면서 법망(法網)을 유지하여 내외에서 모두 우러러보았고, 도를 널리 펴는 큰 인물이었다.
근래에 도업(道業)이 청아하여 속세를 견디지 못하고 거처를 산속에서 찾았으며, 덕을 닦고 한가로움을 따랐다. 지금은 섬현 양산에 머물러 동유(同遊)들을 인솔하고 도를 논하고 뜻을 설명하면서, 속세를 떠나 조용한 곳에서 호연히 멀고 가깝게 읊조린다“
(梁高僧傳 권4 竺法深傳)
이름을 알 수 없는 고구려의 승려가 있었다. 불도에 뜻을 두고 어진 마음에 의지하여 바른 것을 지키고 덕을 근본으로 삼아,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성내지 않았다. 그는 생각을 안으로 모아 흩뜨리지 않았으니, 나라 안에 명성이 자자하였고 급기야는 명성이 더욱 더 흘러 넘쳐 사방으로 전해져, 동진이 지둔법사가 그에게 다음과 같은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海東高僧傳 권1 亡名傳)
3월 왕이 하교(下敎)하기를‘불교를 숭상하고 믿어 복을 구하라’고 하였다.
(三國史記 권18 高句麗本紀 故國壤王9년)
그 때 고구려의 재상이었던 왕고덕(王高德)은 불교에 깊은 신심을 품고 대승불교를 존중하였으며, 부처님의 가르침을 온 나라의 구석구석에까지 펴고자 하였다. 그러나 불교의 내력이나 연유, 서쪽에서 동쪽으로 전해진 연대나 해당하는 왕의 이름을 알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그러한 사실과 관련된 항목을 조목조목 적어 의연스님을 중국 북제의 수도인 업(鄴)으로 보내어 지금까지 알지 못했던 것을 알아 오게 하였다. 그 물음은 대략 다음과 같다.“석가모니 부처님이 열반에 드신 이래 지금까지 몇 년이나 되었습니까? 또 인도에서 몇 해를 경과한 후에 중국에 전해지게 되었습니까? 처음에 전해졌을 때의 황제는 누구였으며 연호는 무엇이었습니까? 또 제나라와 진나라의 불법은 어느 쪽이 먼저였으며 그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몇 년,몇 왕이 경과되었습니까? 구체적으로 갈쳐 주시기 바랍니다. 또한『십지경론』『대지도론』『보살지경』『금강반야경론』등과 같은 논서는 누가 지었으며,논을 찬술하게 된 유래나 그것과 관련된 상서로운 징조 같은 것을 기록한 서적들이 있는지에 대해 삼가 적어 여쭈오니, 부디 의문을 풀어주시기 바랍니다.”
(海東高僧傳 권1 義淵傳)
보덕은 항상 평양성에 거주하였는데, 어느 날 산방(山房)에 있던 노승이 와서 경전을 강의해 줄 것을 청하였다. 법사는 진심으로 거절하였으나 끝내는 사양하지 못하고 강석에 나아가『열반경』40여 권을 강의하였다.
(三國遺事 권3, 塔像 高麗靈塔寺)
고구려의 혜자와 혜관, 백제의 혜총과 관륵은 모두 삼론종의 거장이다. 이들이 처음으로 삼론을 일으킨 후 점차로 가르침을 전해졌다. 이들 여러 법사들은 모두『성실(成實)』에도 능통했다.
(三國佛法傳通緣起 卷中 成實宗)
此年(62년) 고구려의 국왕이 혜관을 일본으로 보냈다. 혜관은 삼론학자로서 당나라의 가상대사 길장(吉藏)에게서 삼론을 배우고 일본으로 건너갔는데, 그가 바로 일본 삼론의 시조이다.
(三國佛法傳通緣起 卷中 三論宗)
- 도교 -
고구려본기에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고구려 말기 무덕(武德:618~626),정관(貞觀:626~649)무렵에 나라 사람들이 오두미교를 다투어 신봉했다.
(三國遺事 권3, 法興 寶藏奉老,普德移庵)
7년(625) 봄 2월애 왕이 사신을 당에 보내 책력을 반급해 줄 것을 청했다.
당 고조는 형부상서(刑部尙書) 심숙안(沈叔安)을 파견하여 왕을 요동군공 고구려국왕으로 책명(策命)하고, 도사에게 명하여 천존상 및 도교의 술법을 가지고 가서 그들을 위해『노자』를 강론하게 하였다. 왕과 나라 사람들이 그 강의를 들었다.
(三國史記 권20, 高句麗本紀 榮留王7년)
당 고조가 이 일을 듣고 도사를 파견하여 천종상을 보내고『도덕경』을 강론하게 하였는데, 왕이 나라 사람들이 함께 그 강의를 들었다. 이때가 바로 27대 영류왕 즉위 7년,무덕7년 갑신년(624)이었다.
(三國遺事 권3, 法興 寶藏奉老,普德移庵)
8년(626)에 왕이 사람들을 당에 들여보내 불교와 노자의 교법을 배우기를 청했더니, 황제가 허락하였다.
(三國史記 권20, 高句麗本紀 榮留王8년)
개금(蓋金)이 아뢰었다.“솥에는 세 발이 있고, 나라에는 삼교가 있는 법입니다. 신이 나라 안을 보니 오직 유교와 불교만 있을 뿐 도교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나라가 위태로운 것입니다.”왕이 이를 옳다고 생각하여 당나라에 도교를 청했다. 이에 태종이 서달 등 도사 8명을 보내 주었다.
(三國遺事 권3, 法興 寶藏奉老,普德移庵)
소문(蘇文)이 왕에게 말하기를“듣자옵건대 중국에는 삼교가 함께 시행된다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도교가 아직 빠져 있으니 사신을 당에 보내 구하시기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곧 글을 보내 청하자, 당에서 도사 숙달 등 8명을 보냄과 더불어『도덕경』을 하사하였다. 이에 절간을 취하여 그들의 숙소로 쓰게 하였다.
(三國史記 권49, 列傳 蓋蘇文)
왕이 기뻐하여 절을 도관으로 만들고 도사를 존경하여 유사(儒士)위에 앉게 했다.
(三國遺事 권3, 法興 寶藏奉老,普德移庵)
이때 보덕화상이 반룡사에 살고 있었는데, 사교(邪敎:도교)가 불교와 대치하여 나라의 운명이 위태로워질 것을 염려하였다. 이에 여러 번 왕에게 간하였으나 왕이 듣지 않았다. 그래서 신비한 힘으로 방장(方丈:화상의 거주처)을 날려 남쪽에 있는 완산주(전주) 고대산으로 옮겨 살았다. 이때가 바로 영휘 원년 경술년(650)6월 이었다.
(三國遺事 권3, 法興 寶藏奉老,普德移庵)
도사들은 다니면서 나라 안의 이름난 산천의 기운을 진정시켰다. 옛 평양성의 지세가 신월(新月:초승달)과 같은 성(城)이었기 때문에 도사들이 주문을 외어 남하(南河)의 용에게 명령해서 만월(滿月:보름달)과 같은 성으로 덧쌓도록 하고, 이에 용언성(龍堰城)이라고 불렀다. 또 예언기를 지어 용언도(龍堰堵), 또는 천년보장도(千年寶藏堵)라 했다.
(三國遺事 권3, 法興 寶藏奉老,普德移庵)
- 유학-
태학박사(太學博士) 이문진(李文眞)에게 명하여 옛 역사책을 요약하여『신집(新集)』5권을 만들도록 하였다. 국초(國初)에 문자를 쓰기 시작하였을때 어떤 사람이 사실을 100권으로 기록하여 이름을『유기(留記)』라 하였는데, 이 때에 와서 깎고 고친 것이다.
(三國史記 권20, 高句麗本紀 榮陽王11년)
출처: 고려대민족문화 연구원 산하기구인 한국사상연구소에서 윤사순선생님을 주축으로 한국사상(고대부터 근현대까지)과 철학에 대한 전반적인 자료를 모아 엮은 책『자료와 해설 한국의 철학사상』에서 고구려관련된 부분만 발췌했습니다.